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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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2월29일생
작품등록일 :
2019.06.26 04:57
최근연재일 :
2020.05.21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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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02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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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갈등의 반대말은 화해와 배려 - 7

DUMMY

트리톤의 워터캐슬을 방문을 마친 다섯은 바닷속에서 나왔다. 사람들 눈에 뜨이면 곤란해지기에 나올 때 역시 인적이 드문 곳으로 나와 여관으로 향했다. 아리엘은 별말 없이 선두에서 발걸음을 재촉했고, 나머지 넷은 바닷속 여행이 신이 났는지 밖으로 나오자마자 열심히 떠들었다.


“와! 정말 그 산호로 만들어진 성은 진짜 아름다웠어. 그 산호들 덕분에 바닷속에 그리 밝다니 정말 놀랍다니깐!”


“그러게 말입니다. 한스님. 제가 상상했던 건 우중충하고 어두운 바닷속이었는데 정말이지 그런 놀라운 광경이 펼쳐져 있을 줄이야! 위대하고 자비로우신 아그나달린님도 그 광경을 보셨더라면 저와 함께 감동의 물결에 눈물을 흘리셨을 겁니다. 아! 눈물을 흘리는 건 수행금지 항목 24번째라 울면 안 되지만 말입니다.”


“파시비엔! 너는 바닷속 광경보다는 헐벗은 트리톤 아가씨들에게 더 관심이 갔던 거 아니었니? 아주 그냥 입이 귀에 걸려서 얼굴까지 시뻘겋게 달아오르더니만 뭐! 거기엔 보석이나 보물들도 많겠지? 그래 맞다! 진주! 마음 놓고 다닐 수 있었으면 진주라도 훔쳐 오는 건데. 아쉽다. 아쉬워!”


“흐흠! 뭐 우리랑 생활습관이 다르니까 옷차림도 그런 거겠지.”


카데스가 레일라의 말에 아까의 흐뭇한 광경이 떠올랐는지 헛기침을 했다. 애써 본인은 파시비엔과 동급으로 취급하지 말라는 듯 말을 꺼냈다. 옆에 있던 한스도 멋쩍게 웃으며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이제 어디서부터 일을 시작해야 할지 걱정이다. 그래도 예전엔 아무리 위험했어도 어느 정도 정보를 가지고 움직였는데 이번에는 감이 전혀 안 와.”


“영 못 미덥긴 하지만 감 좋은 녀석 하나 있잖아. 어차피 보수를 받고 움직이는 것도 아니니까 적당히 하자고. 적당히!”


레일라가 아리엘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한스에게 말했다.


“그래도 레일라! 우리 목숨을 살려준 은인이나 다름없는 아리엘씨 부탁인데 최선을 다해 도와드려야 하지 않겠어?”


“뭐 한스 네 말도 틀린 건 아닌데 서지터 녀석한테 백정 전사니 무식한 놈이니 하며 대하는 태도는 정말 맘에 안 들어! 그놈을 막 대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은 오로지 나뿐이란 말이지. 어디 감히 내 밥을 넘보니? 흥!”


한스도 서지터의 얘기가 나오자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더는 레일라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그렇게 한창 이야기꽃을 피우던 일행은 백사장 앞에 도달했고, 여관으로 가기 위해선 이곳을 가로질러 가야만 했다.


“저기에 무슨 구경거리라도 있는 모양입니다? 한스님. 빨리 가 보시지 말입니다. 재미난 구경거리라면 놓칠 수 없지 않겠습니까?”


“자, 잠깐만······!”


파시비엔이 한스의 팔목을 잡아끌며 사람들이 모여 있는 백사장 한쪽을 향해 뛰어갔다. 둘이 앞서가던 아리엘을 지나쳐가자 그도 자연스레 호기심이 발동되어 둘의 뒤를 따랐고, 카데스와 레일라 역시 별다른 말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먼저 그곳에 도달한 둘은 어떤 재미난 구경거리인지 확인하기 위해 사람들을 헤집고 들어갔다. 둘의 눈에는 여유만만한 덩치가 큰 대머리 사내와 피로 범벅이 되어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눈에 익은 사내가 서 있었다.


