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 이라고, 너는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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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룸서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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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1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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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24 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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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24 0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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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회 - 세 번째 게임, 홀수 짝수

DUMMY

우리 가족의 아침 식사는 침묵 속에서 이루어진다.

정확히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이런 규칙이 생긴 것은 아니다. 다만 서로가 서로에게 뻔한 얘기를 해주는 일에 지쳐버렸기 때문이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삭막함 속에서도 언제나 밝고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여는 사람이 있었다.


"···입니다. 오늘은 전국적으로···"


오늘 하루의 날씨를 알려주는 기상 캐스터, ‘그녀’다. ‘그녀’의 목소리만큼은 한솥밥을 먹는 식구처럼 친근했다.


여담으로, 조금 웃기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나는 꽤 긴 시간 동안 매일 아침을 함께한 ‘그녀’의 얼굴을 아직도 알지 못한다.

텔레비전의 위치가 언제나 등 뒤였던 점 외에도 일기 예보는 귀로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을뿐더러, ‘그녀’를 향한 나의 관심은 밥을 먹는 와중에도 수시로 등을 돌려댈 만큼 깊지 않았으니까.


어쩌면, 혹은 당연하게도, 상대방의 얼굴을 모르는 건 ‘그녀’ 쪽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는 한 번도 그녀에게 얼굴을 보여준 적이 없었으니.


아니, 방금 한 말은 무시해주길 바란다.

일방적인 통신 매체와 교감하려 들다니. 사고 회로의 붕괴 속도가 슬슬 빨라지려는 것일까.


오늘의 ‘얼굴 모를 그녀’가 말했다.


[전국적으로 비가 내릴 전망입니다.]


나는 조용히 콧방귀를 뀌었다. 하늘은 분명 흐리지만, 당신의 예상이 빗나갈 확률은 95%에 육박했다.


기상청이라는 거대한 적을 뛰어넘었다는 사실에, 나는 조금 우쭐해졌다.


오늘은 비가 오지 않을 전망입니다. 이게 나의 일기 예보다.


뭐? 무슨 근거로 이런 말을 하느냐고?


그야, 비 냄새가 나질 않는걸.

믿어도 좋은 정보다. 내 후각이 틀렸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뭐야. 너 개 같아.”


“돌려서 욕한 거지?”


“아니~ 정말 개 같아서 개 같다고 말한 거야.”


“괜히 반복하지 마. 기분 나빠.”


“불쾌지수가 높아서 그런 거야~ 기분 나쁜 것도 모두~”


비닐 봉투가 반바지 아래의 종아리를 스칠 때마다 냉기가 느껴졌다.


강당 안은 웬일로 검도부의 기합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교실 아이들의 말에 따르면, 인근 학교에서 열리는 대회에 참여하기 위해 자리를 비웠다는 것 같다.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공기는 빗방울을 떨어트리기 직전까지의 습기를 머금고 있었다. 그 습기를 온통 흡수한 강당 바닥으로부터 스멀스멀 올라오는 나무 냄새가 생각보다 기분 좋게 다가왔다. 물론 숨을 쉬기 힘들 만큼 젖은 공기는 기분 나빴지만.


2층의 창고도 썩 다른 환경은 아니었다. 강당의 어느 구석과도 다르지 않게 습했다.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면 나무 냄새가 나질 않았다는 것. 벽면과 바닥이 온통 시멘트로 도배된 창고였으니, 애초에 나무 냄새가 날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아···습해. 혹시 에어컨 켜질까~”


“안 될걸. 검도부가 외출한 시점에서부터 희망이 없어. 그보다 창고 불도 안 켜지잖아.”


“아마 차단기를 만져야 할 거야···. 혹시 만질 줄 알아?”


당연히 고개를 저었다. 설령 만질 줄 안다 해도, 감전당하는 위협을 무릅쓰고 싶지는 않았다.


창고에 마냥 어두웠던 것은 아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외부의 뿌연 빛만으로도, 이곳은 꽤 밝았다.


