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시, 얼음의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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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LWinterer
작품등록일 :
2019.07.01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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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10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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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17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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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쪽

15장-귀향歸鄕 (8)

DUMMY

"란······."

오후의 느긋한 햇살이 내려쬐는 언덕 위.

하지만 따사로운 빛과는 달리, 그 위에 선 소녀는 조금 외로운 바람을 맞고 있었다.

발 아래로는 커다란 초승달을 연상시키는 도시가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둥그런 땅 안쪽으로 아슬아슬하게 뻗어있는 다리와 고고한 성의 모습도 한 눈에 들어왔다.

손을 내밀면 한 손에 잡힐 듯 작게만 보이는 땅.

그러나 동시에, 소녀 따위는 단숨에 삼켜버릴 수 있는 괴물이 숨죽여 웃는 땅.

레가야의 수도 란.

다시는 눈에 담을 일 없으리라 여겼던 도시는 아무 것도 모른다는 듯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오 년만에 돌아온 티엘을 마주보고 있었다.

묵묵히 도시를 응시하던 티엘은 천천히 손을 들어, 눈을 가릴 정도로 깊숙히 눌러썼던 모자를 뒤로 넘겼다.

가리고 있던 얼굴이 빛 아래 드러나며, 함께 숨었던 머리칼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이제는 잿빛에 가까울 정도로 닳아버린 주제에, 그녀의 머리칼은 그리운 고향의 바람이 기쁘다는 듯 정신없이 나부꼈다.

쓸데없는 감상.

하지만 막 내리막길로 접어들려던 티엘은, 스스로를 비웃으면서도 잠시 발을 멈추고 말았다.

이상한 일이다.

이 곳을 좋아했던가.

한 번이라도 그립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던가.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이 곳은 결국 티엘을 내쳐버린 매정한 땅일 뿐이다.

꿈에서조차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을, 슬픔으로 얼룩진 이 풍경을 그리워 했을리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메마른 감성도, 구멍난 기억도, '고향'이라는 이름 앞에서는 어째서인지 힘없이 녹아내리리고 있었다.

티엘은 자신도 모르게 한껏 숨을 들이쉬었다.

고향땅의 바람과 흙의 냄새.

익숙한듯, 그러면서도 낯선듯, 애매한 공기가 가슴속을 채웠다.

'돌아가지 않는 것과······, 돌아갈 수 없는 것······. 그건, 이렇게나 큰 차이가 있었던거구나.'

티엘은 아련한 눈으로 도시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크게 휘어지며 란의 심장부를 감싸고 흐르는 카제린 대하와 그 위로 쭉 뻗은 새하얗게 빛나는 카제린 대교를, 다양한 빛으로 물든 란의 시가지를, 그리고 그 위에 펼쳐진 하늘을.

돌아가겠다고 약속했다.

반드시 돌아가 사과하겠다고, 그렇게 약속했다.

하지만 이미 그녀 자신도 그것이 불가능한 약속이라는 사실은 직감하고 있었다.

리이나를 만난 이후 거의 마력을 쓰지 않았음에도 이미 잿빛으로 물들어버린 머리칼은, 그녀에게 남은 시간이 정말 얼마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아마도 마지막으로 눈에 담는 모습이 될 이 풍경 앞에서, 차마 쉽게 걸음을 뗄 수 있을리 없었다.

각오는 이미 되어 있더라도, 사라지는 것이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니까.

이세상 모든 일이 모두 돌이킬 수 없는 일들이라는 것은 알면서도, 이 걸음만 그런 것처럼 괜히 가슴이 떨리는 듯한 기분을 떨쳐낼 수 없었다.

잠깐만, 쉬어가면 안됄까.

문득 작은 욕심이 고개를 들었다.

여기서 발을 딛으면, 그 때 부터는 정말 숨 돌릴 틈도 없이 달려나가는 길 뿐이다.

하다못해 자신이 이 세상에 있었다는 작은 흔적이라도 남기고 가면, 안되는 것일까.

'여기까지 와서 어리광이라니. 역시 나란 애는······.'

