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모아지는 인연 (4) -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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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개 재위 32년 11월 5일, 광시지방 치령(稚嶺)산맥의 어느 산길.
아롱진 새벽녘. 사내 10명, 여인 2명으로 구성된 무리가, 빠른 속도로 산맥으로 접어드는 좁은 길목을 주파하는 중이었다.
주황색 바탕의 옷차림과, 그들이 지니고 있는 휘어지거나 구불구불한 무기양식에서도 짐짓 느껴졌으나, 그들이 주고받는 언어에서 중앙대륙 출신이 아님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여기부터가 은사국 영토입니다. 이 산맥을 넘으면 목적지인 수도에 15일 내외로 도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Shri(슈리) 투브하(Tubha).”
2명의 여인 중 한 명이 허리를 숙이며, 신분이 무리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내에게 말했다.
그러나 이 말에 대한 반응은, 사내 뒷편의 여인에게서 먼저 나왔다.
“호호, 드디어 밤이슬에 축축이 젖는 생활도 끝이 보이네요. 오라버니.”
“미나야, 아직 지령을 완수한 게 아니다. 임무 수행 중에는 한순간도 긴장을 늦춰서는 안 된다.”
종종 손에 든 지도를 펼쳐보며 걷던 사내가 옆에서 깐죽거리는 여인을 나무랐다.
그러나 미나라 불린 여인은 여전히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에이~, 오라버니께선 걱정도 참 많으셔요! 간혹 달려들었던 산적들도 우리 본국 일개병사만도 못한 어중이떠중이들에 불과해 위협조차 안 됩니다. 푸훕, 대륙에는 고수가 넘쳐난다는 말은 그저 뜬소문이었나 봐요~. 호호호!”
"후우......"
사내는 모처럼 한숨을 푹 쉬었다. 물론 그 이유는 철없이 떠드는 여동생에게도 있었으나, 그래도 가장 큰 원인은 또 다른 여인의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에 있었다.
“정말로... 통역만 아니었으면, 네가 굳이 같이 안와도 됐을 텐데..."
"제 수련의 깊이가 얕은 탓에, 일정이 지체되어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아, 아니다. 나는 그런 의미로 이야기한 게 아니었다, 락미쉬(Lakmish)!"
그는 잘못 전달된 의미를 수습하고자 빠르게 말을 보탰다.
“네가 악착같이 애써서 따라 와주는 덕에 예정과 큰 차이 없었다! 그 부분에 대해서 조금도 신경쓰지 마라.”
이어 투브하는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더니, 고개를 조아린 락미쉬에게 망설이듯 내밀었다.
"며, 며칠만 더 고생하면 되니까... 음... 그... 조, 좀 더 힘내거라!"
"......감사합니다, Shri 투브하."
그게 무슨 정표라도 되는 것처럼, 천 쪼가리를 주고받는 두 사람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나 같은 행위라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감정이 제각각일 수밖에 없는 법.
그들의 괘씸한 모습에, 미나는 곧바로 눈을 흘기고 입술을 빼쭉 거렸다. 또한 그것도 모자라다 싶었는지, 뒤에서 따라오는 일행들을 휑~ 돌아보며 신세한탄을 해댔다.
“에고~ 에고~, 내 님은 어디 계시나요~! 아아~! 사랑에 눈 먼 오라버니는~ 이 친동생이 흘리는 땀방울 따윈 안중에도 없나 봅니다~! 이 가련한 소녀에게 손수건 건넬 남자 어디 없나요~?”
하지만 이러한 그녀의 희망과는 달리, 미나의 초롱초롱한 눈과 마주치는 이들은 한결같이 고개를 휘휘 젓거나 딴청을 피워댔다.
“하하, 미안. 손수건이 없어.”
“흐흐, 소매로 닦으면 되지! 나도 그딴 거 안 키운단다~.”
“손수건? 그건 뭐하는 물건이다냐? 크크크!!!”
“어이쿠, 날씨 한번 우중충하다~. 비가 오려나?”
심지어 어떤 이들은 보유중이던 손수건까지 버리는 시늉까지 했다.
“어이, 슈마! 너 하나 갖고 있지 않았냐? 아까 봤는데?”
“후훗, 아까 뒤 닦아내고 버렸음.”
“야, 손목에 묶은 그건 뭔데? 흐흐흐!”
“잉? 이게 왜 여기 있지? 에라잇~!”