“그래도 바람이 조금 시원해서 다행이네.”


“그러면 뭐합니까···. 습한 바람인데······.”


내가 봤던 ‘너’의 모습 중 가장 무기력하며, 짜증 나는 모습이었다.


짜증이 나는 이유도 그녀의 말마따나 불쾌지수가 높았기 때문이겠지.


“있잖아. 오늘은 무슨 게임 할래?”


“벌써 아이디어가 떨어졌어? 사실은 어떤 게임을 할지 정해두지 않았다던가 그런 거야?”


“아니···. 떠올린 것들은 많은데 벌써 꺼내기는 아쉬운 게임들이야.”


테이블 위로 턱을 얹은 그녀는 점점 녹아내리기 시작하더니, 머지않아 눈을 감아버렸다.


“허···죽겠어요. 선생님······.”


“선생님이 아니라서 미안하네요. 게임을 하자고 불러서 왔으니까 얼른 일어나시지?”


처음에 비하면 나도 태도나 생각이 바뀌었다. 이제는 네가 구상하는 놀이를 제법 게임으로 인정해주고 있었다. 물론 아직 80년대의 오락실 게임만도 못한 취급을 하고는 있지만.


비닐 봉투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조금씩 흘러나오는 한기에 반응했는지, 그녀가 한쪽 눈꺼풀을 스르륵 들어 올렸다. 곧이어 끙하는 소리와 함께 맥없이 떨어져 있던 손이 책상 위로 고개를 내밀었다.


“매번 미안하구먼~흐흐···.”


스멀스멀 기어 올라온 손이 비닐 봉투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러나 내용물을 잡지 못했는지, 속에서 흐느적거리기 시작했다.


“그만 흐느적거릴래? 수산 시장에서 문어를 사 온 느낌이거든.”


“문어라니 너무하네···. 아, 혹시 문어 좋아해?”


“아니. 질긴 음식 싫어해.”


“흐흐···나도. 나도 문어 싫어해.”


“···문어가 완전히 상해버렸네.”


정신을 반쯤 놓은 그녀는 문어가 ‘너’ 자신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듯했다.


비닐 봉투 속에서 손이 튀어나왔을 때는 그녀의 눈도 조금의 생기를 되찾았다. 적어도 두 눈을 동시에 뜨고 있을 만큼의 기력은 회복된 모양이었다.


“뭐야. 더위사냥이네?”


그래. 더위사냥이다.


평범한 아이스크림처럼 보이지만, 내가 준비한 비장의 아이템이었다.


반으로 나눠 먹는 경우가 많은 아이스크림이지만 사실은 혼자 먹어도 문제는 없다. 포장지를 벗겨내느냐 마느냐, 그리고 반으로 쪼개느냐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쌍쌍바 처럼 아예 막대기가 두 개씩 달린 아이스크림이 아니다.


즉, 네가 내게 절반을 줄 필요도, 내가 굳이 반을 가져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저번에 아이스크림을 먹었던 이유는 `내가 먹고 싶어서가 아닌, 단지 네가 녹는 것을 빌미로 협박했기 때문에 먹었을 뿐`임을 증명하기 더없이 좋은 아이템이라고 생각했다.


막상 생각을 정리해보니 느끼는 점인데, 조금 유치한 생각이었을지도.


“하나 다 먹으면 질리는데···. 아, 맞다. ‘그게’ 있었지.”


흐느적거리는 몸을 벌떡 일으킨 그녀는 서랍을 향해 걸어갔다. 밑에서 두 번째 칸을 뒤지던 그녀가 뽑아든 것은 온통 변수투성이의 아이템인


‘종이컵···!’


“혹시나 해서 물어보겠는데······.”


아이스크림을 양손으로 움켜쥔 그녀는 그것을 가차 없이 두 동강 내버렸다. 오른손의 것은 자신의 입으로, 그리고 반대쪽은 또 한 번 내 쪽으로 다가왔다.


"먹을래?"


나를 또 한 번 시험에 들게 할 생각인 건가···!


