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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밥먹고하죠
작품등록일 :
2019.06.24 17:52
최근연재일 :
2019.09.29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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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29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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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쪽

#107 어느 오후(完)

DUMMY

“아이고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난 동네 놀이터에서 푸념을 했다. 지저분한 그네에 몸을 턱 올리고, 보름달이 둥그렇게 뜬 밤 하늘을 봤다. 내게 남은 시간 421일. 5시간만 더 지나면 그것도 이제 하루 차감이다.


“실감은 잘 안 되네.”


난 주먹을 폈다 쥐었다하는 것을 멍하니 바라봤다. 수명이니 뭐니 하는 소리를 들어도 잘 와닿지 않는다. 지금 당장도 밥 잘 먹고, 잠만 잘 자는데. 1년 남짓 후엔 죽는다니. 정말 그렇게 될지 안 될지 긴가민가하다.


“상태창.”


켜놓고 보니 참 길게도 정보가 늘어졌다. 이걸 보게 된지 그렇게 긴 세월도 아니건만. 스킬이나 스텟을 볼 때마다 애환이 서린 이력서를 보는 것 같다. 그리고 가장 아래에 쓰여있는 남은 수명 정확히 421일.


“에효, 이게 뭐 하는 짓이냐.”


한숨을 쉬고 그네를 타기 시작했다. 이제 인생 즐길 날은 별로 없는데, 아무도 없는 이런 곳에서 궁상이나 떨고 있다니. 군대에서 겨우 휴가 나와서 하루 왠 종일 pc방에 틀어박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잖은가.


띠리리리링!


그네가 뒤로 넘어가기 직전까지 타는데, 전화가 울렸다.


나는 발신인을 확인하고, 소심하게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

“어디야?”

“그냥 주변 놀이터.”

“...돌아와. 밥은 먹어야지.”

“어...그래.”

“빨리 와.”


목소리가 7시간 전에 비해 확실히 누그러져 있다. 난 그네에서 내려 빨리 걷다가, 이내는 달리다가, 뚝 멈췄다. 도로 옆에 있는 트럭에서 옛날 통닭들이 노릇노릇 구워가고 있는 게 보였다.


‘뇌물이라도 있는 편이 낫겠지.’


난 핸드폰으로 한창 축구를 보고 있는 트럭 아저씨에게 말했다.


“3마리...아니, 4마리 포장해주세요.”


***


띠리릭.


문을 열고 들어가자, 더운 공기가 확 들어왔다. 양손 가득 치킨을 들고 있던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이 냄새는...


“치킨 샀어?”

“좋아하잖아.”


은시령이 데퉁스레 받아쳤다. 다리를 모로 꼬고 앉아있는 그녀 앞에는 유명 브랜드 치킨박스가 2개나 있었다. 난 그 옆에 4개나 되는 닭을 추가하고, 쭈뼛쭈뼛 맞은 편에 앉았다. 그러고 시선을 살짝 올려 눈치를 봤다.


은시령은 무미건조한 얼굴로 치킨들만 바라보고 있었다. 눈가가 꽤 부은 게, 내가 나가

서도 한참을 울었던 듯하다.


‘그나저나...’


난 치킨들을 보며 눈알을 뒤룩뒤룩 굴렸다. 저걸 지금 뜯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점심도 제대로 안 먹어서 배고픈데. 식으면 맛 없는데. 아, 그나저나 냄새 정말 죽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생맥도 좀 사올 걸 그랬...


“며칠 남았다고 그랬지?”


잡 생각을 하던 도중, 은시령이 무미건조하게 물었다. 난 풀어지려는 표정을 고치고 답했다.


“421일.”

“......”

은시령은 길게 침묵하더니, 다시 물었다.

“병원은 가봤어?”

“응. 이상 없다고 하더라.”

“지금 어디 몸 아픈 데는 없고?”

“멀쩡해.”

“그래······”


잠시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은시령이 갑자기 손을 뻗었다.


“뭐, 뭐야. 왜 이래?”

“가만있어봐. 어...너. 그 팔찌 어딨어?”


내 손목을 어루만지던 손길이 급해진다.


“뭐야? 늘 차고 다녔는데 어따 둔거야?”

“깨졌어.”

“뭐?”

“사람들 살릴 때, 너무 많이 썼는지 그냥 지가 알아서 깨져버렸어.”


내 변명에 은시령의 샐쭉한 눈빛으로 흘겨봤다. 그러나 난 충분히 조심해서 말했다. 과거의 실패를 양분 삼아 더더욱 세심하게 구라를 친 것이다. 은시령도 이번엔 나의 포커페이스에 말려들었는지, 더 추궁하진 않았다.


