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 회유-
명 림
-신의 나라-
190화
-거짓 회유-
어쩐 일로 사랑궁으로 이어졌던 긴 줄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날은 화창했지만, 부는 바람은 여전히 차가운 겨울바람 그대로였으므로 담비가죽 털두루마기를 걸친 바리공주가 사뿐사뿐 날 듯 대시전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내관들이 바리를 보고 머리를 조아렸고, 그들을 완전히 무시한 바리는 고수성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서서, 숨을 몰아쉬었다.
웬일로 바리가 눈앞에 나타나자 반색을 하며, 고수성의 안면에 미소가 머금어졌다.
“오~”
“아바마마! 중부로 출정하신다 들었사옵니다.”
고수성은 오랜만에 본 바리를 보고 반가움에 탄성을 지르며 반겼으나 바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 할 말을 먼저 뱉어 냈다.
“...”
고수성은 바리의 의도를 바로 알아차렸고, 미소는 사라지고, 딱딱한 얼굴이 되어 살짝 들렸던 엉덩이를 원래 제자리로 내려놓았다.
“소녀도 데려 가십시오!”
“안 된다!”
“중부로....명림이 온다 들었사옵니다. 소녀, 그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안된다지 않느냐! 물러가라!”
“데려 가시지 않으신다면, 저 혼자라도 가겠습니다.”
“뭐...뭐?............”
고수성은 분노했지만, 눈을 감고 참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중부로 올지 북부로 올지 모른다. 놈들이 어느 쪽으로 먼저 쳐들어올지 모르니 그런 것이다.”
“부마도위도 그랬사옵니다. 명림은...중부로 바로 올 것이라고요! 부마도위는 명림을 사로 잡아 오기로 저와 약조를 하였습니다. 소녀, 그 사람이 잡히는 것을 봐야 겠습니다.”
“부마도위가?”
‘잡는다고?’
“예, 그 사람도 신이었던 사람 아닙니까? 그 사람이 그랬사옵니다. 이미 북부는 황페화 되어 쓸모없는 땅이나 마찬가지이니 곧 바로 중부로 들어올 가능성이 더 크다고요! 제발 아바마마~소녀를 데려 가 주십시오.”
‘광처사(무솔,부마도위)가 무슨 수로 제석을 잡는 다는 것인가?’
고수성은 두 손가락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소녀, 그 간 제 안에 신의 혼들을 담으며, 신수의 힘을 조절하는 방법도 배웠사옵니다. 도움이 될 것입니다.”
“안된다. 그 힘은 절대 쓰면 안 돼!”
“적당히 하면 괜찮다고 부마도위가 그랬사옵니다.”
‘광처사(무솔,부마도위), 그 새끼가...’
고수성은 속으로 욕을 했다.
“물러가라 했다. 더 말하지 않겠다.”
“아바마마!”
바리 또한 고집을 쉽게 꺾지 않을 것 같았다.
“너는 어찌하여 오랜만에 아비를 보고도 문안은커녕 한다는 소리가 명림답부 이야기부터 하느냐? 이제 네 머릿속에는 그 놈밖에는 없는 것이냐?”
“.....................................몸은 비록, 무솔의 여자가 되었지만, 마음만은 그 사람의 것입니다.”
“물러가라! 꼴도 보기 싫다!”
고수성은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를 쳤고, 바리는 입술을 깨물고 섰다가 이내 홱 돌아 대시전을 나가버렸다.
씩씩대며 나가는 바리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고수성은 답부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참을 수가 없었다.
‘흥, 광처사 이 놈이 무슨 수로 놈을 잡겠다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만약 성공한다면, 손해 볼 것은 없겠지.’
“당장, 중부로 갈 것이다. 준비가 덜 되었으면, 준비 되는대로 쫓아 오거라.”
고수성은 벌떡 일어나 대시전을 나가며 소리쳤고, 내관들이 얼른 달려와 머리를 숙였다.
*
“목숨을 살려 줄 것이다. 어찌 할 것이냐?”
“...”
