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 너는 누구지
불사왕은 킬킬 거리며 말했다.
‘큭큭. 아직도 불안하기만 하지?? 혈사마공을 쓸수록 잠식되는 네 이성과, 끓어오르는 본능에 말이다. 그래, 그것이 바로 혈사마공의 본질이다!! 쓰면 쓸수록 자신을 잃어버리고, 그저 폭주하게만 되지!! 그것이 바로 힘이다!! 힘을 얻는데 아무 대가도 없으리라고 생각했나? 와하하하하하!!’
불사왕이 미친 듯이 웃었다. 그러자 원륭은 다가가 수도(手刀)를 휘둘렀다.
휘이익!! 그러나 맞지 않았다. 역시 이것은 꿈인 것이다. 불사왕도 지적했다.
‘안 돼!! 전혀 맞지 않아!! 그것은 너도 이미 짐작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꿈이다!! 꿈!! 난 이미 죽고, 살아있을 때의 모습을 바탕으로 네 뇌가 재구성해낸 나의 허상이란 말이지! 하하!! 환영을 상대로 검을 휘두르다니, 대체 무슨 짓이냐? 하하!!’
자신을 조롱하는 불사왕의 환영이었으나, 원륭은 담담히 말했다.
‘무얼. 그냥 당신의 그 좇같은 면상에 한방 먹이고 싶었을 뿐이오. 생각해보니 전에 그래본 적이 없잖아?? 아쉽군. 지금 실력이라면 충분히 그런 게 가능할 텐데.’
‘가능할까?? 냉정히 생각해봐. 너의 실력이라면 지금 전성기 때의 나를 능가했다고 확신하나? 하하!!’
그 말에 원륭은 입을 다물었다. 과연 그 말은 사실이었다. 과거 원륭은 잠시 불사왕과 함께 2대 1로 파천황을 상대한 적이 있는데, 그때 아주 곤욕을 치렀던 것이다.
그 싸움은 원륭 인생의 가장 힘든 싸움이었다. 다른 싸움은 최소 10여 명의 동료들과 함께 싸웠었으니.
문화대혁명에서 천안문 사태가 일어날 때까지 원륭은 자신을 제외하고도 7명의 동료들이자 스승들과 함께 싸웠고, 그 후에는 홍콩의 새로 사귄 동료들과 함께 9인이 조를 짜 부패한 중국 정치인들을 상대했었다.
그런데 그때 무림지존이나 다름없는 절대고수 파천황을 고작 둘이서만 상대하고도 잠시라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거의 다 혈마 불사왕의 덕분이었다.
그 당시 원륭은 그저 갓 혈귀로 다시 태어난 상태에 불과했으니까.
그저 파천황의 한빙신공으로부터 오는 음한지기만을 간신히 막으며 얼어붙지 않게 버티는 것이 고작이었던 것이다.
물론 원륭이 미끼 역할을 하는 동안 불사왕이 상당한 공격을 하여 예상치 못하게 이 둘의 조합은 아주 좋은 성과를 이루었지만, 가능하다면 다시 불사왕과 단둘이 싸우고 싶지는 않았다.
불사왕은 아주 괴팍한데다 짜증나는 성격이라 비위를 맞추기가 힘든 것이다.
그에 비하면 지금 원륭의 삐딱함은 거의 장난수준이라고나 할까?? 흠······.
원륭은 입을 열었다.
‘결국 하고 싶은 말이 뭐요??’
‘힘에 몸을 맡겨라!! 힘을 두려워하지 마라!! 힘은 악이 아니다!! 네 자신을 지키고 네 의지를 세계에 구현할 수 있는 정의이자 진리이지!! 힘은 무서운 것이 아니다!! 그것이야말로 축복이자 구원인 것이다!! 하하하하하하!!’
‘그럴싸한 말 같지만 그저 그럴듯한 단어의 나열에 불과하군!! 알맹이가 없어!! 그래서 네 놈은 그렇게 말년에 마약에 의지하고 살았나?!’
째릿. 그 말에 불사왕의 두 눈이 빛났다. 마치 꿈에 있는 존재가 아니라, 분명 살아있는 존재와 같은 섬뜩함을 뿜어냈던 것이다.
