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2 멍청이
“30년 전 일이오. 그때 난 절강성에서 잘 나가는 무관의 후계자였지······.”
일지흔은 회상을 시작했다.
“이놈 지강아!! 또 오늘 수련을 게을리 하고 바깥으로 나돌아 다녔구나!! 이래갖고 커서 뭐가 되려고 하느냐!!”
어린 일지흔, 아니 일지강은 능청스럽게 둘러댔다.
“아휴, 아버지. 아버지 같은 훌륭한 사범이 되어야죠!! 저는 커서 아버지 같이 강한 무림인이 될 거에요!!”
“허허, 녀석도 참······.”
일지강의 아버지는 한숨을 쉬었다. 뒤늦게 낳은 외동아들인 일지강. 금지옥엽인 만큼 너무 오냐오냐 해주었더니 이젠 말을 듣지 않기 시작했다.
수련을 하래도 매일 뺀질뺀질 거리며 나돌아 다니기 시작했고, 어설프게 익힌 무공으로 동네 아이들을 모아놓고 골목대장 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런 일지강을 보고 아버지는 한탄했다.
“저 녀석이 커서 뭐가 되려고 그럴꼬······. 시국은 혼란한데 제 앞길을 모르는 구나······.”
“여보, 그리 걱정하지 마세요. 어차피 지강이도 누구 자식인데 커서 자연히 당신 같은 사범이 되겠죠. 범의 자식이 개가 되겠어요??”
“모르는 소리 마시오. 요즘 세상은 너무나 혼란하여 이 무관을 계승하더라도 그 앞날을 장담할 수 없소. 예나 치안이 혼란하고 자기 몸은 자기가 스스로 지켜야 한다는 관념이 강해 무공을 배우러 사람들이 무관에 많이 왔지만, 지금은 다르지.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진 후 공안을 중심으로 한 공권력은 점점 강해지고, 치안도 비교적 안정되고 있소. 사회주의 국가이기는 하지만 중국 역시 현대국가로서 사적 제재를 용납하지 않기 때문에 이제 자기 몸은 자기가 스스로 지킨다는 자력구제의 방침은 통하지 않을 것이오. 도를 지나치면 오히려 처벌 받겠지. 무림의 시대는 이미 물 건너갔소. 앞으로 무공은 완전히 스포츠의 영역으로 남게 되겠지. 저 아이는 그걸 깨달아야 돼······. 저렇게 골목대장 놀이에 빠져있을 것이 아니라.”
“······.”
일지강의 아버지는 애들을 모아놓고 연설을 하고 있는 지강을 안타까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몰락이 예정돼있는데 저렇게 아무것도 모르고 놀기에 열심이니 애가 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때 당시 지강의 나이 불과 열 살.
그런 것들을 완전히 깨달을 수 있는 나이가 아니다. 그러나 지강의 모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기다려 봐요. 저 애는 아직 어린 애잖아요. 기다려 봅시다······.”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소······.”
그렇게 두 사람은 지강을 안타까운, 그리고 애처로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몰락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무관에 드나드는 수련생들은 물론 입문자들의 수도 현저하게 줄고, 과거의 수련생들은 격동하는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 무술 수련마저도 사치라 여기고 다 제 갈 길을 가버렸다.
그렇게 파멸이 다가오는 가운데 어린 지강만 몰랐던 것이다.
······.
어느 날 정말로 파멸이 찾아왔다. 그를 처음 본 순간, 어린 나이에도 지강은 뭔가 전류가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 자는 뭔가 다르다고 느꼈다. 뭘까? 내공? 무공? 살기??
어느 것이나 인간을 초월했다고 느껴진 것이다. 무관 문을 열고 들어서는 그 자를 보자마자, 지강은 딱 멈춰서 버렸다. 움직일 수 없었다. 숨도 쉴 수 없었다. 지강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얘아, 말 좀 묻자. 이곳이 절강무관이 맞느냐??”
“······.”
지강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식은땀만 흐르고 있었다.
“벙어리인가??”
남자는 손을 내밀어 지강의 뺨을 스르륵 만졌다. 그 순간 어린 지강은 마치 뱀이 한 마리 자신의 뺨을 스쳐지나갔다고 느꼈다. 그 정도로 차갑고 소름끼치는 손길은 처음이었다.
나중에서야 그것이, 전설적인 한빙신공을 익힌 자의 손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남자는 손을 내밀어 지강을 이리저리 만져보더니, 이내 웃었다.
“벙어리는 아니군. 혈도와 심맥에 아무런 문제가 없어. 아이야, 설마 긴장했느냐? 자, 여기 사탕을 주마.”
남자는 다정하게 웃으며 품에서 사탕을 꺼내 주었다. 때는 오뉴월. 절강성은 아열대의 습하고 더운 기후라 잠깐이라도 품 안에 사탕을 가지고 걸으면 녹아버리는 곳이었다.
흔한 덥디 더운 곳인 것이다. 그런데 입안에 넣은 사탕은 마치 얼음처럼 차갑고 딱딱했다.
어린 지강은 그저 아무런 생각 없이 맛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남자가 무릎을 굽히더니 눈을 맞추고 말했다.
