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시, 얼음의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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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LWinterer
작품등록일 :
2019.07.01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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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10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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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14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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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쪽

15장-귀향歸鄕 (5)

DUMMY

"이미 말했지요. 지금의 저는, 당신을 처음으로 만나는 거라고."

그러나 자수정빛의 눈동자는 자신을 질책하는 듯한 목소리에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검을 내려놓은 티엘은 다시 내려놓았던 잔을 들어올렸다.

눈 앞의 노인이 따라준 따뜻한 우유가 잔 안에서 조용이 물결쳤지만, 바깥으로 흘러넘치는 일은 없었다.

호의를 되새기듯, 다시 우유를 한 모금 머금은 티엘은 빈 허공을 바라보며 변명하듯 한 마디를 덧붙였다.

"제가 떠올릴 수도 없는 원한으로 검을 겨누고 싶지는 않아요."

"여전히 마음이 여리시군요."

노인은 쓰게 웃었다.

검을 거둔 이유가 그 뿐만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조금 전, 티엘은 죽음을 눈앞에 둔 노마법사가 마력을 끌어올리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마법사라면 위험을 직시했을 때 무의식적으로 마력을 끌어올려 방어하려 드는 것이 일반적이다.

특히 오랫동안 싸워온 늙은 마법사라면, 그것은 호흡처럼 본능에 가까운 당연한 반응.

따라서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이미 그에게 마력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는 뜻이다.

아마 생령과 길항하는 최소한의 마력조차 아슬아슬하게 남아있는 상태일 것이다.

인간의 마력은, 그 몸을 유지하기 위한 생명력을 깎아 손에 넣는 것.

노환이든, 병이든, 지금 쇠약해진다면 자연히 마력 역시 잦아들게 된다.

그리고 이내 더이상 생령을 견뎌낼 수 없게 된다면, 그것으로 끝.

대령결계 내에 있는 이상 마령으로 전락하는 일은 없을지라도, 침식을 겪은 끝에 산채로 말라죽게 됀다.

무수한 싸움을 이겨내고 악착같이 살아남은 흑마법사 가운데서도 절반은 그런 식으로 사그라드는 최후를 맞는다.

이 노마법사 역시 앞으로 남아있는 생이 얼마 되지 않는다.

이미 죽음의 문턱에 선 자를 죽인들,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그러나, 노마법사는 안타까워 하는 얼굴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그렇게 무르고, 여전히 그렇게 따스한 심장을 가지고, 어찌 이 땅으로 되돌아오셨습니까. 이 땅은 피와 철과 얼음의 심장을 가진 자들의 땅인것을."

노인은 손을 뻗어 촛대 하나를 가져왔다.

불꽃도 어둡고, 탁탁 튀며 그을음을 남기는 저질의 양초다.

하지만 심지 끝에서 너울거리는 불꽃의 색만은, 어둠 속에서 황홀할 정도로 선명하고 밝은 선홍빛이었다.

노인은 조심스레 초를 기울여 꺼져있던 다른 초에도 하나하나 불을 붙였다.

마침내 탁자 위가 은은한 주홍빛으로 물들자, 노인은 손아귀의 촛대를 천천히 돌리며 그 불꽃을 응시했다.

"아가씨는 자신의 적을 치기 위해 이 땅을 다시 밟으신 것이 아니었습니까?"

원한은 반드시 갚는다.

적은, 마지막 한 방울의 피까지 절멸시킨다.

피와 투쟁에 물든 이 나라에서는, 어째서 그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보내기에도 모자란 그 시간을, 어째서 적의를 불태우며 서로 검을 나누는 데 서슴없이 낭비할 수 있는 것일까.

대체, 어디서부터 어긋나버린 것일까.

씁쓸한 감상이 혀 끝에 녹아내렸다.

"원한을 풀기 위해서 온 것은 아니에요. 소중하다고 생각한 것들을 지키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 두 가지가, 다르다고 생각하시는 것입니까."