‘휴.’


난 가슴을 쓸어내렸다. 팔찌는 당연히 가지고 있다. 인벤토리 스킬이 SSS급에 오르면서, 아공간에 넣어두기만 해도 물건의 기능을 쓸 수 있게 된 덕에 굳이 찰 필요는 없어졌지만.


“딱딱한 이야긴 됐고. 이제 밥 좀 먹자.”

“그래. 먹자 먹어.”


나를 골똘히 보던 은시령은 돌연 홀가분해진 표정을 했다. 그녀는 다정한 손길로 박스들을 뜯고, 냉장고에서 종류별로 술을 꺼냈다.


“그새 장 봤었어?”

“응. 내가 마실려고.”

“어,음...”


뻘쭘하게 치킨 조각을 들자, 은시령이 닭다리를 내밀었다.


“먹을 것도 많은데, 왜 가슴살 먹어? 이거 먹어.”

“...이제 괜찮아?”

“괜찮고 자시고, 이미 결정된 일이잖아. 되돌릴 수도 없고.”


은시령은 내 손에 닭다리를 쥐어 주더니 소주 한 컵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녀는 마시자마자 취한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니까 남은 시간 아끼고 아껴서 재밌게 보내야지. 질질 짜고나 있으면 아깝잖아. 안 그래?”


허심탄회하게 말하는 은시령을 빤히 보던 나도 씩 웃었다.


“그렇지. 오늘은 먹고 마시고 죽자! 아자!”

“아자!”


우리는 술잔과 닭다리를 부딪히고 새벽까지 떠들고 웃고 부어라 마셔라를 반복했다.


그렇게 내가 불콰한 얼굴로 고개를 떨구고, 테이블에 엎드리기를 약 1분.


잠잠해진 새벽의 방안에서, 의자 끄는 소리가 아주 약하게 났다. 그리고 이어지는 조심스런 발걸음 소리. 척 봐도 매우 조심한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난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었다.


깊은 밤. 드르륵 드르륵 거리며 서랍장 열리는 소리만 작게 나는 것을. 내가 깰까 경계하는 몸짓이 자연히 연상되지만, 그 속에서 다급함도 느껴졌다. 초조해하는 은시령이 자연스레 그려진다.


“아무리 찾아봐도 없어.”


내가 엎드린 채 말하자, 은시령이 뒤늦게 멈췄다. 벌려놓은 서랍장도 닫지 않은 채 그녀가 태연스럽게 물었다.


“그럼 어딨는데? 어디다 숨겼는데.”

“휴우, 시령아.”

“너, 착각하지마. 네가 그러고 죽으면 내가 고마워 할 것 같아?”

“······그래서 네가 팔찌 차서 날 살리기라도 하겠다고?”

“그래! 안 될 게 뭐 있어? 어차피 그걸로 날 살린 거잖아.”

“쉽지 않아. 수명은 둘째치고, 그리고 스킬을 얻으려면 ”

“넌 했잖아! 네가 잘만 가르쳐주면 되잖아! 왜 나는 안 된다고 벌써 부터 단정 지어?”


은시령이 쿵쿵거리며 다가와 네 어깨를 콱 짚었다.


“너 왜 그래? 더 살기 싫은 사람처럼, 왜 다 포기한 것처럼 구냐고! 내가 살려줄게. 그럼 되는 거잖아!”

“시령아. 말했지? 스킬을 쓰는 순간. 수명이 정해져. 스킬을 쓰면 수명이 줄고.”

“그까짓 수명 날아가도 나는......!”

“처음에 확정된 수명이, 상상도 못하게 짧을 수도 있어. 몇 년이 아니라, 몇 달, 당장 내일이 될 수도 있고.”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잠든 새 이것저것 좀 알아봤거든. 네 말대로 살고 싶어서. 그래서 스킬을 이래저래 파보니까 나오더라. 수명은 수많은 변수로 정해지는 것이므로, 처음에 수명이 확정되는 그 순간 평균적인 노령의 나이일 수도, 그보다 길 수도, 혹은 한없이 짧을 수도 있다고.”


나는 입을 앙 다물고 노려보는 은시령에게 담담히 털어놓았다.


“나야 운이 좋아서 나름 넉넉하게 나왔다지만, 넌 아닐 수도 있어. 그러니까 하지 마. 괜히 네가 도박할 필요 없어. 수명이 확정되면, 나도 그걸 못 바꿔. 그러니까··· 팔찌 같은 건 그냥 잊어버려.”

“도박할 필요 없어? 너 말 자꾸 그따위로 할래? 이건 나한테 도박도 뭣도 아냐. 그냥 내가 해야 하고, 하고 싶은 일일 뿐이라고.”

