판상츠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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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니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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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20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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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2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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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1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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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상츠모사][13장 “헤매는 자를 위한 선율” - 12]

DUMMY

[판상츠모사][13장 “헤매는 자를 위한 선율” - 12]




나는 한가해졌다. 시아가 회의 준비를 위해서 방에서 나가고 나자 나는 뜬금없이 라미가 떠났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어... 방금 전에 황제 만나보러 간다는 거, 생각해보니 꽤 중요한 일 같은데 꽤 대충 말하고 떠났네. 라미 성격이 원래 이랬던가? 물론 그에 대해 생각해봤자 답을 줄 사람은 떠난 직후였으므로, 나는 잠시 후 그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포기하기로 했다.

방금 전까지는 대화라도 하고 있었는데, 아무것도 안하려니 다시 머리가 살살 아파오는 걸. 이거 숙취가 제법 되는 것 같단 말이야.

차라리 뭔가 할 거라도 좀 있으면 좋겠는데. 나는 창밖에 가득 드리운 햇빛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오늘 하루 종일 뭘 하면서 시간을 죽이지? 회의에는 안 들어와도 된다고 했지만, 이렇게 되니 자발적으로 회의라도 들어가야 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인데.

그러나 내가 막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들어오세...”


누군가 가볍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입을 열었더니, 내가 미처 말을 맺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안녕. 잘 잤나?”


“아, 네...”


윽, 이 자식이 왜 또 갑자기 여기에? 리체 아니면 무슨 하인쯤이나 되겠지 생각했는데, 나는 갑작스런 사전, 아니, 아즈 총령의 등장에 순간 당황했다. 그러나 그 당황함은 아랑곳하지 않고, 아즈 총령은 담담히 자기 할 말만을 이어나갔다.


“얼굴이 영 아니군. 어제 좀 무리했나? 핀 아이켈 씨.”


그런 말을 해놓고 아즈 총령은 아저씨처럼 껄껄껄 웃었다. 음, 원래 사전 자식이 좀 아저씨스럽기는 한데...


“어때. 오늘 회의 마치면 또 한 잔?”


“아, 예...”


이럴 때는 애매하게 웃으면서 대화를 흘려보내라는 말이 기억나서 나는 성실하게 행동을 수행했다.

오늘만큼은 안 돼! 또 어제처럼 술을 퍼먹으면 분명히 나는 또 죽고 말 거야! 그러나 나의 그런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이, 아즈 총령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하더니 간단히 말했다.


“흐음, 별로 안 내키나 보군. 어쩔 수 없나? 하긴, 진짜 핀 아이켈이라면 어제 그 정도 마시는 것도 좀 무리기는 하겠지만.”


그래. 너 술 세다. 핀 아이켈이라는 이름만 유독 끊어 말하는 걸로 봐서 비꼬려는 의도는 제법 분명해 보이는데. 물론 나는 거기에 걸려들 만큼 다혈질은 아니었다.


“저, 무슨 일로?”


“아, 그렇지.”


내 질문에 아즈 총령은 그제야 생각이 난 것처럼 방안을 한 번 두리번거렸다.


“유시아는?”


“네?”


“유시아 말이야. 유시아. 이 방에 있다고 들었는데.”


“조금 전에... 나가셨는데요?”


“아, 그래? 이런, 길이 엇갈렸네.”


마치 과장된 행동을 하는 광대처럼 아즈 총령은 자기 이마를 가볍게 탁 쳤다.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볼 수 있는 사전의 버릇을 여기서도 목격하게 되자 나는 기분이 약간 이상해졌다. 사전은 여기서도 사전이구나. 하긴, 어제 있었던 일도 사전답다고 하면 정말 사전다운 일이었지만...


“이런... 그럼 혹시 아라미르도 왔다 갔나?”


“네? 네. 잠깐 들르긴 했는데...”


“그래?”


내가 그렇게 말하자 아즈 총령의 얼굴이 순간 살짝 굳었다.