노인은 촛대를 티엘에게 가까운 곳에 내려놓았다.

일렁이는 불길이 두 사람의 눈에 나란히 비춰졌다.

"삶은······, 이런 조그만 불꽃입니다. 계속해서 춤추기 위해서는 살아남아야 하고, 다시 살아남기 위해서는 끝없이 태울 것을 필요로 합니다. 그 과정에서 이처럼 불똥이 튀기도 하고, 그을음이 남기도 하겠지요. 하지만 그 것을 두려워해 거부하는 불꽃은 얼마 가지못해 꺼져버리는 법입니다."

노인은 일렁이는 불꽃을 조심스레 감싸쥐었다.

"불꽃을 꺼뜨리지 않기 위해 심지들이 싸우며 항쟁이라는 불똥이 튀고, 슬픔이라는 그을음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속성입니다. 태어난 이상 누구에게나 선택지는 같지요. 이겨서 모든 것을 쥐거나, 져서 모든 것을 내놓거나."

티엘은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항쟁에서 패한 이는 모든 것을 빼앗긴다.

명예도, 지위도, 목숨도, 심지어는 마음대로 죽을 권리마저도.

그래, 마치 꺼진 촛불이 빛도, 온기도, 모두 잃어버리듯.

"설마 그조차 이해하지 못한 채 이 먼 곳까지 달려오신 것입니까?"

노인은 늦지 않았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남아있는 빛을 잃고 싶지 않다면, 지금이라도 돌아가라고 말하고 있었다.

"싸우지 않고서 목숨을 내어주겠다고 하신 분이, 그리 말씀하시는건가요?"

하지만 대답하는 티엘의 목소리는 분명한 선을 긋고 있었다.

물러날 생각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결코 거칠게 뿌리치는 목소리도 아니었다.

어찌 보면 이상한 일이다.

서로 적이라는 사실은 확인했다.

설령 마법사로서의 힘은 잃었다고 해도, 이 영지의 주인인 이상 경비병이나 사병을 동원해 티엘을 억누를 수도 있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적이라기보다는, 오랜 친구처럼 잔잔하게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노인이 다시 반박하려는 것을 본 티엘은 어깨에 걸고있던 사슬을 끌어당겼다.

오래 전 소중한 사람이 만들어 주었던 마법서, 별의 서가 그녀의 무릎 위로 올라앉았다.

"누군가의 피로 밝힌 길은 원하지 않아요. 왜 다른 사람을 쳐내야만 하는거죠. 왜 다른 사람을 부정해야만 하는거죠? 마주보고 이야기하기에도, 언제 어떤 식으로 사라져버릴지 모르는데."

노인의 얼굴에 약간의 놀라움이 떠올랐다.

이제는 티엘이 떠올릴 수 없게 된 그 사람을, 대신 떠올려준 것일까.

가늘게 떨리는 눈으로 한참이나 티엘을 응시하던 노인은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것처럼 몇 번이고 입을 여닫았다.

그러나 끝내 그 입은 속에 잠든 이야기를 자아내지 못했다.

그저, 오랜 기억을 돌이키며 그리움을 달래는 얼굴로 웃었을 뿐이었다.

어찌보면 취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물을 탄 포도주를 제외한다면, 술은 더이상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았지만, 노인은 분명히 취해 있었다.

노인을 취하게 한 것은 술이 아니라 기억이었을 것이다.

노인은 더이상 자신의 것이 아니게 된 미래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하였던가.

그렇다면 과거야말로 술보다도 더욱 매력적인 유혹이리라.

"그렇지요······. 옛날, 먼 옛날의 이야기가 떠오르는군요. 아가씨가 알지 못할만큼 오래된, 먼 곳에서 있었던 일이지요."

옛날 이야기.

노인은 자신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그렇게 말했다.

한 남자가 있었다.

