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결해(氷結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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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연성
그림/삽화
유연성
작품등록일 :
2019.07.02 17:50
최근연재일 :
2019.08.02 22:00
연재수 :
3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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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09,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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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19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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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제 20화 : 멸천회(滅天會)

DUMMY

“이런..!”


경호성을 내지른 위지호명이 몰아 부치던 곤륜사내를 버려두고 뒤쪽으로 급박하게 물러난다.


타다닥.


저 멀리 사라진 줄 알았던, 좀 전에 피해낸 무지막지한 권기가 허공을 선회해 그의 좌측으로 짓쳐들고 있었다.


우우우웅!


이걸 이기어권(以氣御拳)이라 불러야 할까.

꽤나 시간을 두고 물러났음에도 살아있는 생명체마냥 그를 쫓아오는 권기.


푸스스스.


닿지도 않았건만 기운의 여파로 상의의 왼쪽 어깨부근이 가루가 되어 흩날린다.


‘큭!’


결국 간발의 차로 스쳐지나간 그것은 그의 어깨에 시퍼런 멍을 만들어냈다.

여유부리며 조금만 늦게 회피했더라면 견갑골이 완전히 뭉개졌을 법한 살벌한 공격이었다.


절정의 권사(拳士)가 발할 수 있는 최고의 비기(秘技)임이 분명할 터.

위지호명은 순간 간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낀다.


조금의 방심도 용납해서는 안 될 상대들.

다시금 팽팽히 조여지는 긴장의 끈이다.


허나 공동의 비기를 가까스로 흘려낸 위지호명에게 아직 위기는 끝난 것이 아니었다.


뒤쪽으로 물러나길 기다렸음인가.

어느새 후방에서 권기의 조종을 끝낸 복면권사가 다시금 양 손에 막강한 기운을 품고 짓쳐들어온다.

이번엔 공동비전(崆峒秘傳) 복마신장(伏魔神掌).

급하게 물러나 등을 보이고 있는 위지호명에게 그대로 내리꽂는 이격(二擊)이다.


쿠와아아!


‘위험..!’


황급히 교룡번신(蛟龍飜身)의 수법으로 몸을 뒤집은 그가 내공을 거침없이 끌어올리며 풍차처럼 광명을 휘돌린다.

어마어마한 속도로 휘돌아가는 광명의 창대.

이어 순식간에 생겨나는 가공할 연화의 폭풍.


그로인해 생겨나는 방호벽(防護壁), 연화풍신벽(蓮花風神壁)의 발동이다.


콰콰쾅!


절세의 복마신장을 허공에서 그대로 받아낸 위지호명.

그의 신형이 원래 있던 방향으로 무섭게 튕겨나간다.


‘나쁘지 않다. 어쩌면..!’


연화풍신벽의 묘용이다.


강한 힘을 똑같이 단단한 힘으로 방어하는 것이 아니라, 바람처럼 표홀하게 저항하지 않고 물러나는 방호신공.

복마신장에 저항하지 않고 그 힘을 역이용해 뒤로 자연스럽게 물러난다.

허공에서의 부딪침이라 충격이 덜한 점도 한몫했다.


이 기회를 활용한다.

방어에서 공격으로의 급변이다.

그의 두 눈 깊숙한 곳에서 작은 섬광이 번뜩인다.


‘이제 그만 끝내자꾸나.’


허공을 훨훨 날아 튕겨나가던 그가 일순 하늘을 향해 좀 전의 연화직찰탄을 미친 듯이 펼쳐낸다.

쏟아지는 빗줄기를 뚫고 승천하는 무수한 창기 다발들.


그러한 위지호명의 뜻밖의 행동은 그들만의 다음 동선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던 복면삼인을 당황시키기에 충분했다.

의문어린 눈으로 순간 하늘을 쳐다보는 그들이다.


그들이 잠시 멈칫하던 그때.


이미 쏘아낸 창기다발들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위지호명이 곤륜사내를 향해 그대로 쇄도한다.