“저기······ 한스님? 우리 눈앞에 피떡이 되어 있는 저 사람 서지터님 맞지요? 그쵸?”


“서지터!”


둘은 피와 모래로 뒤범벅이 된 서지터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아무리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지만 분명 자신들의 친구인 서지터가 분명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서지터를 향해 파시비엔이 뛰쳐나가려 하자 뒤에서 카데스가 그의 어깨를 짚어 제지했다.


“가만있어. 파시비엔.”


억지로라도 서지터에게 달려가고 싶었던 파시비엔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저으며 계속 자신의 어깨를 잡은 카데스를 보며 화를 내었다.


“잠깐만요 카데스님! 서지터님 도와드려야 될 거 아닙니까!”


“카악! 퉤! 젠장, 쪽팔리게······.”


서지터는 입안에 피와 뒤섞인 모래를 내뱉으며 자신의 친구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대여섯 발자국 앞에 서 있던 벨크도 고개를 돌리자 아침에 보았던 카데스가 눈에 들어왔다.


“드디어 아빠가 행차하셨구나! 가서 아프다고 징징거려봐. 응?”


“망할! 아직 안 끝났어!”


금방이라도 다리가 풀려버릴 거 같았지만 서지터는 온 힘을 쥐어 짜내어 다시 벨크에게 달려들었다. 벨크의 공격 영역까지 들어온 서지터는 검을 휘두르려 했으나, 몸이 느려진 자신보다 벨크의 공격이 훨씬 더 빨랐다.


그가 자신의 육중한 오른발 다리를 날려 서지터의 몸통을 향해 상당히 빠른 킥을 날리자, 검을 쥔 채 반사적으로 양팔을 들어 가드를 해보았다.


- 퍼헉!


다행히 치명타는 피했지만 월등한 힘의 차이에 의해 서지터는 달려온 자리로 내동댕이쳐졌다.


‘털끝 하나도 건드릴 수가 없어. 실력 차이 한번 빌어먹을 정도로 많이 나는구나. 제길!’


속으로 이미 승부는 결정이 났다고 판단되었지만 서지터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카데스의 제지 때문에 일행은 발만 동동 구르며 그의 처절한 싸움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레일라는 옆에 있던 구경꾼에게서 어찌 된 상황인지 자초지종을 들을 수 있었다.


“저 둘이 왜 싸우기 시작한 지는 나도 잘은 모르는데, 싸움이 시작되고 나서 저기 저 친구는 일방적으로 얻어맞는 중이지. 체급 차이가 나는데 당연한 거지 뭐. 멱살이 잡혀 땅에 내리꽂는 거부터 시작해서 머리끄덩이를 잡혀 거칠게 내던지질 않나. 저 무식해 보이는 검은 잘 쓰지도 않고 거의 손발을 이용해서 손쉽게 걸레를 만들더구먼. 저런 자에게 덤빈 거 자체가 자살행위나 다름없지.”


레일라는 별다른 반응 없이 계속해서 구경꾼의 이야기를 들었다.


“나름 팔이나 다리로 가드를 하면서 막고 있는 터라 치명적인 피해는 안 입고 저리 계속 일어나는 거 같지만, 저자 공격은 가드 자체가 무의미해 보이잖아. 지금도 봐. 힘의 차이가 극명한데 아무리 막아봤자 그게 다 데미지야. 안 그래?”


구경꾼의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에도 서지터는 계속해서 달려들었고,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이번에도 역시 벨크가 한발 앞서 서지터의 옆구리를 향해 킥을 날렸고, 팔을 몸에 바짝 붙여 막아보았지만 팔에 전해오는 충격은 상상을 초월했다.


“크흑!”