“설마... 아라미르가 그 이야기했나?”


“그 이야기라뇨?”


“황제.”


굳이 정보를 주고 싶지는 않다는 느낌의 대답이었다.


“네.”


“이런.”


아즈 총령은 힘이 빠진 듯이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말했다.


“역시 그랬군.”


“왜 그러시죠?”


뭔지는 몰라도 제법 낙심한 눈치였기에 나는 그렇게 물었다. 딱히 궁금해서 물어본 것은 아니었지만, 물어봐야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고나 할까. 그러나 내가 그렇게 묻자 아즈 총령은 머리를 한 번 긁더니, 막 뭐라 입을 열려다가 이내 다시 입을 다물었다.


“아냐. 좀 있다 회의에 들어가서 이야기하자고. 어차피 전부 같이 들어야 할 이야기 같으니...”


그리고 그렇게 말하던 도중에, 아즈 총령은 갑자기 생각난 듯이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왕국 쪽은 이미 모여서 회의하고 있는 것 같던데. 거기는 안 가도 돼?”


엥?


“회의요?”


“응. 아침 일찍부터 바쁜 것 같던데.”


그 이야기가 여기서 왜 나오지? 나는 머리를 한 번 긁었다.


“저도 가야 되나요?”


“응? 그걸 나한테 물어보면 어떻게 해?”


그건 내가 할 말인데. 이놈이 뭔가 너무 당당하게 이야기하니 오히려 내가 이상한 놈이 된 것 같다.


“전 오늘 회의 참석 안하는데요?”


“엥? 왜?”


“왜라고 하셔도...”


그야...


“어제 공주님께서 회의 안 와도 된다고... 그래서 술이나 마시라고.”


내가 뭘 잘못 알고 있는 건가 싶어서 약간 떠듬거리며 말을 했더니, 아즈 총령은 처음에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인 것 같다가 갑자기 어젯밤 기억이 난 듯 표정을 살짝 찡그렸다.


“아, 맞다. 그랬었지...”


뭐야, 내가 잘못 알고 있는 줄 알았네. 그러나 그렇게 말하자, 아즈 총령은 표정을 살짝 찡그렸다. 그리고 가볍게 턱을 한 번 만졌다.

저건... 사전이 뭔가 생각할 일이 있을 때의 버릇인데. 아니나 다를까, 표정 역시도 뭔가 잠깐 생각한다는 투였기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그렇게 잠시간의 생각을 마친 아즈 총령은 이내 나를 한 번 바라보더니, 이번에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까먹고 있었군. 어제 술을 좀 먹었더니 영...”


굳이 다시 말해줄 필요는 없는데. 그러나 그도 잠시, 아즈 총령은 슬쩍 말을 돌렸다.


“그럼 하루 종일 심심하겠네.”


“네. 뭐...”


“방에 여자라도 한 명 넣어줄까? 오늘 하루 정도는 질리지 않고 놀 수 있을 텐데.”


“아, 아뇨. 괘, 괜찮습니다.”


갑자기 미성년자가 접근하면 안 될 것 같은 이야기가 불쑥 튀어나오는 바람에 나는 순간 당황했다. 그러나 아즈 총령은 그런 내 더듬거림을 엉뚱한 방향으로 해석한 모양이었다.


“음, 역시 한창 나이일 때니 한 명으로는 좀 부족한가. 두 명? 두 명까지는 어떻게 될 것 같아도, 세 명까지는 구하기가 좀 힘들 것 같은데. 원체 워낙 작은 별장이라.”


“아니, 그 의미가 아니라.”


“아, 그렇지. 여기서는 좀 그런가? 아니면 에블도트에 놀기 좋은 곳이 있는데, 소개시켜줄까? 주위에는 낚시 갔다고 말해두지.”


“괘, 괜찮습니다.”