갑자기 자신에게 올 줄 몰랐던 곤륜사내의 눈이 일순 흔들리던 찰나.


번개같이 달려들어 내치는 연화순개락이다.


카카카카캉.


연화창의 가장 기본이되, 가장 정석적이며 파괴적인 초식.

또한 위지호명, 그가 가장 좋아하는 초식이기도 했다.


좀 전보다 배는 빨라진 무시무시한 속도다.

이번의 공격으로 끝내겠다는 필살의 의지가 광명에 한가득 실려 있다.


“크으윽!”


손발이 금세 어지러워진 곤륜사내가 온몸 곳곳에 공격을 허용하기 시작했다.

쥐고 있는 양의검에서 살벌한 냉기와 한기의 칼날을 줄기줄기 쏟아내고 있지만, 눈앞의 사내는 얼어붙은 창으로도 그의 공격을 모조리 파훼하고 있다.


‘창절! 이렇게 강할 줄이야..!’


이 사내는 지금까지 전력을 다한 것이 아니었다.


곤륜사내는 솔직히 이곳에 오기 전 그를 우습게 여겼던 것이 사실이었다.

황산에서만 비밀리에 위명을 얻은 창절.

그 별호가 과대평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 자신들을 이곳에 보낸 그도 넷이면 충분하다 생각했으니.


‘우리끼리만 온 것은 실수다.’


이를 악물며 어떻게든 막아보려 애써보지만 그의 현재 무공으로는 역부족.

적양검과 빙한검 모두 그에게 별다른 타격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창절은 점점 빨라지고 단단해지고 있었다.


카캉, 카카카캉!


그의 눈이 경악으로 번쩍 뜨이는 순간.


“크헉!”


결국 단전부근에 깊숙이 창을 허용하고 만 곤륜사내다.


‘이런 괴물 같은...’


그의 눈에서 허망한 빛이 일순 일렁이더니 이내 생명의 빛이 꺼져나간다.

사내에게 창절은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 높다란 벽이었다.


“미안하단 말은 않겠네.”


씁쓸히 읊조리는 위지호명.


남은 복면인 둘은 발에 못이라도 박힌 듯 순간적으로 굳어버린 채였다.

그들이 어떻게 해볼 새도 없이 촌각 만에 한 목숨이 끝나버렸다.


사태를 깨닫고 그들이 주춤하던 찰나.


“마저 끝내도록 하지.”


음울한 그의 목소리가 하염없이 내리는 폭우 속에서도 또렷하게 들려온다.


두 복면인이 서로를 돌아보며 시선을 교환하려던 그 때, 그따위 틈도 주지 않겠다는 듯 위지호명이 그들을 향해 벼락처럼 달려든다.

점창무인을 향해서다.


이미 가장 파탄이 나있는 그에게 광명이 토해내는 연화직찰탄은 사망선고나 다름없었다.


파바바바박!


서른 두발의 창기다발이 그의 전신을 무자비하게 직격한다.


“크아아악!”


사내의 어설픈 방어는 무의미했다.

온몸이 걸레짝처럼 변해버린 점창무인이 썩은 고목처럼 뒤로 넘어간다.


쿵.


이제 남은 복면인은 하나.


공동전인의 두 눈이 거칠게 흔들린다.


홀로 남은 그를 쓸쓸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위지호명.


일순 그가 복면인에게로 짓쳐들지 않고 몸을 돌려 걸어간다.

황노야와 그의 딸 수련이가 있는 방향이다.

이미 황노야가 복면인을 처리한 모양인지 더 이상 병장기의 부딪침은 들려오지 않았다.


부르르 한번 몸을 떨던 공동전인이 이제까지 닫고 있던 입을 열었다.


“나를 우롱하는 건가? 어서 죽여라! 죽이지 않으면 어차피 다시 찾아올 테니까.”


자존심이 크게 상한 듯, 복면 안에서 으르렁거리는 사내.


“난 당신을 우롱하지 않았어. 살려 보낼 생각도 없다네.”


