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 이라고, 너는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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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1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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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03 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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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회 - 여섯 번째 게임, 릴레이 게임(3)

DUMMY

“암호는 걸어뒀으면서 자물쇠는 까먹었나 보네.”


“실수했을 수도 있지~ 그래서 어떤 문장으로 이어갈 거야?”


너는 뜬금없는 문장을 늘어놓았으면서, 그 뒤로 내가 수습해나갈 내용이 궁금하긴 했던 모양이다.


“나는 집주인의 이름을 애타게 불러봤다.”


‘여보세요’ 혹은 ‘저기요’ 같은 말이 집 안에 메아리쳤을 것이다.


“...으아. 자꾸 무서운 방향으로 흘러가는 걸....”


너는 맛없는 젤리라도 씹은 것처럼 표정을 구겼다.


“아마 산타클로스도 이런 집은 지나치겠지.”


“그런데 있잖아, 너는 그런 집에다가 대고 집주인의 이름을 불러댄 거야? 만약 집주인이 귀신이면 어떡하려고?”


“...아, 맞네.”


머릿속에 커다랗고 두꺼운 폰트로 ‘아.’ 하는 글자가 그려졌다.


그려졌달까, 오히려 커다란 도장이 쿵 하고 찍힌 느낌이었다.


“이건 내 실수네. 이번에는 네가 어떻게든 수습해줘.”


“흐음...그렇다면 ‘그러나 집주인의 이름을 몰라서 부르지 못했습니다.’로 할게.”


집주인의 이름을 불렀으나, 이름을 몰라서 부르지 못했다?


“야, 그건 그냥 오류잖아.”


“왜? 성은 알았는데 이름을 몰랐다고 하면 되지!”


“그러니까, 네 말은 ‘김...’ 이나 ‘이...’에서 말문이 막혀버렸다고?”


“바로 그거지!”


“성은 어떻게 알았는데?”


“성은...집 앞에 명패가 걸려있었다고 할까?”


“일단 보통의 가정집은 아니란 말이겠네. 명패도 유서 깊은 집안 정도는 돼야 걸까 말까 하니까.”


“그렇다면 집주인은 사실 대대손손 이어져 온 부잣집의 주인이었구나?”


“부잣집이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다만 이야기의 흐름이 아쉬운 방향으로 흘러가 버렸다는 게, 나는 아쉬웠다.


나는 누군가 설정하지도 않았는데, 나와 집주인의 관계를 꽤 각별한 사이로 착각하고 있던 모양이다.


“일단은 내가 집주인과 생판 남이었는 얘기네.”


생판 남이었거나, 아니면 서로의 이름마저 잊어버릴 정도로 오랜 시간 만나지 않았던가.


결국, 가깝지 않았다는 말이 되어버렸다.


물리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음~ 사실 그건 아닐지도 몰라.”




"왜냐면, 너도 내 이름을 불러준 적이 없잖아?"




“잠깐. 만약 이 장면을 소설에 적어둘 거라면 방금 대사는 각색이 필요할 거야. ‘어느 유명한 소설’에 쓰였던 것과 똑같거든.”


“아, 그래? 그럼 다음부터는 주의할게, 히히.”


“아무리 지금처럼 빙글빙글 웃어본다 해도, 저작권 보호 협회는 그리 만만하지 않아.”


“그래도 죽기 전에 이 대사를 쳐보는 게 소원이었다고 말하면 봐주지 않을까? 히히~”


“그건 판사님이 정하시겠지.”


네가 피시식하는 웃음소리를 내는 사이, 나는 당장 눈앞에 놓인 갈림길의 방향을 정해야만 했다.


문이 열렸으니, 이대로 들어가야 하는가.


아니면 문밖에서 반년이나 했던 짓을 또 반복해야 하는가.


아.


막상 반년이나 이런 짓을 하고 있었다 생각하니, 후자를 택하는 쪽이 얼마나 바보 같은지에 대해서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나아가기로 했다.


발은 생각보다 가벼웠다.


허무할 정도로.


“나는 집안에 들어가서 집주인을 찾기 시작했다. 지금부터는 가택 무단 침입 죄가 성립되는 건가?”


“흐흐 너무 빡빡하게 가진 말자. 그럼 나는 [집안에 들어서자, 등 뒤에서 ‘누구세요?’ 라며 말을 걸어왔습니다] 로 할게.”