물론 어떻게든 네가 절반을 들이밀어 오리란 예상 정도는 하고 있었다.


예고 없는 변수에 페이스를 놓칠 뻔했지만, 나도 나름의 준비는 마친 상태였다.


종이컵이 변수의 아이템이라면, 내가 준비해온 것은 절대 방어의 아이템.


비닐 봉투 속에서 뼈가 시릴 정도의 냉기를 내뿜고 있는 녀석이었다.


“아~ 나는 이거면 충분해서.”


비닐 봉투 속을 파고든 손은 ‘그것’의 촉감을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그대로, 매우 과감하게 뽑아들었다.


“아하···. 너 그거 좋아하나 봐? 그것만 마시네?”


어떠냐, 이게 나의 무기.


“뭐, 좋아하는 편이지.”


포카리다.


페트병의 뚜껑을 비장하게 따버리는 것을 마지막으로, 절대 아이스크림을 먹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표출했다.


“저번에 말했지? 나는 아이스크림을 안 먹는다고.”


“음~그랬던가? 그랬다면 할 수 없네. 아쉽게도 너는 녹아서 죽을 운명인가보다~미안해 반쪽아~”


[도저히 양손에 아이스크림을 들고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것만은 할 수 없다.]

는 그녀의 의지에, 더위사냥의 반쪽은 종이컵에 잠시 수용되었다.


무리도 아니다. `너`는 한창 남의 시선을 의식하기에 바쁜 여자아이니까.


나는 이대로 나의 승리를 직감했다.


더위사냥의 양쪽을 다 먹어치워 버리는 파렴치한 `너`를, 나의 올곧은 신념이 뛰어넘는 승리를.


게임 속 승리 이상의, 인간 대 인간의 구도에서 우위를 점하게 되는 승리를.


그런 줄로만 알았다.


“매일 먹을 걸 들고와서는 내가 벌칙으로 시킬 수가 없잖아~ 얻어먹는 처지라 미안하기도 하고.”


“뭐, 억지로 들고 오는 건 아닌데······.”


“남들이 보면 내가 너 괴롭히는 줄 알겠어.”


“괴롭히는 게 맞다고 보는데······.”


어째서?


어째서 `너`는 절반을 건들지 않는 거야?


저 종이컵 속에서 빠른 속도로 녹아내리는 내용물 때문에 집중이 되질 않는다.


설마 ‘녹아서 죽을 운명’이란 저것을 의미하던 말이었나?


죄책감을 느끼게 하려는 것인가.


아이스크림이 녹아서 죽어버리는 일을 전부 내 탓으로 돌려버리려 하다니. 지독하게 비비 꼬인 성격이군.


`너`는 언뜻 내가 아이스크림을 받지 않은 일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 모든 결과와 반응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이다.


그 증거로 저 여유로운 모습을 보아라.


반쪽이가 녹아 죽어 나가는 중에도 본인은 광고를 찍기라도 하듯, 천천히 맛을 음미하며 콧노래까지 부르고 있지 않은가.


“혹시 다른 거 있어?”


눈앞에서 녹아내리고 있는 아이스크림을 철저히 무시해버리는 발언까지···!


이 녀석, 다른 말이 필요 없다.


‘악’함 그 자체다.


“어? 뭔가 있네?”


다른 게 있다고? 그럴 리가. 내가 사온 건 더위사냥과 포카리가 전부였을 텐데.


라는 터무니없는 생각에 빠진 채, 그녀를 지켜보기만 했다.


정신 나간 생각을 잔뜩 해버린 주제에 그것들을 입 밖으로 꺼내면 안 된다는 자각 정도는 있었다.


비닐 봉투를 낚아챈 그녀는 그것을 거꾸로 들고 털어냈다. 그러자 실제로 안에서 무엇인가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후두둑` 보다도 `짤랑`이 더 잘 어울리는 표현이겠다.


“에이~잔돈이었구나······.”


