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귀-
명 림
-신의 나라-
152화
-원귀-
이부지신의 손가락에 걸려 있는 옥골무가 붉은색으로 변했다.
보고 있던 토래는 그것이 무엇인지 그제야 기억이 났는지 동공을 있는 대로 키웠다.
“옥골무?”
그것은 이부지신의 신하 ‘예’가 궁을 날릴 때 손가락에 끼워 쓰던 것이었다.
온 몸에 잔뜩 힘을 주고, 두 손에 철철 흐르는 피를 쥐어짰다.
피가 흘러내린 자리에서 투명한 붉은 막이 생기기 시작했다.
“친나! 이걸로 될지...?”
토래는 인간으로 태어나 처음으로 쓰는 친나의 힘을 의심하면서도 달리 방법이 없었다.
신의 몸이었다면 ‘친나’는 수천의 아수라들이 들이 닥쳤을 때도 한 번에 막아냈던 붉은색의 큰 방패였지만, 지금의 토래가 꺼낼 수 있는 친나의 힘은 고작 솥뚜껑정도의 크기에 불과했다.
‘끼아아아아아~~~~~~~’
어디선가 찢어질 듯 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찌나 크고 음산한지 옥골무에 힘을 실어 넣던 이부지신마저도 멈칫했다.
‘끼아아아아아아~~~~’
외성 밖에서부터 거무스름한 형체들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고, 토래와 이부지신은 그것이 ‘원귀’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알유가 죽였던 사람들의 원귀였고, 그 수는 무려 천이 넘는 엄청난 숫자였다.
원귀들은 한데 뒤 엉키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하며 허공을 날아다녔고, 크고 작은 비명을 계속 질러 귀가 다 먹먹할 정도였다.
“알유가 죽인 사람들이다. 더 머물기는 힘들 것 같군.”
토래가 이부지신을 보며, 중얼거렸다.
“흐응~골치 아프게 되었네에~”
이부지신은 귀를 후볐다.
몇 개로 뭉쳐 날아다니던 원귀들 중 몇 개는 알유를 따라 가고, 남은 원귀 덩어리들은 각각 이부지신과 토래를 향해 날아오기 시작했다.
토래가 저지른 일은 아니지만, 원귀들에게 그런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원귀들이 볼 때 토래의 혼이 이부지신과 알유와 같은 에너지를 내고 있기에 그랬다.
한 덩어리의 원귀들이 이부지신을 치고 나갔다. 이부지신이 원귀들에게 싸인 모습으로 하늘 높이 올라가는 모습을 보자 토래도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원귀 덩어리들을 대비해 친나를 들어 앞을 막았으나 수 백의 원귀들의 힘에 조금씩 뒤로 밀리다가 급기야 친나가 부서지며, 토래는 원귀에 한껏 싸여버리고 말았다.
“에잇! ㅅㅂ,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난타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원귀들을 피해 달아나기 시작했고, 물기둥을 여러 차례 쏘아 보내 원귀들을 흩어놓으며, 대성 쪽으로 내 달렸다.
몇 차례 발목을 잡아당기는 원귀들 때문에 넘어지기도 여러 번이었지만, 난타는 필사적으로 달렸다.
‘휘익,빠악,쾅’
뜯겨진 대문의 커다란 나무 문이 날아와 가옥의 벽을 뚫고 박혔다.
무수히 많은 원귀들이 알유의 몸에 덕지덕지 붙어 있었음에도 알유는 기어코 걸음을 옮겨 대성의 좌측에 위치한 수라가 있던 집으로 쳐 들어갔다.
막 수라를 업고 나오던 지탈은 깜짝 놀라 지붕위로 뛰어 올랐고, 알유는 지탈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다른 쪽 대문도 뜯어 던져버렸다.
아슬아슬하게 피한 지탈은 지붕을 넘어 다른 지붕으로 올라탔고, 알유도 따라 뛰어 오르려 했으나 원귀들이 잡아 당기는 바람에 바로 뛰어 오르지 못하고, 팔을 휘저어 얼마의 원귀들을 떨군 후에야 지붕위로 올라 설 수 있었다.
벌써 몇 집 건너 지붕 위를 달리고 있는 지탈을 확인한 알유는 앞을 막는 원귀들 때문에 자꾸 시야가 가려지자 입을 벌려 ‘운사(雲射)’를 마구 뿜어댔다.
