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장 귀마회(鬼魔會) (5)
* * * * *
굽이진 강가 근처의 들판.
어느덧 태양이 붉은 석양 되어 산등성이와 맞닿고 있었다. 하양과 노랑의 아기자기 야생화들과, 나머지 배경을 가득 채운 푸른 들풀들은 오늘과의 헤어짐을 노래하려 운치 있게 준비하는 것처럼 보였다.
- 캉! 까깡!
하지만 대략 1천 개의 무기들이 쉼 없이 춤추며 흩뿌리는 혈흔에 짓밟혀진 그들은, 전날과 같이 평화로운 안녕을 더 이상 누리지 못했다.
- 트득, 퉁! 턱!
- 붕~, 붕~, 스각!
“...으윽!”
“아악!”
일천에 가까운 인원들이 한 치의 물러남 없이 어지러이 뒤엉켜 진땀나는 사투를 벌였다. 그러나 고통에 반사적으로 흘러나온 작은 신음 외엔 그 누구의 입에서도 다른 소리가 튀어나오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이 끝을 알 수 없는 집단전투에서 눈앞 상대 외에 앞뒤좌우 상황에 신경을 집중하기 위함이었고, 가급적 안정된 호흡을 유지하여 체력소모를 줄이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상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회주 또는 수뇌부들 추천으로 영입된 고수나 소회주들이 후계자로 간택한 인물과 같이 극히 드문 경우를 제외하면, 오랫동안 훈련과 실전임무를 함께한 서로의 수법을 모를 리 없었기에, 작은 움직임까지 눈여기며 허초와 살초를 구분 짓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 쿠콰곽-!
“크아악..!!!”
사나운 맹수들의 강함에도 서열이 구분되는 것처럼, 바짝 날을 세운 명경급 전문살수들을 유린하며 전 방위로 활약하는 두 사람이 있었다. 그 중 옆머리가 희끗한 중년인은 강을 뒤로하여 수세에 몰린 형세를 보곤, 자신보단 젊어 뵈는 다른 이에게 걱정스러운 전음을 날렸다.
「 흐음, 좋지 않군. 」
「 하하, 류 선배님. 옛날 같지 않으시군요! 연세를 생각하시고 쉬엄쉬엄하십쇼. 읏차! 」
「 망할 녀석, 어찌 보면 집안에서 가족끼리 칼부림하는 꼴이거늘. 명세기 소회주라는 녀석이... 」
「 제 편에 서지 않고 칼 겨눈 놈을 가족이라 할 순 없잖습니까? 하하하, 그리고 거짓정보에 놀아나 궁지에 몰린 우리처지부터 챙기십시다! 지금 숫자가 엇비슷해서 버티는 거지, 왕진학이 추가 지원 끌고 와서 출수하면 그대로 밀릴 겁니다. 」
「 쯧! 하긴... 잠시 후 더 어둑어둑해지면 일단 수하들을 물리고 퇴각하자. 진세연 소회주와 합류해야만 왕진학을 꺾을 승산이 있으니까. 」
「 그러시죠~. 뭐 그럼 해질 때까진 아직 팔팔하게 젊은 제가 저것들 숫자 좀 확실하게 줄이겠습니다! 어잇차~! 」
한때 수하였던 인간의 머리를 관통시킨 류성우의 푸른 강기가, 심광천의 비아냥거림에 더욱 맹렬해지며 다른 적의 심장을 꿰뚫었다.
「 썩을 놈아! 네놈도 올해 지나면 불혹이야! 」
「 아~, 이거 섭섭하네. 어째서 진세연은 소회주고, 나는 왜 놈입니까? 아직 같은 급인데... 」
「 그야 네놈이 나보다 하수니까. 」
「 와... 그동안 연배생각해서 봐줬더니... 이 일 끝나면 제대로 한번 뜹시다! 」
「 후후, 얼마든지 받아주마! 우선 여기서 살아남기나 해라~, 애송아! 」
「 치! 걱정 붙들어 매십쇼~. 늙다리 선배님보단 오래 살라니깐! 」
- 뿌~우~우~!
그때 강 건너편에서 뿔나팔 소리가 깊이 울려 퍼졌다. 상대적으로 신경을 많이 주지 않았던 강물에 이목을 돌려보니, 일정한 간격으로 길게 건너오는 조그만 나룻배 칠십여 척이 보였다.
“?!”
심광천은 그 안에 사람이 타고 있지 않아 의아했지만, 류성우는 공기에 섞인 퀴퀴한 유황 냄새를 맡고 아차 싶었다.
- 피이잉~. 팍. 팍. 팍.
- 화르르르르르...
뿔나팔을 신호로 곳곳에서 날아온 불붙은 화살들이 나룻배에 적중되었다. 기름도 적절히 섞었었는지 순식간에 활활 타오르기 시작한 배들은 주위를 대낮같이 환하게 비췄다.
