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활극록

웹소설 > 일반연재 > 대체역사, 로맨스

PKKA
작품등록일 :
2019.07.10 16:41
최근연재일 :
2023.08.15 19:04
연재수 :
332 회
조회수 :
106,044
추천수 :
3,800
글자수 :
2,778,318

작성
20.01.22 10:22
조회
298
추천
12
글자
20쪽

114화

DUMMY

"먹을 만 해?"


주리는 정우의 물음에 "예. 아주 맛있어요!"하며 장국밥을 한 숟갈 더 입에 넣는다. 둘은 종로거리에서 조금 으슥한 뒷골목에 있는 한 국밥집에서 점심을 먹고 있다. 사무실이 있는 메이지마치에는 맛있는 집이 많았지만, 주리는 의도적으로 그런 데는 피하려 했다. 집에서 먹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밖에서 먹을 때는 최대한 좋은 음식, 기름진 음식은 먹지 않으려는 게 주리의 결단이었다. 자신이 그런 음식을 먹을 때, 아버지 공장의 여공들이 어떤 음식을 먹는지 알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 집은 목이 좋지 아니하여 드나드는 손님도 극히 적었다. 한쪽 구석에서 조용조용히 은밀한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그러나 문제는, 애석하게도 장국밥이 전혀 맛있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이런 거친 음식이라고는 입에 대 본적이 거의 없던 주리는 애써 맛있는 척 하며 입 안에 국밥을 꾸역꾸역 집어넣고 말았다. 그러나 주리의 표정과 손동작에서 국밥이 도무지 입에 맞지 않는 걸 알아챈 정우는 안타까움을 느낀다.


"저, 아무래도 먹기 힘들면 안 먹어도 돼."



정우의 만류에도, 주리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으으응. 아니에요. 이런 것도 먹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걸요! 오빠는 독립운동 하며 더 힘든 날도 많았을 텐데. 제가 음식 가지고 투정부릴 수는 없어요!"


게다가 주리는 이런 음식을 마다하여 부일행위와 노동착취로 부를 착취한 집의 "부잣집 아가씨"의 면모를 정우에게 보인다는 것 자체가 극히 부끄럽기도 하였다.


정우는 그런 주리가 대견하여 머리를 살짝 쓰다듬어 주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혹시 얘가 먹기 싫은 거 억지로 먹어서 체할까 걱정부터 된다.


둘이 국밥을 반쯤 먹었을 때, 정우는 천 지부장이 총독부보다 악당 같다는, 주리의 신경 쓰이는 발언을 대화의 소재로 올렸다.


"아직 불편해? 사와고에 아나운서가 그렇게 된 게."


"에, 그게......"


주리는 잠깐 말을 못했다. 적에게 증오도, 동정도 보이지 말라던 천 지부장의 엄한 호통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자신이 적에게 동정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잘못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정우에게만은, 자기 감정을 숨기고 싶지 않다.


"예. 솔직히 그래요."


주리가 작은 한숨을 쉬었다.


“사와고에 아나운서가 대가를 치러야 하는 건 맞는데요. 전...... 그렇게 된 것이 불쌍하다고 생각해요. 게다가 부인 되는 코토노하라는 사람도 자꾸 불쌍하게 느껴져요. 우리가 아니었다면, 언젠가는 알았겠지만 이런 식으로 알아서 파국이 일어나진 않았을 거잖아요.”


주리는 작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지부장님은 예상 밖이라고만 하셨어요. 거기에 다른 오라버니들도 그냥 웃어넘기시고. 스님도 별말 없으시고...... 이런 생각을 한 제가 잘못된 걸까요?"


"그런 고민이었구나."


정우는 주리의 손을 살짝 잡아준다.


"괜찮아, 그런 생각해도. 다들 내색을 안 하는 것뿐이지, 모두 다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고, 거기에 책임감도 다 느끼고 있어."


"정말이에요?"


주리는 사와고에 아나운서와 그 부인이 어찌 되건 자기들 알바 아니라는 태도를 보이던 오라버니들의 태도에서 그런 것을 생각해 내기가 힘들다. 하지만 정우가 그렇다고 하니 믿고 만다. 그때 주리는, 정우의 얼굴에서 일말의 씁쓸한 표정이 지나가는 것을 눈치채었다.