“나는 목소리가 난 곳을 돌아봤다.”


이야기 속의 내가 고개를 돌렸다.


뒷일을 전혀 알 수 없는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물론 등 뒤의 인물을 정하는 것은 내 몫이 아니어서, 나는 어떤 사람을 마주치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조심성이 부족한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이대로 등 뒤에서 저주받은 인형이 튀어나올지, 아니면 ‘반년 전에 죽은 집주인의 유령’이 튀어나올지 누가 알겠는가.




아, 단 한 사람만은 알고 있었다.


내가 곧 마주치게 될 ‘어떤 사람’의 정체를 결정할, 너만은.



그럼에도 나는, 감히 등 뒤의 인물을 상상해버렸다.


돌아본 곳에는



“그곳엔 머리가 새하얗게 바랜 사람이 있었습니다.”



‘너’가 있었다.


그 상태에서, 현실 속 너의 말이 머릿속에 흘러들어왔다.


.


잠시 눈을 깜빡였을 뿐인데, 너의 ‘색깔’이 바뀌어있었다.


마치 내가 봤던 먹색은 착각일 뿐이라며, 누군가 나를 다그치는 것 같았다.


[많이 피곤한가 보구나. 조금 쉬렴.]


같은, 아무 위로도 되지 않는 말로서 내 등을 토닥여주는 것만 같았다.



이 새하얀 머리카락은 이미 일어난 일이라서, 나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었다.



그렇게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해버린 순간, 너의 머리가 하얗게 변해버린 일은 이미 ‘당연한 일’이 되어버렸다.



“...나는 등 뒤의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어서 와.


“라고, 그 사람이 말했습니다.”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마주해버리니,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게 되어버렸다.


이야기 속의 나는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이미 눈물을 흘리는 일에 바빠서, 말을 꺼낼 여유가 없었다.


이 주고받는 이야기 속의 나는


새하얗게 변한 너의 앞에서 한없이 작아졌다.


턱 끝의 물방울이 발등에 떨어질 만큼 작아졌다.



“...나는....”




나는




“...사람을 잘못 봤습니다, 라면서 집을 빠져나갔다.”




나는 여름의 손님을 ‘나’라고 부르기 시작한 순간부터, 어떤 기묘한 답답함에 시달리고 있었다.


죽음의 공포는 아니었다.


가슴이 차갑게 식어가지도, 긴장에 식은땀이 흐르지도 않았다.


다만 속이 틀어막혀서, 몸속으로 흘렀어야 할 수분이 목으로 차올랐다.


아마 금요일의 네가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가 얼마나 길었는지’ 보여줬을 때, 이것을 처음으로 느껴봤던 것 같다.


몸 속에서 물이 차오르는 건지


내가 물 속에 잠기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답답함이 목을 조여왔다.


“...나...잠깐 좀....”


당장 이곳을 벗어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어버릴 것 같아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내 등 뒤로





[다녀올게.]





형의 목소리가 닿았다.


아주 작고, 선명한 목소리가.




그리고 심장이 발끝까지 떨어졌다.





[엄마 또 밤새웠어?]


[아니야. 내일 얘기할게.]


[이럴 거면 나는 왜 데리고 가는 건데?]


[또 병원이야?]


[샴푸랑 드라이어는 왜 챙겨가?]


[언제 와?]


[내가 왜 닦아줘야 하는데?]


[그만 아프면 안 돼?]


[엄마가 왜 미안한데?]


[형은 아무것도 안 해.]


[또 나가?]


[아침에도 다녀왔잖아.]


[안 가면 안 돼?]


[형은 어리광만 피워.]


[혹시 내가 귀찮아?]




생일인 거, 아무도 모르는구나.



나는 뭐야?



형은 언제까지 아프기만 할 거야?



형은 쓸모없는 인간이야.



차라리 없는 쪽이 낫지 않아?




알약 하나 정도는 없어도 괜찮겠지.




왜 형만 선물을 받아?



나는?





설마 떨어트렸다고 고장 나진 않았겠지?





엄마! 밖에 어떤 사람이 비명 지르고 있어.




엄마?




어디가?




엄마?






.






천천히 뱉고, 다시 들이마셔.



응. 그렇게 천천히.



길고 가늘게 내쉬어봐.



괜찮아. 잘하고 있어.



괜찮아.



너는 지금 여기에 있어.