“네가 나보다 더 빨리 죽을 수도 있어.”

“그딴 건 상관없어!”


비명 지르듯 내 말을 묵살한 그녀가 내 눈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나도 피하지 않았다. 은시령의 두 눈동자는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그녀가 눈동자만큼이나 단단한 목소리로 확언했다.


“살아도 너랑 살 거야. 늙어서 쭈글쭈글 할머니가 되도 너랑 같이 될 거라고! 그러니 제발.”


은시령이 나를 안았다. 물기가 가득한 시선이 내 얼굴을 부드러이 쓸어 훑었다. 따뜻하나 조금 거칠어진 손이 내 손을 맞잡았다. 그녀가 점점 심란해지는 내게 소망한다.


“그러니 범준이 너도, 포기하지 말아줘.”

“...포기가 아냐. 선택이지.”

“그게 무슨 선택이야? 시도해보지도 않고 죽는 게 선택이야?”

“‘네 목숨을 건’이라는 단서가 붙잖아. 난 네가...나 때문에 엿되는 게 싫어.”

“그럼 난?”


은시령의 원망스런 물음에 난 할 말을 잃었다. 은시령이 한 없이 일그러진 얼굴로 가슴을 쳤다. 도저히 반박할 수 없는 한탄이 그녀에게서 흘러나왔다.


“네가 죽고 난 뒤에 난 뭐가 되는데.”

“시간이 지나면...”

“널 잊고 새 출발 할 거라고? 나중엔 행복해질 거라고?”


은시령이 통곡하듯 소리쳤다.


“그게 말이 돼? 진심으로...그런 소릴 하는 거냐고.”

“......”


반사적으로 변명을 내뱉으려다...참았다. 알고 있다. 은시령은 내가 죽은 후에, 옳다구나 하고 자기 삶을 살 위인이 못 된다. 나를 죽였다고, 미친 듯이 원수를 쫓아다닌 걸 보면...알만하다.


이 녀석은 내가 죽고 나면, 세계오지를 다 뒤져서라도 팔찌를 찾고 날 살려낼 계획을 짜겠지. 그리고 계획대로 행할 거고. 하지만...설사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날 은시령의 삶을 두고 빠칭코 레버를 돌리는 짓 따윈 할 수 없었다.


한 번. 그녀가 죽은 걸 봤으니까.


내가 그녀를 죽여본 적이 있으니까. 그때의 괴로움이 얼마나 큰지 아니까.


그러니까...은시령이 아무리 외롭더라도, 아무리 이 녀석이랑 더 시간을 보내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고 싶어도.


나는......


“네가 뭘 망설이는지 알아.”


진창 뒤흔들리는 마음에 파문이 인 기분이다. 은시령은 한 마디를 던지고 날 지그시 봤다. 투시도, 주시하는 눈도 아닌, 그저 평범할 뿐인 두 눈동자로 나를 본 그녀는 신비하게도 내 마음을 읽어냈다.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도 정말 괴로웠어. 당장 죽고 싶을 만큼. 날 포기하고 싶을 만큼. 하지만...”


은시령이 날 끌어안았다. 내 귓가로 울음기 섞인 진심이 스며든다.


“지금은 이렇게 살아서 너를 만나고 대화하고 있어. 널 다시 볼 수 있었어. 여기 이렇게 너와 내가 있을 수 있었어. 그러니까...”


은시령이 확신을 담아 말했다.


“너도 포기하지마 범준아.”


***


눈물과 스킨쉽을 전면에 내세운 설득. 은시령의 그 끈질긴 설득에 난 결국 넘어갔다. 단, 조건을 붙였다. 앞으로 200일. 그러니까 대략 반년간 나와 사는 동안에도 쭉 마음이 변치 않는다면. 만약 그런다면. 네 뜻대로 팔찌를 넘기겠다고. 그렇게 약속했다.


은시령은 그 제안을 자신만만하게 받아들였다. 지딴에는 뭘 당연한 걸 약속까지 하느냐고 난리를 쳤지만, 그건 섣부른 자만이었다.


난 일부러 정 떨어지게 행동하며 은시령의 인내심을 시험......하지 않았다. 미쳤나? 그딴 짓을 하게. 남은 짧은 생에 좋은 추억 잔뜩 쌓아도 모자랄 판국에 난 괜히 마음에도 없는 짓은 하지 않았다.


