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장 귀마회(鬼魔會) (7) - 完
* * * * *
- 웅성웅성.
먼발치에서 구경했던 이들의 표정은 대부분 어아니 벙벙했다.
승리와 패배, 희(喜)와 비(悲)가 서로 뒤바뀐 엄청난 사태이건만, 궁지에 몰아지던 이들도, 또 반대로 몰아넣던 이들조차도, 그 막강한 부회주가 써늘한 시체로 화했음이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때 돌연 진세연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신형을 날렸다. 일순간 왕진학 앞에 당도한 그녀는 일말의 지체함도 없이 그의 목을 뎅겅 베어버렸다.
- 써걱-!
그리고는 왕진학의 수급을 번쩍 들어 올리며, 이 강가에 모여 있던 회중을 향해 당당히 소리쳤다.
“반측자 왕진학은 죽었다! 이는 본회의 지엄한 규율을 거스른 것도 모자라, 감히 역천까지 꾀한 그 행실에 응당한 대가를 치렀음이다!"
"......"
"남은 귀마회의 정예들은 들으라! 죄인 왕진학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반역에 동조한 나머지 잔당들을 모조리 말살할 것을 명한다!”
“......존, 존명!”
그녀의 외침에 정신이 번뜩 돌아온 그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깨닫고 제각각 행동을 취했다. 다시 죽고 죽이는 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이미 결론부터 지어진 싸움이었기에 길게 이어지진 않았다. 그야말로 직설적인 표현으로선 싱겁기 이를 데 없었다.
왕진학을 따르던 부하들이 수적으론 여전히 우세했을지언정 딱 그뿐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피해를 최소로 줄이고자하는 세 명의 소회주들까지 출수한 뒤론 일방적인 살육에 가까웠으니 더욱 그러했다.
맹숭맹숭 떠오른 달이 해를 밀어 금세 어둑어둑해졌으나, 어느 누구 하나 끝끝내 도망치진 못했다. 처음 의도와 다르게 사냥꾼과 사냥감이 뒤바뀌긴 했지만, 징글맞게 활활 불타는 나룻배들이 제 역할을 충실히 행하며 시야를 밝혀준 덕이었다.
나룻배의 불길들이 달빛보다 못한 수준으로 사그라졌을 때쯤, 드디어 온통 상처뿐인 내분에도 종결이 고해졌다.
- 휘이이잉~.
쌀쌀한 강바람이 수많은 이들의 몸과 마음의 상처, 그리고 생기 잃은 시신을 스치며 불어왔다.
- 피-익! 피이익-!
심광천이 불어 댄 호각신호에 귀마회의 고수들이 신속하게 모여와 집결했다. 삼삼오오 눈치껏 대열을 맞춰선 그들은, 작은 둔덕 위의 소회주들과 그 뒤에 선 경이로운 초고수를 곧 마주할 수 있었다.
분명히 강도진은 소회주들의 뒤편에 서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귀마회 일원들에게 몸이 떨릴 정도의 위압감이 전달되고 있는 것은 단순히 그의 강대한 체구 때문만은 아닌듯했다.
“...이제부터 귀마회는 내 명을 따른다.”
귀마회 일원들의 말없는 시선이 집중된 강도진에게서 강한 어조의 말이 흘러나왔다. 혹 그와 친분을 조금이라도 나눠본 이들이라면 매우 낯설었을 그런 진중한 말투와 엄숙한 표정이었다.
“이의 있는 자는 지금 떠나라.”
“.........”
귀마회 일원들은 강도진의 가늠할 수 없는 무위와 전대 회주를 훌쩍 뛰어넘은 비전절학 완성도에 이미 크게 탄복한 상태이긴 했다.
그러나 외부인이라는 낯설음은 또 다른 별개 문제였으므로, 그들의 망설임은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이 바람같이 휘몰아 겉도는 잔잔한 분위기 속에서, 역시 이번에도 행동을 먼저 취한 건 진세연이었다.
“소녀 진세연, 제10대 회주께 인사 올립니다!”
그녀가 이렇듯 공손하게 예를 갖추자, 수하들을 모으기 직전 그녀에게 설득당한 두 사람 또한 뒤따라 무릎을 꿇었다.
“류성우가 차대 회주께 인사 올립니다!”
“소회주 심광천. 회주께 인사 올립니다!”
차대 회주로 거론되던 진세연은 물론, 저마다 각자 평소에 떠받들어 모시던 소회주들마저도 강도진에게 큰절을 올리니, 이것을 바라보던 일원들도 종국엔 생판 처음 보는 사내를 회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귀마회가 차대 회주님을 뵈옵습니다!”
