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만개일화(滿開一花) (3)
“어? 이게 뭡니까? 구 대인?”
“에... 보물의 열쇠 같은 거라오. 가서 이거랑 딱 맞는 걸 찾으시오.”
“아,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다시금 간곡히 부탁하건데 꼭...”
이번엔 구선웅이 아쉬운 표정이 되어 말문을 열었고, 강도진은 그와의 약조를 줄줄 읆으며 확신을 줬다.
“지시하신대로 추적을 따돌리며 숨어 지내되, 사흘 후 약속장소에 미시초(未時初)까지 구 대인이 나타나지지 않으면 나흘 후 국경 근처에서 만나자. 맞지요?”
“하하, 맞소. 그리고 또...”
“세상을 달리하신 친우 분의 소중한 보물엔, 흠집도 안 나게끔 각별히 조심할 테니 걱정 마십쇼! 하하하!”
“...아무쪼록 내 잘 좀 부탁하리다.”
“예, 예~.”
의기양양한 강도진의 모습은, 구선웅의 눈앞에서 엷은 바람소리와 아울러진 뒤 감쪽같이 자취를 감췄다.
- 휘이익~.
“허허, 누가 화정옥녀의 사형 아니랄까봐 아주 귀신같구먼. 그래, 잘 됐어. 다 잘 된 거야. 그 무공만큼 덕망 또한 높기로 유명한 이서백옹의 수제자라면 인성도 그럭저럭 괜찮을 테지. 마음 편히 맡겨도 되겠어.”
어느새 침침한 숲속에서 걸어 나오던 손우빈이, 밤하늘을 촉촉하게 바라보며 중얼거리는 구선웅을 향해 물음을 던졌다.
“어? 숙부님, 강 대협은 벌써 가신 건가요? 또 누이는요?”
“그래, 강 대협은 방금 막 출발했고, 네 누이는 우리가 잠입할 장소 주변을 살피러 아까 먼저 갔다. 그나저나 상치 놈은?”
이에 손우빈은 일련의 몸동작까지 곁들어 대답해줬다.
“죽어도 같이 못가겠다고 끝까지 버티기에 적당한 곳에 묶어두고 왔습니다. 만약을 대비해 어혈이랑 혈도도 이래이래 꾹꾹 눌러놨으니, 내일 아침까진 문제없습니다.”
“좋아, 잘해줬구나. 그럼 이제 강 대협이 북문을 어지럽히는 일만 기다리면 되겠군. 탁 대감이 돌아오기 전에 일을 치르려면 적어도 한 시진 안에는 시작해줘야 할 텐데...”
구선웅의 말끝머리에선, 임무실패에 대한 은근한 걱정이 스며나왔다.
“흐흐, 걱정 마세요. 강대협이 가셨으니 길어봐야 반각이면 기별이 올 겁니다.”
그는 조카 녀석이 자신을 샌님이라 놀리는 줄로 오해하고, 손우빈에게 툴툴거렸다.
"에이~, 욘석아! 남문에서 북문으로 가는 거리만 해도 그게 얼만데... 너 내가 무공을 잘 모른다고 해서, 너무 얕잡아 보지 마라."
"히히, 숙부님도 참. 제가 언제 그랬다고요."
"쨔샤, 사실 강 대협이 북천문의 수제자라고 하니까 내가 홀로 보낸 거였지. 막상 다른 사람 같았으면, 애초에 이런 계획을 세우지도 않았다!"
"흐흐, 그렇죠. 저도 그러셨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솔직히 진짜 염려스럽다. 내가 중추원에 있을 때만 해도, 너희가 명경이라 일컫는 고수를 탁 대감이 3명씩이나 수하로 부리고 있었...”
“명경의 고수가 3명이요?”
손우빈의 당혹감을 다른 식으로 인지한 구선웅이 갑갑한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았다.
“그래! 아무리 ‘큰 성읍마다 툭하면 채이는 게 무림인이다’라고 하는 은사국에서도, 결코 흔하지 않다는 그런 고수를 무려 3명씩이나 말이다! 더욱이 지금은 지킬 재산이 더욱 많아졌으니, 그때보다 호위를 더 보강을 했을 것이 불 보듯 뻔한데...”