순간 원륭은 생전 불사왕이 가끔 보여주던 섬뜩한 기운을 오랜만에 느껴봤다.
불사왕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그래······. 마약을 거론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묻지. 너는 지금 마약을 하고 있지 않나??’
‘!!’
원륭은 움찔했으나 이내 입을 열었다.
‘최소한 너처럼 그렇게 골초는 아니었지. 하루 종일 쪽방촌에서 대마초를 펴대는 너 정도는 말이다.’
원륭 일행이 거주하던 쪽방촌은 거의 고시원 수준의 크기였다.
테러리스트인 일행이 주목받지 않고 숨어살 수 있는 건물은 고작 그 정도였고, 거기에 여러 명이 숨어서 살다보니 각자 고작 한 평 정도만의 공간을 배정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주방과 화장실 등은 공동으로 사용했고 뭐 아무튼 왁자지껄하면서도 지금 생각해보면 다시 돌아가기는 싫은 궁상맞은 건물이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리 싫지는 않았다.
그저 그리울 뿐. 원륭에게 있어 지금껏 머물러왔던 쪽방촌들은 그 시절 향수를 불러왔던 것이다. 마치 영화로 치면 중경삼림이나 화양연화, 심지어 영웅본색의 느낌이라고나 할까······.
실제 느낌은 좀 더 중경삼림이나 화양연화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거주지에 비해서도 훨씬 더 좁고, 영웅본색의 느낌과는 조금 더 다르지만 60년대 중반부터 쪽방촌에서 무림인들과 함께 거주한 원륭에게는 왠지 그런 느낌으로 다가왔다.
느낌은 사람마다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아련하고도, 왠지 그리운 느낌.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시대를 뒤덮었던 모택동과 홍위병의 광기, 등소평과 주은래의 교활한 계책들이 난무하는 지옥 같은 시대였지만, 뭐 그렇다고 해도 사람은 옛날 기억에 향수를 느끼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원륭은 잠시 동안의 추억에서 벗어나 불사왕의 환영을 노려보았다.
설령 꿈이라고 해도, 환상이라고 해도 그는 왠지 곱게 봐줄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자신을 혈귀로 만들어서가 아닌, 그저 본능적인 혐오스러움이었다. 불사왕에겐 왠지 그런 게 있다. 그러나 불사왕은 다시 능글능글한 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후후, 골방에서 내가 자꾸 대마초를 피워대니까 사휘령이라든지 소형승 같은 놈들은 나를 죽여 버린다고 한 적도 있었지. 애송이 놈들. 그렇게 내가 만만한 것 같으냐? 하하하하하핫!!’
‘······.’
그 말에 잠시 원륭은 비교해보았다. 과연 세 사람이 맞붙으면 어떻게 될까.
먼저 소형승은 과거 소림 나한승들의 우두머리였고, 소림 칠십이종절예를 완벽하게 익힌 후 후에 역근경이나 달마의 무공들을 얻는 기연에 도달했다. 그 강함은 필시 절정 중의 절정이겠지.
물론 마교 교주였던 진룡이라든가 제갈세가의 신의 제갈의, 개방방주 상인관, 하오문 문주인 하홍휘, 사씨 세가의 후계자인 사휘령 등도 그에 전혀 부족하진 않겠지마는······.
사휘령의 검술 역시 무시무시할 정도였고, 소형승의 무공도 더욱 강력해졌다지만 과연 그 둘이 편을 먹어도 혈마 불사왕을 확실하게 쓰러트릴 수 있을지 원륭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수십 년간 무공을 연마한데다 이젠 혈귀로서도 원숙해지고 무림에 익숙해진 원륭이라 어지간한 전력의 비교는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항상 파천황을 비롯해서 비교적 최근 상대한 공안 무림맹 요원들, 그리고 보시라이나 구카이라이 등을 다시 한 번 생각하며 매일 시뮬레이션을 하고 있었는데, 불사왕만 생각하면 머리가 아파졌던 것이다.
그는 그 누구를 상대로 하여서라도 절대적으로 이긴다는 보장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절대 진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 자였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바로 혈마보 때문이다.
