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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수문 (悲獸問)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드라마

오패론
작품등록일 :
2019.07.10 00:12
최근연재일 :
2019.12.10 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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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17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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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문(波紋) (10)

DUMMY

그 때, 초문과 여운도진의 사이로 날아드는 한 줄기의 검기(劍氣)가 있었다. 초문이 고개를 들어 검기가 날아온 방향으로 시선을 옮기자, 어느 새 그들의 지척까지 다가온 진석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진석호는 한 차례 깊은 한숨을 내쉰 후, 허리를 숙여 여운도진을 점혈하였다. 그 결과, 그전까지 여운도진의 팔에서 치솟고 있었던 피 분수가 조금씩 멈추기 시작하였지만, 여운도진은 자신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에 소스라치게 놀란 듯 결국 정신을 잃고 말았다. 항상 다른 사람들의 피를 탐닉해 왔음에도, 정작 자신의 피에는 큰 충격을 감당하지 못하는 여운도진의 모습은 실로 모순적인 느낌을 풍기는 것이었다.


한편, 다시 몸을 일으켜 초문을 바라보는 진석호의 입에선 허탈한 듯한 음성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하아... 제 손으로 직접 더러운 뒤처리를 하긴 싫었는데... 어떤 고인(高人)이신지는 모르지만, 선배님 때문에 제 계획이 모두 엉클어져 버렸군요."


사실 방금 전까지 진석호는 일부러 어호대의 공격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은 채 수동적인 방어만 계속해 오고 있던 상태였고, 이와 같은 행동의 이면에는 정파로서 원리원칙에 충실하고 싶어하는 그의 욕구가 반영되어 있었다. 비록 다른 문주들에게 찬동하여 명선장의 멸문에 결의하긴 했지만, 그가 생각하는 멸문(滅門)이란 그저 그 단체의 수뇌부만을 제거하여 자연스럽게 그 세력을 허물어뜨리는 것이었을 뿐 지금처럼 모든 구성원들을 죽이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도주자들을 처리한다는 명목 아래 무특산으로 자리를 옮겼던 것도, 사실은 차마 명선장의 모든 이들이 죽어나가는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을 자신이 없어서였다. 그러나 운명은 결국 그를 명윤 일행과 맞닥뜨리도록 이끌었고, 그로 인해 진석호는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그들을 처치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나머지 일행은 그렇다 치더라도 장주의 아내와 두 자녀까지 죽이는 건 진석호에게 있어 너무나도 죄책감이 드는 일이었기에, 마침내 그는 여운도위를 이용하고자 마음먹게 되었다. 다시 말해, 자신이 어호대를 맞아 쉽게 끝을 내지 않고 시간을 끌다 보면 어느 순간 여운도위가 먼저 장주 가족들을 공격하여 그들을 처리해줄 것이라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초문의 등장으로 인해 진석호가 머릿속에서 그렸던 그림이 완전히 망가져 버리게 되었고,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라도 그는 직접 나설 수 밖에 없었다. 결국, 그전까지 진석호에게 연신 무기를 휘두르며 공세를 취했던 모습이 무색하게, 현재 무특산 정상에선 모든 어호대 대원들이 가슴에서 피를 쏟은 채로 절명해있는 상태였다. 즉, 지금 이 순간 진석호는 초문과 마찬가지로 천하오십대고수(天下五十大高手)의 위용을 제대로 드러내려 하고 있었다.


그렇게 진석호는 초문을 향해 계속 말을 이어갔다.


"원했던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제게 주어진 임무이니 완수를 해야겠지요. 지금 제겐 명선장 장주와 그의 식솔들의 목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부디 선배님께선 여기서 그냥 못 본 체 자리를 피해주셨으면 합니다. 지금이라도 그렇게 해주신다면, 여운 공자에 대한 일은 제가 곡주께 잘 말씀 드려서 선배님께 해가 가지 않도록 조치 하겠습니다."

"하하, 그럴 필요 없다네. 본좌는 여기서 계속 자네를 막아 설 생각이니 말일세. 이들은 본좌에게도 꽤나 중요한 의미가 있는 사람들이라서 말이야."


그리고 나서 초문은 뒤를 돌아보며 명윤 부부에게 말했다.


"어서 도망가시오. 여긴 본좌가 맡겠소."

"대협, 정말 감사 드립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긴 말 말고 어서 여길 떠나시오. 다른 이들이 몰려오기 전에 최대한 이곳에서 멀어지셔야 하오."

"대협..."