“어허, 물론 주위에 예쁜 애들이 많으니 눈이 높은 건 알겠지만, 가보면 충분히 만족스러울 걸? 내가 총령직을 걸고 보증하도록 하지.”


그런 보증에 총령직 걸지 마, 이 미친놈아...

물론 나는 생각만 할 뿐 말을 하지는 않았다. 으, 이 자식은 어떻게 꿈에서도 이렇게 현실하고 똑같은 놈일 수가 있지? 어떤 의미로는 존경스러워지기까지 할 지경인데.

내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마지막의 마지막까지도 뭔가 아저씨스러운 말투로 아즈 총령은 말을 마무리 지었다.


“재미없네. 남자 맞아? 달려있는지 확인해봐야 될 것 같은데.”


잘 달려있으니 걱정은 집어치우라고 말하고 싶긴 한데... 음, 얘가 사전이기만 해도 내가 말했을 텐데, 여기서는 총령이니까... 아오.


“그래. 자기가 하기 싫다면 어쩔 수 없지. 심심할 것 같아서 기껏 배려해주려고 했는데.”


그런 걸 배려라고 하지 마... 어쨌든 아즈 총령은 아쉽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그래. 그럼 필요한 게 있으면 하인에게 말해. 나는 이제 곧 회의 들어갈 테니까.”


“네.”


후아, 힘들었다. 현실에서도 그렇긴 하지만, 여기서도 이 자식을 상대하는 건 은근히 힘들군. 아니, 오히려 동등한 입장이 아니라는 걸 생각하면 여기가 더 힘들긴 하지만. 어쨌든 그렇게 대략적으로 대화가 마무리되고, 이야기를 마친 아즈 총령이 뒤로 빙글 돌아섰을 때였다.

털썩. 뭔가 물건이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바닥에는 탄자 비슷한 것이 깔려있어 날핀로운 소리는 아니었지만, 그것을 감안했음에도 불구하고 제법 둔탁한 소리였다.


“응?”


아즈 총령도 그 소리를 들었는지 몸을 뒤로 다시 돌린 참이었다. 어, 저건...


“이런, 큰일 날 뻔 했군.”


나는 침대에 앉은 채로, 아즈 총령이 허리를 굽혀 바닥에서 권총을 주워 올리는 장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어제 밤에도 저걸 봤었지. 그때는 경황이 없어서 생각을 못 했는데, 그러고 보니... 이 세계에 웬 권총이야?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바닥에 떨어진 권총을 슬쩍 주워 이리저리 돌려보던 아즈 총령은 문득 내 시선을 눈치 챘는지 피식하고 가볍게 웃었다.


“이게 신기한가?”


어, 신기하긴 한데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의미의 신기함은 아닐 텐데. 그러나 아즈 총령은 내 생각을 다 알고 있기라도 한다는 듯 가볍게 말했다.


“하긴, 평범한 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물건이겠지.”


뭔지는 몰라도 권총이란 물건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것 같군. 나는 하품을 하면 어울리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일국의 총령 앞이라 몸가짐을 조신키로 했다. 그러나 내가 그렇게 하품을 참으려 애쓰고 있는 중이었다.


“갖고 싶어?”


“네?”


“음, 하지만 이건 자국의 큰 비물 중 하나이기 때문에 아무리 내가 총령이라고 하더라도 이걸 타국에 함부로 줄 수는 없어.”


아즈 총령은 사뭇 진지하게 말했다. 하지만 솔직히 별 관심도 없는 나로서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이야기였기에, 나는 여기서 어떻게 반응하면 맞장구를 잘 쳤다는 소문이 날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내 그런 고민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라는 건 그냥 해본 소리고.”


아즈 총령은 그렇게 말을 이었다.


“네?”


“부품 만들기가 까다로워서 그렇지, 딱히 만드는 게 어렵지는 않아.”


“부품요?”


“총이라는 물건이 왜 대량생산이 안 되는지 생각해본 적 없나? 이것도 작아서 그렇지, 결국 총이잖아.”