원하는 것은 모두 취하고, 그 과정에서 다른 이들을 짓밟거나 희생시키는 것을 조금도 거리끼지 않았던, 폭풍같은 남자가.

그는 너무나 춥고, 너무나 사나웠다.

피를 나눈 혈육들조차도 그를 이해할 수 없었고, 하나 둘씩 그를 떠나가고 말았다.

하지만 폭풍은, 그 때 까지도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삼고 싶어할 뿐, 안타까운 마음 같은 것은 채 느끼지 못했다.

심장마저 얼어붙었던 것인가, 아니면 그 끝 모를 탐욕이 너무나 컸던 것일까.

그러나, 그런 폭풍의 곁에는 유일하게 나란히 설 수 있었던 또다른 한 남자가 있었다.

거친 폭풍에 흔들리면서도, 결코 쓰러지지 않았던 남자. 같은 피를 나누었음에도, 자신의 형제와는 달리 비바람을 막아서는 거목같은 남자였다.

나무의 온화함에 맞부딪힐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도 사실은 나무처럼 온화한 삶을 동경했던 것일까.

몰아치던 폭풍은 나무의 곁에서만큼은 기세를 죽이고, 잔잔한 미풍으로 잠들었다.

채워질 줄 모르던 갈망은, 한없이 넓은 온기를 삼키며 겨우 평온을 찾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마리의 깃털 고운 새가 비바람에 젖은 채 나무와 폭풍을 찾아왔다.

폭풍은 젖은 깃털을 말려주었고, 나무는 지친 날개를 쉴 수 있도록 가지를 내어주었다.

고운 새는 두 사람에게 감사를 표하며, 아름다운 노랫소리를 들려주었다.

작고 사랑스러운 새의 노래는 둘의 삶에 새로운 기쁨이 되었다.

나무와 폭풍은 새에게 사랑을 주었고, 새는 두 사람에게 똑같은 사랑을 베풀며, 그렇게 행복한 시간을 이어갔다.

동화였다면, 여기서 이야기는 끝을 맺었으리라.

그렇게 셋은 오랫도록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라고.

그러나 또다른 어느 날, 그 행복은 깨어지고 말았다.

폭풍이, 새가 자신보다 나무와 더 가까이 지낸다는 사실을 우연히 깨닫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나무와 새는 그가 모르는 사이 서로를 끌어안고, 사랑을 맺어, 가지 위에 작은 둥지를 만들고 있었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매서운 바람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자그만 불씨가 나뭇가지 위로 떨어졌다.

그 불꽃의 이름은 시기.

폭풍이 지닌 힘이라면, 그 불씨를 꺼뜨리고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도 가능했으리라.

하지만 폭풍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유일하게 그의 마음을 알아주는 존재였건만, 굳건히 뿌리내려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그 모습에 그렇게도 질투를 불태우던 폭풍은 결국 그 자신의 손으로 불길을 키웠다.

일어난 불길은 나무를 덮쳤다.

미친 불꽃이 잎을 사르고, 가지를 태운 뒤, 마침내 흔들릴 줄 모르던 둥치마저 삼켜버린 뒤, 그제서야 손을 거둔 폭풍은 그루터기만 남아버린 나무의 자리를 차지해버렸다.

모든 것을 차지한 폭풍은 나무의 흔적을 하나하나 지워갔다.

남아있는 그루터기를 깎아 왕좌로 삼고, 타다 남은 가지를 모아 새장을 만들었으며, 잎이 타버린 재를 모아 융단으로 깔았다.

그리고 사랑하는 나무를 잃어 슬퍼하는, 그리고 사랑하는 폭풍이 미쳐버린 것에 울부짖는 새를 새로이 만든 새장 안으로 가두었다.

폭풍은 아직 새를 사랑하고 있었다.

아니, 사랑한다고 생각하여 소유하려 했다.