그러나 티엘은 일부러 길게 심호흡을 하며 두 팔을 벌려 바람을 맞았다.

가슴을 탁하게 만드는 감정들을 바람결에 실어보내려는 것처럼.

여기서 돌아설 생각은 없다.

티엘은 천천히, 차가운 바람을 들이쉬고, 불안을 내뱉으며 가슴 속의 열기를 식혔다.

불안하게 일렁이던 마음을 천천히, 한 가닥으로 모아갔다.

활은 마음을 담는 무기다.

시위에 잡념이 맺히면, 살은 표적을 빗나가는 법.

자신이라는 화살을 시위에 올려놓았다면, 이제와서 자신의 마음 따위에 흔들려선 안될 일이다.

깊게, 그리고 길게.

차분히 시간을 들여 호흡을 다스린 티엘은 어느새 열기가 가신 눈을 들어올렸다.

"······이제 가자. 욕심은 적당히 부려야지."

태양은 이미 저물고있었다.

석양이 바다를 붉게 데우고 란을 황금빛으로 물들이는 모습을 눈에 담고 싶다는 마지막 욕심을 털어내버린 티엘은 조심스레 내려서는 길 위로 발을 내딛었다.



* * *



또다시 벨메린 영애의 이름을 빌려쓴 티엘은 어렵지 않게 시가지로 들어섰다.

너무 간단하게 검문을 통과한 탓일까. 몰래 침입하는 주제에 검문이 너무 허술한 것 같다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해 버릴 정도다.

하지만 이미 들어와버린 후에야 어떻게 생각해도 상관없는 일이다..

미안하지만, 속았다는걸 알아챘을 때는 이미 티엘이 이 곳에 없을지도 모르지 않은가.

마음 속으로 가만히 사과의 말을 삼킨 티엘은 괜히 잰걸음으로 시가지 안에 들어섰다.

그래도 십여 년을 살아온 땅이라서 그런 것인지, 조금은 기억과 맞물리는 풍경이 있다.

오래간만에 추억에 잠길 수 있어서일까.

티엘은 과거의 자신을 따라하듯, 조금 가벼운 걸음으로 몇 걸음 달려보았다.

하지만 어느새 훌쩍 커버린 키 때문에 그 시절과는 사뭇 다른 풍경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리저리 구멍뚫린 기억에 의지해서 잠시 걸어본 티엘은 잠시 후 전혀 엉뚱한 곳으로 나와버리고는 잠시 어린아이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핫······."

어느새 피식 웃음이 터져나오고 말았다.

어떻게든 익숙한 모습을 찾으려 안달하는 듯한 자신이, 말 그대로 길을 잃은 어린아이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조급하지 말자.'

어차피 가야 할 곳은 정해져있다.

헤멘다고 해봐야 미로도 아닌, 그저 평범한 시가지의 골목길일 뿐이다.

가볍게 마력을 일으켜 도약하는 것만으로도 쉽게 빠져나갈 수 있다.

게다가 거리를 돌아다니며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무척이나 가슴 따뜻한 것들이었다.

그냥 스쳐지나가기도 조금은 아쉽다.

낮잠을 너무 길게 자버린 것인지, 뒤늦게 일어나 잘 마른 빨랫감을 거둬들이는 처녀가 있었다.

모닥불을 피워 고구마나 감자 등을 둘러놓은 채 주전부리를 하는 일꾼들이 있었다.

꼭 달라붙어 찻집으로 들어가는 연인의 모습이 잠시간 티엘의 눈길을 잡아끌기도 했다.

저 골목 안쪽으로 뛰어들어가는 아이들도 보였다.

무슨 놀이를 하며 노는걸까.

어린 시절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놀아본 적이 없었던 티엘은 우르르 몰려다니며 까르륵 웃는 아이들을 조금은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곧 저녁때일텐데, 집으로 돌아갈 생각 따위는 없는 것 같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몰려 노는 아이들의 모습에 지친 몸과 마음이 조금 따뜻해졌다.