그녀의 심기를 와장창 건드리는 남자 인간들의 반응은, 미나의 눈썹 위쪽에 힘줄 한 가닥을 뿔처럼 솟게 만들었다.
“...우이쒸! 매력이라곤 개미 눈곱만큼도 없는 사내들 같으니라고! 나중에 무릎 꿇고 빌어도 내가 안 받을 테야! 흥!!!”
“아하하하하!”
미나는 자기를 놀리는 재미에 푹 빠진 그들을 향해 소리를 꽥질렀다. 그리곤 가던 방향으로 다시 몸을 홱 돌리며, 심술을 뿡뿡 뿜었다.
그런데 그 분위기를 오래 유지할 수 없었다. 심각해 보이는 투브하의 손짓이 모두를 멈춰세웠기 때문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대략 7장(丈)정도 떨어진 곳. 좁은 길 안팎으로 즐비하게 너부러진 시체들과 나뒹구는 크고 작은 들통들이 있었다.
더불어 바퀴가 완전히 떨어져나가 기울어진 짐마차 3대 역시 미나의 눈에 들어왔다.
방금 전까지 화기애애했던 분위기가 삽시간에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어느새 숨죽인 일행 모두 저마다 무기를 빼내든 행동은 지극히 당연했으며, 이어 투브하의 손짓대로 삼삼오오 나뉘어져 참극이 일어난 장소로 신속하게 이동했다.
- 타다닥. 팟. 팟.
현장의 이곳저곳을 살피던 투브하는, 부서진 수레의 파편으로 짐작되는 나뭇조각을 주워들고 요리조리 관찰했다.
‘...그리 오래되진 않았군.’
그는 작게 살아있는 불씨와 아직 매우 옅게 피어오르고 있는 연기들을 보며 이내 확신했다.
“오라버니~.”
때마침 락미쉬와 함께 주위 시체들의 상태를 파악한 미나가 최대한 낮춘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 끄덕.
눈짓으로 수하들에게 주위경계를 지시한 투브하가 그녀들 가까이에 이르자, 미나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말끔히 잘려나간 흔적, 상당한 고수들에게 당한 모양이에요. 시체강직 정도로 보아 특별히 독을 사용한 게 아니라면 사흘 정도?”
"뭐? 사흘?"
투브하 자신이 조금 전에 살펴본 잔해흔적과 시체들의 상태가 서로 상이했다.
당연하게도 뭔가 크게 잘못됐음을 직감한 그가, 일행들을 향해 소리치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서, 서둘러 이탈한다! 어서!!!”
하지만 그와 동시에 산중턱에서부터 수백 개의 화살들이 연이어 쏟아지기 시작했다.
- 푸슈슈슈슉!!!
“크핫!”
“습격이다!”
"피, 피해!"
그나마 적들이 넓은 범위로 겨냥해온 까닭에, 투브하 무리는 비록 앞뒤로 나아가진 못했어도, 그들의 뛰어난 신법과 무위로써 대부분 피하거나 막아낼 수 있었다.
“지금이다! 수레를 이용해 막아!”
투브하는 궁수들이 화살을 재장전하고 있는지 화살세례가 조금 줄어든 틈을 이용해 명령했다.
이에 그의 수하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쓰러져있는 큰 짐마차를 서둘러 기울이거나 높게 들어 방패로 삼았다.
그리곤 다시금 화살들이 거세게 빗발치자, 서로 등 뒤를 막아주고자 눈치껏 마차를 서서히 움직여 한데 뭉쳤다.
- 후두두두둑!
부서진 짐마차에 파고드는 화살소리가 정신까지 어지럽게 울려 댔다.
“제기랄! 이게 무슨! 다들 괜찮나?”
“예! Shri 투브하!”
“이놈들 예사 산적들이 아닌 것 같습니다. 쏟아 붓는 간격이 굉장히 빨라요!”
“아오, 맙소사! 비가 올 거라 예상했는데, 화살이 비처럼 내릴 줄이야!”
“지금 입에서 농담이 나오는 걸 보니 꽤나 멀쩡한 것 같군.”
“이깟 화살정도에 부상을 입으면, 총단에서 정예로 발탁된 자로써 체면이 안서지 않겠습니까? 크흐흐흐!”
수하들의 양호한 상태를 재확인한 투브하는, 화살이 빗발치는 사이사이에 재주껏 정황을 살폈다.