그러나 한 때는 폭풍에게도 사랑을 나누어주었던 새는 혈육의 피를 손에 묻힌 폭풍의 손 안에서 더이상 노래할 수 없었다.

이미 부서지기 시작한 관계는 점점 일그러졌고, 사랑에 배신당했다 생각한 폭풍은 나날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져갔다.

추위와 슬픔 속에 지쳐가던 새는 결국 마지막 알 하나만을 남긴 채 시들어버렸다.

사랑했던 것을 잃고, 사랑하고자 했던 것마저 잃어버린 폭풍은, 더이상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은 채 갈 곳 잃은 욕망을 아무렇게나 휘둘러대는 재앙이 되었다.

"······원망은, 증오는, 알기 쉬우면서도 강렬한 감정이지요. 자신을 불태우는 독이지만, 그 열기는 더는 살아갈 이유가 없는 자라도 지탱해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새는······, 그녀는 폭풍을 증오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망가뜨린 일 자체는 증오하더라도, 폭풍 자신을 미워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랬기에, 더이상 온기를 줄 수 없는 이 차가운 피얼음 위에서 사그라들 수밖에 없었을테지요."

다른 이의 증오를 마시고, 스스로는 증오를 뱉어내지 않은 채 시들어버린 사람.

그녀는 이 땅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노인은 그렇게 덧붙였다.

차라리 저 남해의 따스한 땅에 태어났더라면, 차라리 저 머나먼 초목의 땅에 태어났더라면, 그 아름다운 노래를 지금까지도 들려줄 수 있을 터였다고.

티엘은 조용히 가슴을 움켜쥐었다.

누구의 이야기일까.

노인 자신의 이야기일까?

아니면, 또다른 누군가의 이야기일까?

하지만 그렇다면 이 가슴은, 어째서 이렇게 잔잔하게 울리는 것일까.

노인은 티엘의 얼굴에 드리워지는 그림자를 바라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녀는 결코 심약한 성격은 아니었지요. 단신으로 눈앞의 마령을 쓰러뜨릴 정도로 강인하면서도, 죽어가는 민초 하나하나에 눈물지을 정도로 정이 깊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아마도 나무를 꺾은 것이 폭풍이 아니었더라면, 그렇게 시들어버릴 일도 없었겠지요. 하지만 그랬던 새마저도, 결국 이 땅의 광기에는 이길 수 없었습니다. 엔지칼 대제께서 세우신 이 나라가 광기로 휘몰아치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들만이, 이 피로 얼어붙은 땅에 뿌리내릴 수 있는 법입니다."

"······그래서, 결국 유혈로 이어지는 길이 옳다고, 그렇게 말씀하시는 건가요······."

"이 곳을 지나면, 아마도 후회조차 할 수 없을겁니다."

노인은 작은 칼을 들어올렸다.

빵을 자르는데나 쓰이는 무딘 칼은, 아마도 노인의 허약한 팔 힘으로는 옷조차도 찢을 수 없을 터였다.

예상대로 노인은 그것을 티엘을 향해 휘두르지 않았다.

날을 세운 칼이 둔한 소리를 내며 식탁 위에 희미한 선을 하나 그렸다.

"지금 이 곳이 마지막 분기점입니다. 아가씨. 돌아가십시오."

"······어째서죠?"

아직 나이프를 쥐고있던 노인의 손 위로, 소녀의 자그만 손이 놓였다.

"한때 죽이려고 했던 적이며, 은원을 잊었다고 하더라도 그저 스쳐가는 인연. 그런데도 마치 저를 걱정해 만류하려는 걸로 보여요. 어째서죠?"

"무익한 죽음을 바란 적은 없었습니다. 항쟁이란 필요악일 뿐, 되도록 일어나지 않는 편이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노인의 손끝이 소리없이 움직였다.

가상의 선이 그려낸 것은 어떤 사람의 이름이었다.

"큭!"