그때 주리는 문득 어딘가에 생각이 미쳤다. 정우는 오래 전부터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상하이 임시정부를 위해 여러 일을 해냈다고 하였다. 그 일은 대부분 이러한 일, 남을 속이고 이용하여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주리는, 사랑하는 연인이, 그녀가 아는 한 누구보다 남의 고통을 모른 척 하지 않는 사람이 그런 일을 계속 해왔다는 것이 어떻게 다가올 지 자연스럽게 알고 말았다.


"오빠. 상하이에서 작업하며, 많이 힘드셨죠?"


주리가 갑작스레 이런 말을 하자, 정우는 처음에는 대답을 망설였다.


이런 비슷한 질문을 천 지부장에게 받은 적도 있었다. 적에게 회유당해 정보를 팔아넘기려다 덜미가 잡힌 경무국 소속 청년의 뒤통수에 직접 45구경을 박아주었던 날이었다. 지금 걱정으로 가득한 주리의 눈과 달리, 천 지부장의 눈은 늘 그리하였듯이 엄격하게 굳어 있었다. 정우는 그 눈 앞에 그저 "동포들이 고통받고 있는데 어떻게 제가 힘들다 하겠습니까?"라며 흔들림 없는 척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천 지부장은 딱히 만족스러워 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더 추궁하지는 않았다.


사모님도 마찬가지였다. 손에서 피 냄새가 가시지 않는 것 같아서 습관적으로 손을 닦을 때, 사모님이 넌지시 물었다. 정말 괜찮냐고 말이다. 사모님의 얼굴에는 평소의 장난기가 없이 진지한 표정이었다. 정우는 그 때도 그저 괜찮다고, 마땅히 해야 하는 일에 사감 같은거 가지지 않는다고 했었다. 사모님은 더 묻지는 않았지만, 눈에는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형제들에게도 받은 적이 있었다. 상하이에 있던 시절, 명수가 회계사기를 쳐서 자기 소유 공장에서 노동착취를 일삼던 한 일본인 부호를 몰락시킨 날이었다. 개구지개도 그 날은 그 부호 딸의 결혼식 날이었다. 회사 자산이 공중분해 되었다는 소식이 식장으로 날아든 순간, 결혼식은 그 자리에서 끝장이 나버렸다. 동태를 살펴보러 간 정우의 눈에는, 인생 최고의 날이 최악의 날로 바뀌어 버린 신부가 들어오고 말았다. 그 날, 같이 갔던 민호는 너 괜찮냐고 물어봤었다. 정우는 잠깐 망설였지만, 결국 "제 아비의 업보지 뭐."라고 하며 태연한 척 굴었다. 민호는 더 묻지 않았다.


정우가 지금 주리 이외에 고충을 털어놓은 사람은 오직 혜월 스님 뿐이었다.


"세존께서는 인생을 고통의 바다라고 하셨지. 이것이 부처님 법의 근본 가르침 중 하나이니라."


정우의 말에 대한 스님의 대답이었다.


"고통이 어째서 나오는지 보고, 느끼고, 또 깨닫을 때, 고통이 고통이 아니라 그 이름이 고통임을 알게 될 것이니라."


스님의 설법은 항상 정우의 마음을 기쁘게 하였지만, 그래도 설법이 끝나면 마음 속에 막막한 어둠이 깔려왔다. 스님 이외에 누군가 알아 주었으면 하는 어둠 말이다.


그래서 지금 자신 앞에서 사랑스러운 얼굴을 하고 자신을 골똘히 바라보는 이 아가씨에게는, 자심이 숨겨오고 싶었던 것들을 남김없이 털어놓고 싶다는 충동을 어찌할 수 없었다.


"그래. 네 말대로 많이 힘들었어."


이 말로 운을 떼자, 말문이 놀라울 정도로 술술 터져나왔다.


"우리가 하는 일들은 정상적인 사회에서는 용납하지 못할 범죄야. 정부의 자금을 위해서라지만, 상대가 누구가 되었건 남에게 피해를 주고 힘들게 만드는 것이 우리 일이야. 우리가 너희 아버지에게 하려는 것도 그렇고. 대한독립이란 대의를 위한 것이라지만, 남의 돈을 빼앗고 믿음을 준 사람을 배신하는 삶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어."


정우는 주변에 사람이 없음을 확인하고 자신의 손에 눈길을 주었다.


"그리고 내 손은, 솔직히 말할게. 전혀 깨끗하지 않아. 상하이에서 내 손으로 여럿을 직접 처치했어."