“와아아아아아!!!”
- 다그닥. 다그닥.
“하아... 이런 니미 씨......”
선두에서 말을 타고 달려오는 왕진학과 그 뒤에 3백 명의 휘하들을 본 심광천의 입에서 쌍욕이 흘러나왔다. 이제 수적으로도, 무력으로도, 지형적으로도 불리함이 자명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렇게나 밝으면 철수를 지시해봤자 수하들의 생존을 장담할 수도 없기에, 그는 상황이 더욱 암울하게 느껴졌다.
“크하하하하하!”
반면 울며 겨자 먹는 격으로 부하들을 한데 뭉치고 있는 류성우와 심광천을 바라보는 왕진학은, 하늘이 떠나가라 쩌렁쩌렁 웃으며 아랫것들에게 포위진을 명령했다.
“한 놈도 놓치지 마라! 결코 후환을 남겨선 안 된다!”
* * * * *
작은 언덕 위. 진세연이 별나게 환한 강가를 가리켰다.
“저쪽입니다. 저기에 다들 모여 있네요.”
“그렇군요. 서두릅시다.”
“저... 잠시만...”
서둘러 신형을 날리고자 돌아서던 강도진은, 자신의 팔소매를 살포시 붙잡는 진세연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
“마지막으로 여쭙겠습니다. 정녕 하시고자 하시옵니까?”
모호한 질문에 담긴 의미를 아는 강도진은 대답대신 무거운 고갯짓으로 답변을 대신했다.
- 끄덕.
“저곳에 당도하는 순간부턴 돌이키실 수 없습니다. 그만두시려거든 지금입니다.”
“......솔직히 내키지 않는 게 사실이오. 사부님께서 이 일을 아시게 되면... 단순히 파문되는 정도론 끝나지 않겠지. 허나 내 입으로 내뱉은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하지 않겠소?”
“저는 아직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제겐 오라버니요, 가족이라지만......”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보복을 위해 더러는 깎아내리고, 더러는 죽이며, 꼬꼬마시절부터 이기적인 선택을 반복하여 단 한 번도 사람을 신뢰해본 적 없는 진세연으로써는 강도진의 행동 자체가 의문덩어리였다.
“음... 굳이 표현하자면 찜찜하기 때문이오.”
“......?”
눈동자에 물음표만 띄우는 그녀를 위해, 강도진은 뒷머리를 박박 긁적이며 설명을 보태줬다.
“에... 숨넘어가는 이의 간절한 유언을 무시하면... 나중에 천벌 받을 거 같아서...랄까?”
“......푸훕.”
강도진의 표정에서 얼빵한 시골청년과 같은 느낌을 받은 진세연은 고개 숙여 아주 작게 웃었다. 그리고는 다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약속... 꼭... 지키셔야합니다.”
“그대야말로 나와의 약조를 반드시 이행해야 할 것이외다. 혹여 다른 꿍꿍이나 수작을 부린다면... 단언하건대 정말로 가만두지 않을 것이오.”
“명심하겠습니다.”
할 이야기 다 끝났다고 생각한 강도진이었으나, 여전히 그녀는 그의 소맷자락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뭐가 더 남았소?”
“아직 때가 되지 않았습니다.”
“어... 음... 지금 저쪽은 충분히 위기에 처했다라고 생각되오만?”
“저희는 각각 개별전투에 익숙하지만, 이런 세 자리 단위의 집단전은 경험이 부족합니다. 왕진학 저자가 어떻게 처신하는지에 따라 판단하여 난입해도 늦지 않습니다.”
“흐음... 그래도... 중상자가 상당히 나오기 시작하는 거 같은데......”
“아니오. 아직입니다.”
“......”
전상(全象)을 쏘아보는 진세연의 눈빛은 강도진을 대할 때처럼 따뜻하지 않았다.
* * * * *
활로를 뚫기 위한 류성우와 심광천의 노력이 처절했다.
“퇴각하라! 퇴각! 내 뒤를 따르라!”
“좌측! 좌측이다! 전원 공격!”
살기 위한 본능이 찌릿하게 자극된 탓일까? 아직 견고해지지 않은 왼쪽 포위망을 노리는 그들과 그들의 수하들의 움직임은, 이리저리 꼬이는 난투 속에서도 전진의 전진을 거듭하며 멈출 줄을 몰랐다.
- 스각!
“끄아아아아!”
하지만 내분을 종식시키고자하는 왕진학이 친히 뛰어들어 대형 유엽도(柳葉刀)를 휘두르며 이 기세를 짓눌러왔다.
「 선배님! 」
- 끄덕.
류성우와 심광천은 이미 몇몇을 반신불수로 만들어버린 그를 보곤 눈빛으로 의견을 합치했다.
- 타앗!