하지만, 그 두 개의 이름을 눈으로 읽은 순간 머릿속에 균열이라도 가는 것처럼 예리한 두통이 찾아왔다.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이를 악물어도, 결국 이마를 움켜쥐며 신음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아는 이름일텐데, 알고 있을 이름일텐데, 떠올릴 수 없는 그 이름.

자신이 잃어버린 것들.

노인은 그런 티엘을 처연하게 응시하다 소맛자락으로 그 이름들을 다시 가렸다.

"아가씨. 아가씨의 등에는 수많은 이들의 바람이 엮여있지요. 이제와서 무익한 죽음은 택하지는 말아주시길. 이 늙은이의 부탁입니다. 이대로 돌아가, 가까스로 얻은 행복을 지키십시오."

"······그가 뭘 하려는지, 알고 있나요?"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때문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 분이라면, 마지막까지 돌이킬 수 없는 실수는, 하지 않으실테니까요."

쓸쓸한 미소를 짓던 티엘은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노인은 소녀의 탄식을 들으며 소리없이 일어나, 주방 한 켠에 놓여있던 술 한 병과 유리잔을 가져왔다.

말갛던 녹색의 증류주가 두 개의 잔에 나란히 채워졌다.

설탕이 녹아들며 순식간에 맑던 술이 탁한 빛으로 물들었다.

어느 젊은 마법사가 간혹 즐기던 이 술의 탁한 빛이, 오늘따라 노인의 마음을 흔들었다.

오래간만에 옛 이야기를 꺼낸 탓일까, 아니면 이 손으로 빚어낸 수라장을 겨우 넘겼던 소녀가 곁에 있기 때문일까.

술을 따라 그의 눈빛도 흔들린다.

노인은 잔에 담긴 자신의 감정을 입 안으로 털어넣었다.

"당신은 이 촛불이 스스로를 유지하기 위해, 다른 이들로부터 생명을 빼앗아야만 한다고······. 그렇게 말했었죠."

문득 귓가에서 소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어느새 고개를 든 티엘은 노인이 켜두었던 촛대를 두 손으로 들어올린 채, 심지 끝에서 춤을 추는 불꽃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당신은 조금 전 하나의 초로 다른 초에 빛을 나누어주었어요.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없는걸까요?"

티엘은 부드러운 눈으로 노인의 손에서 칼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 칼끝으로 조심스레 초의 심지를 건드렸다.

"자세히 보면, 이 조그만 하나의 불꽃마저도 홀로 서지 않아요. 밀랍은 녹아내리고 심지는 그 촛농을 빨아올리죠. 불꽃이 빼앗는게 아니에요. 모두가 조금씩 자신을 내어주고, 나눠받고, 그렇게 하나로 어우러진 끝에 이 자그마한 빛이 태어나요. 불꽃이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면, 순식간에 녹아버린 초는 쓰러져버릴거에요. 그리고 이내 녹아내린 밀랍에 잠긴 불씨도 금새 사라져버리겠죠."

"아가씨."

칼이 조용히 탁자 위로 내려앉았다.

대신, 빈 손끝은 무심코 가슴께를 향했다.

물론 이미 새로운 자리를 찾아버린 목걸이는, 그 곳에 없다.

하지만 티엘은 여전히 그 곳에 목걸이가 남아있다는 듯 손을 움켜쥐며 살짝 눈을 감았다.

"저는 항쟁에 아무런 가치도 느끼지 않아요. 제가 란으로 가는 이유는 레가야도, 대공의 이름도 아니에요. 단지 몇 사람을 지키고 싶다는, 조그만 소망 때문이에요."

"단지 몇 사람을 위해서 의미없이 목숨을 던지실겁니까?"

"꼭 의미가 있어야하나요?"

가슴에 머무르던 손이 조용히 귀걸이를 풀어냈다.

영장은 아니다.