‘200? 아니, 넉넉히 300명은 되겠군. 제법 뛰어나긴 하나 기량은 우리에게 크게 못 미친다. 흠... 뭉쳐 방어하기 시작한 뒤로 저놈들이 쏘아대는 간격이 확연히 줄었지만, 개인이 지니고 다닐 수 있는 화살에는 엄연히 한계가 있을 터. 지금은 인내해야 할 때다.’
승산을 판단한 그는, 부하들을 향해 지시를 내렸다.
“조금만 더 버텨라! 때가 되면 9명씩 나뉘어 일제히 저들을 칠 것이다! 각자 15명 이상 목을 쳐내고 나한테 확인받도록!”
“하하, 근데 그냥 다 죽이면 저놈들 정체를 알 수 없으니, 한두 놈씩은 남겨둘까요?”
투브하는 어느 수하의 의견에 고개를 긍정적으로 끄덕이며 말했다.
“음, 그래... 어쩌면 이전 사절단을 공격한 놈들과 관련 있을지 모르지. ...좋다! 슈마, 그 일은 네게 맡기겠다.”
“네! 맡겨만 주십쇼! Shri 투브하!”
전투에 매우 익숙해 보이는 이들의 얼굴에선, 이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여유로움까지 보였다.
하지만 운명은 그들의 막연한 희망과는 다르게 흘러가는 듯, 여유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헛?!!! 빠, 빠르다!’
역시 기척을 먼저 알아챈 건, 이들 중 가장 강한 투브하였다.
다른 이들도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들이 웅크리고 있는 이곳을 중심으로 에워싸고 있는 다른 적들이 있음을 눈치 챘다.
‘30여명정도인가? ...헉, 저것들의 정체가 뭐지?! 저들 하나하나의 기량이 모두 나와 견줄 수 있을 정도다!’
- 후두두두두둑!!!
투브하가 난처해진 이 상황에서 빠져나갈 방도를 물색하는 가운데, 매정한 화살들이 두세 차례 더 쏟아졌다.
'부딪쳤다간 전멸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차라리 전원 산개했다가 산맥너머 마을에서 합류하는 편이 생존에 더... 흠?!'
점점 여기저기 구멍이 뚫리기 시작한 짐마차를 보며, 그는 후퇴하는 쪽으로 이내 마음을 굳힐 때였다.
- 쉬이익~, 퉁~퉁~.
- 데구르르르......
결과적으로 투브하는 수하들에게 명령을 내리지 못했다.
그와 그의 부하들 대부분이 화살들을 막아내느라 정신이 팔린 사이, 또 화살과 마차가 부딪치며 발생한 둔탁한 소음에 묻힌 사이, 어느 샌가 그들의 발밑으로 유유히 굴러들어온 연막탄이 바로 그 원인이었다.
- 피슈~, 푸스스스스......
시야를 자욱하게 방해하며 피어오른 연기는 상상 이상으로 치명적이었다.
“쿨럭. 쿨럭. 켁!”
“엌, 이.. 이거 뭐야? 도, 독?!”
“여튼 단순한 연막탄이 아니야. 숨을 깊게 쉬지 마!”
“커헉... 제, 젠장할!!!”
“아, 안 돼! 자리를 유지해! 화살이 또 들이친다!”
“이... 비열한... 새ㄲ.... 쿨럭.”
급히 숨을 참거나 소매로 코와 입을 가리는 이도 있었고, 이미 중독되어 입에서 피가 조금씩 흘러나오는 이들도 있었다.
그래도 내공과 육체가 강건한 그들이었기 때문에, 짙게 몰려오는 고통에 부들부들 떨면서도 마차를 결코 내려놓진 않았다.
‘커헉...지금껏 서역의 사갈독분(蛇蝎毒粉)이 최고라 여겼는데, 대륙에 그것을 능가하는 독이 존재했군! 더는 방법이 없어.'
투브하는 주위를 살피며 여인들을 찾았다. 이미 바닥에 쓰러져 눈, 코, 입에서 피를 한 웅큼 쏟아낸 락미쉬가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여기서... 이대로 끝이란 말인가?!'
그는 잠시 눈시울을 붉혔다가 돌연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자신이 가슴에 담았던 그녀가 벌써 삶을 달리했다는 사실을 담담히 인정한 것이었다.
'허나... 여기까지 와서 순순히 포기하기도 억울하지.'
급박한 상황 속에서 정신을 냉철하게 차린 그는, 내력을 힘겹게 끌어올리며 독에 저항하는 미나를 발견해냈다.
