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강력한 적
“아니, 진 대협!!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공산당에 대항하지 않겠다니!”
“원륭, 말을 끝까지 듣게!”
“진 대협!!!”
콰아앙!!!
원륭의 몸에서 사나운 기세가 솟아나왔다. 그 순간 반경 3km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원인불명의 공포를 느꼈다.
“대체 이게 무슨 기분이지?!”
“너도 느꼈어?!”
“응, 나도!!”
“오한이 멈추지 않아!!”
분노가 넘쳐 폭주한 원륭의 기파가 사방으로 뻗쳐 나가고 있는데 진룡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약간 오해의 소지가 있게 발언한 것 같군. 공산당과는 당분간 싸우지 않겠다는 의미였네.”
“진심이십니까??”
“내가 자네에게 왜 거짓말을 하겠나??”
“······.”
그제서야 원륭의 기세도 수그러들었다. 그리고 원륭은 곧바로 사과했던 것이다.
“죄송합니다, 진 대협. 지금까지 우리는 공산당과 모택동에 대항하여 싸워왔는데 그것을 그만둔다고 하니까······.”
“내 발언에 좀 애매한 점이 있었나보네. ‘당분간’이라는 말이 빠졌군. ‘당분간’이라는 말이.”
“······.”
잠시 생각한 원륭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당분간 공산당에 적대하는 것을 그만두는 이유는 어째서입니까?”
“우선, 자네가 다쳤네.”
“······.”
“그리고 휘령을 포함한 우리 모두가 거의 다 다쳤지.”
“다른 사람도 다쳤단 말입니까?!”
“소형승이 총알에 어깨를 관통 당했네. 한동안 쉬면 낫겠지만 그동안엔 팔을 쓰기 어렵겠지. 뭐, 소형승 정도면 금방 회복하겠지만.”
“그 외에 다친 사람은 없습니까?”
“홍휘도 얼굴에 총알이 스쳤네. 자칫 잘못하면 위험할 뻔 했지.”
“하필 여자인데 얼굴이······. 심하지 않기만을 바라야겠군요.”
“그녀보다 자네의 상태가 더 심하니 먼저 자네부터 낫게. 솔직히 이마에 수류탄 파편이 박혔는데 우리 중에 자네보다 상태가 심각한 사람은 없네.”
“과연······. 그렇군요······.”
원륭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마음이 불쾌했다. 일행이 공산당에 대항하지 못하는 원인 중 하나가 자신의 부상이란 것을 알게 되자 다시금 분노가 치밀었던 것이다.
물론 이들 중 가장 무공이 약한 원륭이라 똑같은 수준의 적을 상대하면 자신이 제일 버거울 것이란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화나는 것은 화나는 것이었다.
원륭은 자존심이 강해 타인에게 짐이 되는 것을 무척 싫어하는 것이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인상을 찡그리고 마치 몸에서 김이 나올듯한 기세로 분노하고 있는 원륭을 보고 진룡은 일어섰다.
“아픈 사람을 붙잡고 말을 너무 많이 했군. 푹 쉬게. 어차피 나으면 다시금 지긋지긋한 싸움이 시작될 테니까.”
“······알겠습니다······.”
탁. 진룡 등이 방문을 열고 나가자 원륭은 다시 자리에 누워 한숨을 쉬었다.
“후우······.”
꽉 막힌 천장엔 푸른 빛 하늘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원륭이 아침 햇살에 잠을 깰까봐 창문에도 제갈의가 검은 천을 대어놓아 창밖 역시 눈꼽 만치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답답한 마음을 추스르며, 원륭은 다시 잠이 들었다. 그러나 이렇게 쉬는 것도 매우 드문 일일 것이다. 회복하고 나면 앞으로는 다시 맹렬한 싸움의 나날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1966년 7월 24일 권력의 중추에서 밀려나있던 모택동이 조어대 국빈관에 그 모습을 드러내고, 7월 29일 인민대회당에서는 궁지에 몰린 유소기와 등소평이 자아비판을 시작했다.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모택동이 권력을 잃고 뒷방 늙은이가 된 동안 유소기가 그 자리를 대신했는데 유소기는 모택동과 똑같이 정부에 비판적인 식견을 가진 자들을 탄압하여 높은 불만을 사고 있었다.
그리고 모택동이 이 인민대회당에 등장하자 참가한 학생들로부터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성이 터져 나왔고 유소기와 등소평은 실로 당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모택동은 학생들의 환호를 받으며 의기양양하게 사라졌고, 그 뒤에는 예의 그 제갈공명의 환생이라 불리는 남자, 주은래가 함께 있었다.