감이 많이 무뎌졌다고는 해도 영장이 만들어내는 흐름을 알아채지 못할 노인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귀걸이에서 분명히 제법 짙은 마력이 배어나오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것은 착용자를 지키기 위한 마력이 아닌, 귀걸이 자체를 보호하기 위한 수호계의 마력이었다.

"당신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을 이 작은 장신구는 지금의 제게는 레가야 전체보다도 의미있고 소중한 물건이에요. 봐요. 누군가에겐 무의미하더라도, 다른 누군가에게는 의미가 있어요."

혹여 잃어버리지 않을까 몸에서 떼어놓지 못하고, 혹여 긁히지는 않을까 생령의 마력까지 불어넣어 보호하는, 지금의 티엘에게 무엇보다 소중한 물건.

티엘의 손 위에 놓인 한 쌍의 귀걸이는 처음 샀을 때와 똑같은 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주인의 눈빛과 똑같은 귀걸이를 말없이 바라보던 노인은 다시 한 번 긴 한숨을 쉬었다.

마치 제자의 작은 실수를 알아챈 스승처럼 아쉬운 기색이 역력했다.

아직 진정으로 피에 물들지 않은 순박한 대답.

차라리 방해되는 것을 모조리 얼려버리는 얼음의 마녀로 성장했다면 어땠을까.

차갑고 잔혹한 마녀는, 어쩌면 레가야에 군림하며 나름의 가치를 찾아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내 노인은 빙그레 웃으며 조금 전 떠올린 생각을 어리석다고 생각해버렸다.

인간성을 버리고 힘을 추구하는 모습은, 그녀의 딸에게는, 티엘에게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다.

한때 이상을 추구했으나 결국 현실 앞에 돌아서버린 자에게는, 단순히 이상론을 늘어놓는다고 비웃을 자격 따위는 없다.

노인의 입에서 어느 순간 나직하게 시작된 웃음소리가 이내 껄껄거리는 큰 웃음으로 변해갔다.

"돌아가지 못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정녕 그것으로 만족하십니까?"

"돌아갈거에요. 돌아가서 사과해야 할 사람이 있으니까."

그것으로 되었다고 말하듯, 노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비어버린 식기를 차곡 차곡 정리한 그는 지친 기색으로 지팡이를 찾아 쥐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더이상 할 말은 없다는 듯 조용히 돌아섰다.

아마도 이승에서의 마지막 마주침.

두 번 다시 만날 수는 없을 것이다.

그에 생각이 미친 티엘은, 식당을 절반쯤 가로질러간 노인의 뒷모습을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잊고있었던 말이 하나 생각났어요. 예전에 누군가에게서 들은 말이었죠."

뒤돌아보는 노인의 눈에 살며시 웃는 티엘의 얼굴이 들어왔다.

놀라울 정도로 누군가를 닮은 미소였다.

너무 이른 나이에 져버린, 밤안개의 마법사.

어쩌면 그녀가 이 곳에 서있었는 것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닮은 얼굴이었다.

눈앞의 소녀와 겹쳐보이던 마법사가 특유의 눈웃음과 함께 천천히 입을 열었다.

"누구의 방식도 아닌, 나만의 길을 찾아라."

레가야가, 그리고 제국이 택한 방식이 싫다면 잊을 뿐이다.

그것을 의식해, 굳이 그 반대 모습으로 걸어가는 것 또한 결국에는 해방이 아니라는 사실을, 지금의 티엘은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모두 내려놓는다.

그리고, 그 곁에 있을 무수히 많은 길 가운데서 원하는 길을 찾으면 된다.

누군가를 죽여서 끝내는 것도, 누군가에게 죽어서 끝내는 것도 아니다.

그저, 자신이 바라는 대로, 누군가를 지키는 것으로 이 삶을 이어가면,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오랜 시간, 많은 실패와 생각을 거듭해 정한 지금의 길이다.

그랬기에 자신있게 말하는 티엘의 입가에는 미소마저 떠오를 수 있었다.