“푸훕!”
조카놈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음을 뿜어대자, 구선웅의 배알이 살살 꼬였다.
“아니, 이 녀석아! 이 숙부는 젊은 사람을 사지에 던져놓은 것 같아서, 마음이 이렇게나 심란한데 뭘 그리 웃어!”
“푸하하하!!! 웃음이 터질 수밖에요! 숙부님께서 강 대협의 무위를 심하게 과소평가하고 계시는데, 어찌 안 웃겠습니까?!”
“응?”
손우빈은 무공에 대해서 문외한인 숙부를 위해, 적절한 표현을 찾으려 노력했다.
“흐흐, 숙부님~. 그러니까... 강 대협은 말이죠. 음... 뭐랄까... 아! 쉽게 말해서 강 대협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곤, 고작 2명밖에 손꼽을 수 없는 그런 고수이십니다!”
“뭐? 은사국에서 겨우 두 사람? 허허, 그 사람이 그리 고강하다고?”
구선웅의 오류를 손우빈이 즉각 지적했다.
“아니요, 틀리셨습니다.”
“?”
“은사국이 아니라, 천하입니다!”
손우빈의 말에 구선웅의 코에선, 실로 콧방귀만 빵빵 새어나왔다.
“캬~, 이놈이 끝까지 사기를 치네! 그런 중요 인물이라면! 국내외 기밀정보를 아우르는 부서에 있었던 이 숙부님이 모를 리 없지!!!”
“당연히 모르시겠죠! 강 대협이 하산한지, 서너 달도 채 안 됐으니까요!!!”
“...저, 정말이냐?”
이쯤되고 나니, 신나게 따박따박 대답해주던 손우빈도 가슴이 갑갑해졌다.
“아휴, 누가 들으면 이 착한 조카가 숙부님한테 허구한 날 사기쳐온 줄 알겠습니다! 그리 정 못미더우시면 어머니께 직접 물어보세요! 저희 부모님께선 그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론, 언제나 사위감 0순위에 강 대협을 올려놓고 계시니까요!”
충격의 정도가 남달랐던 것일까? 돌연 구선웅의 이마에 식은땀이 새벽이슬처럼 알알이 맺히기 시작했다.
“...연희가 그 사내를 사위로 점찍었다고? ...진짜로?”
“예입! 부모님께오선 전설적인 조화경에 이르신, 천하에 둘도 없는 ‘젊은 총각‘ 고수를 꼬옥~ 사위삼고 싶다하시며, 매일같이 이른 새벽에 정화수(井華水) 한 그릇 떠 놓곤 간절히 빌고 계시옵니다!”
"뭐?! 매일같이?!"
이 말이 끝맺혀지기가 무섭게, 구선웅의 얼굴에선 핏기가 싹 사라졌다.
“....우, 우빈아! 강대협한테 다시 좀 오라고 해라! 어서!”
“네?”
“시간 없어! 당장!”
“왜... 이제 와서...”
“그 뭐냐... 무림인들은 서로 멀리 떨어졌어도 이야기할 수 있는 기술이 있다며! 그걸로 좀 불러봐봐! 어서!”
“아니, 마음먹고 숨은 전설적인 고수를 제가 어떻게 알고 찾아요!”
손우빈이 덩달아 짜증을 버럭 내긴 했지만, 한편으론 사약을 코앞에 둔 죄인과 같은 구선웅의 모습이 영 마음 쓰였다.
“으으, 안 돼!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대로는 네 어미가 날 죽이려 할게야!”
“숙부님, 갑자기 밑도 끝도 없이 도대체 왜 이러세요?”
"아 글쎄 나중에 답해줄테니까, 우선 쫌 찾으..."
그때였다.
- 꽝-! 꽝!!!!
- 쿠앙! 콰과광!!!!
- 피유웅~ 펑! 퍼버펑!!!
북쪽에서 시뻘건 불꽃이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밤하늘을 수놓는 불빛의 크기로 미루어 볼 적에, 적어도 수십 관의 화약을 연달아 터트린 것 같았다.