김이 오르는 수프 한 그릇을 받아든 것처럼 저절로 미소가 배어나오는, 언제까지나 이어지도록 지켜주고 싶은 풍경이다.

내일은 또다른 오늘일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 저 평화로운 모습들.

티엘은 저 풍경이야말로 르비아가 저울에 올려놓은 것중 가장 큰 것이라는 사실을 씁쓸하게 곱씹었다.

'그는······, 이런 풍경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걸까.'

르비아는 신을 부르겠다고 말했다.

세상에 뿌리내린 슬픔, 아픔을 돌이키겠다고.

그러나 그 것이 실패했을 때 희생되는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이런 사람들이다.

티엘은 조용히 고개를 돌려 성과 그 곳으로 이어지는 다리를 바라보았다.

저 다리를 건넌 땅이 얼마나 많은 피에 물들었는지, 과연 그 누가 알 수 있을까.

제국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난다는 항쟁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배층의 이야기일 뿐이다.

남의 위에 서려는 대신, 가족들과 소박한 행복을 누리는 자들은 그저, 그 불똥이 자신들에게 떨어지지 않기를 가슴 졸이며 지켜볼 수밖에 없었을 뿐이다.

이런 조그만 평화에서 눈을 돌린 자가 신을 불러온다고 한들, 대체 무슨 구원을 가져올 수 있을까.

인간의 행복을 알지 못하는 자가 약속하는 구원이, 정말 그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있을까.

멀어져가는 아이들의 그림자에 조금 씁쓸해하던 티엘은 가까운 벽에 손을 짚으며 자그맣게 생령의 이름을 불렀다.

"슈니엘."

티엘의 손아귀에서 가느다란 황금빛 실이 소리없이 흘러내려 지면을 파고들었다.

사막의 식물이 물을 찾듯, 지하 깊숙한 곳으로 아슬아슬한 거리까지 뻗어간 마력이 겨우 영맥을 찾아냈다.

역시 예상한 대로, 레가야의 영맥은 조금도 뒤틀리지 않은 평범한 상태였다.

탈리아에서도 느꼈던 위화감이 완전히 굳어졌다.

르비아의 말마따나 신화적인 수준의 마력을 한데 모은다면, 갑작스레 마력량이 늘어난 영맥은 억지로 영역을 확장하며 기이한 형태로 일그러진다.

그렇게 되면 마법사의 체내에서 일어나는 마력폭주와 똑같은 일이 지하 깊은 곳에서 일어난다.

멋대로 지반의 약한 곳을 뚫고 들어간 마력이 지하수를 건드리고, 공동을 무너뜨려 지반을 약화시킨다.

동시에 대기에도 악영향을 미쳐 기후를 뒤틀고, 최악의 경우 물질붕괴가 일어나며 대규모 마력폭발이 일어날 수도 있다.

하지만 란의 하늘과 땅은 너무나 고요했다.

쌓이고 쌓인 힘은 흩어지더라도 반드시 그 흔적을 남긴다.

저 로이아 해의 바람조차도, 한여름의 태양이 쌓아올린 열을 페넬타라는 폭풍의 형태로 발산하며 가까스로 스스로를 유지한다.

그렇다면 르비아가 모아둔 그 막대한 마력은, 대체 어떤 폭풍을 통해 발산되었단 말인가?

'설마 마법진을······. 아니, 그럴리 없어. 마법진의 제어에 성공하더라도, 그런 규모의 마법진이 가동되는데 이 거리에서 눈치채지 못한다는건 말이 안돼.'

슈니엘의 마력을 회수한 티엘은 불편한 심경으로 다시금 성을 노려보았다.

잔잔하던 심장이 긴장을 머금으며 조금씩 거칠어졌다.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모르지만······. 역시 빈틈은 보여주지 않는건가요.'

자신만만하게 자신을 초대까지 한 상대다.

싸우기도 전에 가장 큰 목적을 노출시키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으리라.

얼마 안되는 가능성에 조금은 희망을 걸었던 티엘은 약간 낙담하면서도 순순히 마법서의 끈을 고쳐맸다.