명윤 부부는 한 차례 깊이 허리를 숙여 보인 후, 다시 몸을 돌려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초문은 들릴 듯 말 듯 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 다음에 우리 은혜가 당신들을 찾아가게 되면 홀대하지 말고 반드시 잘해주셔야 하오."


눈을 감으며 다시 진석호 쪽으로 돌아서는 초문. 그리고 잠시 후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땐, 그의 손에선 이미 영롱한 황금 빛깔의 수강(手罡)이 형성되고 있었다.


#8

초문과 진석호 간의 결투는 한 시진이 넘게 계속되었다. 그런 그들이 싸우고 있는 무특산(無特山) 주변에는 이미 수많은 무인들이 몰려와 있었는데, 그들 중 절반은 무특산에서 터져 나온 기의 파동을 느낀 사람들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드디어 명선장의 비밀통로를 찾아낸 후 이쪽으로 건너온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차마 산을 타고 두 사람의 근처로 다가갈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토곡(㫦谷) 모월단(募月團)의 단주(團主) 조복진(照複珍)은 끊임없이 기의 충돌이 울려 퍼지고 있는 무특산 정상부(頂上部)를 바라보며 감탄했다.


"저같이 엄청난 양의 두 기가 서로 충돌하는 전투는 소인으로서도 처음 목격하는 것이군요. 그나저나 진 장주님을 상대하여 이 정도의 투기를 발산할 수 있는 저 자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그러자 그의 옆에 서 있던 해진검문(獬進劍門) 섬율대(剡汩隊)의 대주(隊主) 목운(凩沄)이 입을 열었다.


"글쎄올시다. 그러나 확실한 건 이 싸움이 그리 쉽게 끝나진 않으리란 것이오."


조복진과 목운의 말처럼 초문과 진석호의 결투는 어느 누가 우세하다고 딱 잘라 말할 수 없을 만큼 매우 치열한 것이었다. 하지만 중인들의 예상과는 달리 그들의 싸움은 이미 종반부를 향해 치닫고 있었다. 어중간한 초식으로는 결코 승부를 낼 수 없다는 걸 깨달은 두 사람이 드디어 각자의 최고 절기를 시전하기 위한 준비자세를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초문의 경우 그가 양손을 마주대자 그 주위에 형성돼 있던 금빛 수강이 온 몸을 감싸며 마치 황금 불상과 같은 모습으로 변했고, 진석호는 푸른빛 검강이 운용된 자신의 두 검을 이기어검으로 움직이며 마치 해태의 양쪽 송곳니와 같은 형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각각 그들이 지닌 최강의 절기인 금래퇴려위수(金來退戾威手)와 청음해아어검(靑廕獬牙馭劍)이 지금 이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렇게 잠시 동안 두 사람 사이에는 폭풍전야와 같은 짙은 침묵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얼마 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어느 순간, 바람결에 풀잎이 가볍게 흔들리는 소리를 신호 삼아 두 사람의 신형이 서로를 향해 뛰어들었다. 그와 동시에 무특산 전체를 뒤흔드는 엄청난 굉음과 기의 파동. 무특산에 존재하던 상당한 양의 나무와 풀들이 송두리째 뽑혀져 나간 것은 물론, 심지어 산 아래에서도 그 여파를 못 이기고 뒤로 밀려나는 이들이 있을 정도였다.


잠시 후, 무특산 정상부를 뒤덮고 있던 먼지가 걷히고 바닥에 쓰러져 있는 두 사내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 중 먼저 몸을 일으킨 건 바로 진석호였다. 그는 심하게 다쳐 뼈까지 드러나 보이는 옆구리를 움켜쥔 채 신음성을 흘리고 있었다. 그는 한쪽 무릎을 꿇은 어정쩡한 자세로 초문이 있는 쪽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당금 천하에서 천하오십대고수 이외에 이토록 강한 무위를 지닌 자가 또 누가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답을 찾을 수 없었는데, 방금 전 그 마지막 초식을 보니 이제야 알 것 같군요. 선배님께서는 과거 강호에서 갑자기 모습을 감추셨던 초문 선배님이 맞으시죠? 그런데 이십오 년 전에 무림을 떠난 사람이라고 하기엔 너무 강하신 것 아니십니까?"

"흐흐, 정작 이렇게 사람을 쓰러뜨려놓고 할 얘기는 아니라고 보네만. 그나저나 자네도 참으로 둔하구먼. 이제서야 본좌의 정체를 알아채다니 말이야."