백 원짜리 동전들이 요란하게 쏟아졌다. 매점에서 거슬러 받은 잔돈을 어디에 쑤셔 넣어뒀나 했더니, 비닐 봉투 속으로 흘려보냈던 모양이다.


“누군가 재촉하는 바람에 넣어둔 거겠지. 지갑에 넣을 틈도 없이 말이야.”


“아무렴 어때? 그보다, 오늘은 이걸로 게임 해보지 않을래?”


그녀는 제각각으로 흩어져있던 동전을 주워담기 시작했다. 움푹하게 만든 손바닥 안으로 짧게 짤랑거리는 소리가 여러 번 들렸다.


잔돈이 총 얼마였던가, 그래 400원이었지. 속으로는 그런 생각을 하며 그녀의 준비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때였다.


“들어는 봤을 거야. 홀수 짝수 게임이라고.”


“잠깐.”


손바닥을 들어 그녀를 제지했다. 만약 그녀가 구상해냈다던 게임이 동전의 개수가 홀수냐 짝수냐를 맞추는 게임이라면, 물론 그 밖의 홀수 짝수라는 이름의 게임은 없을 테니 거의 확정이나 다름없지만.


“난 분명 말했어. 사행성 게임은 하지 않는다고.”


그건 대표적인 사행성 게임이 아닌가.


교실의 몇몇 아이들이 휴대폰을 들고 모여 홀이냐 짝이냐를 점치는 일로 열변을 토해내는 것을 여러 번 본 적이 있다.


“어허~ 종목이 비슷할 뿐이지, 직접 돈이 오가지는 않거든?”


움푹하게 만든 손 위로 반대쪽 손을 덮은 그녀가 양손을 위아래로 흔들기 시작했다.


“자자. 눈 똑바로 뜨지 않으면 안 보인다?”


저것을 뒤섞는 일에 의미가 있을까, 전혀 기대되지 않았다.


한참이나 위아래로 흔들리던 손이 분리되었다. 자랑스럽게 들이밀어 온 왼손과 등 뒤로 숨긴 오른손 중, 나는 왼손이 숨기고 있는 동전의 개수를 맞추면 되는 게임이다.


‘너’는 분명 정신 사납게 흔들던 중, 오른손으로 동전을 옮기는 척을 했겠지. 나는 그런 트릭을 모를 만큼 멍청하지 않았다.


앞서 말했듯이 ‘옮기는 척’이었다. 서툴게 꼼지락거릴 뿐인 손놀림으로는 나의 동체 시력을 속이지 못한다.


“짝수.”


직접 동전을 담아두는 바구니 역할을 하던 손은 굳게 닫힌 상태에서 열리지 않았다.


“기, 기회를 한 번 더 줄게.”


말 만큼이나 흔들리던 그녀의 동공이 나의 승리를 점쳐줬다.


“짝수.”


“마지막 기회야.”


“짝.”


그런 얕은 트릭을 걸다니. 초보군.


“가챠 게임으로 단련된 나를 얕보지 마라, 초보 도박사.”


“가차? 그게 뭔데?”


“있어. 확률에 목숨 걸어야 하는 뽑기 부류의 게임.”


“그런 게임이 있어? 그런데 그거야말로 사행성 짙은 게임이잖아. ‘분명 말했어, 사행성은 하지 않는다고.’라더니만.”


묘하게 내 말투를 따라 하던 너를 보고 있자니 살짝 기분이 나빠졌다. 나를 완벽하게 모방해냈기 때문일 것이다.


“근데 있잖아. 네가 이겼을 때는 나한테 벌칙을 시켜야 한다는 거 알지?”


“알지.”


“생각해둔 거라도 있어? 벌칙.”


아, 그러고 보니.


“과한 것만 아니면 다 들어줄게. 어쩌면 ‘찐~한 것’도 가능할지 몰라?”


그녀가 노골적으로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넘겼다. 머리카락 사이를 파고드는 왼손가락과 그 아래에 덮여있던 새하얀 목덜미가 눈에 들어오는 바람에 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러나 자꾸 정면을 쳐다보라며 소리치는 본능이 강제로 눈을 돌리게 하였다.