운사에 맞은 원귀들이 옅어지자 알유는 펄쩍 뛰어 올랐고, 남은 원귀들이 알유의 뒤를 따라가자 검은 덩어리들이 길게 늘어지며 마치 알유의 긴 꼬리처럼 보였다.
대성을 완전히 빠져나간 지탈은 수라를 업고, 미친 듯이 내달렸고, 알유는 엄청난 기세로 그 뒤를 바짝 쫓았다.
그러나 집요하게 매달려 있는 원귀들 때문인지 제 속도를 온전히 내지는 못했다.
한 번씩 운사를 뿜어내며, 원귀들을 흩어놓기는 했지만, 원귀들의 수는 많았으므로 모두 다 훑지는 못했다.
급기야 밟은 지붕이 무너지면서 알유는 집을 무너트리고 아래로 떨어지고야 말았다. 집안에 있던 사람들이 아래에 깔려 비명을 쳤지만, 알유는 여전히 달려드는 원귀들을 쳐내느라 바빴다.
집의 잔해들과 원귀들을 해치며 겨우 밖으로 나온 알유가 다시 위로 날아올랐지만, 이미 지탈은 보이지 않은 후였다.
“우워어어어~”
분노한 알유가 크게 소리쳤고, 그 소리는 남부 전역 곳곳에 울려 퍼져나갔다.
사실 도망치는 지탈에게도 원귀들은 붙어 있었다. 지탈의 혼도 알유과 같은 기였으므로 원귀들은 알유와 같은 기를 가진 지탈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이다. 뒤를 돌아보며 알유를 따돌린 것을 알았음에도 멈추지 못하던 지탈은 숲 안쪽으로 짓쳐 들어가서야 수라를 내려 놓고, 한 팔에 끼워져 있던 구슬 팔찌를 풀어 돌렸다.
빠르게 도는 구슬 알들은 지탈과 수라 주변으로 원귀들이 공격하지 못하도록 방어 역할을 했고, 원귀들은 주변을 날아다니다가 구슬에 맞아 비명을 지르거나 멀리 달아났다 돌아오는 등 우왕좌왕 하는 모습을 보였다. 일단 지탈은 수라와 구슬 막 안에 가만히 앉아 원귀들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답부를 업고 달아나던 어소반도 마찬가지였다.
원귀들에게 싸였다가 벗어났다를 반복하며, 겨우 산꼭대기까지 올라섰지만, 집요하게 따라 붙는 원귀들 때문에 어소반은 미칠 것 같았다.
어소반의 몸 주변으로 물 덩어리가 몽글몽글 생성되어 원귀들을 쳐 봤지만, 큰 타격을 입히지는 못하고, 살짝 밀어내는 정도에 불과할 뿐이었다. 다행인건 답부에게는 원귀들이 들러붙지 않으니 일단 답부를 내려놓고, 원귀들을 따돌려야겠다 생각한 어소반은 홀로 숲으로 뛰어 들어갔다.
동쪽으로 나 있는 산등성이 위에 서 있던 범천은 남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보고 있었다.
“원귀들이라니...이래서야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겠구나.”
*
여명이 서서히 올라오자 남부 전역 곳곳이 보이기 시작했다.
대성의 윗 층에서 내려다보고 있던 고추대가 미설추와 두 고추가 방추와 이추는 전쟁터를 방불케 한 남부안을 내려다보며 너무 놀라 아무 말도 못하고 굳어 있었다.
알유가 소리쳤을 때는 오금이 저려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대대로 어수당과 고추가 어참이 괴수에 의해 무참히 죽음을 당했고, 말객 칠백 오십 명, 조의 천 이백 십 오명이 모두....죽었습니다.”
예속의 보고를 듣고서도 믿을 수 없는 피해에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만 벌리고 있을 따름이었다.
“가옥 수천 개와 민간인 천여 명이 다치거나 죽었고...”
계속되는 말객의 보고는 정신을 온전히 하고는 듣고 있기도 끔찍 할 정도였다.
“어...어찌...이런...일이...”
미설추는 의자에 겨우 앉아 떨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괴수는...왜 갑자기 괴수가...”