괜찮아.




창고 안을 비집고 다니는 쇳소리가 차츰 수그러들었다.


이내, 점점 사람의 것에 걸맞은 숨소리로 옅어졌다.




“...하아...하아...하....”



“옳지. 잘했어.”



앞머리 끝에 매달려있던 땀방울이 너의 옷 위로 떨어졌다.


그제야 이곳이 너의 품 속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너를 밀어내려 했지만.


“괜찮아.”


부드럽게 잡아당기는 너를, 온몸에 힘이 빠진 나로서는 이길 수 없었다.


너에게 끌려다닐 때 느꼈던, ‘내 힘으로는 너의 진심을 이길 수 없다’ 라는 사실에 또 한 번 가로막혀 버렸다.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심장 소리와, 내 것과 조금은 다른 속도로 뛰는 맥박음이 머리로 전해졌다.


.


시간이 조금 더 흘렀을 때는 누군가의 부드러운 향기를 느낄 수 있을 만큼의 여유도 생겼다.



“...미안.”



너는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야, 라고.



.



마실 것을 사오겠다며 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따라가고 싶었지만, 다리가 도통 말을 듣지 않았다.


창고를 떠나던 너는 ‘너를 등에 업고 다니는 건 무리니까 잠자코 여기에 계세요~’ 라는 말과 함께, 그대로 눈앞에서 사라졌다.


.


네가 떠나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더이상 더위가 느껴지지 않을만큼 긴 시간이 흘렀던 것 같다.


그 사이, 나는 의자 위에서 느린 속도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누운 것도, 그렇다고 앉은 것도 아닌 자세였다.


나는 그대로 고개만 돌려, 창밖의 풍경을 쳐다보기만 했다.


무소유나 번뇌, 또는 해소라든지.


실생활에 쓰이기 어려운 단어를 떠올리게 했던 푸른 세상은 이번에도 또 다른 깨달음을 알려주었다.



아니.


다시 생각해보니까 깨달음은 아닌 것 같다.


이미 알고 있던 것을 다시 한 번 일깨워준 것에 가까웠다.


그 일깨움이란, 뻔한 것이었다.


네가 죽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는, 뻔하디뻔한.




아니, 아니다.


네가 사라져버린 지금만큼은 나도 너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그러니 이번만큼은, 아주 조금만 더 솔직한 고백을 해보겠다.




나는, 솔직히 네가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


괜히 소리를 내어 말하면 어떠한 기적이 펼쳐지지는 않을까.


말에는 힘이 있다고 하니까.




그런 미신에 기대고 있는 나 자신이 부끄러워서, 나는 그대로 책상에 엎드려버렸다.



.



여름 바람이 발목에 감기면서, 기분 좋은 아늑함이 느껴졌다.


그것은 곧 깊고 어두운, 그러나 편안한 공간으로 나를 데려갔다.


나는 중요한 사실 하나를 잊어버린 듯한 찝찝함을 느꼈지만


[결국, 전부 상관없는 일이야.]


라는 나무의 목소리에, 그만 모든 것을 놓아버렸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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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78회 - 어느 소설(9) 19.11.19 16 0 13쪽
78 77회 - 어느 소설(8) 19.11.16 22 0 11쪽
77 76회 - 어느 소설(7) 19.11.14 27 0 10쪽
76 75회 - 어느 소설(6) 19.11.13 22 0 8쪽
75 74회 - 어느 소설(5) 19.11.11 33 0 11쪽
74 73회 - 어느 소설(4) 19.11.08 22 0 8쪽
73 72회 - 어느 소설(3) 19.11.05 39 0 14쪽
72 71회 - 어느 소설(2) 19.11.02 21 0 11쪽
71 70회 - 어느 소설(1) 19.10.29 23 0 12쪽
70 69회 - 마지막 게임, 작별인사 게임(13) 19.10.26 37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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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67회 - 마지막 게임, 작별인사 게임(11) 19.10.21 22 0 8쪽
67 66회 - 마지막 게임, 작별인사 게임(10) 19.10.19 31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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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64회 - 마지막 게임, 작별인사 게임(8) 19.10.12 22 0 10쪽
64 63회 - 마지막 게임, 작별인사 게임(7) 19.10.10 25 0 11쪽
63 62회 - 마지막 게임, 작별인사 게임(6) 19.10.09 16 0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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