다행히도 이번 벨크의 공격에 나가떨어지지 않고 버텨냈지만 검을 들 수 없을 정도로 왼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오호라! 지금 버티는 거야? 친구들 앞이라고 쪽팔리긴 하나 보지? 크하하하! 하지만 그냥 조금 전처럼 나가떨어지는 편이 나았어!”


커다란 덩치로는 나올 수 없을 거 같은 빠른 속도로 몸을 움직인 벨크는 커다란 한 손으로 서지터의 얼굴을 덥석 쥐고 두세 발자국 도움닫기를 하고 공을 던지듯이 그를 날려버렸다.


“으랴랴랴!”


- 후웅!


둘의 싸움을 지켜보던 카데스가 깜짝 놀랐다.


“빨라! 둔해 보이는 저 육중한 몸으로 어떻게 저런 속도가 나올 수 있지? 저 녀석 아무리 만신창이가 됐지만, 반응조차 하지 못하고 붙잡혔어.”


바닥에 처박힌 서지터는 몇 번 나뒹굴더니 밀물이 닿는 곳까지 튕겨갔다. 짠 바닷물이 입안으로 들어와 피와 뒤섞이며 기분 나쁜 맛이 났다. 이대로 그냥 쓰러져 버릴 거 같았지만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서지터의 의지와는 달리 다리에 힘이 풀려 풀썩 주저앉아버리고 말았다.


“서지터님! 제발 그만 일어나십시오! 그러다 정말 죽습니다!”


파시비엔이 외치는 소리를 듣자 서지터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하아, 하아. 그렇게 자신 있다고 해놓고 한 대도 못 때려보고 쓰러지면 쪽팔리잖아. 이렇게 그냥 쓰러질 바엔 저놈에게 죽는 게 나아.”


서지터는 좀비처럼 힘없이 다시 몸을 일으켰다. 무자비한 공격을 당했음에도 자신의 검만큼은 절대 놓지 않았다.


“카데스님! 저희가 나서서 이 끔찍한 싸움을 멈춰야 합니다!”


“그래, 카데스. 더 이상의 싸움은 무의미해. 애당초 이런 싸움 말도 안 된다고!”


파시비엔과 한스가 카데스를 설득하려 했지만, 카데스는 요지부동이었다. 레일라와 아리엘 역시 아무 말 없이 상황을 지켜만 볼 뿐이었다.


“여기서 끝내면? 저 녀석 자존심에 그걸 용납할 수 있을 거 같아? 어떻게 끝이 나든 그냥 내버려 두는 게 서지터에겐 더 도움이 될 거야. 죽을 일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 저 덩치가 처음부터 죽일 작정이었다면 우리가 도착하기도 전에 이 싸움은 끝났어.”


“어? 지금 저건!”


팔짱을 낀 채 아무런 말 없이 있던 아리엘이 깜짝 놀라 서지터를 바라보았다. 아리엘의 반응에 일행은 모두 서지터를 향해 눈길을 돌렸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어 보였다.


‘상당히 약하지만······. 분명해. 저 녀석 지금······.’


일행을 비롯한 이곳에 모인 구경꾼들 모두 알아채지 못했지만 유일하게 아리엘만이 달라진 서지터를 확인할 수 있었다. 분간하기도 힘든 붉은 아지랑이가 희미하게 그의 몸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지금 말리지 않으면 저 녀석 위험해!’


아리엘이 한 발짝 나서려던 순간 카데스가 손을 뻗어 막아섰다.


“뭔지 모르겠지만 아리엘씨. 저 녀석 믿고 그냥 놔두십시오.”


아리엘이 서지터의 이상한 기운을 알아채고 몸을 움직이려 하자, 카데스가 눈치 빠르게 그를 막아선 것이다. 카데스의 제지에 앞으로 나서려던 아리엘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만 두지.”


“후우! 단 한 번이다. 이걸로 승부를 걸자.”


자신의 몸의 변화조차 눈치채지 못한 서지터는 단순히 이기고 싶은 의지로 인해 힘이 난 듯한 기분이었다.


“흐아압!!”