심광천이 선제공격에서 이점을 챙기고자 먼저 몸을 날렸다. 오늘 하루 이미 피로 흥건히 젖은 환수도(環首刀) 두 자루였지만, 여전히 피에 굶주린 야수처럼 왕진학의 목덜미를 물어뜯으려했다.
- 치이이이잉~! 카강!
대각선으로 비스듬히 세운 유엽도에서 싫은 쇳소리가 불꽃처럼 튀었다. 이미 공격을 알아채고 자세를 낮추며 일부러 아슬아슬하게 막아낸 왕진학은, 심광천의 무기를 튕겨냄과 동시에 그의 오른팔을 잘라낼 생각으로 도신을 회전시켜 둥글게 선을 그었다.
- 팡!
그러나 잇따라 출수한 류성우가 뿜어낸 장력이 방해가 되어, 고작 살점만 조금 베어내는 수준에 그쳤다.
“제길!”
호기를 놓친 왕진학은 아쉬움으로 입맛을 다시며 뒤로 10여장의 거리를 벌렸다. 이에 놓칠 세라 류성우와 심광천이 그의 동선을 추격했다.
- 퍼벅! 퉁~! 깡! 깡!
한 치의 양보 없는 세 명의 격돌은 점점 거세지며 어느새 이백여 합이 넘어가기 시작했다. 물론 이 사이 퇴로는 봉쇄되어 완벽히 포위되어 버렸다.
현재 대치중인 포위된 자들과 포위한 자들은 모두 곁눈질로 최고 지도자들의 살피며, 각자 자신들이 선택한 주군이 어서 이겨주길 바랬다. 이 대결의 결과에 따라 판세가 완전히 뒤집어질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이었다.
‘쳇! 역시나 버겁군. 하는 수 없지.’
왕진학은 묵경을 코앞에 둔 소회주 둘을, 더군다나 자신의 무공에 훤한 이들을 통상적인 수법으로 계속 상대한다면, 앞으로 일백여 합은 더 섞어야 우위를 점할 수 있을 것이란 결론이 섰다.
그렇게 그가 결심을 굳히자, 갑자기 무기 들린 그의 손에서부터 새카만 기운이 나돌았다.
『 현궁뇌정 참백귀혼(斬白鬼魂) 제 삼(三)식 선무구혼(仙舞拘魂). 』
- 촤악-!
“크흑! ...크흐흠...!”
전혀 예상 못한 변초에 왼다리 깊은 상처를 내준 심광천에 입에서 신음이 질끈 흘러나왔다. 만일 류성우의 도움이 없었다면 아예 잘려나갔거나, 적어도 힘줄이 끊겨 평생불구가 됐을 것이다.
이 한 수로 판도를 장악한 왕진학은, 이 이상 기운을 빼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므로 저들이 주춤한 사이 멀찌감치 물러났다.
어차피 반대세력 종자들을 일망타진하고자 했던 그의 목적은 이미 달성됐기에, 일말의 아쉬움 따윈 없는 듯 했다.
“하하하! 이런~, 이런~. 처량하기가 이를 데 없구나!”
“으... 왕진학...!!! 감히 회주만이 익힐 수 있는 무공을 훔쳐 배우다니!!!”
“허허, 곧 회주자리에 앉으실 이 부회주님의 존함을 친구처럼 함부로 불러서야 쓰나?”
“퉤잇! 존함을 얼어 뒤질 존함! 남몰래 재물을 빼돌려 사익을 챙겨온 배신자에겐 욕도 아깝다!”
“후훗, 그놈의 주둥아리가 매우 고약하군.”
- 척.
기분 좋게 그들을 비웃는 왕진학의 손짓에 궁수들이 일제히 활시위를 바짝 당겼다.
- 쭈~욱. 끄드득....
반대로 더 이상의 활로를 찾지 못한 류성우와 심광천 무리는, 덫에 걸려 사냥꾼에게 으르렁거리는 맹수 같았다.
하지만 나룻배 수십 척이 불타고 있는 큰 강을 등 뒤로한 채 에워싸인 그들은, 궁수들을 앞세워 위협을 가하는 왕진학의 의기양양한 공세에 저항할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만 끝내도록 하지. 조만간 진세연도 니놈들 곁으로 보내 줄 테니 저승에서 사이좋......”
“부회주님! 부회주님!”
뒤편 수하의 갑작스런 외침이 자신의 말을 끊자, 왕진학은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쯧, 무슨 일이냐?!”
“저, 저기! 진, 진세연 소회주가 나타났습니다!”
“뭐?! 뭐라?!!!”
대략 100장의 거리. 길쭉한 짐 꾸러미를 등에 맨 채 걸어오고 있는 진세연과 그 뒤에 선 흑의인을 확인한 왕직학이 화들짝 놀랐다.
“돌무더기 속에 있어야할 저년이 어찌...?!”
- 작가의말
부단히 노력은 하고 있는데... 매일 2연참이 조금씩 버거워 지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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