위지호명은 뒤를 돌아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일행을 향해 걷던 걸음을 옮길 뿐이다.


“뭐라..?”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복면인의 의문 가득한 표정 위로.


‘설마..?’


일순 뇌리에 스쳐 지나가는 한 가지 가능성.


그가 고개를 번쩍 치켜들며 복면을 세차게 때려대는 폭우를 거슬러 올라 어둑한 하늘에 시선을 던진다.


“잘 가게.”


위지호명의 음성이 폭우 속에서 환청처럼 들려온다 싶은 순간.


천공(天空)에서부터 복면인을 향해 벼락처럼 내리꽂히는 창기 다발들.

복면 속에서 이미 새하얗게 질린 사내가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는 그것들을 멍하니 바라본다.


‘이런 어처구니 없...’


콰콰콰콰쾅.


복면인이 서 있던 자리가 무자비하게 터져 나간다.


산산조각이 나 비산하는 사내의 육편(肉片)들.

그 비현실적인 광경 위로.


그칠 줄 모르는 빗줄기만이 처참한 그들의 현장을 여과 없이 때려대고 있을 뿐이었다.



일행 앞까지 걸어온 위지호명이 황노야의 핏빛 무복을 한 번 쳐다본다.

그리고 이내 그의 두 눈을 바라본다.


가주의 눈동자가 이렇게 슬퍼 보인 건 그가 알기로 두 번째였다.

황노야가 두 눈에 애써 웃음을 그려 넣으며 고개를 살짝 끄덕인다.

그 모습에 짧고도 굳게 마주 고개를 끄덕이는 위지호명이다.


황노야를 지나 그의 두 눈이 자신의 사랑스러운 큰 딸 위지수련에게로 닿는다.

황노야 덕분인지 피한방울 튀지 않은 순백의 의복이다.

쫄딱 비에 젖긴 했지만.


“미안하구나, 수련아.”


많고 많은 말 중에 그가 내뱉은 말은 아버지로서 가장 멋없는 한 마디다.


위지수련의 두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힌다.

그녀의 눈물은 다른 것이 아니다.

그녀는 아버지가 울고 있다고 느꼈다.

저렇게 미안한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커다란 울음을 쏟아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아버지가 너무 가여워 눈물이 난 것이다.


‘왜 마음의 짐을 그토록 혼자 지으시려 하는 거예요.’


아버지와 마음의 짐을 꼭 나눠야겠다고 다짐하며.

그녀가 먼저 가서 아버지에게 안긴다.


“저는 괜찮아요. 저는 아버지가 자랑스러워요.”


아버지의 멋없는 한 마디를 가장 멋진 한 마디로 감싸주는 딸이다.


위지호명의 입가에 힘겨운 미소가 떠오른다.

누군가 그가 웃는 것을 방해하듯.

하지만 간신히 원래의 모습을 찾아가는 그의 미소다.


“우리는 꼭 이겨낼 수 있을 거다 수련아. 암 그렇고말고.”


위지수련은 대답대신 아버지를 더욱 세차게 끌어안는다.

그리고 아버지의 등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미친 듯이 퍼붓고 있는 폭우 속에서.

서로를 얼싸안고 있는 부녀와 그들을 말없이 지켜주는 수호령이 있다.

어떠한 시련에도 굴복하지 않을 그들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과도 같을는지.

불어오는 전란(戰亂)의 바람 속에서 위지세가는 그처럼 스스로를 다독이고 있을 뿐이었다.


***


사천성(四川省) 중경(重慶).


사천의 동쪽 끝에 위치한 그리 넓지 않은 지역.

중원 사람들에게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사천의 성도(成都)에 비하면, 과거로부터 이곳을 아는 사람들은 극히 드물었다.


그 이유는 지형적인 이유가 한몫했다.

사천의 성도나 다른 지역과는 다르게 유독 중경은 산과 언덕이 많이 분포해 있어 도심을 형성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경에서 북(北)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섬서의 종남산(終南山)이, 동(東)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호북의 무당산(武當山)이니 말을 더해 무엇 하랴.

