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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률과 로맨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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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인드믹스
작품등록일 :
2019.06.19 23:01
최근연재일 :
2019.07.2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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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20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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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확률과 로맨틱

DUMMY

“빈민가 출신의 축구선수와 공주님의 결혼이라니 너무 로맨틱하지 않아?”


명목 뿐인 부활동 시간을 때우기 위해서였다.

스마트폰을 뒤적거리다 스웨덴 왕가의 세기의 결혼에 관한 기사가 우연히 눈에 띄었다.

이 정도면 무료한 일상에 잠시나마 청량감을 줄 수 있는 괜찮은 소재였을 터였다.


문제는 이 자습부3(부이름도 문제지만 이름에 번호가 붙어 있다는 점에서 이미 글렀다.)에는 내 이야기를 들어줄 인간이 '저 녀석' 뿐이라는 것이었다.


차한솔. 교복 단추를 하나도 남김 없이 잠근 과도한 단정함과 대조적으로 손으로 대충 빗은듯한 머리카락이 늘어져 안경테에 아슬아슬하게 걸쳤다.

평범한가 싶으면서도 미묘한 이질감 때문인지 뇌리에 인상이 박힌다.

녀석은 참고서에서 눈을 떼지도 않고 책을 향해 대답하듯 말했다.


“희박한 확률이긴 하지.”


“으엥?”


기묘한 대답에 걸맞은 기묘한 반응을 해버린 것이 녀석의 스위치를 눌러버린 것 같다.

무심한 듯 바라보던 참고서를 덮고 책상 모서리와 평행이 되도록 가슴 앞에 정리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늘어 나를 바라본다.


“두 사람의 만남이라는 건 우연에 우연을 뚫은 기적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


동문서답하는 느낌도 들었지만 매번 그랬던 것처럼 이번엔 또 어떤 엉뚱한 이야기를 할까 싶은 호기심이 들어 귀를 쫑긋 세웠다.


“일반적으로 만날 수 있는 대상은 같은 생활권에 한정되고 거기에 나이대라는 조건까지 붙으면 사실 그 만남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에 가깝다고 할 수 있지.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상대를 다 합쳐봤자 몇 명이나 될 것 같아?”


“지금 남친 있는 애들도 다 교내커플이니 일리는 있네.”


“두 사람의 만남이라는 건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는 거야. 만날 수 있는 사람의 풀(pool)이 너무 적으니까. 좀 과격하게 표현하자면 두 사람은 강제로 만나게 된거지.”


녀석을 본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별생각 없이 맞장구를 쳐주곤 했다.

그러다 보면 이 사이비 교주 같은 놈의 언변에 넘어가 녀석의 궤변에 동의할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린다. 이제는 나도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지.


“풀이 좀 좁다고는 해도 그 중에 제일 좋아하는 사람을 만났을텐데 강제라는 건 너무 억지 아냐?”


녀석의 표정에서 묘한 웃음끼가 비치는가 싶더니 눈을 반짝이며 말을 잇는다.


“자기최면이지.”


“으웽?”


또 이상한 소리를 내버렸다.

하지만 녀석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듣다 보면 한번씩 이야기의 연결고리를 잃어버리게 되니 이는 불가항력적 반응이라고 생각한다.


“최선을 가장한 차선 어쩌면 차차선 이하의 선택을 후회할 바에는 그게 최고의 선택이라고 자기최면을 거는 거야.”


주어진 여건에서 만남을 갖는다는 게 자기최면까지 걸어야 하는 비참한 상황이라니.

녀석의 이야기를 곱씹어보니 나도 모르게 미간이 살짝 찌푸려진다.

내가 탐탁해 하지 않는 것을 눈치 챘는지 호흡을 살짝 가다듬고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더니 말을 잇는다.


“너를 만난 건 내 인생 최고의 행운이야.”


“... 므흐?”


내 머리가 망치에 얻어맞은 라운드의 벨처럼 띵하고 울렸다.

한솔의 입에서 나온 단어들은 나의 귓바퀴를 타고 내이 속으로 들어와서는 언어중추를 향하지 않고 시상하부 주의를 맴돌다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의미를 해석 하는데는 실패했지만 어떤 형태의 정보가 전달 되었는지 귀부터 뜨거운 열기가 턱을 타고 볼까지 내려와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라고 말하는 건 상대에게만 하는 말이 아니야.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 하는 다짐 같은 거지.”


얼굴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정신이 맑아진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도 모르게 한솔의 얼굴을 흘겨 보고 있었다.

녀석은 뭐가 좋은지 빙그래하고 한 번 웃더니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온다.