무솔은 그 동안 잡아들인 신의 혼을 가진 자들을 모아놓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각각 도당, 호귀, 측신, 걸립, 당산, 공알바우, 화덕, 화주, 일직, 수구신, 풍등이었다. 그 나마 신들 중 중급에 속하는 신들로 무솔은 하급 신들은 바리나 알유에게 줘버리고, 쓸 만한 신들만 모아 놓고, 협상 중에 있었다.
거의 다 신의 기억은 있으나 신의 힘은 없는 자들이었다. 애초에 신의 힘을 쓸 줄 모르고 있기도 했고, 신의 힘이 필요치 않아 회복하기를 거부한 자들이었다. 그렇기에 무솔이 부린 엽충들과 무(巫)들에게 쉽게 잡혀 온 것이었다.
“그냥 죽이시게.”
풍등이 팔짱을 끼고 앉아 조용히 입을 열었다. 모두 신이었던 자들이여서 인지 무솔의 협박에 동요하는 자는 단 한명도 없었다.
“모두 같은 생각이오?”
무솔이 다시 물었다.
풍등이 고개를 끄덕이자 다른 신들도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
‘이래서는 안되겠군.’
“허면....그대들의 가족들까지 죽이는 것은?”
“그게 무슨 소린가? 그들은 인간들이네. 그저 인간들을 왜 죽이나?”
“그야, 여기 모인 신들의 가족들이시니까. 그 이유로 죽이겠다는 것이지요.”
“만약....네 놈이 내 가족을 죽인다면, 네 놈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하하하...무슨 수로, 이 몸을? 신의 힘도 회복하지 않은 분들이? 그냥 죽음을 받아들이십시오. 이 세상에 당신들을 알고 있는 인간들은 누구라도 찾아서 다 죽일 것이니, 삶과 죽음은 한 끗 차이 아닙니까? 영혼의 세상에서 살았던 분들이 인간들의 죽음에 왜 그리 놀라십니까?”
무솔이 빈정대자 수구신이 벌떡 일어서서 눈을 부라렸다.
“광처사! 그대는 상제의 신하였음에 부끄럽지 않소?”
“놀라지들 마십시오~제 뒤에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상제께서 계십니다.”
“뭐? 뭐라고? 그럼 상제께서 우리를 모으신 것인가?”
“그렇다고 할 수 있지요. 인간의 껍데기 안에 계셔도 여러분들은 신입니다. 아닙니까? 상제께서 하시려는 일에 도움을 좀 달라고 부탁을 드리려는 것인데, 이리도 역정을 내시니...”
“그...그럼 진작에 그리 말을 했으면 되었지 않나? 왜 가족을 죽이겠다 겁박까지 한 것이오?”
측신이 안색이 새파래지며 말을 했다.
“사실 상제께서는 모르고 계십니다. 힘겹게도 스스로 일을 다 하시려고 하셔서...신하인 제가 이렇게 돕고자 하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지?”
천궁호귀가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오래전..........우리들이 인간들에게 내린 신수의 알을 아실 것입니다. 그 신수의 알을 찾아 없애야 합니다.”
“신수의 알? 그것이 아직도 지상에 있었던가?”
“그렇습니다. 그것이 있어 앞으로 인간세상은 분란이 끊이질 않을 것이라는 상제님의 말씀이 계셨습니다. 해서 그 분은 무리하게 인간으로 환생하시어 홀로 신수의 알을 찾고 계시지요. 헌데!”
모두 무솔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듯 일제히 쳐다봤다.
“제석천과 지부사천대왕, 동추사가 방해를 하고 있습니다.”
“제석천? 지부? 그 둘은 서로 앙숙 아니었나? 게다가...동추사는 상제의 신하면서?”
“그렇습니다. 제석천과 지부는 서로 앙숙임에도 불구하고, 상제의 일을 방해하고 나섰고, 동추사는 상제를 배신했습니다. 그들이 상제의 일을 방해하고 얻게 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무솔의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고, 모여 있는 신의 혼을 가진 사람들은 한 껏 긴장하여 듣고 있었다.
“바로....신수의 알! 그것을 찾아 상제에게 대항하려는 의도가 보입니다. 그러니!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모두는 제법 긴장된 표정으로 있을 뿐 더 말을 하는 자는 없었다.