아니, 대량생산이 안 된다는 생각 자체를 해본 적이 없는데요. 하긴 내 관점으로 보니까 그런 거겠지. 그러나 그런 내 어이없음을 아즈 총령은 총기에 대한 관심으로 해석한 모양이었다.


“한 번 구경하러 가볼래?


“구경...요?”


아즈 총령은 어깨를 한 번 으쓱거렸다.


“에블도트에 공방이 있지. 구입은 안 되겠지만, 그냥 한 번 보는 것 정도는 괜찮을 텐데.”


이 자식, 이런 쪽에 관심이 많은 성격이었나? 하긴, 항상 뭔가 직업 전용 장비 같은 것에 집착하는 눈치기는 했지만... 뭐, 어쨌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아, 괜찮습니다.”


“왜애? 어차피 오늘 할 것도 없잖아. 게다가 딱히 그거 아니라도...”


그리고 여기까지 말한 아즈 총령은 갑자기 말을 멈추고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어? 그러고 보니 아마 지금쯤이...”


지금쯤? 갑작스레 대화가 끊어지는 바람에 나는 아즈 총령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지금 나가면 구경할 게 제법 많을 때군?”


“구경...요?”


내 중얼거림에 아즈 총령이 씨익 웃었다.


“그야...”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그렇게 입을 연 아즈 총령은 눈을 몇 번 깜빡거리더니 이내 씨익 웃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으음, 말로 설명하면 재미가 없지. 에블도트 이야기는 들어봤을 거 아냐?”


“네?”


“아, 내 앞에서 굳이 기억상실인 척 안 해도 돼. 들어는 봤을 거잖아?”


이건 또 무슨 소리지? 그러나 내가 그 의문을 질문으로 구체화하기 전에, 아즈 총령은 가볍게 말을 이었다.


“이 기회에 한 번 가보는 게 어때? 특히나 지금 가면 이것저것 볼 게 많을 걸? 어차피 오늘 할 것도 없잖아?”


내 동의를 왜 구하는 거야? 그러나 그런 푸념 비슷한 생각과는 별개로, 아즈 총령의 제안에는 약간 솔깃한 면이 있었다. 게다가... 어차피 오늘 할 게 없는 건 맞잖아? 가만히 여기 앉아있다가는 차라리 회의에 참석하는 게 더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참에, 눈에 들어오는 게 있었다.


“어?”


“응? 왜? 아, 그렇지. 유곽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았군. 그게 어디 있냐면...”


“아니, 그게 아니구요.”


이렇게까지 일관성이 있으면 이제 말하기도 지친다. 그래서 나는 지친 말투로 입을 열었다.


“그럼?”


다소 풀이 죽은 말투로 아즈 총령이 대꾸해왔다. 이런 거에 풀 죽지 말라고...


“혹시, 거기 가면 이런 것도 구할 수 있나요?”


“이런 거?”


아즈 총령이 고개를 한 번 갸웃거렸고, 그래서 나는 슬쩍 그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러니까...”




*




“아델리체.”


나의 진지한 목소리에 리체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네?”


“오늘 일정은?”


“저...요?”


내 일정을 물어보는 건지, 자신의 일정을 물어보는 건지 살짝 헷갈린다는 표정이었지만, 내가 별다른 부정을 하지 않자 리체는 잠시 후 약간 당황해서 말을 이었다.


“별다른 일정은 없습니다만... 혹시 무슨 일이 있으시면 보좌하는 것 외에는...”


“그럼 됐군.”


“네?”


무슨 의도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열심히 생각하던 눈치이던 리체는 내 이야기에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


“지금 즉시 외출 준비를 하도록.”


“외출이라고요?”


“옷은 하녀가 곧 가져올 테니 그걸로 갈아입고.”


갑작스런 명령에 리체의 표정에 긴장감이 스쳐지나갔다. 무슨 일이라도 터졌구나 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준비가 끝나면 내 방으로 오도록.”