주리는 그 말이 나오자 순간 긴장한 얼굴이 되었다. 침이 목구멍으로 꿀꺽 넘어가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주리도 짐작을 안한 바는 아니었다. 그녀가 총독부 경무국에서 발행한 치안연감 속에는, 독립지사들이 적의 경찰, 관리, 또는 부일배 부호를 살해한 일을 알려주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는, 정우가 그런 일에 연관되지 않았으면 한다는 바램이 없지는 않았었다. 정우의 맑은 얼굴과 사려깊은 태도가, 피와 죽음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은 한 구석으로 치워두고 싶었다. 그러나 정우 본인이 밝히고 만 이상, 그 작은 바램은 그저 무의미한 것이 되었다.


"난 네가 생각하는 것 만큼 강한 사람이 아니야. 가끔 악몽을 꿀 때가 있어. 내가 사살한 사람들, 사기친 사람들, 강도질한 사람들이 꿈 속에 나타나. 무슨 말을 하는 것도 아니고 날 어찌 하려는 것도 아니야. 그저 나타나 지그시 보기만 해."


말은 '가끔'이었지만, 실은 '자주'였다.


"그럼, 다른 오라버니들은 어떻게......"


"웃음으로 버텼지."


그 한 마디에, 주리는 왜 다른 오라버니들이 평소에 웃고 떠들기를 좋아하는지, 왜 그들에게 당한 사람들을 불쌍할 정도로 조롱하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실 없는 농담이라도 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행위로 말미암은 무거운 감정을 덜어낼 수 있는 수단인 것이었다. 정우는 그들 사이에서 아주 유쾌하게 웃지는 않았지만, 형제들이 계속 웃고 지낼 수 있다면, 자신의 고통 정도는 그저 마음 속에 담아두기로 하였다.


"그래서 너 만나기 전까지는, 많이 지쳐 있었어. 발버둥쳐도 독립이 올 지 확신이 안 서고, 내가 지은 죄는 자꾸 떠오르고. 부처님 앞에서 아무리 절을 해도, 스님께 여러 번 설법을 들어도 번뇌망상이 사라지지 않았어."


"아, 오빠!"


주리는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울음을 터트릴 뻔했다. 정우는 주리가 오랫동안 몰랐던 세게에서 살아 왔다. 주리는 그 세계가 얼마나 어두컴컴하고 잔혹한 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 사실이 주리의 가슴을 쥐어뜻듯이 아프게 만들었다. 자신을 악몽 속에서 구원해 준 이 사람은 또 다른 악몽에서 헤메이고 있었던 것이다.


주리는 정우의 손을 덥석 잡고 말았다.


"오빠! 이제 괴로워하지 마세요! 이런 말을 하는 것 만으로도 오빠가 정말 강하고 훌륭한 사람이라는 증거예요. 저는 제 죄업 속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만 했던 걸요. 그러니까, 앞으로도 괴로운 게 있으면 저에게 말해주세요. 괴롭고 힘든 건 같이 나누면 반으로 나뉜데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주리는 겨우겨우 목구멍에서 치솟으려는 뜨거운 걸 삼켰다. 정우는 그런 주리가 고마워서, 몸이 저릴 정도로 고마워서 말을 더 잇지 못했다. 너는 나에게서 구원받았다고 생각하지만, 나 또한 너에게 구원받았구나.


잠시 후, 주리가 감정이 다소 가라앉은 것 처럼 보였다.


"이런 말은 혜월 스님 말고는 너밖에 못했는데, 이렇게 얘기하니 가슴이 좀 후련해 지는 것도 같네. 고마워. 얘기 들어줘서."


"언제든지 말하세요."


주리가 귀엽게 눈웃음을 지었다.


"오빠는 분명 다른 분들 걱정시킬까봐 이런 말 계속 속으로 꼭꼭 숨겨 온 게 다 보이네요. 그런거 계속 속에 쌓아두다가는 병 나요, 병. 제가 그랬던 것처럼요."


주리 말이 살짝 잔소리를 하는 투라 재밌다. 주리는 바로 평소의 쾌활한 태도를 보인다.


"하긴. 지부장님 앞에서는 약한 소리를 하면 바로 호통이 날아올 테니 이런 말 하기도 아주아주 어려웠겠죠. 오빠가 그런 말을 했다가는 바로 이렇게 말씀하실 테니까요."


주리는 그러더니만 엣헴 하고 헛기침을 하고는, 천 지부장의 성대모사를 한다.