‘아, 그래. 바로 혈마보가 있었지······. 불사왕. 그것이 있는 한 너는 그 누구를 상대로 하더라도 그리 쉽게 깨지지는 않겠지.’
‘그리고 너도 말이다.’
‘그래······.’
불사왕이 자신의 말을 되돌려주자 원륭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혈마보.(血魔步) 아까 전 쿤밍역에서 쿠사나기 및 마룡을 상대로 원륭이 자신을 숨긴 수법이 바로 혈마보다.
피와 내공을 대량으로 소모해서 잠시 동안 눈에 보이지도 않고, 기척이 감지되지도 않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원륭은 말했다.
‘그러나 그 대가는 너무 커. 소모가 장난이 아니지.’
‘그건 맞는 말이다. 음······.’
불사왕이 신음했다. 안개화된 상태에서 보법이나 신법을 펼치는 것이 바로 혈마보, 그리고 그 상태 그대로 은신하고 있는 것이 혈운화(血雲化)인데, 가만히 있든 움직이든 그 소모는 엄청나다.
그대로 아무것도 안 하고 그 상태를 유지하고 있기만 해도 불과 얼마 버티지도 못하고 탈진하고 마는 것이다.
그러니 최후의 비상수단이라 할 만했는데, 무공이 높아질수록 소모되는 내공이나 피가 줄어들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 소모가 어마어마한 것은 달리 변화가 없었다.
말하자면 불과 몇 퍼센트 차이······. 무시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뭔가 어마어마한 것도 아니다.
‘나도 죽기 직전까지 계속해서 혈마보와 혈운화의 내공 소모율을 억제해보려 했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 않더군, 하하.’
‘만약 그게 성공했으면 파천황마저도 이미 죽어나자빠졌을 것이다.’
‘맞는 말이다.’
웬일로 불사왕은 그에 동의했다. 현재 원륭과 파천황 사이의 간격은 굉장히 애매한 단계에 와있었다. 비록 화경과 현경의 차이라고는 하지만, 절대 아무런 피해도 입힐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단지 파천황이 좀 더 빠르고, 좀 더 강하고, 좀 더 경험이 많기에 전반적으로 여러 면에서 유리한 것이다. 말하자면 상위호환······. 그래. 압도적으로 상위호환이다.
그렇다고 해도 원륭의 공격도 정통으로 맞기만 한다면 상당한 타격을 줄 수가 있었는데, 뭐 아무튼 맞지 않는 것이 문제다.
피해버리든가, 그놈의 한빙신공으로 만든 두터운 얼음벽으로 막아버리기가 일쑤니까.
그 수법에 몇 번이나 당했는데 깨지 못하는 것은 그 정도로 강하기 때문이다.
단순한 수법이라도 강력하기만 하면 매우 부수기가 힘든 것이다.
단순함이야말로 진리. 그야말로 오의라고나 할까······. 사파 그 자체인 혈마 불사왕의 혈사마공은 아무리 강력하다고 해도 정종무공의 극의인 한빙신공을 깨기에는 손색이 있었다.
안타까운 말이지만은. 원륭은 말했다.
‘혈운보와 혈운화의 위력은 압도적이다. 아니, 어떻게 보면 혈사마공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초식이 바로 이것이지. 그 막대한 내공 소모만 어떻게 한다면 순식간에 적 뒤로 아무 인기척도 없이 돌아갈 수도 있고, 적의 공격은 받지 않는 사기적인 초식을 계속해서 쓸 수가 있다.’
‘그래. 그렇게만 된다면 확실히 무적이나 다름없겠지······. 하지만 하늘은 공평하다. 아마 그 정도 초식이 그 정도 내공 소모량을 가지고 있는 건 당연한 하늘의 섭리겠지. 그건, 본래 내가 만든 무공이 아니니까.’
‘뭐?! 네가 만든 무공이 아니라고?! 혈사마공은 네 독문무공이 아니었나!!’
‘응? 내가 언제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나?? 그저 내가 자주 쓰는 걸 보니까 네놈들이 멋대로 그렇게 생각한 모양이지. 혈귀의 혈통과 함께 이어져 내려온 것은 저주만이 아니다. 그 감염능력과 마찬가지로, 혈사마공 역시 태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저주받은 마공인 것이다.’