“아이야, 혹시 이곳 무관의 가장 큰 책임자가 누군지 아느냐?”
끄덕끄덕. 지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호오, 혹시 네가 그의 아이인거냐?”
끄덕끄덕. 다시 지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잘됐구나. 나를 좀 안내해다오. 나는 네 아버지에게 용무가 있어서 온 사람이다.”
“······.”
끄덕. 어린 지강은 마치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사탕의 단 맛에 넘어간 것이 아니다. 그 남자에게는 뭔가 알 수 없는 마력이 있었다.
어쩌면 두 눈을 마주친 순간부터 지강은 뭔가 거부할 수 없는 마력에 세뇌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지강은 쫄래쫄래 걸어 안채로 향했다. 그곳엔 자신의 아버지가 글을 쓰고 있었다.
“지강아, 거기서 뭐하느냐. 또 하라는 수련은 안하고, 헛!!!”
그 순간 지강은 아버지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한 평생 지강이 처음 본 놀라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경악하는 두 눈에는 충격만이 그득했고, 온 몸이 뻣뻣이 굳어있음이 어린 지강에게도 느껴졌다. 아까 지강이 느낀 충격을 지금 자신의 아버지도 똑같이 받고 있는 것이다.
“······누구요??”
“내 기세를 알아챘나. 놀랍군. 어지간한 자들은 그저 기분 탓에 소름이 돋는 건가 하며 어리둥절해하는데, 큭큭. 너는 이 쇠락해가는 무림에서도 다른 자들관 좀 다르군.”
“누구냐고 물었소.”
“나? 대답하면 알려나······. 난 파천황이라고 하네.”
“파천황!!!”
쿵!!!
부친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띄엄띄엄 얘기하기 시작한 것이다.
“파천황이라면 내가 듣기론 60년 전에 나타난 최강의 고수라고 하던데······. 듣자하니 당신은 의화단 운동 말기에 갑작스레 나타나 그 세력을 전멸시키고 유유히 사라졌다고 들었소. 맞소??”
“제법 정보에 능하군. 어떻게 알았지??”
“······60년 전 일이지만 의화단 운동의 일은 그리 가벼운 일이 아니오······. 외세에 대항하여 비록 문제는 있었지만 어찌됐든 나라를 지켜보자고 일어난 싸움이었지. 그 과정에서 식인 같은 잔혹한 행위가 있었지만 말이야······. 어찌됐든 초반엔 나름 승승장구했던 그들은 서구 열강의 본격적인 반격과 운동 말기 나타난 파천황이라는 한 남자에 의해 초토화됐다고 들었소. 그 광경이 너무 충격적이라 살아남은 의화단의 잔당들에 의해 무림 각지로 그 소문이 퍼져나갔지······. 파천황이라는 괴물이 있다. 만나게 되면 절대로 맞서지 마라, 고 말이오······.”
“나쁘지 않은 소문이군. 자신에 대한 공포감을 자극하는 소문을 듣고 기분이 나쁠 순 없지.”
“그런 소문을 듣고 기분이 나쁘지 않다는 말이오??”
“왜 기분이 나쁘겠는가. 모두 다 사실인데.”
씨익, 웃는 파천황을 보고 부친은 소름이 끼쳤다.
‘소문은 사실이다. 저건 악마야.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는 자는 누구라도 단번에 처리해 버릴 눈이야!!!’
뱀 같은 파천황의 눈을 보며, 부친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그는 이내 마음을 다잡고 말했다.
“그래, 그런 파 대협께서 무슨 일로 오셨소??”
“파 대협이라니 그런 낯간지러운 소리는 하지 말자구······. 단도직입적으로 말함세. 자네는 새로 시작될 공안 무림맹에 합류해주어야겠네.”
“공안 무림맹??”
“아, 내 설명이 부족했군. 그럼 말해주지. 공안 무림맹은 말 그대로 공안 내에 신설되는 무림인들의 조직일세. 특수치안유지부대라고 말해도 되겠지. 일반 공안들로선 해결이 불가능한 범죄, 타국과의 전쟁, 첩보, 파괴공작 등을 담당하게 될 걸세.”
“그런 흉흉한 일에 왜 나보러 참가하라는 거요??”
“후후. 과거를 바꿔도 아무 소용이 없지. 과거란 한번 정해진 순간부터 끊임없이 따라다니는 것일세. 그렇지 않나? 일지효? 아니, 척지효!!”
“네놈, 그걸 어떻게?!”
“후후, 다 아는 수가 있지. 무림에 비밀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게. 무림에는 그저 접근하기 어려운 비밀과, 접근하기 쉬운 비밀이 있을 뿐이야. 절대적인 비밀은 없지.”
“네놈!!!”
척지효가 눈을 부릅떴다. 그러자 파천황을 따라온 일지강이 덜덜 떨기 시작했다.
“아버지, 왜 그래요. 무서워요!!!”
“······.”
아들의 말에 척지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파천황이 일지강을 안아들더니 다정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얘야, 척계광이란 장수를 아느냐??”
“척계광?? 어디서 들어본 것 같기는 하지만······.”
