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색깔에 빠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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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loal13
작품등록일 :
2019.06.15 01:16
최근연재일 :
2019.06.15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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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15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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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1)

DUMMY

스물하나. 수능을 망치고 일 년간 재수를 한 뒤에 대학교에 온 내가 나를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단어였다. 재수 생활은 끔찍했다. 처음으로 고향을 떠나는 게 뭔가를 성공하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실패를 만회하러 떠나는 것이라니. 힘들었지만 일 년이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나는 나름 열심히 공부를 했고, 나름 괜찮은 학교에 붙었다. 한 번에 성공해서 다행이었다. 같은 학원에서 공부를 하던 채석이는 또 실패했다. 원하는 곳이 너무 높은 탓이었는지 아니면 그냥 부족해서였는지. 그 두 개가 같은 말일지도 모르겠다.


좁지도, 넓지도 않은 8평 월세 32만원 짜리 자취방은 대학교 신입생에게 딱 좋은 크기였다. 건물이 낡기는 했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학교에서 정말 가까운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작년에 수험생활을 하며 느낀 것은, 자취방은 내가 가야 할 곳과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좋다는 것이다. 작년에 학원을 다닐 때는 아침마다 30분씩 걸어서 학원에 가야 했다. 그런 끔찍한 일을 두 번이나 할 수는 없었다. 마침 대학가도 바로 옆에 붙어 있어 놀기도 좋을 것 같았다..


부모님이 자취방 짐 정리를 도와주시고 함께 밥을 먹었다. 어머니는 뭐가 그리 걱정이 많이 되시는지 헤어지는 순간까지 이럴 땐 이렇게, 저럴 땐 저렇게 말씀을 하시다 돌아가셨다. 혼자 자취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누우니 대학교에 왔다는 실감이 들었다. 옆방이 시끄러운 것을 보니 저쪽도 이사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떤 사람일까?


A시로 올라오고 3일째, 할 것이 없어서 매일 성주와 피시방이나 가며 하루를 때웠다. 성주는 같은 재수를 하면서 만난 친구다. 둘 다 공부를 하겠다며 시작부터 사람들과 친해지려 하지 않다가, 7월쯤 슬슬 혼자 밥을 먹기 지겨울 때 쯤 마침 옆자리에서 만났다. 성적도 비슷하고 취미도 같아서 담배를 나눠 피며 친해졌다. 성주가 같은 학교에 와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성주 앞에서는 쪽팔려서 이런 것들을 말하진 못하겠지만 말이다.


배가 고파서 저녁도 먹고, 대학가를 둘러볼 겸 거리로 나갔다. 낮의 대학가는 아직 방학 기간인데도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여기서 지나치는 사람들 중에 같은 학과에 들어온 신입생이, 나처럼 대학가를 한 번 둘러보려고 나온 사람이 있지 않을까.

지나가면서 음식집 하나를 스쳐가며 안을 들여다봤다. 아직 저녁을 먹기에는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음식집에는 사람이 하나밖에 없었다. 마침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아직 수능이 끝나고 알바를 해서 벌어놓은 돈이 많으니 한 끼 쯤은 밖에서 사먹어도 괜찮겠지. 나는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자리에 앉으니 앞에 노란색 머리의 밖에서 본 노란색 머리의 뒤통수가 보였다. 노란색 머리에 노란색 카레를 먹다니. 왠지 웃겼다. 종업원이 물을 들고 왔다.

“뭘로 주문하시겠어요?”

카레를 보고 들어왔으니 카레를 먹어야겠지.

“그냥 기본 카레 주세요.”

“네, 금방 가져다 드릴게요.”

생각보다 카레가 금방 나왔다. 김이 올라오는 것이 맛있어 보인다. 그때 앞자리 사람이 일어나서 계산을 하러 갔다. 앉아 있을 때는 몰랐는데, 서있는 모습을 보니 머리가 정말 길었다. 저런 특이한 머리를 한 사람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했지만, 각도가 도무지 맞지 않았다.