그리 대꾸하는 초문의 상태는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했다. 오른쪽 상반신에선 부러진 갈비뼈가 피부를 뚫고 나와있었고, 왼쪽 다리는 아예 형태조차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표정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도 편안해 보였다. 초문은 눈을 감고 주변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와 진석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숨소리를 포함하여 나뭇잎이 흩날리는 소리, 흙먼지가 바위를 스치는 소리 등 다양한 소리들이 그의 귓전을 자극하였다. 그러다 문득 초문에게로 속삭이는 듯한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왔다


"사형의 인생은 행복하셨나요?"


초문이 눈을 뜨고 하늘을 바라보자 희뿌연 안개처럼 목란(穆爛)의 모습이 보였다. 이에 초문은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피어 올리며 답했다.


"글쎄. 매순간 내 인생이 행복했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이겠지. 다만, 이제 이 삶에 있어 미련은 전혀 남지 않는구나. 란이 너를 만나 어엿한 사내가 되었고, 은혜를 만나 아버지가 되었으며, 동하 그 녀석을 만나 드디어 짐승에서 인간이 될 수 있었으니깐. 게다가 이 순간 마음 속 번뇌들까지도 모두 사라져버렸으니, 이 정도면 나름 괜찮았던 삶이라 표현해도 좋으려나?"


그 순간 목란이 초문에게로 손을 내밀어왔다.


"사형, 그렇다면 이젠 소매 곁에서 같이 행복하게 살아보아요."


초문이 힘겹게 팔을 뻗어 그 손을 잡자, 알 수 없는 온기가 그의 온 몸을 감싸는 듯한 느낌이 전해져 왔다. 그와 동시에 초문의 눈가로 흘러내리는 한 방울의 눈물. 그렇게 초문은 마지막 순간 행복해 보이는 표정을 지으며 숨을 거두었다.


말없이 그런 초문의 모습을 지켜보던 진석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무특산 너머 저편을 응시하였다.


"결국엔 그들을 놓쳐버렸구나. 이제 와서 다시 뒤쫓는다 하더라도 붙잡기엔 무리가 있겠지. 아아, 오늘 일의 파문(波紋)이 미래에 어떤식으로 일게 될지는..."


이 순간, 진석호의 눈빛은 이유를 알 수 없는 복잡한 감정으로 무척이나 일렁이고 있었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파문(波紋)이란 단어의 중의적 의미가 중요하여 그것을 잘 살려서 글을 쓰고자 했는데, 그러다 보니 글의 전개가 다소 지지부진해 보였을 수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앞으로 더 좋은 글 쓸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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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마수(魔獸)의 길 (4) 19.12.10 49 3 10쪽
26 마수(魔獸)의 길 (3) 19.12.07 86 3 8쪽
25 마수(魔獸)의 길 (2) 19.12.01 88 3 8쪽
24 마수(魔獸)의 길 (1) 19.12.01 80 3 7쪽
» 파문(波紋) (10) 19.11.17 99 4 11쪽
22 파문(波紋) (9) 19.11.17 88 4 12쪽
21 파문(波紋) (8) 19.11.09 150 3 12쪽
20 파문(波紋) (7) 19.11.07 126 4 7쪽
19 파문(波紋) (6) 19.11.04 131 5 9쪽
18 파문(波紋) (5) 19.11.02 165 4 9쪽
17 파문(波紋) (4) 19.10.27 189 5 13쪽
16 파문(波紋) (3) 19.10.24 190 4 11쪽
15 파문(波紋) (2) 19.10.20 200 5 9쪽
14 파문(波紋) (1) 19.10.16 239 5 8쪽
13 칠 년 후: 비극의 서막 (7) 19.10.13 256 5 11쪽
12 칠 년 후: 비극의 서막 (6) 19.10.11 313 6 8쪽
11 칠 년 후: 비극의 서막 (5) 19.09.30 281 6 7쪽
10 칠 년 후: 비극의 서막 (4) 19.09.27 285 6 9쪽
9 칠 년 후: 비극의 서막 (3) 19.09.05 328 5 7쪽
8 칠 년 후: 비극의 서막 (2) 19.08.13 437 7 8쪽
7 칠 년 후: 비극의 서막 (1) 19.08.03 533 7 9쪽
6 내게 남은 것 (5) 19.07.24 567 8 13쪽
5 내게 남은 것 (4) 19.07.21 606 8 7쪽
4 내게 남은 것 (3) 19.07.17 640 8 12쪽
3 내게 남은 것 (2) 19.07.14 754 9 8쪽
2 내게 남은 것 (1) 19.07.11 981 9 8쪽
1 서 (序) +2 19.07.10 1,130 8 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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