아주 잠깐만 쳐다보는 선에서 합의를 본 나는 다시 눈을 그녀에게로 돌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게슴츠레 눈을 뜬 그녀와 눈이 마주치는 바람에 아예 눈을 질끈 감아버리기까지 했다.


“어, 어쨌든 내 선택을 바꿀 생각은 없어. 짝수로 간다.”


과하게 뛰는 맥박 때문에 나올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비겁한 수를 쓰다니. 추후 벌칙을 줄 때는 ‘조금 심한 정도’의 괘씸죄를 추가해보는 것도 고려해볼 만하겠다 생각했다.


그때, `너`의 반응이 나의 눈을 강제로 열어젖혔다.


“후후···.”


그때 떠오른 짧은 단어 하나가 수를 불리더니, 이내 머릿속을 가득 채워버렸다.


`설마`라는 단어였다.


“설마···?”


“그래···. 그 ‘설마’가 맞다!”


‘너’의 왼손이 활짝 펼쳐졌다. 그대로 기세를 이어나가 책상 위로 내용물을 하나씩 떨어트려 보이기까지 했다.


짤랑, 짤랑, 짤랑.


내가 기대했던 `네 번째 짤랑`은 들리지 않았다.


“하.하.하.하.하!”


그녀가 한 글자씩 끊어 또박또박 비웃어댔다. 심지어 웃음소리마저도 홀수로 떨어졌다. 나는 언젠가 봤던 도박 만화의 주인공처럼 ‘크윽···!’하고 주저앉는 장면을 상상했다.


아, 물론 만화는 만화일 뿐이다.

실제로 눈물이 나올 만큼 분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눈앞의 상황을 믿을 수 없을 뿐.


“믿기지 않는 눈치네? 트릭을 알고 싶겠지만 알려주진 않을 거야~”


얄밉다. 정말 얄미운 녀석이라고 생각했다.


“기회를 세 번이나 줬던 만큼, 벌칙은 ‘아주 심한’ 정도가 적당하겠지?”


아주 심한 이라니, 이쪽은 ‘조금 심한’ 정도를 생각했는데.


“네가 그러고도 인간이냐······.”


“흠~ 뭐로 할까~”


그녀는 내 반응 따위가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듯, 가볍게 콧노래로 무시해버렸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창고 내부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걸음걸이는 느렸지만, 기대에 가득 차있었다. 걷는 와중에도 그녀의 입은 ‘흠~’이나 ‘뭐로 할까~’를 반복해서 말했다.


원을 그리며 걷던 그녀는 두 번째 손가락을 아랫입술에 대고 있었다. 고민하고 있는 처지를 대놓고 즐기는 듯한 모습이었다.


“아, 정했어!”


한참을 걷던 그녀가 뜬금없이 급제동을 걸었다. 판결이 내려진 것이다.


그때, 그녀와 나의 시선이 모두 바닥으로 향했다.


어떠한 낙하물을 따라서.




[짤랑-]




가벼운 금속 물체가 낙하했다. 어디서 떨어진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그게 ‘너’의 것임은 알 수 있었다.


그야 네 발꿈치 쪽으로 떨어졌으니까.


“너 동전 떨어트렸어.”


나는 친절히 ‘너’의 발치를 가리켰다. 별 의미가 있는 행동은 아니었다. 그저 동전이 떨어졌음을 알려주는 행위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너’는 조금 전까지의 위상이라고는 온데간데없는 모습으로 굳어버렸다.


“···아.”


“아-가 아니라 주워야지.”


잽싸게 동전을 주운 그녀는 서둘러 자리로 돌아왔다. 원을 그리며 돌던 속도보다 대여섯 배는 빠른 걸음걸이였다.


“동전 떨어트린 게 뭐가 그렇게 충격적인데?”


“아니···! 그냥! 어! 그래서 정한 벌칙이 뭐냐 하면~”


“이봐. 난 이쪽에 있거든? 창밖에 매달려있지 않다고.”