그럴 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손을 맞잡고 놀러 가고, 영화 보고, 같이 침대에 누워 숨결을 나눴다. 내숭도 가식도 없이, 이제 더 숨기는 것도 없이 진심으로 그녀를 대했고, 그만큼의 대접을 돌려받았다. 그렇게, 200일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오늘이네···”


약속한 날의 아침이 밝자, 은시령이 즉각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난, 인벤토리 안에 숨겨두었던 팔찌를 꺼내 넘겼다. 알림에 타인에게 양도 시 SSS의 권리권을 포기하게 된다는 경고가 나왔지만, 쿨하게 씹었다.


“생각보다 무겁네.”


은시령은 조심스레 그걸 받더니 눈을 가늘게 좁혔다.


“부서졌다더니.”

“커흠!”


크게 헛기침하곤 입을 닫았다. 이제 더 할 이야기는 없다. 지난 200일간 은근히 그냥 관두는 게 어떻냐고 꼬드겨도 봤지만, 은시령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러니 이제 와 몇 마디 붙인들 결정이 번복되진 않으리라.


“괜찮겠어?”


손안에 든 팔찌들을 물끄러미 보던 은시령이 돌연 내게 물었다. 근데 질문이 이상하다.


괜찮겠냐니? 그건 오히려 내 쪽에서 물을 말 아닌가?


“괜찮겠냐니, 뭐가?”

“이거 팔찌들, 내가 들고 딴짓하면 어쩌려고?”

“뜬금없이 그건 왜 물어봐?”

“나 도둑이었잖아. 안 불안해? 게다가 이걸 잃으면 넌···”


“실없긴. 어. 안 불안해. 흰소리 말고 준비나 하셔. 어차피 스킬 생기려면 아마 한참 지나야 할 거야.”


어쩌면 아예 안 생길 수도 있고. 뒷말을 삼킨 나는 팔찌에게서 얻은 ‘시간 조정’ 스킬에 대한 정보를 상기했다. 스킬의 가장 큰 문제가 되는 ‘확정된 수명은 바꿀 수 없다.’는 조건. 그러나 이것에도 허점은 존재했다. 조건에 의해 수명이 다해 죽은 이는 치유 스킬로도 되살려 낼 수 없지만.


몸 상태를 스킬의 부작용이 걸리기 전으로 돌리면, 조건 자체가 성립되지 않아 저주는 풀리게 된다. 이 가장 큰 걸림돌은 해결책이 나왔기에, 걱정해야 하는 것은 오직 하나. 은시령의 수명이었다.


“그동안 몸에 좋다는 거 많이 먹었으니까, 잘 나오겠지?”


내가 은시령의 정수리를 툭툭 치며 묻자, 그제서야 그녀가 맑게 웃었다.


“당연하지.”

“긴장하지 마. 스킬은 어차피 시간이 좀 지나야...”

“잠깐.”

“어? 왜? 어디 막 아파? 기분 이상해?”


팔찌를 끼자마자, 멍해지길래 물었는데. 은시령이 잘 듣고도 순간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뱉었다.


“생겼는데? 스킬.”

“······뭐?”

“이거 맞지? ‘시간 조정’. 끼자마자 갑자기 생겼어.”

“푸하하하하하! 야, 농담도 정도껏 해야지!”

“진짜야. 역행의 시간. 도약의 시간. 이거 맞잖아.”


은시령의 말에, 난 쥐어 짜내던 웃음을 뚝 끊었다. 억지로 구부린 입꼬리와 눈매에 금이 쩍쩍 가는 기분이다.


‘누군 그 지랄을 해서 겨우 됐는데, 얘는 하이패스라고?’


팔찌를 매섭게 노려봤다. 이 새끼가 진짜 사람 차별하나. 내가 그토록 빌 때는 외면하다 막판에 막판까지 가서 선심 쓰듯 던져주더니. 은시령은 끼자마자...


“알림에, ‘본주의 바람에 의해 스킬이 생성되었습니다.’이러던데.”

“진짜?”

“응. 본주라니. 이거 너 아냐?”

“그건.”


그렇지. 팔찌 명칭이 서범준 스테이틱스 시스템이니 본주가 나라고 해도 이상치 않다.


처음에 습득한 건 신민아겠지만 그 여자가 그렇게 설정을 해놓은 듯 하니.


그나저나 내가 바랐다고? 은시령이 하루살이가 될지도 모르는 스킬을? 내가?


별별 의심에 의혹이 생겨났지만, 사실은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 바랐다. 은시령과 더 오랜 시간을 보낼 수 있기를. 은시령이 나를 위해 하는 말들이 그저 말에서 끝나지 않기를 나는 기대했었다.


그러면 안 된다고, 그녀가 어떤 선택을 내리든 존중해야 한다고. 틈만 나면 되뇌이기도 했지만, 결국 내가 진심으로 소망했던 건 그런 미래였다.