“귀마회가 차대 회주님을 뵈옵습니다!”
“귀마회가 차대 회주님을 뵈옵습니다!”
* * * * *
귀마회 본전 회주의 침소.
강도진으로부터 부회주 직위와 회주대리로써 대부분의 권한을 위임받은 진세연의 지휘 아래 귀마회 내부는 빠르게 안정을 되찾아갔다.
더욱이 그녀가 사전에 류성우와 심광천에게 약조한 조직구성과 배분이 있었기 때문에, 자시초(子時初, 23~24시)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시간을 들여 손봐야하는 물리적 파손을 제외하면 딱히 문제로 삼을 만한 사안도 없었을 정도였다.
‘하아... 피곤하군.’
강도진은 자신의 키보다도 크고 푹신푹신한 침상에 대자로 쭉 뻗으며 한숨을 뿜었다. 일이 마무리되고 몇 시간 홀로 이 방에서 밍기적밍기적 뒹굴뒹굴 거리다보니, 사태의 심각성을 새삼 깨달아버린 것이었다.
그땐 가능한 다른 선택이 없었다는 핑계로 자기암시를 끊임없이 걸어봤으나, 이제는 어떡하나 싶은 심정이 사고 칠 당시와는 다르게 점점 더 불어만 갔다.
‘그렇게 말렸는데도 북천문 전인되지 않겠다고 박차고 나온 놈이... 나라를 넘나드는 살수조직의 두목이 됐다는 걸 스승님이 아시면...? 난 그날로 죽은 목숨... 으으...... 하기야 의협을 매사 강조하시는 스승님껜... 이건 부관참시도 시원찮은 사안이니까. 아... 놔......’
- 풀썩, 풀썩!
그는 이불 뒤집어쓰고 비명 지르고픈 마음을 허공에 뿌리는 주먹질과 발길질로 대신했다. 그런다고 해서 애들처럼 기분 풀리는 것도 아니었지만, 가슴에 꾸역꾸역 쌓인 감정을 어떻게든 표현하여 발산하고 싶었던 것이다.
- 사박. 사박.
‘......?!’
자신이 머무르는 처소로 다가오는 기척을 느낀 도진은 후다닥 일어났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방 안의 공기가 더운 것 같기도 해서 창문도 활짝 열어 환기시키곤, 자리로 냉큼 돌아와 정좌했다.
- 똑, 똑.
“소녀 진세연입니다.”
“험험, 문 열려 있소.”
옷차림새부터 어여쁘게 단장한 그녀는 품에 들고 온 물건을 차분히 내려놓곤, 무릎 꿇고 두 손을 모아 다소곳이 예를 표했다.
창 밖에서 일렁인 바람에 은은히 스며든 향기가 그의 코끝을 즐겁게 했다. 아마도 진세연이 먼지구덩이에서 뒹굴며 더러워진 몸을 깨끗이 닦아낸 지 얼마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강도진이 옷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그녀의 육감적인 굴곡에 시선처리가 난감해져있을 무렵, 진세연이 2권의 책자를 꺼내놓았다.
“여기 왕진학이 따로 관리하던 장부이옵니다.”
“흠, 흠... 어? 이미 다 끝난 일 아니었소? 혹시라도 내가 사람을 잘못 죽였다거나 하는 그런... 거요?”
“아닙니다. 영환도사들에게 일어난 사태의 원흉은 이미 구두로 말씀 올렸던 그대로입니다. 다만 말로만 전해 들으셨을 따름이니, 회주께서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게 당연치 않겠습니까?”
“어... 음...”
“어머, 설마 제 이야기를 전혀 의심치 않고... 그대로 믿으셨던 겁니까?!”
“...그런 상황에서 거짓말이 나오는 게 이상한 거 아니오?”
“푸흡, 참으로 순진도 하시옵니다! 오호호호!"
"......"
진세연이 그의 순박함에 놀란 만큼, 강도진의 표정도 창피함 속에 파묻혔다.
"무릇 사람이 생사가 달린 일에는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법이지요. 으레 의심하고 사실을 조목조목 확인하시는 게 당연한 수순입니다. 아니 그렇습니까?”
“크흠... 앞으로는 참고하리다.”
강도진은 어미한테 핀잔 듣는 아이처럼 살짝 고개 숙여 옆머리 벅벅 긁으며 얼굴을 붉혔다. 그러다 그는 마주한 진세연 얼굴을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천천히 운을 띄웠다.