서지터는 기합을 넣으며 벨크에게로 다시 달려들었다.


“어? 아직도 힘이 남아있는 거야? 크흐흐. 꼬맹이 네 녀석의 그 끈질긴 집념만큼은 내가 인정해주마! 하지만 계속해서 똑같은 패턴으로 공격해 오는 것만큼 멍청한 짓도 없다고!”


벨크는 양발을 횡으로 크게 벌려 자세를 낮추고 무식하게 커다란 양손검을 허리춤 뒤로 돌려 공격태세를 갖추었다. 이 한방으로 싸움을 끝내려는 계획이었다.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서지터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빠르게 달려들었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벨크가 서지터의 몸을 두 동강 낼 기세로 거대한 양손검을 휘둘렀다.


- 후우우윙!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주위에 있는 구경꾼들조차 감탄할 정도로 크게 들려왔다.


- 타앗!


벨크가 휘두른 검이 허공을 갈랐다. 벨크에게로 뛰어들던 서지터가 레일라에게 배운 공중제비를 이용해 공중에서 부드럽게 한 바퀴 돌아 벨크의 왼쪽 옆으로 무사히 착지했다. 가속이 붙어 착지하는 순간 왼발이 앞으로 나가며 몸이 살짝 쏠렸지만, 지금까지 방해만 되어왔던 모래에 발이 빠진 덕분에 앞으로 넘어지지 않았다.


‘됐다!’


“그런 얄팍한 술수로? 크핫! 그럼 이것도 피해 봐!”


수많은 경험을 바탕으로 상황판단을 빠르게 한 벨크가 오른쪽으로 쏠리던 양손검을 가볍게 멈추고 왼손으로만 검을 쥔 채 무방비의 서지터의 등을 노렸다.


“말도 안 돼. 너무 빨라. 저건 못 피한다고!”


카데스가 벨크의 빠르기에 놀라 소리쳤다.


- 부우우웅!


하지만 카데스의 예상과는 달리 서지터의 몸놀림이 조금 더 빨랐다. 벨크의 양손검이 그의 등에 채 닿기도 전에 다시 한 번 있는 힘껏 거꾸로 공중제비를 돌았다. 검은 이번에도 역시 허공을 갈랐다. 백 텀블링으로 착지에 성공한 서지터는 검을 치켜들어 벨크의 목을 겨눴다.


“응?”


“하아! 끝난 거 같······.”


- 퍼어어억!


“헙!”

순식간이었다. 벨크의 오른쪽 무릎이 정확하게 서지터의 복부를 강타했다. 신장 차이가 워낙에 나던 터라 벨크는 서지터의 복부를 강타한 순간 가볍게 무릎을 위로 치켜 올렸다. 이 싸움을 끝내는 치명적인 한방이었다. 서지터는 공중에 1미터가량 붕 떴다가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크헉! 쿨럭!”


서지터는 내장이 뒤틀리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바닥에 엎드린 채로 피를 토했다. 온몸의 기운이 다 빠져나가는 기분을 느낀 서지터는 정신마저도 혼미해져 갔다. 벨크는 자신의 앞에 엎드린 채 있는 서지터를 보자 다시 한번 발길질로 복부를 노리려는 시늉을 취했다.


“방금 잔재주는 제법이었어. 진짜로 끝내자고! 크흐흐!”


“멈춰! 벨크!”


구경꾼들 사이에서 날카로운 눈매에 한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둘의 앞으로 터벅터벅 걸어와 싸움의 승자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지시한 내용 못 들었나? 죽이지 말라고 했을 텐데? 방금 마지막 공격으로 충분해. 지금 또 공격했다간 저 아이는 죽는다.”


“어? 대, 대장! 흥분해서 나도 모르게 그만······!”


조금 전의 기세는 온데간데없이 대장이라 부른 이 사내 앞에서 벨크는 한 마리의 순한 양으로 돌변했다.


“이 싸움 벨크 네가 졌다.”