“미나야, 이제 우리들 중에 대륙어를 조금이라도 할 줄 아는 사람은 너 밖에 없다.”
“응?”
중독되는 것을 막으려 온정신을 쏟고 있던 미나는, 오라버니가 자신에게 무어라 중얼거리자, 곧바로 그가 있는 곳으로 기듯이 옮겨와 한쪽 귀를 돌렸다.
그런 그녀를 향해 투브하는 손바닥보다 작은 옥합을 꺼내 보이며 말을 이었다.
“...잘 들어라. 이후 너는 남쪽으로 향하거라.”
“오라버니... 지금 뭐라고...”
"이 ‘청화공정’을 세아공주께 꼭 전해야 한다."
"뭐? ...서, 설마?!!!"
그제야 오라버니의 의중을 파악한 미나가 반항하려 했다.
- 퍽!
"읏."
허나 이를 예상한 투브하가 순식간에 그녀의 기혈을 제압하여 혼절시켜버렸다.
축 늘어졌던 미나를 가지런히 눕힌 투브하는, 옥합에 들었던 단약 두 알 중 하나를 꺼내어, 그녀의 입에 서둘러 물려 넣었다.
그리곤 어느새 피부가 검게 변질된 락미쉬의 시체를 끌어오더니, 동생의 얼굴과 드러난 다른 피부가 잘 보이지 않게 겹쳐서 가려놓았다.
“흐흐, 그거로는 조금 부족해 보이는군요.”
지금까지 투브하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던 슈마라는 사내가, 락미쉬의 눈을 살며시 감겨주었다.
이어서 그는 자신의 손목에 묶여 있던 손수건을 풀어 펼쳐서 그녀의 얼굴 위에 살포시 올리곤, 투브하를 향해 피식 웃어 보였다.
“쳇, 원래는 나중에 미나가 땀 닦을 때 쓰려했는데, 이렇게 형수님께 선물하고 나니 솔직히 아깝습니다.”
“뭐?! 형수?!!! 크크크, 슈마! 난 너 같은 놈을 가족으로 받아들인 기억이 없다!”
투브하가 으레 발끈하는 사이, 또 다른 사내가 같이 마차를 짊어진 이에게 눈짓하여 자리를 조금 고쳐 앉았다.
아마도 여차하면 그대로 마차를 미나 위로 덮어서 떨어지는 화살을 막아낼 요량 같았다.
“어잇차~, 그럼 저는 어떻습니까? Shri 투브하.”
이것을 기점으로 다른 수하들 역시 저마다 한 마디씩을 툭툭 던졌다.
“쿨럭... 쿨럭.. 저 놈보다는 제가 훨씬 잘 생겼으니... 쿨럭...”
"개뿔, 솔직히 너보단 내가 더 낫지!"
“아, 이 난리에 농담이라니 다들 제정신이 아니군! 안 그렇습니까? 매형! 으핫핫핫!”
투브하는 내장이 썩어 들어가는 듯한 고통 속에 코와 입에서 피가 줄줄 새고 있음에도, 이렇듯 끈질기게 버텨주는 수하들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큭큭. 시끄럽다, 이놈들아! 우리는 북쪽으로 이동하며 눈에 보이는 놈들을 칠 것이다. 허나 명심해라! 여기서 가능한 멀리 떨어지는 것이, 적의 목을 치는 것보다 최우선임을! 마지막 명령이니까 끝까지 최선을 다하도록... 커흑... 퉷!”
여기까지 말한 후 끓어오른 검은 피를 한 모금 탁 뱉어낸 투브하는, 금방이라도 튀어나갈 자세를 잡았다.
그런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불현듯 고개만 살짝 뒤로 돌려 그의 듬직한 수하들을 바라보았다.
“마지막까지 내 뒤에 붙어 있는 놈은, 다음 생애에 반드시 매제로 삼아 주겠다!”
“옙!!! Shri 투브하!!!”
"가자!"
......참 유난히도 흐린 날이었다.
- 작가의말
다음 편은 내일 오전 10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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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hri('슈리' 또는 '스리')
: 인도에서 사용되는 존칭. 보통 남성이 정부 고위급 인사의 경우에 사용하며, 성명 앞에 붙임.
본 소설에서도 이를 차용하여 설정상 서역에서 통용되는 매우 높은 존칭의 의미로 사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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