“그나마 정심왕이 상제를 돕고 있으나 정심왕은....지금 이 나라의 대왕의 자리에 있습니다. 그러니 상제의 일을 돕겠다고 돌아다닐 수도 없으니 제약이 많을 수 밖에 없습니다.”
“정심왕? 그 자가 왜 상제의 일을 돕지? 지하의 신이?”
도당천신이 의아해 물었다.
“그야~과거에나 지하의 신이지요. 지금은 인간들의 왕으로 군림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인간들이 사는 이 세상이 신수에 의해 무너지는 것을 원치 않으니 상제를 돕고 있는 것입니다. 그도 신수의 알을 하루라도 빨리 찾아 없애고 싶어 합니다.”
“...그렇군....그렇다면....나 천궁호귀는 기꺼이 돕겠네. 다만....신의 힘을 되찾으려면 시간이 필요하네.”
“물론 시간이야 드리겠습니다. 또한 돕겠습니다.”
천궁호귀가 나서자 듣고 있던 다른 신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고, 곧 이어 무솔의 말에 동의하여 돕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군!”
화주였다.
화주는 불을 다스리는 신으로 모습이 없음에도 지금은 인간의 모습, 그것도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뭐가 이상하다는 말씀입니까?”
“상제가 왜 직접 신수의 알을 찾으러 왔지? 그리고 왜 쓸데없이 우리를 인간으로 환생시킨 것이지?
그런일을 하려거든 우리들, 신들을 환생시킬 필요까진 없었던 것 아닌가? 그랬다면 지부나, 제석 같은 놈들이 방해할 일도 없었을 텐데! ‘신계재창조계획’이라는 것도 생각해보면 이상한 것 투성이인데, 혹시 신수의 알을 찾기 위해 그런 말도 안 되는 계획으로 우릴 속이려 한 것이 아닌가 말이지.
그리고 지금 저 왕! 왕으로써 인간들을 잘 다스린다고 볼 수도 없는데....신수의 알을 찾아 없애고 싶어 한다고? 내 볼 때....지금의 왕은 오히려 신수의 알을 더 원할 것 같은데? 그런 면에서 보면......상제가 신수의 알을 찾으려는 본래의 의중과 정심왕의 의중이 다를 수도 있지 않느냐....그 말이오?”
‘저 년...뭐야?’
무솔은 침을 꼴깍 삼켰다.
“우리 신들을 ‘신계재창조계획’ 이라는 이유로 인간으로 환생시킨 것은 상제께서 직접 하셔야 할 일에 상제의 자리가 비게 되면, 선계에서 일어날 자잘한 사건들을 처리하지 못하실 까봐 차라리 대부분의 신들을 환생시켜 아예 선계를 비워버린 것이라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심왕은 사실....정치를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라 그렇습니다. 여기저기서 일어나는 반란의 세력들, 그 중 제석천이 이끄는 무리들! 그들 때문에 정심왕은 매일 같이 힘든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북부에는 땅이 울리고, 갈라지는 일이 연이어 벌어지고, 황부는 비가 오지 않으며, 동부는 비가 너무 와서 홍수가 자주 일어납니다. 그래서...”
“그런데 이 판국에 부여를 치고, 읍루를 치러 갔다? 말의 앞뒤가 안 맞는군! 당신 광처사! 무엇을 숨기고 있는 것이오? 일전에 보니 신수 알유와 인간의 껍데기가 아닌 신 본연의 모습 그대로인 이부지신이 정심왕과 함께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 들은 왜 거기 있는 것인가?”
“...도당천신님은 저와 따로 말씀을 더 나누는 것이 좋겠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다 듣는데서 하는 것이 좋겠소?”
무솔이 도당천신에게 은근히 말하자 걸립이 끼어들었다.
“그렇다면 말씀드리지요! 제석과 지부, 동추사는!.........................신수의 알을 이미 네 개나 얻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한 개! 그것은 바리공주 안에 있습니다. 그들은 바리공주 안에 있는 신수의 알까지 모두 얻은 후...상제가 없는 지금의 선계로 가서! 선계를 장악하고! 인간들을 멸할....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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