“네.”


리체에게 그런 지시를 내린 후 나 역시도 방에 돌아와서 옷을 갈아입었...


“준비 완료했습니다.”


아니, 그렇다고 이렇게 빨리할 필요는 없었는데.


“음, 지금 바로 내려가지.”


“네.”


결연한 표정의 리체를 데리고 나는 계단을 내려왔다. 계단 끝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리즐렛 씨는 리체에게 가볍게 목례를 한 다음, 가벼운 손짓으로 우리를 뒷문으로 안내했다.


“이겁니다.”


“고맙습니다.”


뒷문을 나오자 리즐렛 씨는 그렇게 중얼거린 다음 뒤로 살짝 물러섰고, 나는 예의상 대답을 한 후 소개 받은 마차를 한 번 쳐다보았다. 우리가 공화국으로 올 때 타고 왔던 마차와 달리 투박한 목재를 투박하게 사용한 투박한 마차였다.


“원래 물건을 싣고 오가는 짐마차라 조금 허름하긴 합니다만...”


“괜찮습니다. 이게 더 나을 것 같네요.”


약간 송구해하는 느낌이 묻어나는 리즐렛 씨의 말에 나는 간략히 대답했다.


“지금 바로 가도 되죠?”


“네. 문제없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리체를 쳐다보았다.


“뒤쪽에 타는 게 나을 것 같은데, 괜찮지?”


멍하니 나와 리즐렛 씨의 대화를 듣고 있던 리체는 별안간 내가 말을 걸자 순간 깜짝 놀란 눈치였다.


“아, 네. 네. 괘, 괜찮습니다.”


여전히 상황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를 못하겠다는 듯한 눈치였다.


“그럼.”


미리 준비되어있던 나무 발판을 타고 나는 먼저 마차 짐칸에 올라섰다. 어두운 색깔의 천으로 한 번 휘둘러져 있어서 그런지, 짐칸에 올라서자 약간의 서늘함이 느껴졌다. 그 서늘함을 기분 좋다 생각하면서, 나는 뒤돌아 선 다음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리체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


“네...”


생각한 것과는 뭔가 상황이 다르게 돌아간다고 생각했는지, 리체는 당황해하면서도 어쨌든 내 손을 잡고 마차 짐칸으로 올라섰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가 탑승한 것을 확인하자, 리즐렛 씨는 품에 손을 넣더니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아까 말씀하신 물건입니다.”


“고맙습니다.”


내가 작지만 묵직한 그 주머니를 받아들자, 리즐렛 씨는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서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에블도트는 훌륭한 도시입니다. 부디 즐거운 시간되시길.”


그리고 리즐렛 씨는 슬쩍 고개를 돌리...려다가 마침 생각난 듯이 다시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네?”


“지금이 마침 기념제 기간이군요.”


“기념제요?”


리즐렛 씨는 대답 대신 고개를 한 번 끄덕거렸다.


“기념제 기간에는 특히나 볼만한 것들이 많지요.”


윽, 왠지 내 마음을 읽은 것 같은데. 그러나 내가 그렇게 뜨끔하는 사이, 리즐렛 씨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마차 앞을 보며 말했다.


“출발하게나.”


“예.”


굵은 남자 목소리가 이어지고, 가벼운 채찍 소리가 나더니 마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달각달각, 바닥에서 바퀴를 타고 올라오는 진동도 우리가 타고 온 마차에 비하면 투박함 그 자체였다.


“좀 앉자. 많이 흔들리네.”


“네...”


그냥 짐마차면 된다고 했는데, 그래도 우리가 탄다 말을 해서 그런지 마차 짐칸에는 앉은뱅이 의자 비슷한 게 두 개 놓여있었다. 나는 거기 털썩 주저앉았고, 그리고 리체는 약간 혼란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으면서도 일단 자리에 앉는 게 맞다 생각한 듯 조심스럽게 몸을 숙였다.