“엥? 대장! 무슨 말이야 그게?”


벨크가 대장의 말에 반박하며 열을 올렸다.


“저 아이의 마지막 공격. 실제 전투상황이었다면 너는 목이 베였을 거다.”


“하하. 그건 아니잖아. 대장! 실제 전투상황이었으면 저 녀석은 벌써 아까 죽었다고! 내가 봐주면서 싸운 거 아냐?”


“네 성격으로 봐서 실제 전투상황이었을지라도 상대방과의 실력 차이를 알고 지금처럼 가지고 놀 듯 대했을 거야. 내 말이 틀리나?”


“아니 뭐······.”


벨크는 대장의 말에 말끝을 흐렸다.


“그래서 일부러 체급 차이가 남에도 불구하고 저 아이에게 시비를 걸고 대련하게 시킨 거다. 쓰러져있는 저 아이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너에게 교훈을 주려고 말이야. 각오를 다지는 마음가짐에서부터 너는 진 거다. 저 아이는 죽을 각오로 전력을 다해 너를 상대했어. 그런데 너는 뭐지?”


“에휴! 알았다고 대장.”


벨크는 자신의 민머리에 맺힌 땀을 스윽 닦으며 자신의 동료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벨크가 자리를 피하는 것을 본 파시비엔이 치료를 해주기 위해 그에게로 달려왔다.


“서지터님!”


“이 아이 동료인가 보군. 큰일은 생기지 않을 테니 치료 전에 잠시 이야기를 나눠도 되겠나?”


“네? 그래도 빨리 치료를······.”


“괜찮아. 그 일격을 당하고도 기절조차 하지 않았어.”


대장이라 불린 자는 빙긋 웃으며 파시비엔을 안심시키고 자세를 낮춰 서지터에게 말을 걸었다.


“내 말 들리나? 말하기는 힘들어 보이니 들리면 고개만 끄덕여보게.”


서지터의 여전히 엎드린 채로 입에서는 피를 줄줄 흘리고 있었다. 멍한 상태이긴 했지만, 아직 사리 분별은 할 수 있었기에 이 자의 말대로 고개를 한번 끄덕여 보였다.


“그래, 우선 자네를 이용한 건 미안하게 생각해. 그렇다고 순전히 내 부하 녀석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이용한 것만은 아닐세. 오전에 길거리에서 본 순간 호기심이 발동했거든. 바스타드 소드를 차고 있는 왼손잡이 검사. 내 호기심을 자극하기에는 충분했으니까 말이야. 자네도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왼손잡이는 극히 드물어. 그리고 역사적으로도 전설적인 기사나 용병, 혹은 검사 중엔 전부는 아니지만, 왼손잡이들이 제법 있었지. 그래서 일부러 자네 실력을 보고 싶어 이런 행동을 한 거야.”


서지터는 있는 힘을 쥐어 짜내어 한마디 내뱉었다.


“쿨럭. 그, 그래서······?”


“하하, 한마디로 말해서 벨크 저 녀석과 마찬가지로 자네가 마음에 들었네. 앞으로 어떤 경험을 하며 어떤 자들과 함께 실력을 키워나가느냐에 따라 달렸어. 내가 볼 땐 충분히 자질이 있어. 어떤가? 우리 용병단에 들어와 보는 건? 그러고 싶으면 방금처럼 고개만 한번 끄덕이라고.”


의외의 용병단 입단 제의에 서지터를 비롯해 이제 그의 주위에 다 모인 일행들조차 놀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서지터는 거절의 의미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는 곧바로 기절해버렸다.


“하하, 이런! 설득도 하지 못하고 보기 좋게 거절당했군. 자네들이 이 아이 동료들인가? 이거 미안하게 됐군그래. 내 수하가 저지른 일은 내가 지시한 것이니 정중히 사과하겠네. 그리고 잘 돌봐주게. 많이 다쳤어. 언젠가 다시 만날 거 같은 유쾌한 기분이야. 깨어나면 아더라는 자가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다시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전해주게.”