“험, 험. 세연 낭자. 아니 진세연 소회주, 나는 약조를 지켰소.”
“네, 솔직히 기대 이상으로 잘 해주셨습니다.”
“그럼... 이제 나와의 약조를 지켜주실 차례요.”
이 말에 그녀의 태도와 언행은, 어전에서 왕을 알현하여 정사를 논하는 신하처럼 진중하게 변했다.
“예, 그리하겠습니다. 내일부터 귀마회는 회주의 뜻에 따라, 반토막 난 세력을 정비함과 동시에 내실을 다진다는 명목 아래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봉문하게 될 것입니다.”
"좋소. 꼭 그렇게 해주길 바라오."
"하오나..."
“하오나?”
“활동을 제약한다고 해도... 사람이 하나둘이 아닌지라 꽤 많은 비용이 해마다 필요합니다. 기존에 쌓아놓은 재물이 있으나, 본회가 앞으로 회주님의 의지에 따라 오래토록 봉문하고자 한다면... 해마다 최소한의 수입은 유지해야...”
“살인은 안 되오.”
강도진은 빙빙 돌려가며 어렵게 꺼내는 그녀의 말을 거칠게 딱 잘랐다.
“...알겠습니다. 허면 정보를 수집해 파는 일 정도는 계속 유지해도 괜찮을는지요?”
“그 정도라면야... 뭐...”
“감사합니다.”
“그 대신 내 신상에 대한 건 절대 금기사항임을 명심하시오. 절대, 절대로! 일절 생각조차 하지 마시오!”
“호호, 각별히 유념하겠습니다. 세상 떠난 오라버니를 걸고 맹세하건데, 결코 은혜를 원수로 갚지 않겠습니다.”
“아!”
“...네?”
그녀가 이성민을 언급하자, 강도진의 머릿속에 문득 급부상한 궁금증이 있었다.
“내가 뭐 하나 물어봐도 되오?”
“예, 하문하십시오. 회주님.”
“그대의 오라버니가 내게 충각사를 언급한 일이 있었는데... 거기에 무슨 일이 있는 게요?”
<<< 13장 충각사(忠覺寺)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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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암지방 우곡성(迂曲城).
장날이 아님에도 성내 여러 객잔마다 사람들이 와글와글 붐볐다. 만약 이 손님들이 비교적 얌전한 축에 속하는 상인들이나 한량들이었다면 모든 객주들은 쌍수를 들고 환영했겠으나, 무기를 꿰차고 어깨에 힘주고 다니는 무인들이 대부분이었던 지라 온통 가시방석에 앉은 것 마냥 매사가 불안해보였다.
“으어어억!”
- 우당탕탕! 콰직!
방귀가 잦으면 똥 싸기 쉽다고 했던가? 이런 객주인들의 우려는 어김없이 현실이 되었다.
“아으으으...”
“어이쿠, 여보게! 괜찮은가?!”
안에서 문밖으로 내동댕이쳐진 사내의 동료정도로 보이는 두 사람이 황급히 뒤따라 나와 그의 상태를 살폈다.
반면 된통 얻어맞은 복부를 비비적대던 사내는, 부아가 치밀었는지 객잔 안을 향해 욕을 한 사발 퍼부었다.
“아오... 우라질! 야!!! 니들이 명문세가?!!! 이런 미친! 무공이 명문이면 뭐해?! 인간들의 인성이 쓰레기인데?!!!”
“여, 여보게. 여민구. 이쯤 하시게나.”
“아, 말리지 말어! 뭐! 내가 틀린 말 했어! 틀린 말 했냐고!”
“허허, 사람 참! 이러다 정말 큰일 치르겠네!”
“니미럴! 죽기 밖에 더해? 야! 야, 이 풍령세가 명문 쓰레기들아! 썩 나와! 나와서 제대로 붙어보자! 붙자고!”
홧김에 벌떡 일어난 여민구는 다른 동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고래고래 고함을 치며 무기를 빼들었다.
이에 지나가던 사람들은 강 건너 불구경보다 흥미진진하다는 싸움구경을 놓칠세라 그 주위로 큰 원을 그리며 웅성웅성 모여들었다.
* 진세연.
* 보너스.
- 작가의말
연참대전 참가 전에 비하면 조회수와 선독자 수가 눈에 띌 정도로 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남들 보기엔 여전히 초라한 숫자일지 모르겠으나,
원체 유행에서 동떨어진데다가, 더불어 호흡이 긴 소설인지라... 제게는 여러모로 의미가 큽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꾸준한 관심에 거듭 감사드립니다. (_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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