단검도, 활도, 모두 손쉽게 뽑아 쥘 수 있는 위치에 자리잡고 있었다.

민간인들이 휘말리지 않는 선에서라면, 언제라도 싸울 준비는 되어 있다.

그 순간이었다.


지친 눈, 낡은 돛

길 잃어 나아갈 곳 잊었지만

돌아올 곳, 나아갈 땅

쉴 곳 있으매, 망설이지 않는다.


어디선가 익숙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레가야에서 가장 흔하게 부르는 노래 중 하나, '푸른 바다와 은색의 비늘'.

물론 레가야의 중심에서 레가야의 노래가 들리는 것은 그리 특별한 일도 아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그 소리가 들려오는 것은 티엘이 막 발을 내딛으려던 방향이었다.

게다가 아직 스물은 넘지 않았을 듯한 젊은 남성의 목소리다.

'나셀······은, 아니야.'

티엘은 조금 얼굴을 굳히며 잠시 멈춰섰다.

명확하게 말할 수 없는 애매한 무언가가 발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리움?

물론 그 목소리를 나셀과 착각할 리는 없다.

더군다나 나셀이 이 곳에 있을 수도 없다.

애초에 나셀에게 주문을 걸어 공화국으로 돌려보낸 것이 티엘 자신이었으니까.

오히려 티엘이 지금 느끼는 감정은, 굳이 말하자면 불안감에 가까웠다.

하필이면 나셀을 강제로 되돌려보낸 티엘을 조롱하듯, 그를 연상시키는 음유시인의 노래가 들린다.

단순한 우연일까.

그저 과민반응이라 여기면서도, 티엘은 멈춰있던 시간을 만회하려는 것처럼 다소 빨라진 걸음을 재촉했다.

불협화음.

그리고 단조로움.

가까이 다가갈 수록, 이름모를 음유시인의 다소 부족한 솜씨가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화려한 기교와 장식음이 사라지고, 그러면서도 기본적인 음조차 제대로 다루지 못해 위화감이 드는 연주.

그러나 그 위화감은 그리 커다란 수준은 아니었다.

실력이 서툰 것보다는, 조율할 때 음을 잘못 맞춘 것이다.

물론 언제나 완벽할 정도로 악기를 조율해 두던 나셀은, 저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니, 나셀이라면 설령 조율이 틀어진다 해도, 즉시 연주를 멈추고 다시 음을 바로잡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셀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확신하면서도 왜 점점 가슴이 뛰는걸까.

어느새 티엘은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달리고 있었다.

어깨를 부딪히고, 틈을 비집다, 아예 낮은 건물의 난간을 딛으며 나는 듯이 속도를 냈다.

마치 눈으로 직접 보지 않고서는, 그가 나셀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할 수 없는 것처럼.

숨을 헐떡일 정도로 달린 끝에 마침내 시야가 확 트였다.

란의 중앙광장.

타국의 사절을 맞이한다거나 대공위의 계승을 널리 알리는 등 레가야의 가장 큰 행사가 있을 때에나 가득 차는 넓은 공터가 모처럼 몇 사람 보이지 않는 한산한 모습으로 티엘을 맞이했다.

티엘은 무릎을 짚으며 거칠게 숨을 헐떡였다.

광장은 거대한 열쇠 구멍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바늘처럼 뾰족하게 세워져 하늘을 찌를 듯한 '비문의 탑'이 서 있다.

노래는 바로 그 비문의 탑의 기단부에 앉아있는 음유시인이 부르는 것이었다.

음유시인의 실력 때문인지, 그의 곁에서 노래를 들어주는 사람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조금 안쓰러운 모습이다.

겨우 호흡을 진정시킨 티엘은 천천히 광장을 가로질러 그에게 다가섰다.

티엘의 인기척을 느꼈을텐데도, 음유시인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부드러운 가죽으로 만든 모자를 푹 눌러쓴 그는, 노래를 마치기 전에는 고개를 들지 않겠다는 듯한 태도로 팔현금의 현을 뜯고 있었다.