"내 스승이 가르쳐준 마지막 가르침대로, 저는 이 길을 선택하겠어요."

"······그 새는, 약하지 않았다고 말씀드렸지요."

어쩔 수 없다는 듯, 허심탄회하게 웃은 노인은 이미 끝났다고 생각했던 이야기를 다시 꺼내들었다.

"증오를 불태우는 대신, 그 깃털 고운 새는 스스로의 생명을 불살랐답니다. 그리고, 그렇게 남은 목숨을 모두 불살라 사라질 뻔 했던 자신의 아이를 세상에 남겼습니다. 하지만 아마도 그 새가 바란 것 또한, 자신의 원한을 갚아달라는 것은 아니었겠지요. 그녀 역시도 같은 말을 들려주고 싶었을겁니다."

짙은 미소를 남긴 노인이 크게 허리를 굽혔다.

본래 신하가 군주에게 보내는 최대한의 경의를 담은 배례.

놀란 티엘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지만, 이내 따스한 표정으로 되돌아오며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덕분에 즐거운 시간을 보냈어요. 처음 뵙겠습니다. 설원의 새벽, 이스티엘 아르야 카르티치스입니다."

"저야말로, 이제는 미련없이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군요. 허허허허······. 성자의 방패, 헬루타 마야드 그람마인이라 합니다. 부디, 원하는 바 이루시길."

노인은 부드러운 웃음을 남기며, 미련 없이 돌아섰다.

헬루타.

그제서야 그의 이름을 떠올린 티엘은, 말없이 손을 들어 멀어져가는 자신의 유년을 향해 작별을 보냈다.

그렇게 끝마치지 못했던 인사가, 또 한 가지, 막을 내렸다.



* * *



여관을 나선 헬루타는 아득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 또한, 이상한 일입니다.'

자식이란, 본래 보고 자란 부모의 모습을 닮기 마련이다.

아무리 미워하고, 아무리 증오하더라도 하나의 틀에서 나온 주물(鑄物)처럼 같은 모양으로 자라난다.

그런데도 그의 손에서 나락으로 떨어져버린 공녀는, 신기하게도 보고 자란 아비, 미노스티야와는 조금도 닮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성정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안겨보지 못한 채 떠나보낸 대공비를 닮아있었다.

메르비아 로인 아르야.

레가야 동북방의 변경백령 아르미스의 백장영애이자, 헬루타의 첫 번째 제자.

아직 시스피케라와 미노스티야가 소년이라 불리웠을 시절, 메르비아와 처음 만나는 자리에도 그는 그 곁에 있었다.

그들이 결국 파국을 맞이하는 모습을 눈으로 보았고, 차마 한 때는 가족같이 여겼던 이를 미워할 수 없었던 메르비아가 자신의 목숨까지 불태워가며 뱃속의 아이를 숨기는 것도 그 눈으로 담아야만 했다.

그것은 한없는 비극이었다.

미노스티야는 그루터기에 남은 불씨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때문에 르비아는 어려서부터 철저히 고립되어 자라야만 했다.

메르비아도, 헬루타도, 르비아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너무나도 적었다.

결국 르비아는 홀로 살아남는 법을 배워야만 했고, 점차 두 사람에게서도 멀어져가기 시작했다.

메르비아는 혹여나 시스피케라의 마지막 아이에게까지 해가 미칠까 두려워했다.

수명을 깎아가면서까지 필사적으로 모든 것을 의심하는 미노스티야의 눈까지 속여내고, 그렇게 자신의 아이를 지켜냈다.

하지만 그렇게 쇠약해진 대공비는, 그토록 안아보고 싶어했던 아이를 안아주지도 못한 채 산고로 세상을 떠났다.

어처구니없게도, 그렇게 태어난 딸은 대공비의 희생이 안타깝게도 그 아비로부터 버려졌다.

메르비아를 빼앗은 적이라고 생각한 것인가.