주변의 산세와 지형의 험난함이 이와 같은 중경이었다.


하지만 최근 십년 사이에 중원에서 가장 괄목(刮目)할 발전을 이룩한 곳을 꼽으라면,

알 만한 사람들은 이곳 중경을 세 손가락 안에 꼽기를 주저치 않았다.

서장(西藏)과의 교역로를 끼고 있는 감숙의 난주(蘭州)가 그 첫째요,

운남의 낭인연합(浪人聯合)이 세를 불려 정착한 귀주의 귀양(貴陽)이 둘째,

마지막 셋째가 바로 이 중경이라 할 수 있었다.


중경의 발전은 어찌 보면 예견되어 있는 일인지도 몰랐다.

북으로는 섬서를, 동으로는 호남과 호북을, 남으로는 귀주를 끼고 있는 지리적 특성이 교통의 요충지로써 커다란 잠재력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물꼬를 튼 것은 다름 아닌 제천맹의 일익(一翼), 현월신가(玄月申家).

십오 년 전쯤 이곳 중경으로 파견을 나온 신가의 장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그때부터 이곳에 믿을 수 없는 도로와 다리들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중경에 살던 사람들에게 불가해한 현상이었다.

달리 천지개벽(天地開闢)이라 부르는 것이 적절할까.

그 높았던 산들이 깎여 나가고 울퉁불퉁 경사진 언덕들이 평지가 되어갔다.


그렇게 형성된 지금의 중경.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동서남북을 잇는 교통의 중심지로 변모한 것이다.


워낙 지형적으로 불리했던 탓에 불과 십 몇 년 만에 대도시로 성장하거나,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여드는 명승지로 탈바꿈 하기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과거보다 여러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중경을 통해 왕래하는, 확실히 사람냄새가 나는 곳이 되어간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러한 이곳 중경에서도 나름 정착민들의 밀집된 군락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니, 그 군락이 자리한 곳의 이름을 우릉현이라 했다.


중경의 우릉현(羽陵峴).


평평히 깔린 도로 위로 드문드문 솟아있는 집들과 상점들, 그 사이사이로 쉬지 않고 흘러가는 인파들이 꽤나 도심의 빛깔을 내고 있다.

그 곳에서 유독 눈에 띄는 상점이 한 군데 있었으니, 우릉현에서 가장 유명한 약초상점인 천구약상(天求藥商)이다.

말 그대로 하늘에서 구한 약을 파는 상점이란 뜻.

대단히 과장되고 허황된 이름의 약초상점이었지만 중경의 사람들은 모두 이곳을 애용했다.

약초의 효과가 정말 기가 막히게 신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은 일주일 중에 유일하게 이곳 천구약상이 쉬는 날이다.

우릉현에서 가장 높이 솟아 있는 천구약상의 건물 중앙 대문에 휴무(休務)를 의미하는 판때기가 대롱대롱 걸려 있다.


상점을 스쳐가는 꽤나 많은 인파들과 하루 잠시 동떨어진 듯 보이는 모습.

그러한 청구약상의 어둑한 창문 안쪽으로 사람의 것으로 보이는 그림자들이 넘실대고 있다.


아니다 다를까, 밖과는 어울리지 않는 어둑한 내부에 커다란 원탁을 중심으로 적지 않은 인물들이 제멋대로 둘러 앉아 있다.

족히 스무 명은 되어 보이는 인원.

특이하게도 원탁의 가운데에 박혀있는 야명주(夜明珠)가 이곳의 어둠을 밝혀주는 유일한 빛이 되어주고 있었다.


대부분 많이 쳐줘야 삼십대 후반, 그토록 상당히 젊어 보이는 그들의 외양이다.


그들 중 이 지루하기 짝이 없는 적막을 불쑥 깨뜨리는 한 사내가 있었다.


“진짜 정군맹(正群盟)이 신설될 줄이야. 이건 우리도 예상치 못했던 건데 안 그렇소, 형님?”