"네 이놈!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구나! 이것은 너의 투쟁심이 약해진 증거다! 내 혼을 내줄 것이야!"


소녀의 높은 목소리 톤이 억지스럽게 굵지만 서늘한 천 지부장 특유의 목소리를 흉내내려 애를 쓰자, 그 차이에서 느껴지는 감각이 폭소를 유발하기에 무리가 없었다. 둘 다 언제 무겁고 힘든 이야기를 했냐는 듯 즐겁게 웃어버렸다.


정우는 얘기하는 김에 주리에게도 숨기고 싶었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난 그 때문에, 해방이 된다면 출가하기로 생각했었어. 혜월 스님 모시고."


"예? 정말요?"


주리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출가해서 부처님을 진정으로 모시고 수도생활을 한다면, 우리가 이제까지 지은 모든 업장을 더는 데 보탬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거든."


그 정도로..... 주리는 다시금 가슴이 먹먹해지는 걸 느꼈다. 사부와 형제들의 업장까지 자신이 짊어지겠다고 하다니. 그 답다면 그 다운 일이었지만 너무나도 큰 짐 같았다.


그런데 그때 주리는 마음이 급해져 버렸다. 정우가 출가하여 머리를 깎고 승려의 길을 걷는다면, 자신은 어떻게 되는가?


"저..... 지금도 출가하고 싶으세요?"


"아니야, 지금은."


서로의 눈이 마주친다. 정우가 긴장한 얼굴이 된 주리에게 싱긋 웃어준다.


"네가 있으니까."


주리는 그 한마디에 가슴이 탁 풀어지고 저절로 "다행이다."라고 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하지만 못내 걱정이 되어 더 추궁하고 말았다.


"정말이죠? 정말 출가 안 할 거죠?"


"안 한다니까."


정우는 상기된 얼굴로 출가하지 말라고 보채는 주리가 귀여워 또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었다.


"거기에 스님도 출가는 함부로 결정하는 게 아니라고 하셨고."


정우는 작년 이맘때쯤, 혜월 스님에게 출가의 뜻을 밝혔을 때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스님은 수염을 쓰다듬고는 이렇게 말하였다.


"정우야. 네가 부처님 법을 지성으로 받들며 선근이 깊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출가를 그저 도피처 쯤으로 여긴다면 진정 잘못 생각하는 것이니라. 이 세상 모든 생명이 본디 부처님 생명임을 깨닫게 하기 위해 모든 중생을 제도하려고 서원하는 자가 출가인이니라. 그 서원에서 비롯된 고충을 어찌 세속의 고충에 비하겠느냐? 아직 너에게는 주어진 시간이 많으니 더 생각하고 출가를 입에 담도록 하여라."


"스님의 이 말씀에 정신이 번쩍 들었어. 내가 악업을 씻기 위해 출가를 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도피하고 싶어서 출가를 하고 싶은 것인지 생각해 본 적이 없더라고. 그래서 이후 출가하고 싶다는 말씀은 안 드렸어."


"앞으로도 하지 마세요!"


"그래. 그래. 알겠어."


그런데 주리는 잠시 뭔가 생각하더니만, 표정에 또 구름이 꼈다.


"죄송해요, 오빠. 제가 너무 속이 좁았어요."


"어? 뭐가?"


"제가 왠지 세존께서 태자의 자리를 버리고 출가하려 할때 말리던 나수타라(那輸陀羅, 아쇼다라) 태자비 같아서요. 오빠에게 출가하지 말라고 한 거, 제 생각만 해서 그런 거 같아요."


주리의 눈이 부끄러움으로 내리깔아진다. 주리는 정우가 정말로 출가하여 혜월 스님을 시봉한다면, 극도로 용맹 정진하여 등정각에 올라 중생을 불도로 이끌 큰스님이 될 것임을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그렇게 될 수 있는 정우를 자신의 감정 때문에 잡아둔다는 것이, 이기적인 생각처럼 느껴지고 말았다. 정우는 괜히 출가 얘기를 한 건 아닌지 조금 후회가 되었다.


"그런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아 줘. 네가 내 곁에 있는 한, 머리 깎을 일은 없을 거니까."


"그래도......"


주리는 자신이 정우의 출가와 성도에 방해가 된 것 같다는 잠시 말이 없다가, 갑자기 고개를 든다.


"그럼 하나만 약속해주세요."


"뭐를?"


주리의 얼굴은 결연히 굳어 있다.