건물 자체가 그리 크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금방 정문을 빠져나왔다. 크지 않은 건물이라고는 해도 총령이 있어서 그런지 경비는 제법 삼엄한 편이군. 나는 칸막이에 손을 얹고는 멀어져 가는 건물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저...”


“응?”


눈치를 보고 있던 게 분명한 리체가 그제야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지금... 어디 가는 건가요?”


“아, 그걸 설명 안 했군.”


물론 알고는 있었지만 말이야.


“에블도트.”


“에블도트...요? 대학원 말씀하시는 건가요?”


“대학원?”


내가 반문했더니 리체 표정이 살짝 바뀌었다.


“아뇨. 저는 그냥...”


“음, 거기에 잠깐 들를 수도 있을 것 같군. 일정이 빡빡하진 않으니까.”


내가 그렇게 이야기하자 리체는 표정을 살짝 풀었다. 비로소 지금 상황이 그렇게 급박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저,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요?”


확인 차 물어오는 질문에 나는 일단은 가볍게 침묵했다. 그리고 말했다.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리체의 얼굴에 약한 안도감이 스쳐지나갔다. 내심 뭔가 일이 터진 건 아닌가 하고 걱정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럼, 지금 에블도트에는 무슨 일로?”


“어, 그게...”


사실 이렇게 직접적으로 물어오니까 좀 그렇긴 한데.


“살 물건이 좀 있어서.”


내 대답에 리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살... 물건... 이요?”


100가지 답을 예상했는데 101번째 답을 들은 듯한 표정이었다.


“그렇다. 살 물건이 있어서. 문제라도 있나?”


“아, 아뇨. 그런 건 아닌데... 뭔가 물건이 필요하시면 직접 나오실 필요는...”


리체는 내 대답에 다소 당황한 눈치였다. 뭔가 사고라도 터진 게 아닐까 지레짐작하고 있다가 엉뚱한 답을 들어서 난감하다는 느낌이랄까. 그러나 리체는 똑똑했고, 그래서 곧 자기가 이 시점에서 물어봐야 할 질문을 찾아내었다.


“그런데... 그게 뭐죠? 살 물건이라는 게.”


“음.”


나는 잠깐 고민했지만...


“인형.”


“네?”


이번에는 1000가지 답을 예상했다가, 4000번째쯤 되는 답을 들은 표정.


“인형이라고.”


“인형...요?”


리체는 자기가 들은 게 과연 인형이라는 단어가 맞는지, 맞다면 인형이란 단어에 자기가 알고 있는 뜻이 아닌 다른 의미가 있는지, 그게 아니면 무슨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된 것은 아닌지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순차적인 표정으로 보여주다가, 결국엔 이해를 못하겠다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 인형이란 게... 제가 아는 그 인형 맞나요?”


“응.”


나는 간략히 대답했다. 쓸데없이 근엄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도 여기까지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아...?”


리체는 어이가 없어지면 저런 표정이 되는구나. 한두 번 본 게 아니긴 했지만, 오늘은 좀 더 특별하긴 하군.


“그 인형을 사러간다고요?”


“응.”


“왜요?”


이제는 내가 민망해 해야 할 차례군.


“아, 그게...”


나는 뺨을 살짝 긁으면서 슬쩍 입을 열었다.


“오늘 하루 종일 어차피 할 것도 없고 해서, 에블도트 구경이나 할까 생각을 했는데 말이지.”


“네?”


앞뒤가 연결이 잘 안된다 생각했는지, 리체의 반응이 미묘했다.


“그런데 구경하러 가겠다고 솔직히 말하기도 뭐하고 해서.”


내가 슬쩍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자, 리체의 표정이 그제야 약간 변했다.


“그래서요?”


변한 표정처럼, 살짝 굳은 목소리가 돌아왔다.


“그래서... 뭐 좀 살게 있다고 핑계대고 지금 나가는 거지.”