“후후, 척계광은 산동 출신의 인물로 명나라 사람이란다. 그는 대대로 무인 집안의 사람이었는데 그렇게 무인으로 지내다 절강도사첨사라는 사령관이 되면서, 왜구들을 토벌하게 되었지. 그가 만들어낸 절강병법과 삼수병 체제, 그리고 기효신서는 수많은 왜구들을 쓸어버리는데 효과가 있다는 것이 입증되어 후에 그의 병법은 명나라 장수들뿐만이 아니라 청 말기에 이르기까지 증국번(曾國藩)이라는 자가 이용하여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는데 사용했고, 임진왜란 후의 조선에서도 척계광의 병법을 수용하여 자신들 방식에 맞게 고쳐 사용했지. 그런 자가 사실은 너의 조상이라는 것이다. 대단하지 않느냐??”
“하지만 난 일 씨인데······.”
“후후. 이후 척계광은 무수한 공적을 쌓아 당시 만력제 아래에서 재상을 담당하고 있던 장거정에게 중용되게 되지. 하지만 장거정이 죽고 부정부패 등으로 인한 고발이 이어지자 그가 중용하던 척계광 역시 탄핵을 당해 파면을 당하게 된다. 그의 파면 조치는 3년 후 철회되었지만 실의에 빠진 척계광은 그대로 병마에 시달리다 고향인 산동성 등주에서 죽었다. 그런 그의 후손이 정체를 감추고 성 마저 바꾼 채 살아간다고 해도 이상하진 않겠지.”
“······아버지, 정말이에요??”
“······.”
“아버지!!!”
“사실이다.”
쿠웅!! 어린 나이에도 일지강, 아니 척지강은 충격을 받았다.
솔직히 어린 나이라 자신의 조상이 얼마나 심각한 일을 당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보다 자신이 사실 일 씨가 아니라 척 씨라는 사실에 크나큰 충격을 받은 것이다.
그때 척지효가 말했다.
“아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고 했나? 나도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너는 그 조상님의 절강병법과 기효신서를 노리고 온 것이냐??”
“틀린 것은 아니지. 다만 내 개인적인 욕심이라기보다는 국가에 이바지하기를 바래서이다. 공안 무림맹은 절도 있는 무림인들의 특수부대가 될 예정이다. 과거의 중구난방인 무림맹과는 차원이 다르지. 과거의 무림맹은 이민족들이나 마교가 쳐들어왔을 때만 일시적으로 무림인이 모이는 기구였던 데다 그때마다 세력관계에 따라 지휘체계가 정해지고 개인주의적인 무림인들의 특성상 명령을 제대로 듣지 않아 오합지졸들이었다. 그런 조직으로도 용케 이민족들에 대항하여 중원에서 버텼지. 하지만 이제는 달라. 검과 창이 아니라, 총과 폭탄의 시대이다. 그리고 미사일의 시대지.”
“훗, 그런 시대면 무림인이 할 일도 없지 않나. 시대착오적인 발상이군. 이런 시대에 시대역행적인 무림인들의 집단을 만든다는 것이 말이야.”
“아니지. 전혀 아니야. 넌 잘못 생각하고 있어, 척지효. 잘 생각해보라구. 미사일로 어느 지역을 초토화 시키면 그걸로 끝나나? 그건 아니지. 결국은 그 지역의 치안을 유지할 인력, 즉 보병들이 있어야 하는 거야. 나의 공안 무림맹은 그 첨병에 설 것이다. 그야말로 특수부대라는 말이 어울리는 곳이지.”
“······그런 자들에게 시대에 뒤떨어진 절강병법과 기효신서는 왜 가르친단 말이냐. 앞뒤가 맞지 않는 발언이군.”
“척지효, 사실 난 요 며칠 잠복하여 네가 수련생들에게 병법을 가르치는 장면을 다 봤다. 아주 체계적이더군. 사실 병법이란 시대를 초월하여 잘 만든 병법이라면 여전히 통하지. 병법이란 건 어느 순간 딱! 하고 갑자기 나타나는 것이 아니야. 수백 년, 수천 년 동안 이루어진 전쟁의 역사가 병법의 발전을 낳는 것이지. 네가 가지고 있는 그 기효신서 등은 지금 시대에도 충분히 통할 가치가 있다. 내놔라! 아니! 정확히 말하면 국가를 위해 헌납하는 거다! 그럼 너는 앞으로 발족될 공안 무림맹의 수석 교관으로 삼아주마!!”
수석 교관. 매우 구미가 당기는 말이었다. 갈수록 줄어드는 문하생들. 그리고 시대에 뒤떨어진 직업. 이대로 파천황의 제안에 응하면 부귀영화가 보장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물론 아내와 자식, 그리고 그 자식의 자식까지도 대대손손 잘 먹고 잘 살 수 있겠지. 그러나 척지효는 대답했다.
“대답은 부(不)다.”
“뭐라고?? 이렇게 기막힌 제안을 거절한다는 거냐?! 넌 멍청이냐!!!”
“그래, 난 멍청이다. 아니, 병신이지.”
척지효는 두 눈을 똑바로 뜨고 파천황을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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