그 아이 역시, 한 번 안겨보지도 못한 채 어머니를 빼앗겼건만.

그러나 폭풍은 방관자가 끼어들 수 없도록 날을 세웠고, 이번에도 헬루타는 멀리서 방관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그는 르비아를 미라야로 도피시켰고, 그가 항쟁을 일으킨 날 그의 지팡이가 되고, 검이 되었다.

그러나 정작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티엘을 보살폈는지 알면서도, 항쟁의 반대편에 섰다는 이유만으로 티엘을 내쳐야 했으니 이 얼마나 얄궂은 운명이란 말인가.

사과따위, 할 수 있을리 없다.

아니, 설령 용서받는다고 해도 스스로를 용서해서는 안된다.

스스로를 지킬 수조차 없는 나약한 어린아이를 죽음보다 더한 고통속으로 몰아넣은 자에게 그런 구원따위는 있어서는 안된다.

하지만 그 나락에서 기어올라온 티엘은, 그런 헬루타의 참괴를 무뎌지게 할 정도로 아름답게 성장해 있었다.

당당하게, 이제껏 죄책감으로 도망치기만 했던 헬루타를 향해 실로 당당하게 자신의 길을 걷겠다고 말하는 그 모습은 아마 세상을 떠나는 그 순간까지 잊을 수 없으리라.

"카릭스, 라피다멘테······."

떠나버린 옛 친구를 부르듯, 그리움 가득한 목소리가 과거를 더듬었다.

"자네들이 부러워지는군. 저 분의 성장을 곁에서 지켜보고, 또 도와드릴 수 있었더라면······. 허허허허······. 아니, 르비아 전하를 모시기로 한 순간부터, 이렇게 되리라는 것은 이미 정해졌던 것인가······."

세워 짚은 지팡이가 유난히 무거웠다.

약간의 아쉬움, 미련.

이미 떨쳐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망령처럼 되돌아와 지팡이를 잡아채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노마법사는 그 것들을 뿌리치며 단호하게 걸음을 내딛었다.

이미 늙어버린 그가, 스스로의 길을 정하고 나아가려는 젊은이를 잡아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니.

"자네들의 주인은 훌륭하게 성장하셨군 그래. 허허허허허······. 곧 감세. 같은 곳으로 가진 못하더라도, 하다못해 잠시 얼굴은 마주할 수 있지않겠나? 가서, 저 분이 얼마나 성장하셨는지, 기쁜 마음으로 전해주겠네들. 조금만, 조금만 기다리게나······."

모든 미련을 끊어낸 듯한 후련한 목소리가, 이제는 곁에 없는 자들을 그리며 머나먼 곳으로 휘날려갔다.


작가의말

폭풍과 나무. 그리고 새.

아이러니하지만, 제국의 귀족가는 대부분 비슷한 일을 겪거나, 보게 됍니다.

그리고 제국의 부조리를 보며 선택하게 돼죠.

이미 선대가 그러했듯, 자신 역시 광기어린 흐름에 굴복하고 편해질 것인가. 아니면 무모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홀로 싸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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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 16장-시원의 새벽 (9) 19.11.29 57 3 32쪽
161 16장-시원의 새벽 (8) 19.11.28 65 3 24쪽
160 16장-시원의 새벽 (7) 19.11.27 95 3 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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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 16장-시원의 새벽 (4) 19.11.24 68 3 30쪽
156 16장-시원의 새벽 (3) 19.11.23 65 3 30쪽
155 16장-시원의 새벽 (2) 19.11.22 64 3 29쪽
154 16장-시원의 새벽 (1) 19.11.21 71 3 28쪽
153 15장-귀향歸鄕 (11) 19.11.20 63 3 38쪽
152 15장-귀향歸鄕 (10) 19.11.19 62 4 25쪽
151 15장-귀향歸鄕 (9) 19.11.18 220 3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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