열정만은 대단하지만, 역시 악기를 다루는 손놀림은 매우 조심스러웠다.

기량은 어느 정도 갖춰져 있어도 아직 스스로의 실력에는 자신이 없는 모양이다.

'역시······.'

무슨 걱정을 하고 있었던 것인가.

설마, 르비아가 나셀을 잡아와 인형으로 만들어두기라도 했을까봐 겁먹었던 것일까.

스스로에게 대답조차 할 수 없는 한심한 질문이었다.

안도일까, 아니면 스스로에 대한 탄식일까 모를 한숨이, 뒤늦게 가슴을 쓸어내리는 티엘의 입에서 슬며시 새어나왔다.

띠잉-!

그 순간 음유시인의 손이 주르륵 미끄러졌다.

박자를 놓쳐버린 악기의 현이 끊어질 듯한 소리를 내며 떨었다.

손이라도 베인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날카로운 소리였다.

음유시인은 자신의 실수에 크게 놀라버린 것처럼, 뚝 멈춰버린 채 망연히 악기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이런, 무례한 짓을 해버렸네.'

당황한 티엘은 손을 들어올려, 조금 전의 실수는 듣지 못했다는 듯 박수를 보냈다.

짝짝짝!

음유시인의 무안함을 덜어주려던 박수소리는, 오히려 주위를 더더욱 얼어붙게 만들었다.

"저······."

조금 당황한 티엘은 사과라도 하기 위해 음유시인에게 말을 건넸다.

하지만 음유시인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티엘을 바라보기는 커녕, 마치 돌을 쪼아 만든 석상처럼 미세한 떨림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뭔가, 이상하다.

메마른 광장의 분위기 속에서, 아직 잠들지 않은 손뼉의 메아리가 유난히 길고 선명하게 주위를 맴돈다.

선명하다.

스쳐 지나가는 새들의 명랑한 지저귐도, 아직 여운을 잊지 못한 팔현금의 현이 떠는 소리도, 탑을 문지르는 바람의 소리도, 잿가루 위에 떨어진 새빨간 꽃잎처럼 이상할 정도로 선명했다.

아무리 광장에 사람들이 적은 편이라지만, 이렇게까지 조용하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티엘이 위화감을 느끼는 사이,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았던 메아리마저도 점점 잦아들었다.

이내 광장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완전한 정적이 찾아왔다.

'뭐야······.'

티엘은 미간을 좁히며 자신이 달려왔던 방향으로 시선을 던졌다.

아무도 없다.

달려오면서 부딪힌 사람이 몇 명이었는지조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는데도, 그녀가 달려온 거리는 황량할 정도로 휑하니 비어있었다.

그 옆의 거리도, 다시 그 옆의 거리도 마찬가지다.

한낮의 신기루처럼, 그 많던 사람들의 그림자는 오간 곳도 없이 사라져있었다.

"푸르른 바다여, 그대 드넓은 대양이여······."

오싹한 한기가 등을 따라 흘렀다.

고개를 숙인 채 침묵을 지키던 음유시인은, 아무것도 달라진 것 없다는 것처럼 갑자기 다시 시리아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아니, 연주가 아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약간 어긋날지언정 하나의 음율을 이루던 현의 소리가, 지금은 무작위로 훑어내리는 단순한 소음으로 바뀌어있었다.

완전한 불협화음을 내면서도 그렇게 연주하는 것이 맞다는 것처럼 태연하게 노래를 부르는 음유시인의 모습은 더이상 인간미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고장난 인형.

머릿속을 스치는 스산한 단어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조금 무서워진 티엘은 활을 손에 쥐며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그렇게 세 걸음 정도 움직였을 때였다.

무정하게 시리야를 뜯던 손이 힘없이 툭 떨어졌다.

그 손에 들려있던 악기도 비참하게 바닥을 나뒹굴며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때마침 불어온 바람이 음유시인의 모자를 걷어내며, 순간적으로 싸늘하게 얼어붙은 티엘의 눈은 악기가 아닌 음유시인을 똑바로 노려보고 있었다.