'뭐야, 벌써 당도했다...고?!'
나름 장관이라고 할 수 있는 이 풍경을 바라보는 구선웅은, 뒤통수를 망치로 얻어맞은 것처럼 얼마간 말을 잇지 못하고 멍하니 서있었다.
* * * * *
‘오우~, 역시 폭죽이랑은 전혀 다르구나! 한 군데에 몰아놓고 불 댕겼으면, 진짜 줄초상 치렀겠는걸! 프흐흐흐!’
역시나 쉼 없는 폭발은 강도진으로부터 비롯되고 있었다. 그가 지나친 창고지붕마다, 굉음을 머금은 불기둥들이 밤하늘로 험하게 뿜어졌다.
'크하하핫!'
미친 짓을 산뜻하게 즐기는 그의 모습엔, 황당하게도 아련한 그의 어린 시절이 투영되어져 있었다.
- 피유우우우~ 퍼퍼펑!
혼인과 같은 온 마을의 경사.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타타타타닥' 경쾌하게 터져 오르던 폭죽들.
그리고 그 호쾌한 야경을 두 눈에 하롱하롱 담았던 꼬마 아이.
'음하하하! 신에게는 아직 열두 관의 화탄이 남았나이다!'
탁 대감댁 화약고의 가득 정제된 폭약들은, 이제는 성년이된 꼬마의 환상을 흡족히 채워주기에 더없이 풍족했다.
- 콰과과과과과광-!
그렇게 대궐 북쪽 대부분의 창고들이 불타오르는데는 일각도 지나지 않았다.
'어따~, 높기도 하다! 가까이서 올려다 볼수록 굉장하구나! 도대체 몇 층이나 되는 거야?'
대궐집이 발칵 뒤집혀 모든 이가 혼비백산하는 사이, 꿈을 이룬 강도진은 낮에 눈여겨 보아두었던 고층 누각 근처로 옮겨와 감탄했다.
‘응? 예순 여덟, 예순 아홉... 일흔... 여든... 흐음... 히야~, 조금 뒤에서 달려오는 놈들까지 합하면 100명에서 딱 3놈 빠지네.'
몰래 잠입해야 하는 누각을 중심으로 각 입구마다 두터워지는 경비는, 강도진의 입장에선 굉장히 거슬릴 수 밖에 없었다.
'우이쒸, 한가락 하는 녀석들은 싹 다 여기로 몰려오는군! 저것들은 속히 불 끄러 다닐 생각은 안하고... 쩝... 다른 창고에 있는 것들보다 여기 누각에 넣어둔 보물이 그렇게나 비싼가?’
강도진은 경공술을 쓰기로 결심했다. 귀찮은 관계로 복면을 두고 왔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자기보다 약한 사람들을 다짜고짜 두들기는 선택지가 마음 내키지 않았던 것이었다.
- 쉭-! 쉭-! 쉭-!
그가 발을 디딜 때마다 모기가 앵앵거리는 것보다 경미하게 바람이 일었다.
'어? 누가... 있어?'
단숨에 오르려던 강도진은, 목적지인 누각 꼭대기에서 사람 기척 하나를 느끼곤 나선 방향으로 짧게 짧게 돌았다.
- 스스슥.
그는 고리가 걸리지 않은 창문을 찾아 소리 없이 열고 숨어들었다.
‘우오오오......’
강도진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보다 정확하게는 꼭대기 층에서 창문 밖을 살피는 여인을 보며 넋을 놓았다고 표현하는 편이 옳았다.
그녀의 자태는 마치 차디찬 칼바람과 서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끝끝내 맑은 꽃과 향을 피워내는 설화를 닮아 있었다.
또한 몸에 걸친 비단옷보다 더욱 새하얀 그녀의 고운 맵시는 강도진의 마음에 은은하게 내려앉으며, 이를 지켜보는 그의 사고를 얼마간 마비시켰다.
- 끼릭.
“이크...”
강도진이 멍 때리다가 실수로 잘못 짚은 걸상이, 바닥을 지익 긁으며 싫은 소리를 냈다.