쿵!! 원륭의 머리에 엄청난 충격이 달렸다. 거의 몇 십 년 만에 이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이 자식······. 왜 진작 말을 하지 않았지?!’
‘네가 물어보지 않았으니까.’
‘미친놈!! 애초에 그런 상상조차 어지간하면 할 수가 없는데 대체 어떻게 물어보나?! 네놈은 병신이냐!! 어떤 무공을 가르쳐주면서도 그런 유래조차 알려주지 않다니!!’
‘뭐,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 사실을 알고도 수백 년 동안 나는 한계에 부딪쳤으니까.’
‘수백 년?? 뭐, 너는?!’
‘아아, 그렇게 이상하게 보지마라. 솔직히 그 정돈 이미 예상하고 있던 것 아닌가?? 수백 년이라고 해도 고작 명, 청 시대의 이야기다. 대수로운 것은 아니지······.’
‘이 자식······.’
‘지금도 가끔 명, 청 시대의 유물이 어딘가에 묻혀 있다 홍위병의 마수로부터 피해 살아남아 가끔 발굴되지 않나?? 하핫!! 뭐 중국은 넓어!! 숨겨진 유물들이야 얼마든지 많지!! 발굴기술이 따라주지 않아 아직까지 발견해놓고서도 봉인해놓고 있는 유적들도 한두 개가 아니고 말이다!! 말하자면 나는 유물이란 말이지!! 유물! 문화재!! 살아있는 화석!!’
‘뭐, 개소리 집어치우고······. 그래서 그 혈사마공은 네가 물려받을 때부터 그런 상태였었나?! 본래부터 그렇게 강력했었냔 말이다!!’
‘아니. 그건 그렇지가 않았다. 무림의 역사를 보면, 무공이란 매우 강력했다가 쇠퇴기를 겪고, 다시 부흥기를 겪은 뒤 다시 쇠퇴했다고 볼 수가 있지. 지금은 그 다음 시기라고 보면 되나 흠······. 선인들이 선계로 떠난 후 막강했던 음양혼돈공이 갈라져 한빙신공과 열양진경이 되었지. 여기가 첫 번째 쇠퇴기다. 그 후 무공과 무림은 점차 발전을 하다가 명 시절에 다시 한 번 절정을 이루었다. 뭐······. 또한 동시에 하락이 시작되었지만······. 주원장의 배신에 맞서 명교와 백련교 등은 복수를 위해 절치부심하며 무공을 갈고닦았고, 그에 대항하기 위해 소림 등 구파일방 또한 막대한 수련을 하여 그 당시가 전성기였지. 무림을 탄압하던 주원장의 명나라 때문에, 모순적이게도 무공이 발전했다는 얘기다. 하하. 그 후 청나라가 들어서 이민족들이 중원을 차지하니, 명나라 시절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탄압으로 인해 아예 대부분의 무림 문파들은 그 뿌리가 흔들리게 되지. 게다가 서구 열강과 총기, 폭탄, 대포 등이 들어오니 본격적으로 무림은 쇠퇴하게 된 게야. 그 후 국공내전 등을 거치며 대만 음양당의 강호육에 대항하기 위하여 파천황과 공안 무림맹이 나섬으로 인해 다시금 무림은 전성기를 되찾아가고 있다······. 뭐, 역사적으로 보면 국민을 탄압하는 역대급 암흑기에 도달해있지만, 무공 수준으로만 보면 과거 상고시절 태초와 비교해도 그리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얘기지. 음양혼돈공을 제외하고는 모든 무공의 위력이 다 동급이거나, 혹은 그 이상이니까. 후후!!’
순간 원륭은 혼란에 빠졌다. 지금 대화를 하면서 느낀 건데, 이 불사왕의 환영이라 주장하는 존재는 단순 환영이라 하기에는 뭔가 위화감이 느껴졌다. 마치 살아있는 것만 같았던 것이다.
게다가 현재 무림이라든지 국제 정세를 알지 못하고서는 절대 대답할 수 없는 답변들을 골라가면서 하고 있었다. 원륭은 꿈속이지만 내공을 끌어올리며 침착하게 물었다.
‘너는 누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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