“외국 여행 중의 우연한 만남과 학교 발렌타인데이 연례 행사에서의 고백. 뭐가 더 로맨틱한 것 같아?”


“둘 다 괜찮긴 한데, 그 자체로도 로망인 외국 여행에 이국적인 만남까지 더해지면 비교가 안되는 건 어쩔 수 없잖아?”


최근 인터넷에서 검색한 몰디브 해안가에서 사랑을 속삭이는 상상을 하니 생각만으로도 행복해지는 것 같아서 목소리가 살짝 올라갔다.


녀석은 그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살짝 가로 젓는다.


“장소의 문제가 아니야. 그럼 동남아시아 맞선 투어에서의 이국적인 만남은 어때?”


“아, 짜증나.”


녀석의 말 한마디에 내 머리 속의 파라다이스는 인간시장으로 변해버린다.

이 녀석이 분위기 깨는 데는 탁월한 재주가 있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인위적인 만남은 로맨틱지수가 떨어질 수 밖에 없어.”


“로맨틱지수?”


녀석은 나의 태클은 들은 채도 하지 않고 자신의 주장을 계속한다.


“소개팅이던 맞선이던 만남을 주선하는 순간 만남의 확률이 대폭적으로 높아지거든. 확률이 높아질수록 로맨틱지수는 낮아지니까 로맨틱하게 느껴지지 않는 거라구.”


희박한 확률이라는 녀석의 첫 대답은 녀석 나름의 동의였던 것이다.

이성적으로는 Yes라고 말했지만 감정적으로는 No라고 말한 것 같은,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가슴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이 찝찝함.

이 녀석은 항상 이런 식이다. 갑자기 짜증이 밀려온다.

진짜, 로맨틱지수라는 해괴한 단어까지 만들어서 낭만을 깨뜨려버리는 이유가 뭐야?


“하아, 로맨틱이라는거... 전혀 로맨틱하지가 않아졌어. 내 낭만을 돌려줘.”


냉탕과 온탕을 몇 차례 왔다갔다 하기라도 한 것처럼 몸이 무거워져서 탁 소리가 날 정도로 고개를 책상에 처박아버렸다.

고개 너머로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낭만이라는 건...”


나는 고개를 처박은 채로 손을 더듬어 필통을 열고 몽당지우개를 붙잡아 손목의 스냅을 이용해서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휙 하고 던져버렸다.

내 손끝을 떠난 몽당지우개가 무언가에 부딛히면서 내는 "탁"소리와 동시에 "아!"하는 외마디 소리가 들린다.

'스트라이크!'


“키키키키.”


딱히 맞출 생각은 없었지만 평소에는 들을 수 없는 녀석의 당황한 목소리를 듣고 나니 나도 모르게 입에서 웃음 소리가 새어나왔다.


고개를 들어 한솔을 바라보니 녀석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참고서를 보고 있었다.

왠지 겸연쩍어져서 나도 참고서를 펼쳐보지만 조금 있으면 하교 시간인데 이제 와서 공부가 될 리 만무하다.


이 자습부라는 기형적인 특별활동부는 우리가 입학할 때 처음 생긴 제도라고 한다.

특별활동이 없는 학생들이 집에서 빈둥거리는 꼴을 보다 못한 학부모들의 성화로 방과후 교실에 학생들을 잡아 놓은 것이다.


선생들은 이름 짓기도 귀찮았는지 자습부1,2,3으로 나눠서 학생들을 대충 넣어 놓고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

어차피 대충 나눈 것이라 친구 따라 반을 옮기는 일도 빈번하게 일어나다 보니 자습부3에는 나와 차한솔 둘 만 남게 되었다.


나와 친한 친구들은 다들 제대로된 특별활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차라리 나도 특활을 할까 생각해봤지만 학기 중에 특활을 시작할 엄두가 나지 않아 결국 어정쩡하게 자습부3의 수호자로 남게 되었다.

문득 저 녀석은 왜 여기에 혼자 남게 됐는지 궁금해졌다.


"넌 친구 없어?"


스스로에서 입에서 나온 말에 흠칫 하고 놀라고 말았다.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는 맞아 죽는다고 하지 않는가?

'생각을 하고 말을 했어야 했는데'라고 후회해 봤자 이미 돌맹이는 내 입을 떠나 눈 앞의 개구리를 크린히트 하고 말았다.


"친구를 어떻게 정의하냐에 따라 다르지."


평소의 무심한 말투.

한편으로 마음이 놓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언어라는 돌맹이로는 절대 동요하지 않는 방탄멘탈에 살짝 질리는 느낌이 들었다.

뭐, 그래도 물리공격에는 약한 것 같으니 괜찮나?