카레는 내 생각과 비쥬얼만큼 맛있었다. 먹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교 친구를 사귀면 여기로 와서 카레를 먹어야겠다. 식사를 끝내고 계산을 하고 나와 담배를 한 대 물었다. 수험 생활을 하며 남은 것이 딱 두 가지 있었다. 현역 때보다 높은 수능 성적과 말보로 미디움. 몸에 안 좋다는 것을 알면서도 도통 끊을 수가 없었다. 이게 그 끔찍한 재수 생활 내내 얼마나 내게 위안을 줬는지.

담배를 다 피고 불을 끄고 옆에 있는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담배 때문에 머리가 좀 띵해지고 나니 대학가의 길에 담배가 얼마나 많이 떨어져 있는지 보였다. 대학교와 담배. 뭔가 잘 어울렸다.


자취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워 핸드폰으로 드라마를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카카오톡 알림이 떴다. 눌러서 들어가 보니 단톡방 이름이 보였다. k대학교 통계학과 신입생 단톡방. 이런 식으로 대학교 단톡방이 만들어지는 거였구나, 어떤 사람이 자기가 학과장이라고 말하고, 길고 쓸모없는 설명을 한 뒤에 단톡방에서 나갔다. 어떤 패기넘치는 녀석 하나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깔끔하다. 자고로 첫 번째가 가장 보내기 쉬운 법이다.

다들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다. 프로필 사진이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하긴, 처음부터 사람들이 자기 프로필 사진을 보면 기분이 안 좋을 수도 있겠지. 어떤 미친놈이 있을지 모르니 말이다. 난 인사를 하기엔 왠지 부끄러워서 그냥 가만히 있었다.


다시 보던 드라마를 보고 있었는데, 성주가 전화가 왔다.


“J. 뭐 하냐? 오늘도 피시방 갈래?”

“우린 뭐 맨날 피시방 밖에 안 가냐? 다른건 없나? 며칠째 게임만 하니 좀 질리는데.”

“당구장은 어때?”

“나 당구 못 치는거 알잖아.”

“그럼 걍 피시방 가자, 그게 우리 인생이여.”

피시방에 가긴 싫지만 가만히 있는건 더 싫다.

“그러자 걍. 우리 자취방 쪽 와서 전화해.”

“알았어.”

시간을 보니 6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성주는 기숙사에 살아서 대학가까지 오려면 10분쯤 걸린다. 침대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켜고 대충 야구잠바를 하나 챙겨 입고 밖으로 나갔다. 담배나 한 대쯤 피고 있어야지.

전화를 받고 피시방에 가자 성주가 이미 와 있었다. 성주 옆에 앉자 성주는 모니터에서 눈을 때지도 않은 채 나에게 인사를 했다.

“왔냐?”

“어.”

컴퓨터를 키고 게임에 접속했다. 성주가 게임이 끝나길 기다리며 웹툰을 보고 있는데 성주가 말을 걸었다.

“야, 너희 과도 단톡방 만들었냐?”

“어, 아까 보니까 초대했더라.”

“우리 과는 아직도 안 만들었던데. 너네 과에 여자 많냐?”

“그냥 한 반반?”

“하긴, 문과는 여자 많지. 우리 과는 남자만 존나 많을 것 같은데.”

“그렇지 뭐.”

“나중에 개강하면 과팅이나 한 번 잡아줘라.”

난 웃음을 살짝 흘리면서 말했다.

“벌써 그런 생각부터 하냐. 미친놈.”

“왜, 일 년 좆빠지게 하고 대학 왔는데 좀 즐겨 봐야지.”

“그건 맞지.”

성주는 낄낄거리며 다시 게임에 빠져들었다.

성주의 게임이 끝나고 같이 게임을 한참 하고 있는데 핸드폰 알림소리가 들렸다. 잠깐 핸드폰을 열어보니 학과 단톡방에 카톡이 와 있었다.

[오늘 시간 되시는 분들 만나서 한잔 하는 거 어때요?]