모자 아래에서 드러난 얼굴은 상당히 익숙한 형태였다.

한데 모아 묵은 목에 닿을 정도로 긴 금발.

그리고 머리칼 사이로 티엘을 바라보는 풀잎을 연상시키는 녹색의 눈동자.

그러나 그것은 살아있는 자의 것이 아니었다.

살짝 벌려진 입술도, 금방이라도 가늘게 떨릴 듯한 눈꺼풀도 모두 만들어낸 거짓.

유리알로 만들어진 투명한 눈동자에 섬뜩할 정도로 무표정한 티엘의 얼굴이 비춰졌다.

다음 순간, 티엘은 우라실을 꺼내 힘껏 휘둘렀다.

예리한 칼날이 인형의 상체를 베어가르고, 무너져가는 동체를 다시 한 번 꿰뚫었다.

그리고 그 위로, 한 발의 아스트라가 날아들어 삽시간에 인형을 쓰레기 더미로 바꾸어 놓았다.

인형의 잔해까지 완전히 바스라뜨린 티엘은 부스러기를 짓밟으며 뿌득 이를 갈았다.

"이따위 치졸한 수에 보기 좋게 걸려버렸네."

착각할 리 없는 장난이다.

하지만 그것이 누구를 흉내낸 것인지 명백한 이상, 티엘에게 흙탕물을 뿌리는 짓이나 다를 바 없는 짓이었다.

역청처럼 들러붙는 불쾌감을 애써 억누르며 몸을 돌린 티엘은 완전히 텅 비어버린 도시를 보며 머릿속으로 찢어질 듯한 고함을 내질렀다.

을씨년스러운 바람이 휘감은 도시에 살아있는 사람의 기척은 없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연인들의 미소도,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의 친애도, 모조리 그럴싸하게 꾸며낸 허상이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다.

조금 전 티엘은 사람들 사이의 따뜻한 온기를 보지 못하는 르비아를 비난했었다.

그러나 만일 르비아가, 티엘이 그렇게 여길 것까지 꿰뚫어 보았다면?

마치 티엘이 소중하다고 여긴 것들 자체가 허상이라고 말한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 아닐까.

한 때 티엘 자신보다도 티엘을 더 잘 알았던 르비아다.

단순한 망상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소름끼치는 함정이었다.

몸을 망가뜨리는 것만이 함정은 아니다.

의지를 꺾고, 마음을 짓밟아 스스로 부서지게 만드는 것 역시, 소름끼칠 정도로 무서운 함정이다.

따가가각. 정적 속에서, 기계장치가 맞물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살의에 가까운 분노가 매섭게 소리의 근원을 찾았다.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 모를, 또 한 명의 그림자가 시야 한 구석에 나타나 있었다.

부드러이 물결치는 갈색의 머리를 풍성하게 기르고 커다란 활을 등에 짊어진 한 명의 여성.

양 귀에 매달린 한 쌍의 은 귀고리가 아련한 빛을 뿌렸다.

익숙한 걸음걸이, 익숙한 몸놀림.

누구였는지 떠올리는 것보다도 먼저, 티엘의 심장이 터져버릴 듯 날뛰기 시작했다.

저 사람을 모욕하는 것을, 더이상 놔 두어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르비아아아아아!"

티엘은 활을 들어올려, 단숨에 여성의 심장을 꿰뚫었다.

물론 비명은 없다.

오히려 비명을 지르는 것은 티엘의 내면이었다.

그러나 인형극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티엘은 금방이라도 뇌가 익어버릴 듯한 감정윽 억누르며 냉정을 유지하려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가까스로 발길을 돌려 얼마쯤 달려가자 문득 경계를 서던 병사 한 명이 티엘의 곁을 스쳐지나갔다.

붉은 더벅머리에, 커다란 창을 든 낯익은 얼굴이 지나쳐간다.

이를 악물며, 마찬가지로 또다시 인형을 부쉈다.

그러자 이번에는 어느 가게 앞에서, 긴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짧은 금발머리의 여성이 쾌활하게 손을 흔들었다.