한치의 흐트러짐이 없는 지금의 모습과 몽당지우개에 맞아 당황하던 한솔의 목소리가 머리속에서 겹쳐 재생되니 '푸훗'하고 웃음이 나와버렸다.

나의 웃음소리에 반응한 듯 녀석의 대답이 이어진다.


"길거리에 쓰러져 있을 때 모른척하지 않고 지나가지 않을 사람 정도는 있어."


"우웩, 그게 친구야?"


녀석이 앞 머리카락을 손으로 '쓰윽'하고 쓸어 올려보지만 이내 다시 안경테 위로 스러진다.

안경이 뭔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안경을 고쳐쓰나 싶더니 안경집에서 안경닦이를 꺼낸다.

안경을 벗어 안경닦이로 슥슥 닦는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으니 고개를 들어 나를 본다.


한솔의 안경을 벗은 모습은 처음 봤다.

안경 하나로 사람의 인상이 이렇게 바뀔 수 있구나 싶을 정도로 주변이 환기 되었다.

안경테에 가려져서 잘 알 수 없었던 의외로 오똑한 콧날,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한 진갈색의 검은자에는 자세히 보면 약간의 초록빛의 기운이 서려있었다.


"도움이 필요할 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친구라는 카테고리에 딱 들어맞는다고 할 수도 있지."


"으응?"


내가 감을 잡지 못하는 듯한 표정을 짓자 안경을 반짝이며 부연설명을 한다.


"학창생활에서 친구란 학교를 빠졌을때 숙제를 알려준다던지, 점심시간에 의미 없이 모여서 말동무가 되어 준다던지 그런거잖아?"


"그렇긴 하지만 도움을 바라고 친구가 되는 건 아니잖아? 뭔가 이기적인 느낌이 들어서 싫어."


녀석이 피식하고 웃더니


"정의에 대해서 '맞다', '틀리다'가 아니라 '좋다', '싫다'로 판단하는 점이 너 답네. 그럼 '최소연' 버전의 친구의 정의를 들어볼까?"


하고 뭇는다.


갑자기 질문을 받으니 '친구는 친구지.'라는 생각 말고는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는다.

생각을 말로 표현한다는 것은 의외로 꽤 까다롭구나.

그래도 녀석에게 바보 취급 당하고 싶지 않다.


"그러니까 뭐 있잖아... 같이 있어주면 힘이 되고, 마음이 따듯해지고 그런 거 있잖아."


"그럼, '고미'가 네 절친이구나?"


고미는 아주 어릴 때 아빠가 사온 곰인형인데 아빠가 '곰'이라고 말해준 것을 혀 짧던 시절에 고미, 고미 하다가 이름이 고미가 되었다.

그나저나 어쩌다 지나가듯 말했을 뿐인데 이 녀석은 한 번 들으면 잊어버리는 게 없는 것 같다.


"그.. 그런가?"


또 녀석에게 넘어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그렇게 싫지는 않았다.


"나는 네 친군가?"


머리속으로만 하려던 말이 무심코 입밖에 나와버렸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나니 부끄러운 말을 한 것 같아서 얼굴이 빨개질 것만 같았다.


"내가 쓰러져 있으면 그냥 지나갈꺼야?"


"그.. 그럴리가 없잖아?"


녀석은 빙그레 웃더니 다시 참고서를 보기 시작한다.


"참, 쉬운 남자네."


"딩동~ 딩동~"


때마침 하교 종이 친다. 재빨리 가방을 챙겨서 일어난다. 교실문 앞에 서서 문을 열고 나가려다가 잠시 멈추어 뒤를 돌아 보았다.


차한솔은 그제서야 느긋하게 책들을 가방에 넣고 있었다.


"내일 봐."


나는 대답도 듣지 않고 후다닥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친구니까 인사 정도는 해야겠지.

가슴이 조금 벅차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내일 부활은 4시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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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비오는 날 19.07.13 14 0 11쪽
22 하트 여왕 19.07.12 13 0 11쪽
21 민폐녀 여사친 19.07.11 35 0 12쪽
20 누구를 위한 세레나데? 19.07.10 15 0 12쪽
19 1+1+1+1? 19.07.09 18 0 12쪽
18 1+1+1 19.07.08 18 0 11쪽
17 자상부 스타트 업! 19.07.06 23 0 12쪽
16 웰컴 홈? 19.07.05 19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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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에니그마 19.06.24 17 0 13쪽
4 넓은 공간 19.06.23 22 0 11쪽
3 니가 왜 거기서 나와? 19.06.22 19 0 12쪽
2 효율과 로맨틱 19.06.21 28 0 12쪽
» 확률과 로맨틱 +2 19.06.20 123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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