보낸 사람을 보니 프로필 사진이 없었다. 분명 낭만과 패기가 넘치는 스무 살 신입생이리라. 뭔가 저럴 수 있다는 것이 부러웠다. 내가 저렇게 하면 스무 살 애들 입장에서는 그냥 재수생이 주책부리는 걸로 보이겠지. 가 볼까? 가 보면 재밌으려나 모르겠다. 그래도 한 번 얼굴 익숙해져 놓는 게 적응하기 좋으려나?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 하나가 보낸 카톡이 왔다.

[좋아요! 몇 시에 어디서요?]

이 사람은 프로필 사진이 있길래 프로필 사진을 봤다. 노란색 머리를 하고 있었다. 왠지 느낌이 신입생인 것 같지는 않았다, 나 같은 재수생이려나? 웃음이 피식 나왔다. 아까 음식점에서 본 노란머리 사람이 기억났다. 뭔가 가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도 갈게요.]

카톡을 보내고 나니 뭔가 기대감이 들기 시작했다. 몇 시쯤 모이려나? 몇 명쯤 오려나? 왠지 실실 웃고 있자 성주가 이상한 것을 본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

“뭐가 그렇게 좋냐?”

“아니, 우리 과 신입생 동기들 오늘 술 먹을 것 같아서.”

“벌써? 대단하네.”

“뭘...”

조금 더 게임을 하다가 카톡방을 다시 봤다. 어째 자기들끼리 이야기가 다 됐나 보다. 8시에 대학가에 있는 지리산이라는 술집에서 만나자고 했다. 지리산? 이름이 왠지 옛날 술집 같았다. 요즘 술집 이름을 지리산으로 지을 리가 없지 않는가. 카톡방을 올려보니 나를 포함해서 6명 정도가 온다고 했다. 핸드폰 위쪽의 시간을 보니 벌써 7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그래도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 많을 탠데. 가서 씻고 준비를 좀 하고 나가는 것이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지개를 한 번 편 다음 성주에게 말했다.

“성주야, 나 간다.”

“벌써? 왜?”

“8시에 보재서 자취방 가서 준비좀 하고 가려고.”

“뭔 술 먹는데 꾸미고 가려고? 이쁜 애라도 있냐?”

난 피식 웃으며 말했다.

“무슨... 그래도 처음 보잖아.”

성주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에휴... 알았다. 또 혼자 해야겠구만...”

난 웃으며 성주의 머리를 툭 쳤다.

“간다, 수고혀.”

“오냐.”


자취방으로 돌아와서 샤워를 하고 술집 위치를 검색해 봤다. 걸어서 몇 분 걸리지 않을 거리에 있었다. 이정도면 한 10분 전에 출발해도 되겠는데? 나는 머리를 말리고 옷장을 열었다. 어떤 옷을 입지? 아직 좀 쌀쌀하니 코트를 입을까? 아닌가. 너무 꾸미고 온 것 같으려나? 나는 한참 고민을 하다 후드티에 청자켓을 입었다. 그래, 이 정도면 적당하겠지.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의 술자리는 확실히 기대감이 든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가 잘 나오게 해주는 마법의 음료를 들이키고, 그 사람이 한, 내가 처음 들어보는 경험들을 듣는 것은 정말 즐거운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술자리에는 위기감이 항상 함께 존재한다. 이야기가 잘 나오다 못해 넘치는 순간이 오면 실수가 일어날 수도 있다. 오늘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남에게 말하지 못할 비밀을 말할 수도 있고, 술과 그 신나는 분위기에 취해 다음날 술이 깨면 내가 왜 그랬지 싶을 행동들을 할 수도 있다. 이래서 술이 양날의 칼 같은 것이다.


술집 앞에 도착하니 왠지 뻘쭘하게 서 있는 사람 둘이 있었다. 코트를 입고 한껏 꾸민 티가 나는 키가 큰 딱 봐도 스무 살처럼 보이는 남자 하나와 단발머리에 후드티를 입은 여자 하나. 딱 봐도 서로 어색해 보이는 것이 저 둘이 내 동기가 맞는 것 같았다. 하지만 왠지 말을 걸기가 힘들었다. 만약 오늘 만나기로 했던 사람들이 아니면 얼마나 쪽팔리겠는가. 난 핸드폰을 열고 단톡방에 카톡을 보냈다.