“아, 아하! 그냥 날씨가 궁금해서 쳐다본 거지~민감하게 굴 필요 없잖아~”


솔직히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겠다.


'너'가 너무 심한 벌칙만 내리지 않는다면, 나는 ‘너’의 잔꾀를 알고도 그냥 넘어가 주려 했던 것 같다.


이유가 뭐였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사실대로 말해. 눈 똑바로 보고.”


그녀가 내 눈을 똑바로 마주치는 시간은 채 1초도 되지 않았다. 몇 번을 시켜본들 1초 이상 마주치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었다.


“너의 몰수패다. 판정에 대한 이의는?”


‘너’는 고개를 가로로 내저었다. 입술을 꾹 깨물고 먼 곳을 바라보던 그녀의 표정은 가히 볼만했다.


아마 이 긴장한 표정을 느긋하게 감상하고 싶어 모른 척하려 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너’의 표정은 그만큼 ‘가관’이었으니까.


“좋아. 죄를 지었으니 벌 받을 시간이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테이블 건너편으로 걸어가는 시간만큼은 살아온 어느 때보다도 위풍당당한 포즈를 취할 수 있었다.


소위 말하던 승리의 맛이라는 것, 나는 그것에 취해버렸다.


“이게 내가 정한 벌칙이야.”


그녀는 입을 꾹 다문 채로 고개를 가로로 내저었다. 이의가 없음을 표하던 것보다도 훨씬 강렬하게 말이다.


내가 정한 벌칙은 그만큼 ‘심했다.’


“마셔.”


이번엔 조금 전의 것보다 두 배는 빠른 속도로 고개를 저었다. 저러다가 목이 고장 나버리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 정도였다.


“네가 ‘찐~한 것’도 괜찮다고 말했잖아. 얼른 마셔.”


“장난이었지···! 설마 이런 걸 들이밀 줄은 몰랐으니까···.”


“누가 들어서 오해할 만한 소리는 그만하고 마시기나 해.”


“아악! 위에 하얀 게 둥둥 떠다니잖아! 이게 뭐냐고!”


“그런 건 제조사에 문의해. 나한테 물어봤자 몰라.”


오히려 따지고 보면 ‘진한’ 보다는 ‘미지근한’에 가까웠다.


“그러니까 누가 마음대로 아이스크림을 녹이래?”


나는 예정대로 괘씸죄를 추가했다. 나를 속이려 들었던 것이 괘씸했고, 아이스크림을 소중히 하지 않은 그녀가 괘씸했다.


완전히 녹아버린 갈색 액체를 마시는 것은 그에 대한 합당한 벌이리라,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선, 선처의 기회를 줘···!”


“그런 건 없어. 여태까지 없었고, 지금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거야. 그보다 뭐가 다른데? 그냥 조금 덜 시원한 더위사냥을 마시는 일이잖아.”


“그 부분이 너무 다르다고, 그 부분이! 너도 방금 알게 모르게 강조해버린 그 부분이! 이건 더이상 더위를 사냥하지 못하는 더위사냥이잖아!”


“열 내지 말고 들이키기나 해. 이 정도로 넘어가면 싸게 쳐주는 거야.”


한참을 이런 승강이를 벌이느라 배가 고파졌다. 얼른 게임을 해치우고 밖에 나가서 뭐라도 사 먹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에라!”


더위사냥이었던 액체는 결국 네 입속으로 흘러들어 갔다.


너무 긴 시간 동안이나 승강이를 벌여서, 그리고 네가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꿀꺽꿀꺽 넘겨버리는 바람에 오히려 김이 빠져버렸다.


“야, 이거 생각보다 괜찮은데? 녹으니까 단맛이 조금 사라졌어. 오히려 그냥 자판기 커피에 가까운 맛이야! 너도 마셔봐!”


“어디서 약을 팔아? 그보다 전부 마셔버리고 권유하는 그 태도는 뭔데.”


“칫. 이래서 감이 좋은 녀석은······.”