방추가 주먹을 쥐고는 있지만, 힘은 들어가지 않은 상태로 탁자를 내려쳤다.
“도....동부....동부의 고추대가는...어디 계시느냐?”
미설추가 예속에게 물었다.
“그 분들이 계시던 가옥은 모두 부서져 있고.....광통의 토래는 괴수에 맞서 싸우다 갑자기 나타난 검은 구름에 휩싸여 멀리 달아났다 합니다.”
“검은...구름이라니? 그건 또 무엇이냐?”
“모..모릅니다.”
예속 역시도 보고를 올리는 내내 연신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조...조의두대형을 찾아 데려오라! 당장!”
“예!”
조의두대형은 몇 달 전 토래의 백골부대에 의해 심한 부상을 입고, 기도를 하러 산 속에 틀어 박혀 있었다.
백고는 지탈이 수라를 업고 달아나기 전부터 외성으로 나가 다친 사람들을 수습하고 있었다. 무너진 집의 잔해에 깔린 사람들을 자신의 손이 터지고 찢어지는데도 아랑곳 하지 않고 구해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정신이 나가 버린 상황에서 그나마 제 정신인 것은 백고 뿐이었고, 수 백명의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혼자의 몸으로 이리저리 뛰어 다니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 쓰러질 뻔 한 적도 여러번이었다. 그러나 그럴때마다 이를 악물고, 차가운 물을 벌컥벌컥 마시며, 부상자들을 한 곳에 모아 놓고, 어디서 구해온 천을 찢어 상처를 메 주었다. 그 모습을 얼빠진 얼굴로 보고만 있던 사람들도 거의 하루가 꼬박 지나고 나서야 백고를 돕겠다 나섰고, 그 나마 한 숨 돌릴 수 있었지만, 여전히 돕는 사람보다 다치고, 죽은 사람들이 더 많았으니 바쁘긴 마찬가지였다. 부상자들을 모아 놓는다 해도 치료해줄 사람이 없으니 부상자들 중에서 사망자가 속출하기도 했다.
그때 무너진 집의 잔해를 치우다 위에서 무너져 내리는 잔해가 백고에게로 쏟아졌다.
“?”
위를 올려다 보니 누군가가 백고에게 막 덮치려던 잔해를 두 손으로 잡고는 멀리 던져버리고 있었다.
“괜찮으시오?”
“아..고..고맙소.”
“외소한 몸으로 혼자 다 하신게요?”
“어쩔수 없지요. 사람들이 지금 너무 놀라서...”
“그럼, 미약하나마 소인이 좀 돕지요. 그나마 가진 것이라고는 힘 뿐이니.”
“그래주신다면야...고맙소.”
백고는 환하게 웃어 도와준 사람에게 감사를 표했다.
“참, 존함이...”
“아...소인 보잘 것 없지만, 범천이라 합니다.”
“번천님, 저는 고백고라 합니다.”
범천이 고개를 끄덕이자 백고도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건냈다. 그 길로 범천이 잔해들을 치우면 백고가 아래 깔린 사람들을 꺼냈다.
“나으리~”
다리가 부러지고, 팔이 잘린 신음하는 부상자를 상처를 봐주고 있던 백고에게 숨이 넘어가기 직전인 노인 한명이 불렀다.
“대성에서도 아무도 나서지 않는 것을...나으리는 왜 혼자....”
“아마...대가께서도 이런일이 처음이니 정신이 없으실 겁니다. 곧 말객들이 나와 도울 것이니, 어르신 조금만 참으십시오.”
백고는 부상자의 상처를 천으로 둘둘 말며 다정하게 말해주었다.
“이 늙은이는 이제 죽어도 상관없지만, 젊고, 어린 아이들의 죽음이 너무....흑흑”
하고는 노인은 울기 시작했다.
백고는 침울한 얼굴로 노인의 손을 꼭 잡았다.
“어르신, 지금 누구의 죽음은 안타깝고, 누구의 죽음은 덜 안타깝고...그런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모든 이의 생명은 소중합니다. 어르신도 이대로 죽겠다 마음 먹지 마시고, 저를 좀 도와주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
노인은 흐느낌을 멈추고, 백고의 상처투성이 손을 내려다봤다.