삐딱한 듯 하면서도 거칠음이 한가득 묻어나오는 음성.

꽤나 준수한 얼굴에 훤히 드러난 이마, 질끈 동여맨 말총머리가 꽤나 호남아의 인상을 주는 사내다.

독이 오른 듯 날카로운 눈빛과 높은 콧대를 가로로 살벌하게 지나고 있는 커다란 흉터만 아니라면.


그의 말투가 원래 그러한 건지, 형님이라 불린 사내는 별 신경 쓰지 않는 투로 화답했다.


“그러게 말이다. 그만큼 구파와 정파인들이 제천맹에게서 느끼는 위협의 수위가 한계에 달했다고 봐야겠지.”


조용하면서도 차분한 음성이 물어온 동생이란 자와 확실히 대비되는 면이 있다.

선이 가는 평범한 얼굴에 고요한 신색이 돋보이는 사내.

입고 있는 도복만 아니라면 서생이라 해도 믿을 만한 분위기다.


“아니, 십 오년 동안 얼마나 많은 피해가 있었는데, 도와주려면 진즉 도와주던가. 그동안은 잠자코 있다가 칠 년 전, 일 년 전 그 꼴을 겪으니까 이제 와서 지들도 위기의식을 느낀 건가, 참나!”


내뱉는 말이 신랄하기 그지없다.

그 속에 담긴 울분과 한을 가감 없이 표출하는 말총머리 사내다.

그의 그러한 말에도 누구하나 뭐라 하는 이가 없었다.

무리에서 사내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도 위치지만, 대부분 이들이 비슷한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저도 운경 형님 말에 어느 정도 공감해요. 정군맹을 설립한 주체가 이대세가(二代世家)니까요. 핵심인물은 남궁가(南宮家)의 검왕(劍王) 어르신과 제갈가(諸葛家)의 가주. 지금까지 손 놓고 가만히 있다가 이제 와서 구파와 하나인 것처럼 구는 게 마음에 들진 않네요.”


할 말이 있으면 조근 조근 끝까지 해댈 것 같다.

선한 인상과 입가에 항상 자석처럼 매달려 있는 미소, 제법 누님들의 사랑을 독차지할 것 같은 미소년의 느낌을 주는 청년이다.

오른쪽 눈 밑에 난 흉터만 아니라면 그리 크지 않은 체구와 더불어 만만히 보일 수도 있는 인상.


“역시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 운이 밖에 없어!”


말총머리 운경이 일순 계집애 같은 목소리를 내뱉으며 미소년 사내 청운을 사랑스럽다는 듯이 쳐다본다.

그 어울리지 않는 희극적인 표정이 꽤나 우스웠는지 무거운 분위기를 뚫고 좌중에서 간간히 웃음소리가 흘러나온다.


“그리고 이대세가라, 큭큭큭! 우리 운이는 너무 적나라하게 있는 그대로 얘기를 잘한다니까. 오대세가 중에 세 곳이 멸문했으니 이대세가지 암, 큭큭.”


뭐가 그리 우스운지 배를 잡고 혼자 키득거린다.

허나 그 키득거림에 동반되는 다른 이들의 웃음은 없었다.


“경아, 그래도 오랜 세월 동고동락해온 다 같은 정파인들이 아니더냐. 너의 조롱은 너무 과하다. 그만 해라.”


형님이라 불린 서생 같은 도사 사내가 그의 동생을 엄준히 꾸짖는다.


“현오 형님은 무슨, 말도 못합니까. 틀린 말 한 것도 아니구만.”


그래도 본인이 과했던 것은 아는지 애먼 천장을 쳐다보며 머쓱함을 달래는 운경이다.