"출가할 마음이 드신다면 말리지 않을게요. 대신, 석가모니 부처님처럼 오밤중에 집 담 넘어서 출가하진 말아 주세요. 꼭 저에게 말씀하시고 하셔야 되어요. 아셨죠?"


"그래. 약속할게."


주리는 어린아아이처럼 새끼손가락까지 내민다. 정우는 조용히 미소짓고는 주리에게 장단을 맞춰준다. 안심해. 널 버리면서까지 부처님께 모든 것을 바치진 않을 것이니.


주리는 계속 무거운 이야기만 하자, 화제를 돌리려 한다.


"그럼 해방되면 뭐 하실 거예요?"


"민호가 무역회사 차린댔어. 거기서 일해야지."


"예에?"


주리는 그 말에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민호 오라버니는 완전히 사기꾼이잖아요! 진짜 회사 차려서 잘 운영할 수 있대요?"


그런데 주리는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정우 얼굴은 진지하다.


"민호는 우리 형제들 중 기업경영과 재무관리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친구야. 카라스마 세이지 백작님께서도 민호의 관심사와 재능을 알고 특히 그 쪽으로 가르쳐 주셨고. 민호가 경영한다면 믿을 수 있어."


"어, 진짜 그래요?"


주리는 민호가 미쓰이 사토시 사장으로 변장했을 때부터 사기꾼 기질만 계속 봐 와서 정우의 이런 평가가 뜻밖이다. 사실 정우도 어느 정도는 형제에 대하여 좋은 말만 해 주고 싶어서 이런 말을 한 것이기도 하였다. 민호는 대공황 때는 물론이고 몇 차례 주식 했다가 생활비를 날려먹서 정우에게 손을 빌린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사업자금은요?"


"장 대인이 빌려주기로 하셨어."


"흐음. 그래요?"


주리의 얼굴에 또 장난기가 번진다.


"혹시, 또 사기쳐서 사업자금 마련하려는 건 아닐까요?"


"글쎄다."


정우도 이건 확신은 못한다. 정우 또한 월급 받고 수입을 마련한 경험이 1929년 12월로 끝나 버린지라, 2년간 자신들이 정상적이고 합법적인 방법으로 자금마련이 용이할 지 슬슬 고민이 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민호는 회사 세우면 사부님을 명예회장으로 추대할 거야."


"에엑?"


주리는 그 무시무시한 천 지부장이 정장을 갖춰입고는 명예회장 명패를 책상 위에 올리고 위엄있게 앉아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저, 아무리 생각해도 지부장님이 사업하는 자리에 있다는 게 상상이 안가요."


"어? 그래? 난 잘 어울리실 것 같은데. 그럼 네 상상은 어떤데?"


"음, 제 생각은......"


주리는 골똘히 생각하더니, 결국 생각한 걸 그대로 내뱉고 말았다.


"마피아 보스?"


정우는 그 한 마디에 참지 못하고 푸하하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신문지상에 자주 오르내리는 미국 시카고 마피아의 제왕 알 카포네의 자리에, 천 지부장의 얼굴을 합성해도 무언가 그럴듯했던 것이다.


둘은 가벼운 마음이 되어 식사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서로 맞잡은 손은 그날 따라 더욱 따스하게 느껴졌다. 사무실에는 다른 형제들도 다 돌아와 있었는데, 주리는 쌀쌀맞게 군 건 다 장난이었다고 고백하고는 멋적게 웃는다. 주리가 또 찬바람을 불어일으킬까봐 경계하던 형제들은 "아니, 이런 요물을 보았나!"라고 성화를 내고는 다들 한바탕 웃어 버렸다.


저녁 시간이 되어 정우와 작별한 주리는 사뿐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정우가 남에게는 털어놓지 못하는 것을 자신에게 말했다고 생각하니 그들의 사이가 한층 더 가까워진 것 같아 콧노래가 나온다. 둘 간의 사이를 생각하니 격렬하게 나누었던 키스가 생각나 얼굴이 발그래해진다. 앞으로 기회가 있다면 더 용기를 내어 그 이상까지 가 보자고 생각했을 때, 온 몸이 부끄러움으로 마구 간지러워졌다.


그런데 집 근처에 도착했을 때, 낯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아씨. 그간 안녕하셨습니까요?"


놀라 돌아보니, 주리의 눈에 반가운 얼굴이 비추었다. 고모의 편지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상하권을 가져 왔던, 청주의 공장 문지기가 아니던가!