“맞소. 이 몸,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지만, 아직 사지가 멀쩡하니....이 고운 손.....아이고....이 고운손이....”
“힘쓰는 일은 하지 마시고, 다니시면서 부상을 입지 않았거나, 운신할 만한 사람들이 보이거든 그들을 설득해 일을 돕도록 해 주십시오.”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노인은 대답과 동시에 백고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어느 집 귀족 자제 같은 멀끔한 얼굴이라 노인은 속으로 깜짝 놀랐다. 입고 있는 의복은 이미 피와 살과 먼지와 흙에 범벅이라 알아보긴 힘들었지만, 백고의 얼굴과 눈빛만은 달랐던 것이다.
‘저 분은 분명...크게 되실 분이구나. 내 죽기전에 저런 분을 직접 뵙게 되었으니...이제라도 힘을 내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때부터 노인은 목에서 피가 터져라 소리치며, 다소 멀쩡한 사람들을 일으켜 세워 일을 시키기 시작했고, 곧 있으니 꽤 많은 사람들이 부상자들을 여기저기서 안아 들고 오는 모습이 보였다.
사람들은 부상자들 사이를 누비는 백고를 눈물을 흘리며 바라봤고, 그 모습은 그들에게 강하게 낙인찍히게 되었다.
*
이틀 지났을 때 백고는 더 참지 못하고, 대성으로 쳐 들어 가 그때까지도 두려움에 떨고만 있는 대가에게 크게 호통을 쳐 댔다.
“지금 뭐 하는 게요? 밖에 백성들이 보이지 않소? 언제까지 그렇게 떨고만 있을 거냔 말이오?”
고추대가 미설추는 백고의 모습을 보고 바로 알아보지도 못했다. 그 만큼 백고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당장 말객들과 치료가 가능한 조의선인들을 파견해 백성들을 보살피시오. 죽은 자들은 한곳에 모아 모두 화장시키고, 부상자들은 멀쩡한 집으로 옮겨 치료하라 시키란 말이오!”
“아....”
그럼에도 미설추가 입만 벌리고 앉아 있자 백고는 미설추의 멱살을 잡아 흔들었다.
“정신차려! 당신은 여기 최고 지도자야! 언제까지 주저 앉아 있을 거냐!”
“아...알겠습니다...예....예....”
그제야 미설추의 멍한 눈빛이 제대로 돌아오는 듯 했다.
“바...밖에...누가 있느냐?”
미설추의 물음에 밖에 있던 예속이 들어섰다.
“예속 들었사옵니다.”
“여기, 황자마마께서 하신 말씀대로....죽은 자들은 모아 태우고....”
“부상자들은 그나마 멀쩡한 집으로 모두 옮겨 조의선인들에게 치료하라 시키거라.”
미설추가 말을 하다 백고의 눈치를 보자 백고가 마저 말해주었다.
“예!”
예속이 얼른 달려 나갔다.
“말객들에게 집을 보수하라고도 시키시오. 일단 무너진 집의 자재들을 한 곳에 쌓아 두고, 땅을 깨끗이 한 후 새로 지을 집과 보수만으로도 가능 할 집의 수를 파악하라 지시하시오.”
“예...”
“식량창고를 개방해 밥을 하시오. 백성들을 먹여야 할 것 아니오? 이틀이나 굶었소!”
“예...”
“당장!!!!”
백고가 큰 소리로 고함을 치자 깜짝 놀라며 미설추가 백고를 쳐다봤다.
“예!”
미설추의 대답에 힘이 실린 것을 확인하고서야 백고는 대성을 나설 수 있었다.
알유와 이부지신도 원귀에 의해 쫓겨났고, 다행히 다시 돌아오지는 않았다.
아마도 수라가 남부의 성안에 없다는 것을 감지한 것이 아닐까 추측할 뿐이었다.
*
“수라는?”
답부는 남부의 성을 빠져나온 첫날 아침에 이미 깨어났었다.
“지탈이 데리고 피했는데...”
어소반은 밤새도록 원귀들에게 쫓겨 다니다가 기진맥진 한 모습으로 답부에게 돌아온 지 일각도 지나지 않아 지쳐 주저앉아 있었다.
답부는 산꼭대기 위에서 남부의 모습을 어이없는 얼굴로 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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