“거, 거기 누구십니까?”
- 파팟!
깜짝 놀라 돌아보는 여인의 시야에서 반사적으로 사라진 강도진의 몸뚱이와 달리, 그의 마음은 지금도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벌렁거렸다.
‘햐~ 목소리도 정말 청아하네. 큼직한 성읍 기루의 한껏 꾸민 여인들조차도 이 여인에겐 감히 비할 수 없구나.’
그러나 그는 마냥 헤벌레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어서 나오십시오! 안 그럼 소리를 질러 사람을 부르겠습니다!”
“......”
“...셋을 세겠습니다. 하나... 두울...”
“아아, 진정하시오! 낭자.”
강도진은 천장에서 내려와 그녀 앞에 섰다. 그것은 자칫 일이 귀찮게 커질 수 있겠다는 염려 때문이었다.
“...대감의 수하로는 보이지 않네요. 지금 바깥 소란의 원인이신 듯한데... 누구신지요?”
“험험, 내 낭자에게 해를 끼칠 생각은 전혀 없소이다. 그저 물건 하나를 찾으러 온 사람일 뿐이오.”
“......”
강도진의 시커먼 옷차림부터가 수상쩍은 그녀의 눈엔, 경계심만 가득해 보였다.
더욱이 그가 그녀의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고 더듬더듬 말하는 모양새는, 그녀의 의심을 눈덩이처럼 불렸다.
“이 나라에서 한 손으로 꼽을 수 있는 세력가의 집에 물건을 훔치러 오시다니, 도둑치고 담이 무척 크신 분이시군요.”
“후, 훔치는 게 아니오! 억울하게 빼앗긴 보, 본래 주인에게 돌려주려는 것뿐이오!”
“불쑥 방에 침입한 밤손님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니 당장 여기서 나가주세요.”
꿈에서나 그려보았을 미인에게 한낱 좀도둑 취급을 받자, 강도진은 구선웅이 손에 쥐어줬던 옥으로 된 작은 막대기를 다급하게 꺼내 보였다.
“진짜 거짓말이 아니오! 여기, 여기! 이게 그 즈, 증거요! 이게 그 보물의 열쇠라고 하더이다!”
“......”
그것을 응시하는 여인의 눈가가 살짝 떨렸다.
“...구선웅 아저씨께선 무탈하신가요?”
“네. 물론... 음? 낭자, 구 대인을 아시오?”
강도진의 말을 들었는지 말았는지, 아리따운 여인은 그에게 물음을 이어갔다.
“혹시 아저씨가 찾아오라고 부탁한 보물이란 건, 능청운이란 분의 소유가 맞나요?”
“...맞소.”
“옥합 하나를 찾으라 하셨지요?”
“...그것도 맞소. 아니, 근데 낭자가 그런 것들을 어찌 다 알고 있는 겁니까?”
그녀는 그의 물음에도 말없이 미소 짓더니, 뒤쪽에 있던 수납장으로 가서 손수건으로 감싼 무언가를 꺼내왔다.
그리고는 손수건을 끌러 그 안에서 조그마한 옥을 하나 꺼내 도진의 것과 맞춰보았다.
“아... 아저씨도 어찌하지 못하는 일이라 여기고 있었는데... 이번에도 결코 약속을 어기지 않으셨네요.”
여인이 반 토막 난 비녀를 양 손에 고이 쥐고 물끄러미 내려다 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리자, 상황판단이 아직 덜 된 강도진이 그녀에게 조심히 말을 붙였다.
“......저기...... 저... 낭...자?”
“아, 실례가 많았습니다! 저를 구하러 와주신 은인께 인사 올립니다. 소녀 능소옥(綾素玉)이라 하옵니다.”
확실히 그녀는 혹자의 관점에 따라선 돈으로도 살 수 없는 보물임에 틀림없었다.
* 누각을 오르는 강도진.
- 작가의말
주말 내내 피곤 속에 흐느적 대느라... 한자 오류와 퇴고를 못 했네요. 이따가 퇴근 후에 다음 화를 예약하고 나서 수정작업을 진행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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