같은 해 8월 1일, 모택동은 청화대 부설 중학교의 학생들에게 친히 모든 반란에는 다 그 이유가 있다는 뜻의 ‘조반유리(造反有理)’라는 말을 남겼다.
모택동의 선동을 당한 학생들은 곧 모든 것을 때려 부수기 시작했다.
어제까지 자신들을 가르치던 선생들을 고문하고 죽이고, 심지어 그것은 그들의 부모마저 예외가 아니었다.
비록 자신의 부모라도 공산당에 비판적이거나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때려 죽여 버렸던 것이다. 온 중국은 큰 혼란에 빠졌다.
시작은 한 중학교뿐이었지만, 살아있는 신으로 불리는 모택동의 말은 곧 온 중국에 전해졌다. 북경에서 상해해서, 사천에서, 산동에서. 모든 중국의 영토에서 그러한 일들이 벌어졌던 것이다. 그것은 심지어 원륭의 고향, 저 멀리 흑룡강성도 예외는 아니었다.
권력을 되찾기 위한 모택동의 광기는 온 중국을 뒤덮어버렸던 것이다.
8월 4일에는 청화대 부설 중학교 학생들이 자신들의 교장과 교감을 구타했고, 8월 5일에는 이들 중 교감인 변중운이 수 시간에 거친 고문을 버티지 못하고 사망했다.
이 날이 바로 원륭과 쪽방촌의 무림인들이 홍위병들과 처음 조우한 날이었다.
쪽방촌 안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던 그들에게 홍위병들이 쳐들어와 모욕을 주었고 그것을 되갚아주려고 쫒아갔다가 결국 원륭과 홍위병들의 싸움, 그것이 발전하여 공안의 무림맹 소속 무림인들과 쪽방촌 무림인들간의 전투가 벌어졌던 것이다.
원륭은 그 날을 떠올렸다.
“오늘이 며칠이더라??”
원륭이 부상의 후유증 때문인지 요 며칠 정신이 없이 보낸 탓인지 날짜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할 때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8월 6일 모택동은 유소기를 부르주아 독재자라고 맹비난했으나 원로들의 동의를 얻는 데는 실패했다.
그들은 이미 모택동의 독선과 실패를 충분히 봐왔기 때문에 그나 유소기나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원로들은 국민당과의 전쟁, 일본군과의 전쟁부터 모택동과 함께 한 사이라 말 그대로 생사고락을 함께한 전우였는데 그들마저 모택동에게 동의하지 않았으니 그동안 모택동이 갖은 실책으로 잃은 신뢰를 알만했다.
한편 원륭이 방 안에서 곰곰이 생각에 잠긴 동안, 거실에서는 나머지 인원들이 열띤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8월 6일 모택동이 임표를 불러들였다하오.”
“임표를??”
상인관의 말에 진룡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리고 제갈의도 한몫 거들었던 것이다.
“잘은 모르지만 그 자에게선 좋은 소문이 들리지 않던데.”
“맞소. 임표는 열일곱 살 때부터 사회주의 운동에 참가하고 열여덟 살에는 공산당에 가입한 뼛속까지 공산주의자요. 그는 그 해에 황포군관학교에도 들어갔다고 하지.”
“황포군관학교라면······. 초대 교장이 장개석에 주임으론 주은래가 있지 않았소??”
“그렇소.”
“그런데 국민당인 장개석이 교장으로 있는 학교에 공산주의자인 임표가 왜 들어갔지??”
“그 당시는 국공합작이 있었소. 그리고 황포군관학교는 소련이 군사 고문을 파견했고 그 당시 중국에서 가장 좋은 군관학교였기 때문에 누구든 군인이 되기 위해서는 황포군관학교에 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오.”
“그렇군······. 그래서 임표란 어떤 자요??”
제갈의의 질문에 상인관은 몹시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우리쪽 정보원들이 손에 넣은 정보에 의하면, 매우 비열하고 야비한 자라고 하오. 팽덕회가 려산 회의에서 모택동을 비판하고 실각당한 뒤, 그가 맡은 국방부장직을 승계한 것이 바로 임표요. 그리고 1년 전 해서파관 사건 때 모택동의 주구로 온갖 모택동의 거슬리는 자들을 제거한 것이 바로 임표인 것이오. 게다가 그는 군사적 식견도 우수한 만큼 매우 강력한 적이요.”
“으음······.”
그 말에 모두가 입을 다물고 신음했다. 모택동이 비열한 임표를 불러들이고 신임한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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