전지전능한 팔찌께서는, 아마 그런 걸 눈치라도 채셨는가 보다.


‘그렇다면...’


굳이 차고 있지 않아도 내 마음을 반영한다면, 부디...


“시간 조정. 역행의 시간.”


‘함께’ 살아간다는 기도조차 이루어주었으면 하고 바랐다. 설령 이 선택에 후회하게 될지라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간절하게 갈망했다. 눈이 따가워질 만큼 붉은 빛이 번쩍여도, 그 때문에 난 눈꺼풀을 닫을 수가 없었다.


“후우.”

“어때?”


팔찌를 모두 은시령이 타고 있어서 내가 메시지를 들을 순 없었다. 그러나 굳이 상태창 따위를 보지 않아도 은시령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벌겋게 상기된 얼굴과 파르르 떨리는 팔이 내 몸에 달라붙었다. 그녀의 환희 어린 외침이 들렸다.


성공이었다. 그녀의 수명은 24894일. 원래 내 것보다 9년은 더 길었다.


***


은시령의 호언장담이 현실화된 이후. 우리는 이성을 놓고 한참을 방방 뛰었다. 체면이고 존엄이고 나발이고 울며불며 날뛰었던 기억이 났다. 심지어 옆에서 시끄럽다고 문을 실컷 두들길 때도 무시하고 소리를 질렀던 것 같다.


“계 탔네.”


내 썰을 들은 백화영, 아니 아멜리아가 피식 웃었다. 선글라스를 끼고 흰 마스크까지 했지만 여전히 미모를 엿볼 수 있는 얼굴이 씰룩댔다. 그녀는 가림막 너머로도 알만한 장난스런 미소를 지으며 입을 떼었다.


신민아가 빙의하는 통에, 본의 아니게 유창해진 한국어가 자연스레 튀어나왔다.


“그래서? 잘 살고있는 사람 불러낸 이유가 뭐야? 생존 신고하려고?”

“아니, 받으려고.”


선선한 대답에 아멜리아의 미간이 좁혀졌다.


“뭔 소리야?”

“살만하나 해서.”


짤막한 답에 아멜리아는 입술을 비틀다 말았다. 그러곤 팔짱을 끼고 팔을 검지로 두어 번 두드렸다.


“물 만난 고기지. 겨우 그 광년이한테서 풀려났는데.”

“그게 아니라.”

“알아. 뭔 얘긴지. 주변에서 쑥덕대는 애들? 당연히 있지. 나 때문에 가족이 죽었다 친구가 다쳤다 하는 애들. 그런데 뭐 어쩌겠어? 이제 와서 제가 아니라요. 다른 년이 한 건데요...이럴 수도 없잖아.”

“······.”


태연한 대꾸에 침묵하자, 아멜리아가 버블티를 쪽 빨아먹고는 일어섰다.


“더 할 말 없음 간다. 네 면상 보면 그때 생각나서 속이 더부룩하거든.”


미련 없이 돌아서는 그녀에게 말했다.


“힘들면 말해. 더 버티기 힘들면 사람들 기억을...”

“됐다. 됐어. 괜한 오지랖 부리지 말고 네 애인이나 잘 챙겨.”


내 말을 중간에 잘라먹은 아멜리아가 흘려가듯 말했다.


“마지막엔, 고마웠다.”

“너야말로. 고생했다.”


아멜리아는 팔을 몇 번 휘저어준 후, 대로변의 사람들 속으로 사라졌다. 난, 그녀를 보고 하늘을 봤다. 쾌청한 하늘엔 구름 몇 개가 떠돌아다녔다. 난 그걸 멍하니 지켜보며 읊조렸다.


“데이트하기 졸라좋은 날씨네.”


난 멀리서 손을 휘저으며 다가오는 은시령을 맞아 일어섰다. 순백색 윈터 드레스와 왼팔에 낀 팔찌가 해를 받아 밝게 빛났다. 난 그 반쪽이 메워진 오른팔을 들어 흔들어주었다.


그런 오후였다.


작가의말

안녕하세요. 밥먹고하죠 입니다.

우선, 여기까지 읽어주신분들께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글을 쓰고 댓글을 읽으면서 많이 배운 것 같습니다.

전개의 문제. 주인공의 문제. 개연성의 문제 등등...

제가 봐도 문제가 많다고 생각되었고, 솔직히 말하면 중간에 연중을 하고 싶기도 했지만...

그래도 끝까지 봐주신 분들 덕에 완결은 칠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변변찮은 소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욱 좋은 작품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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