스쳐지나가는 가정집의 정원에서는 밤색 머리를 어깨까지 기른 여인이 물레로 실을 잣고 있었다.

여기도, 저기도, 그리고 그 너머도.

이미 잊어버렸을 터인데도 여전히 가슴을 저미게 만드는 수많은 사람들의 그림자가 그녀의 곁을 맴돌았다.

안다.

이런 인형극에 의미따위는 없다.

단순히 티엘의 화를 돋굴 뿐이다.

그러나 그 인형극은 당하는 티엘마저도 무심결에 감탄을 자아낼 정도로, 집요하게 신경을 건드리는 함정이었다.

그저 스쳐지나가도 되는 단순한 인형들이라 해도, 마치 자신이 사랑해온 사람들을 욕보이는 것만 같은 기분에 사로잡혀버렸다.

결국 티엘은 마주치는 인형 하나하나를 남김없이 부숴갔다.

마치 거미줄에 걸린 나비였다.

그럴 수록 정신적으로 몰린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인형을 부수려는 몸을 멈출 수가 없었으니까.

때문에 티엘은 마지막으로 나타난 인형의 모습에 오히려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나뭇가지에 줄을 달아 만든 그네에 앉아 한가로이 발장난을 치는, 긴 검은 머리의 소녀.

티엘 자신을 본뜬 인형이었다.

"당신, 울고, 있나요?"

검은 머리의 소녀는 티엘을 보며 생긋 웃었다.

맑은 자수정빛의 눈동자를 깜빡이는 소녀의 머리칼은, 어느새 잿빛이 되어버린 티엘과는 달리 짙은 검은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네를 늦춰 뛰어내린 소녀는 거리낌없이 티엘에게 다가와, 그녀의 머리칼을 어루만졌다.

"아픈, 가요?"

뜨거운 것이 가슴 속으로 울컥 치밀었다.

티엘은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돌렸다.

"······파드마."

화약을 터뜨린 듯한 요란한 소리가 들리고, 이내 마지막 인형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진 쓰레기가 되어 풀썩 허물어졌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미처 부서지지 않은 부품이 하나 남아있었다.

데구르르 굴러 티엘의 발을 툭 건드린 그 부품은, 다름아닌 자수정빛 눈동자 부분이었다.

만족하나요?

이미 입을 열 수 없는 인형이 그렇게 묻는 것 같았다.

티엘은 대답 대신 구두굽으로 유리눈을 콱 내려찍었다.

그러나 보석이 으깨지는 감각은, 생각 이상으로 소름끼쳤다.

"이따위 장난으로, 대체 뭘 말하고 싶은건가요······."

인형의 시체가 수북하게 쌓인 거리에, 꽉 눌린 목소리가 쓸쓸한 혼잣말을 남겼다.

과거, 그를 잘 안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그가 티엘의 속내까지 알아맞추듯, 티엘 역시도 르비아의 생각을 읽거나 예상하는 것 정도는 가능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이해할수도, 따라잡을 수도 없었다.

기억을 잃어서?

아니, 아마 모든 기억을 다 가지고 있었더라도, 티엘은 지금의 르비아를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언제부터 그는 이해할 수 없는 괴물이 되어 있었던 것일까.

미라야로 떠났던 때?

아니면 그보다도 더 오래 전?

어쩌면 처음부터 본성을 숨긴 채, 티엘을 기만한 것인가?

"파드마."

티엘의 주위로 백색 빛무리가 엉겨붙었다.

티엘은 그 빛을 투명한 갑옷처럼 전신에 두르며 신중하게 활을 들어올렸다.

아직 아스트라를 걸지 않아 텅 빈 활끝이 긴장 속에서 느릿하게 주위를 훑었다.

습기를 잔뜩 머금은 바람이 좁은 틈새를 지나는 듯한 소리가 먼 곳에서부터 들려오고 있었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마침내 움직이는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애냐!"


작가의말

고스트 타운이라는 소재는 전부터 써먹어보고 싶었습니다 :D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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