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3 약회해주세요
다음해인 1985년에는 중국 어뢰정이 한국으로 표류한 사건이 있었다.
통신사와 항해사가 소총을 난사해 동료들을 살해한 뒤 대만으로 망명할 생각이었는데, 도중에 연료가 다 떨어져서 흑산도 부근에서 표류하고 있었다.
이에 지나가던 한국 어선이 어뢰정의 조난신호를 발견하여 경찰에 신고했고, 이후 해군과 정부에 통보되었다.
문제는 중국이 이 어뢰정을 쫓아 무단으로 한국 영해 내에 예인함과 구축함, 전투함을 무려 도합 네 척이나 보냈다는 사실이었다.
한국은 전투기까지 출격시키며 강력하게 항의했고, 중국은 즉각 퇴거하지 않았으나 이후 미국 대사관까지 개입하여 퇴거를 요청하자 결국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후 한국은 항의각서를 전달해 자신들의 주장을 강력하게 전달했고, 중국은 순순히 자신들이 부주의하게 한국의 영해로 진입한 것을 사과했다.
중국의 사과각서가 한국으로 공식적으로 전달됐고, 양국의 교섭 후 한국은 어뢰정은 물론 탑승한 승조원, 시신을 전부 인계했다.
당시는 한국과 중국이 공식적으로 수교하지 않은 상태라 상당한 긴장감이 감돌았지만, 결국 평화적으로 해결되면서 이 역시 7년 후 한중수교가 이루어지는데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반란을 일으킨 두 선원은 중국으로 송환 후 살인죄와 반역죄로 총살되었다.
두 선원은 애초에 망명을 희망했으나 국제법상 선상 반란을 일으킨 범죄자는 본국 송환이 원칙이었기에 한국은 어쩔 수 없었다. 굳이 범죄자들의 요구를 들어줘야할 이유도 없고.
그리고 한국 정부는 바로 다음해에 이뤄질 86아시안 게임, 그리고 3년 후 이루어질 88올림픽 때문에 중국과 척을 질 이유가 없었다. 만약 중국과 분쟁이 일어나 이들 행사에 지장이 일어났다면 오히려 더 큰 손해이리라.
원륭은 신문을 보며 이와 같은 사건에 대해 파악했다.
사건의 발생과 처리가 고작 일주일만이라는 빠른 시간 내에 끝났고 그 처리도 워낙 평화적이라 언론을 검열하는 중국 내에서도 딱히 숨길 필요가 없었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원륭 등 쪽방촌 무림인은 상인관의 개방이나 하홍휘의 하오문을 통해 어떻게든 알아냈으리라.
“아무튼 이번엔 내가 나설 일이 없겠군.”
이미 사건은 다 처리된 데다 지난번 여객기 불시착 사건과는 달리 원륭 본인이 당사자가 아니라 어떻게 끼어들 필요도 없었다. 오히려 여기서 끼어들면 쓸데없는 짓을 하는 것이리라.
“자, 그럼 떠나볼까!!”
한동안 공안 무림맹이나 대만 음양당이 쓸데없는 짓을 하지 않았기에 원륭은 자유로워졌다.
가능하면 앞으로 평생 이런 나날들만이 계속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원륭은 지금 북경을 떠나 홍콩에 와있었다. 홍콩은 이미 작년 중영공동선언으로 인해 중국에게 그 주권이 반환된다고 알려진지 오래였지만, 여전히 그 위세를 자랑했다.
각국의 자금이 몰려들고 있었고, 중영공동선언으로 인해 미리 홍콩을 떠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그만큼 또 홍콩으로 몰려오는 사람도 많았다.
원륭은 한동안 홍콩에서 머물기 위해 집을 알아보다 화들짝 놀랐다.
“이게 뭐야!! 북경과도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비싸잖아!!”
그 좁은 홍콩 땅에 사람들이 몰려드는데다, 중국 정부가 재벌 중심의 성장정책을 펼쳐 홍콩에는 땅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5대 재벌그룹이 홍콩 땅 대부분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5대 재벌은 가진 땅을 묵히며 개발도 거의 하지 않았고, 이러니 남은 얼마 안 되는 땅마저 가격이 폭등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원륭은 구룡성채로 들어갔다.
구룡성채는 본래 홍콩의 영국군을 감시하던 청나라의 요새였으나, 2차 대전 직후 일본군이 홍콩을 점령한 후 구룡성채의 성벽을 헐어버리면서 부랑민들이 모여살기 시작했다.
이후엔 홍콩 정부도 진입하지 못하고 국민당 정부도 그런 시궁창 같은 곳은 관리를 거부하여 완전히 치외법권의 무법지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원륭은 방을 구하기 위해 구룡성채로 들어가던 첫날을 기억했다.