"어머나, 아저씨!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주리는 놀랍고 또 반가워 이 문지기를 살갑게 맞이하려는데, 문지기는 저번에 그랬던 것처럼 주변을 빠르게 살피고는 "마님께서 보내셨습니다."라며 편지 한 봉투를 건네주고는 "전 여기 안온 겁니다요."하고 빠르게 사라졌다.


"아이 참. 좀만 있다가 가시지."


주리는 문지기 아저씨가 또 편지만 전해주고 부리나케 가버리자 아쉬워했다. 어디 가서 좋은 음식이라도 대접해 주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혹시 아버지 한 참의가 자신이 고모와 교류한다는 것을 들키면 경을 칠 것이기에 이럴 수 밖에 없다고 이해한다.


주리는 오랜만에 전해온 고모의 편지인 만큼 방에 들어가서 보는 것도 기다리지 못하여 빨리 편지봉투를 뜯어보았다. 편지를 찬찬이 뜯어본 주리는, 갑자기 "어머나 세상에!"하고 뛸 듯이 기뻐하였다. 편지에는 고모가 조만간 경성으로 올라올 거라고 쓰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6

  • 작성자
    Lv.64 PnPd
    작성일
    20.01.31 16:51
    No. 1

    해방 후 화교들 대우를 생각해보면....음....

    찬성: 1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8 PKKA
    작성일
    20.01.31 16:54
    No. 2

    이때야 어찌될지 몰랐으니까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5 고단풍
    작성일
    20.08.24 20:47
    No. 3

    정우의 고통이 생생하게 느껴지네요.
    문득 경성스캔들의 여경이 떠오르네요.
    경찰, 고문, 취조 등이 무섭다는 말...
    눈앞에서 누군가 죽었을때의 그 충격, 그런 것들이 세세히 나와서 공감했던 기억이 있네요.
    정우와는 경우가 다르지만 평범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고민들을 하는 것이겠죠.

    찬성: 1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8 PKKA
    작성일
    20.08.24 21:29
    No. 4

    다들 같은 인간이니까요 ㅠ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 영락태왕
    작성일
    21.05.19 11:44
    No. 5

    해방....해방직후 3년이 정우와 주리,그리고 분단,독재가 기다리는다는게 참 ㅠㅠㅠ
    해방이 되도 정우가 행복하게 살수있을까요 ㅠㅠ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8 PKKA
    작성일
    21.05.19 14:22
    No. 6

    휴 구상한게 있는데 전혀 밝지 않을 거에요 ㅠㅠ

    찬성: 0 | 반대: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경성활극록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팬사운드트랙 링크 20.12.18 390 0 -
공지 『경성활극록』 쓰며 영향받은 작품과 참고문헌 +6 19.07.11 1,955 0 -
332 332화 +10 23.08.15 169 5 14쪽
331 331화 +10 23.04.16 161 6 15쪽
330 330화 +6 23.04.02 164 4 19쪽
329 329화 +6 23.03.19 190 4 18쪽
328 328화 +6 23.03.05 199 4 19쪽
327 327화 +6 23.02.26 197 4 15쪽
326 326화 +10 23.02.12 201 5 18쪽
325 325화 +14 23.02.05 230 6 17쪽
324 324화 +10 23.01.22 226 4 18쪽
323 323화 +8 23.01.20 221 4 23쪽
322 322화 +8 23.01.08 219 6 23쪽
321 321화 +14 22.12.25 235 6 18쪽
320 320화 +10 22.12.11 224 4 18쪽
319 319화 +10 22.11.27 237 6 14쪽
318 318화 +10 22.11.20 230 7 19쪽
317 317화 +8 22.11.13 230 5 14쪽
316 316화 +8 22.10.23 253 6 18쪽
315 315화 +8 22.10.02 240 4 13쪽
314 314화 +5 22.09.14 263 3 13쪽
313 313화 +5 22.08.15 266 5 29쪽
312 312화 +14 22.07.31 286 7 29쪽
311 311화 +2 22.01.31 291 4 19쪽
310 310화 +7 22.01.15 284 4 21쪽
309 309화 +3 22.01.01 269 6 18쪽
308 308화 +6 21.12.19 279 6 20쪽
307 307화 +4 21.12.12 292 8 23쪽
306 306화 +8 21.11.28 276 6 18쪽
305 305화 +12 21.11.23 281 9 16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