[저 도착했는데, 혹시 이미 오신 분 있나요?]

금방 답장이 왔다.

[저희 지금 둘이 술집 앞에 서 있어요.]

내 예상이 맞았던 것 같다. 그냥 바로 말을 걸걸. 둘이 서 있는 쪽으로 다가가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아, 혹시 통계학과 신입생 분이세요? J씨?”

내 이름 뒤에 씨라는 단어가 붙는 것이 이상하다. 대학교에 온 것이 실감이 났다. 이렇게 쉽게 어른 대접을 받게 되는 건가.

“네. 맞아요.”

“저희 둘이서 들어가기 뻘쭘해서 한명 더 올 때 까지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들어가시죠?”

“네, 먼저 들어가 있죠 뭐.”

대학가의 술집을 처음 가 본 것은 아니었으나, 이렇게 오니 뭔가 좀 색다르게 느껴졌다. 낡은 분위기의 술집은 사람이 반 정도 차 있었다. 우리는 어색하게 자리를 잡았다. 성윤이 가장 먼저 앉고, 그 옆에 채윤이 앉았다. 나는 자연스럽게 성윤을 마주보는 자리에 앉게 됐다.

“미리 뭐 시켜 놓을까요? 아니면 사람들 더 올 때 까지 기다릴까요?

“8시 되면 시켜 놓죠 뭐.”

코트를 입은 남자는 겉보기보다 말이 많고 나서는 타입인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아직 서로 통성명도 하지 않았다.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혹시 두 분 이름이 어떻게...”

코트를 입은 녀석이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아직 이름을 안 말했네요. 전 김성윤이라고 해요.”

“오늘 보자고 하신 분 맞으시죠?”

“네, 제가 A시가 고향이라... 그래도 대학가를 좀 아니 제가 모아야죠. 빨리 친구 사귀고 싶기도 하구요.”

친구는 아닐 탠데. 내 나이가 야속하게 느껴졌다.

옆에 있던 단발 여자도 말을 했다.

“저는 이채윤이라고 해요. 혹시 J씨 맞으세요?”

내 이름을 바로 알길래 살짝 놀랐다. 아마 프로필 사진을 봤으리라.

“네 맞아요.”

성윤이 말했다.

“그... 혹시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스물하나라고 말을 꺼내기가 참 어렵다.

“아, 저 재수해서 스물 한 살이에요.”

성윤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했다. 리액션이 많은 사람인 것 같다.

“그럼 형이시네, 저는 스무 살이에요.”

옆에서 듣고 있던 채윤이 말했다.

“저도 스무 살이에요.”

존댓말을 자꾸 듣는 건 영 불편하다. 미리 말을 편하게 하라고 해야겠다.

“아... 그럼 말 놓을게...? 너희도 편하게 말해, 난 존댓말 듣는 게 영 어색해서.”

성윤이 미소를 씩 지으며 말했다.

“알았어 형!”

이 녀석은 캐릭터가 확실한 것 같다. 어느 무리를 가도 이러 녀석들이 하나씩은 있는 것 같다. 약간 오버스러운 행동에, 초면에 선을 넘을락 말락 하는 캐릭터. 좋게 말하면 친화력이 좋은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예의가 없는 거다.

채윤도 눈치를 보면서 말했다.

“그럼 편하게 할게요.”

편하게 한다고 말하지만 편하게 말하고 있지 않았다. 모순적이었다.


8시가 다 되도록 사람이 더 오지 않았다.

성윤이 말했다.

“우리 그냥 시켜놓고 있을까?”

내가 대답했다.

“그러자, 그게 낫겠네. 어차피 7시 됐으니까 뭐.”

우리는 벨을 눌러 종업원에게 메뉴판을 달라고 했다. 그때 술집 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들어왔다.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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