골목은 미로와도 같고 아파트가 빽빽하게 밀집 되서 햇빛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구룡성채의 사람들은 대낮에도 전등을 키고 살았던 것이다.
게다가 치외법권이다보니 이 전등도 전기를 정상적으로 돈 내고 끌어와서 켜는 것이 아니었다.
훔쳐서 쓰는 것이다. 수도도 마찬가지였는데, 대약진운동으로 폐허가 된 흑룡강성에서 살다 마찬가지로 빈말이라고도 좋다고는 할 수 없는 쪽방촌에서 무림인들과 계속해서 부대껴 살던 원륭에게도 이곳은 지옥이었다. 이곳보다 더한 곳을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 원륭만 그렇게 느끼는 게 아니라 인류역사상 이곳 구룡성채보다 인구밀도가 더 높은 곳은 없었다.
만약 구룡성채의 인구밀도로 전 세계인들을 한곳에 모으면 제주도 두 개 정도 크기의 섬에 70억 인구를 다 모을 수 있다.
어지간한 야구장 하나 정도의 크기의 이 구룡성채에 무려 5만 명이 넘게 살고 있었던 것이다. 실로 말도 안 되는 밀도였다. 원륭은 적당한 방을 구하기 위해 구룡성채 내 부동산을 들렀다.
치외법권이지만 이곳은 나름 그 안의 질서가 잡혀있었고, 치과와 한의원, 아편굴, 사창가, 기타 등등 사회에 있는 온갖 시설은 다 있었다. 원륭은 부동산 안으로 들어섰다.
짤랑.
방울이 울리자 안에 있던 남자가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았다.
“뭐요?”
‘뭐요?? 이게 손님을 맞는 부동산업자의 태도인가??’
원륭은 순간 성질이 올랐으나 꾹 참고 침착하게 말했다.
“방을 찾고 있소. 조용하고 아늑한 방이면 좋겠는데.”
“아늑한 방?? 그런 건 구룡성채에 없소.”
“그런 걸 찾으려면 밖으로 나가야지, 낄낄!!”
웃음소리가 들려와 보니 구석엔 불량해 보이는 무리가 여럿 앉아있었다. 으레 복덕방이 그렇듯이 이곳에도 온갖 어중이떠중이들이 모여 한량 짓을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원륭은 한 번 더 참고 말했다.
“그럼 아무 방이나 상관없소.”
“형씨, 외부에서 온 사람이오?? 그러면 적응 못할 텐데······.”
“그래, 어중이떠중이들은 적응 못하거든, 낄낄!!”
그러면서 불량배들은 슬쩍 일어났다. 원륭을 둘러싸고 위압감을 주는데, 원륭은 짐짓 침착하게 물었다.
“뭐하는 거요??”
“형씨가 이 구룡성채에서 살 자격이 있나봐야지. 이 구룡성채는 아무나 못살거든~~ 그러니 우리들이 형씨가 살 자격이 있는지 알아봐주겠단 말이야. 일단 있는 돈부터 다 꺼내봐. 액수부터 보고 판단해줄 테니까.”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애초에 원륭이 무공을 배운 것은 이딴 쓰레기들에게 무시당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애초에 원륭이 무공을 배우게 된 계기도, 북경으로 올라왔다가 다짜고짜 불량배들에게 습격당하여 생명의 위기에 놓였고, 그런 원륭을 쪽방촌 무림인들이 구해준 것이다.
원륭의 눈에 불꽃이 피어올랐다.
“이 개새끼들이 보자보자 하니까······.”
“어?!?”
“이놈들이 사람이 말로해서는 알아듣지를 못하는구나!!”
원륭은 곧바로 바로 앞에 있던 한 놈의 머리를 쥐어들고 벽에다 처박았다.
그러자 머리는 벽을 뚫고 들어가 옆집 사람에게 인사를 하고 말았던 것이다.
쾅!!!
“뭐, 뭐야, 이거?!?”
한가롭게 밥을 먹고 있던 옆집 소녀는 당황했다. 원륭은 벽에 처박힌 불량배의 머리를 빼낸 뒤, 거기에 얼굴을 대고 침착하게 말했다.
“신경 쓰지 말고 계속하시오. 오래 걸리지는 않을 테니까.”
과연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옆집 소녀는 마음껏 편히 밥을 먹을 수 없었다.
옆집에서 괴상한 소리가 한동안 흘러나왔던 것이다.
“죽여!”
“아아악!!!”
쾅, 쾅!!!
겁도 없이 불량배들이 저항하는 소리, 그러다 벽에 대가리가 처박히는 소리가 한동안 들려왔다. 그러다 쿵쿵하는 소리가 완전히 사라지자, 원륭은 다시 벽에 고개를 내밀고 말했던 것이다.
“소란 피워서 미안하오. 신경 쓰지 말고 생활하시오. 그럼 이만.”