“다 들린다.”


어떤 맛인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미지근하고 달고, 그야말로 ‘웩-’이라는 표정이 절로 지어지는 맛이겠지. 굳이 마셔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웩···미지근하고···달고···! 기분 나쁜 맛이야···.”


네가 그렇게 표현하고 있었으니까.


“아···나 포카리 좀 줘.”


“내가 입대고 마셨던 건데?”


“뭐야, 너 그런 거 신경 쓰는 타입이었어?”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페트병을 향해 손 하나가 뻗어왔다. 그 손이 너무 잽싸게 치고 빠져버린 탓에, 나는 음료수를 지켜내지 못했다.


“잘 마실게~”


그녀가 고개를 뒤로 젖혀 음료수를 마시는 동안, 나는 그런 ‘너’의 모습을 빤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딱히 이유나 의미가 있어서 지켜보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냥 왠지, 아까의 목덜미나 손가락을 한 번 더 볼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에이~ 뭘 그렇게 원망스러운 눈빛이야! 다음에 내가 사줄게!”


조금 전의 나는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내 것을 마음대로 탐하는 그녀가 실제로 원망스러웠던 것일까. 아니면 평소에 쌓이고 쌓인 피해의식이 몸에 배어 버린 걸까. 잘 모르겠다.


나처럼 '당하고 사는 아이' 중에는 입꼬리가 내려간 모습으로 표정이 굳어버린 사람도 몇몇 보였다.


그들과 같은 모습이 되는 것은 반갑지 않았다.


그들은, 왠지 불행하기를 자처하는 듯한 모습처럼 보였으니까.


후자의 경우는 아니길, 소리 없는 바람이 입안에서 맴돌았다.


“생각보다 빨리 끝났는데, 한 판 더 할래?”


그 무렵, 바람이 사나워지기 시작했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원룸서사시 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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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75회 - 어느 소설(6) 19.11.13 22 0 8쪽
75 74회 - 어느 소설(5) 19.11.11 33 0 11쪽
74 73회 - 어느 소설(4) 19.11.08 22 0 8쪽
73 72회 - 어느 소설(3) 19.11.05 39 0 14쪽
72 71회 - 어느 소설(2) 19.11.02 21 0 11쪽
71 70회 - 어느 소설(1) 19.10.29 23 0 12쪽
70 69회 - 마지막 게임, 작별인사 게임(13) 19.10.26 37 0 11쪽
69 68회 - 마지막 게임, 작별인사 게임(12) 19.10.24 19 0 9쪽
68 67회 - 마지막 게임, 작별인사 게임(11) 19.10.21 22 0 8쪽
67 66회 - 마지막 게임, 작별인사 게임(10) 19.10.19 31 0 13쪽
66 65회 - 마지막 게임, 작별인사 게임(9) 19.10.16 26 0 11쪽
65 64회 - 마지막 게임, 작별인사 게임(8) 19.10.12 22 0 10쪽
64 63회 - 마지막 게임, 작별인사 게임(7) 19.10.10 25 0 11쪽
63 62회 - 마지막 게임, 작별인사 게임(6) 19.10.09 16 0 9쪽
62 61회 - 마지막 게임, 작별인사 게임(5) 19.10.07 34 0 17쪽
61 60회 - 마지막 게임, 작별인사 게임(4) 19.10.05 75 0 10쪽
60 59회 - 마지막 게임, 작별인사 게임(3) 19.10.02 29 0 18쪽
59 58회 - 마지막 게임, 작별인사 게임(2) 19.09.30 26 0 12쪽
58 57회 - 작별인사 게임(1) 19.09.28 72 0 14쪽
57 56회 - 친애하는 너에게(완) +2 19.09.21 67 1 14쪽
56 55회 - 친애하는 너에게(12) 19.09.18 39 0 15쪽
55 54회 - 친애하는 너에게(11) 19.09.15 21 0 9쪽
54 53회 - 친애하는 너에게(10) 19.09.12 30 0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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