“엄밀히 말하면 오십년 전부터 이것은 구파와 제천맹의 싸움이었다. 본 회(會)가 창단되면서 팽가(彭家)와 황보가(皇甫家)의 인물들이 합류하긴 했으나, 그건 그들의 자발적인 선택이었지. 안타깝게도 숭고한 희생으로 끝났지만 말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야. 남궁가와 제갈가가 자발적으로 나서서 구파와 정파무림에 도움을 주는 것이다. 사실 두 가문이 전면에 나서서 주동은 하고 있으나, 다들 알고 있지 않느냐. 핵심은 우리 구파가 정군맹이라는 틀을 빌어 양지로 나오는 것이라는 걸 말이다. 우리는 단지 그들 두 가문의 용기에 감사를 표하고 할 일을 하면 될 뿐이다.”


현오의 나직하고도 힘 있는 음성은 좌중을 납득시키면서도 분위기를 숙연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하지만 한 사람은 항상 예외인가보다.


“감사는 개뿔이, 생각해보니 더 화나네. 특히 검왕을 필두로 한 남궁가 말이오. 진즉에 우리 회와 노선을 같이 했으면 십오 년 간 이정도 피해는 없었을 것 아니오. 지금 서부무림의 온갖 중소문파들을 끌어들이면서 정파인으로서 멋진 척은 지들이 다하고 말이야. 결국 피흘리는 건 우리 구파와 중소문파들이겠지. 기회주의자 같은 놈들, 에라이!”


그는 단단히 꼬여있었다.

그래도 이곳의 많은 이들이 그의 말에 반박할 수 없는 것은 그의 진심을 알기 때문이다.

말은 저리 거칠어도 이곳의 누구보다 정이 깊고 의리 있는 사내가 운경이었다.

그만큼 십오 년 간 수많은 동료들을 잃었기에 자연스레 나오는 한탄일 뿐.


하지만 그의 지랄 같은 저 화병(火病)을 유일하게 받아주는 이도 현오 뿐이었으니.


“유란이가 참 그립구나. 여기 있었다면 저놈의 주둥이를 쌍검으로 싹둑 잘라버렸을 텐데 말이야.”


현오의 한탄어린 혼잣말에 무겁게 가라앉아 있던 좌중에서 떠나갈 듯한 폭소가 터져 나온다.


“큭큭큭.”

“크하하하!”

“하하하!”


운경이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한 번 어루만지더니 몸을 부르르 떨어댄다.


“상상해 버리고 말았네. 아오 끔찍해라! 그나저나 형님은 어디서 그런 파락호의 말투를 배운 것이오? 주둥이라니, 큭큭큭. 형님도 드디어 도사의 탈을 벗어던진 것이여, 나처럼. 큭큭!”


혼자 키득거리는 그의 모습에서 정파인의 가지런한 모습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어디서 배우긴. 내 앞에서 웃고 있는 미친놈한테 배웠지. 그나저나 유란이가 늦는구나.”


걱정스럽게 변한 현오의 표정에 청운이 언제나처럼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별일 없을 거예요. 누님이 워낙 꼼꼼하잖아요? 아마 개방에서 건네 준 정보를 좀 더 면밀히 분석하느라 늦는 걸 거예요. 절 믿으세요, 형님.”


청운의 말에 현오가 이내 고개를 굳게 끄덕였다.

이중에 가장 막내라 할 수 있는 청운이 회의 네 조장 중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절대 운이 아니었다.

그만한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청성파의 심도(心道)라는 예지술(豫知術)을 어릴 때부터 익혀온 그에게는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영적인 감각이 있었다.

청운이 괜찮단다.

항상 십 할 들어맞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의 자신 있는 미소라면 안심해도 좋았다.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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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제 11화 : 제천맹(濟天盟) 19.07.05 233 5 20쪽
10 제 10화 : 제천맹(濟天盟) 19.07.05 243 5 16쪽
9 제 9화 : 제천맹(濟天盟) 19.07.04 267 4 14쪽
8 제 8화 : 제천맹(濟天盟) +2 19.07.04 298 4 13쪽
7 제 7화 : 황산북해(黃山北海) 19.07.04 296 4 18쪽
6 제 6화 : 황산북해(黃山北海) +2 19.07.03 340 6 13쪽
5 제 5화 : 황산북해(黃山北海) 19.07.02 384 7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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