“잠깐, 집을 이렇게 해놓으면 어떻게 하라는 거예요??”
“응??”
“집이 엉망이 됐잖아요.”
“엄밀히 말하면 벽이 엉망이 된 건데······.”
“그거나 그거나!! 벽은 집의 일부분이 아니에요?!”
소녀는 성격이 매우 사나워보였다. 마치 암사자 같은 태도로 천하의 원륭에게 호령했던 것이다. 그러자 원륭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내가 뭘 어찌해주면 좋겠소?”
“고쳐놔요.”
“뭐??”
“집부터 고쳐놓으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소녀에게 못 이겨, 원륭은 쓰러져있던 불량배들을 발로 걷어찼다.
“야, 일어나.”
“으음······.”
“빨리 안 일어나? 실시!!”
“아악!!!”
누워있던 불량배들은 전기고문을 당한 것처럼 벌떡 일어났다. 원륭이 가한 건 분골착근이었다. 무림인들도 걸리면 못 버티는 이 수법을 한낱 불량배들이 버틸 수가 없는 것이다.
원륭은 대놓고 설교했다.
“야, 니들 뭐야??”
“예??”
“니들이 깡패야??”
“저흰 부동산업자인데요······.”
“니들 같은 것들을 누가 부동산업자라고 그래?? 니들이 깡패지 부동산업자냐? 니들 이런 식으로 손님들 협박하고 돈 갈취했지??”
“······.”
부동산업자, 아니 불량배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게 구룡성채의 방식이다.
어차피 전기고 수도고 훔쳐 쓰는 것이 예사고 치외법권 지대의 마경인데, 이런 걸 일일이 신경 쓰는 사람이 이상한 것이다. 적어도 구룡성채의 방식은 이러했다.
하지만 힘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한다지만 압도적인 힘이 있으면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낼 수도 있었다.
원륭은 불량배들의 대갈통을 한 대씩 갈기며 말했다.
“니놈들 같은 쓰레기들 때문에 나 같은 선량한 시민이 편하게 못 사는 거에요!! 그리고 이 피 어떡할 거야? 니들이 세탁비 줄 거야?!”
퍽! 퍽!!
계속해서 대갈통을 때리는 원륭의 주먹에 못 버틴 나머지, 불량배들은 다급하게 말했다.
“드릴게요! 세탁비고 뭐고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이 벽도 고쳐놔.”
“예??”
‘그건 당신이 부순 건데요······.’라고 하려다 불량배들은 그만두었다. 그 말을 꺼내는 순간 정말로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적어도 원륭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 벽 고쳐놓을래, 아님 고칠 돈을 나한테 줄래?”
“저흰 돈이 없는데······.”
“요즘 장기밀매 시세가 얼마더라······. 여기 구룡성채에도 분명히 거래하는 애들이 있을 텐데······.”
“드, 드리겠습니다!! 아니, 고쳐놓겠습니다!!!”
불량배들은 허겁지겁 밖으로 뛰어나가 벽돌을 사온다, 시멘트와 페인트를 사온다 난리를 쳤다.
이런 자에게 잘못 걸리면 뼈와 살도 못 추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도 오랜 불량배 생활을 통해 이미 상대에 대한 분석을 완료한 상태였다.
그들이 판단하기에 원륭은 시키는 대로만 하면 살려주는 사람이다. 하지만 반대로 말을 듣지 않으면 목숨의 보장은 할 수 없다.
불량배로 살아간다는 것은 상대의 역량을 잘 파악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불량배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강자에게 비굴하고 약자를 잘 착취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자연적으로 익혀진 강자판별능력을 통해, 이들은 순순히 고분고분 원륭의 뜻을 따르기 시작했다.
불과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어설프지만 벽이 복원되고 페인트마저 칠해졌다.
그러나 소녀는 여전히 뾰루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봐, 왜 아직도 벌레 씹은 표정을 하고 있어? 벽은 다 고쳐줬잖아.”
“페인트 냄새가 나잖아요. 이런 집에서 한동안 어떻게 살라구요.”
‘거 참 말 많네······.’라고 원륭은 생각하며 주먹을 쥐었다. 원륭은 무림인이었기에 여자를 때리는 것도 익숙했다. 그의 주먹 앞에서 여자의 차별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원륭은 남녀평등주의자였다. 그렇게 원륭의 주먹이 올라갈려는 찰나, 소녀가 성난 얼굴로 말했다.
“약회해주세요. 그게 용서해주는 조건이에요.”
“뭐??”
약회(约会)라는 건 중국어로 데이트라는 뜻이다. 만남을 맺다, 즉 만나다라는 뜻인데 소녀는 벽을 부순 대가로 데이트를 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원륭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쥐었던 주먹을 내렸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