리체는 눈을 몇 번 깜빡이면서 그런 내 대답을 곱씹는 모양이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자기가 놓친 부분이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하는 거겠지만.


“그럼 지금 나가는 건...”


달각달각거리는 마차 움직임 사이로 다소 미적지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시선을 회피한 채 우리가 지나온 길을 바라보고 있었다.


“놀러나간다는 거...예요?”


“에, 뭐... 그렇지? 말을 하자면.”


딴청 피우듯이 눈을 마주치지 않고 대답을 하자, 곁눈질에도 리체의 표정변화가 즉각 시야에 들어왔다. 리체는 약간 경악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고 그래서 나는 휘파람을 불까 고민했다.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리체는 잠시나마 마음을 졸인 게 억울하다는 듯 본격적으로 따지듯이 물어왔다.


“아니, 나는 또 무슨 일이라도 터진 줄 알았네. 그런데 태도가 갑자기 왜 그래요?!”


“태도?”


“그러니까, 갑자기 무슨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심각하게...”


“글쎄? 내 태도가 그랬나?”


천연덕스럽게 이야기를 받아넘기자 리체는 약간 화가 난 듯 나를 뚫어져라 쏘아보았다. 그 시선을 바로 받아넘길 자신은 없어 나는 다시 시선을 돌렸고, 그래서 리체는 좀 더 화가 난 모양이었다.


“지금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놀러나가도 되는 거예요? 다른 분들 지금 다 회의하느라 바쁘시잖아요?”


물론 화가 난다고 해서 리체가 딱히 뭘 할 수 있는 건 없었기 때문에, 리체는 근원적인 질문을 던졌다.


“안될 건 또 뭐야. 그리고 허락은 받았어.”


“허락?”


“공주님께.”


그렇게 이야기했지만, 리체의 표정은 여전히 부루퉁한 채였다.


“아니, 허락 받고 안 받고의 문제가 아니라...”


리체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건지는 알겠는데, 나도 이정도의 상황쯤은 예상하고 있었다.


“어차피 너도 할 거 없었잖아?”


“제가 할 게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리고 아까 물어봤을 때 날 보좌하는 게 네 임무라며?”


억지일지언정 논리적으로는 크게 무리 없는 이야기였기에 리체는 그제야 마지못해 입을 조금 다물었다.


“아니, 그건 그렇지만...”


“지금 내가 제2군 사령관으로서 공화국의 심장이라 불리는 에블도트의 현 상황을 파악하러 가는 게 그리 작은 일이 아닐 텐데, 보좌관의 마음가짐이 다소 아쉽군.”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척을 했더니 리체가 뜨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제야 간신히 상황을 파악했다는 듯 살짝 박수를 쳤다.


“아, 여, 역시 그렇군요. 지금 구경하러 간다는 건 단지 주위의 눈을 피하기 위한 명목일 뿐이고 실제로는 공화국의 실정을 파악하러 가신다는 거군요?”


그래서 나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아니, 그냥 놀러가는 건데.”


“사, 사람을 갖고 놀지 말라고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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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5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22] 23.09.29 20 1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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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3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20] 23.09.26 25 1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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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0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17] 23.09.23 25 1 22쪽
289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16] +2 23.09.22 28 1 14쪽
288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15] 23.09.21 27 1 20쪽
287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14] 23.09.20 27 1 20쪽
286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13] 23.09.14 30 1 19쪽
285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12] +1 23.09.09 31 2 26쪽
284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11] 23.09.08 25 1 23쪽
283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10] +1 23.09.03 30 2 21쪽
282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9] 23.09.02 28 1 22쪽
281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8] 23.09.01 30 1 21쪽
280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7] 23.08.30 33 2 21쪽
279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6] +1 23.08.29 33 2 27쪽
278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5] 23.08.28 35 2 17쪽
277 [판상츠모사][16장 “덧그린 모사품” - 4] 23.08.27 30 2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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