“······네.”


이 자의 카리스마에 압도된 카데스가 불만의 말조차 꺼내 보지 못하고 알았다며 대답했다. 파시비엔은 기절한 서지터를 보자 곧장 달려가 신성 마법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더는 볼 일은 없겠지만 그럼 나중에 또 보세.”


구경하던 자들도 서지터가 기절해버리자 하나둘씩 사라졌다. 자신을 아더라고 소개한 이 사내 역시 자신의 수하들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


파시비엔이 치료를 마치자 의식을 차린 서지터가 힘겹게 눈을 떴다.


“서지터님! 괜찮으신 겁니까? 아, 정말 위대하고 자비로우신 아그나달린님의 은총이십니다. 이리 당하고도 금방 정신을 차리니 말이죠.”


“미련한 놈. 괜찮냐?”


“......어. 근데 꼭 기절했다가 깨어나면 쫑알거리는 파시비엔이 내 옆에 항상 있어야 하는 거야?”


“아! 정말 너무하셔! 당연히 제가 치료를 하니 곁에 있는 것이 당연한 겁니다! 정말 전 서지터님이 죽으면 어쩌나 얼마나 걱정됐는지 아십니까?”


파시비엔이 눈물을 글썽이며 서지터의 손을 꼭 쥐었다. 카데스가 애절해 보이는 둘의 모습을 보며 말을 꺼냈다.


“좀 어때?”


“죽을 만큼 아프지만, 기분은 좋은데? 푸흐.”


“미친 녀석.”


기운 없는 목소리로 자신을 걱정하는 친구들에게 괜찮다는 듯 웃어주었다. 피투성이가 된 채로 모래를 잔뜩 뒤집어쓴 모습이 참으로 흉해 보였지만 서지터는 아랑곳하지 않고 웃었다.


최근 자신의 검술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기가 힘들었던 그는 베일 일과 겹치며 슬럼프의 시기를 겪고 있었다. 비록 입 밖으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같은 검사인 카데스만이 실력이 정체된 듯 초조해하던 서지터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처참하게 박살이 났지만, 기분이 좋다는 뜻은 새로운 목표치를 잡았다고 볼 수 있다.


치료 덕분에 간신히 몸을 일으킨 서지터는 파시비엔의 부축을 받으며 여관으로 향했다. 한스와 레일라도 그 뒤를 따라갔고 조금 멀찌감치 뒤에서 아리엘과 카데스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며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아까 아리엘님의 반응. 무슨 이유였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살짝 불안한 내색을 비춘 아리엘이 잠시 침묵을 지키다 입을 열었다.


“별거 아냐.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고 내가 그냥 지레짐작하는 거 같아. 나중에 확신이 서게 되면 말해줄게.”


“무슨 일인지 대략 설명해주셔도 안 됩니까?”


“안 돼. 다만 이것만은 얘기해줄게. 혹여 전투상황에 놓이게 되면 너도 정신없겠지만 저 녀석 주의해서 관찰했으면 해. 지금으로서는 말해 줄 수 있는 건 이것뿐이야.”


“네, 알겠습니다.”


아리엘의 이야기에 카데스는 의문만을 남긴 채 백사장을 벗어났다. 그렇게 한바탕 백사장에서의 소동이 끝이 나고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많은 피드백과 충고, 오타 지적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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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0 14화 슬픔은 가슴에 묻고 - 10 20.05.04 57 2 12쪽
269 14화 슬픔은 가슴에 묻고 - 9 20.05.02 64 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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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3 14화 슬픔은 가슴에 묻고 - 3 20.04.25 68 1 19쪽
262 14화 슬픔은 가슴에 묻고 - 2 20.04.24 78 2 11쪽
261 14화 슬픔은 가슴에 묻고 - 1 20.04.23 74 2 14쪽
260 13화 거짓된 역사 - 21 20.04.22 58 2 14쪽
259 13화 거짓된 역사 - 20 20.04.21 65 2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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