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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활극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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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KKA
작품등록일 :
2019.07.10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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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26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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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23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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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쪽

115화

DUMMY

“어휴, 참 무서운 세상이에요. 어떻게 그런 일이······.”


성 여사가 아침 댓바람부터 입에 올린 일은 당연히 사와고에 아나운서의 비극이었다. 비록 사와고에 부인 가문의 위세로 이를 보도했던 신문이 바로 회수되었지만, 용케도 배달부가 던지고 간 신문을 통해 이 소식이 사교계 내에서 알음알음 퍼지기 시작하였다. 미남으로 유명한 아나운서의 추문이었던 관계로 소문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하룻 밤 만에 이 일을 가지고 입방아를 찧었는데, 성 여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거, 그러게 조심 좀 하고 살았어야지. 아무래도 갑자기 불온한 방송을 했던 것도 그것과 관련 있던 것 같은데.”


한 참의가 혀를 끌끌 찬다. 주리는 아버지가 어쩌다 족집게 같은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그것도 잠깐이었다. 주리의 머리 속에는 고모가 어제 보낸 편지로 가득했다.


-주리 보아라.


건강히 잘 지내는지 궁금하구나. 이 고모는 고을 사람들의 도움으로 그럭저럭 지내고 있단다. 내가 보내준 책은 잘 읽어보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너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게다. 이제 네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았을 게다. 네 부모의 죄를 씻고 양반의 집안에서 상놈의 집안으로 추락한 가문의 명성을 되찾으려면 네 노력이 절실하단다. 이를 항상 명심하거라.


이 편지를 받고 모레 즈음에 내가 한성에 올라갈 예정이니라. 네 고모부님이 형무소에서 석방될 날이 그 날이란다. 올라간 김에 한번 네 얼굴도 보고 싶구나. 고모부님께 널 인사시켜야 하기도 하지만, 네 얼굴을 다시 보고 싶기도 하구나. 너에게 편지를 통해서뿐만 아니라 직접 보고 해줄 말도 아주 많단다.


그날 오후 5시 경에 시간이 난다면 낙랑파라라는 다방에서 볼 수 있으면 보자꾸나. 내가 한성에서 유일하게 아는 다방이라 생각나는 곳이 거기 밖에 없구나.


그때 보길 기다리마.


고모가.-


고모님이 경성에! 방 안으로 들어와서는 주리는 너무 기쁜 나머지 침대에서 마구 굴러다니다가 또 바닥에 떨어졌었다. 고모는 주리에게 한때 강한 정신적 고통을 안겨준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자신을 각성케 하여 독립운동의 길로 이끌어 준 누구보다도 존경하는 어른이다. 기억 속의 고모는 자신을 극히 거칠게 아버지 공장의 여공들이 처한 현실을 몸서리치도록 보여준 무서운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적의 탄압에 맞서 당당히 싸우는 투사다.


게다가 고모를 더욱 보고 싶은 이유는, 이제 자신이 그런 고모 앞에서 당당히 독립운동 한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주리는 고모 한자청 여사에게 절대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벅차고 피곤해도 팔다리에 힘이 솟구친다. 게다가 고모부님이라니! 주리는 고모부 오세창 진사에 대해 아는 게 많이 없었지만, 지금까지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었고 또 그 강건한 고모의 남편이라는 점에서 미루어 볼 때 분명 위풍당당한 선비라고 상상하던 차였다. 그런 분을 뵙게 된다는 상상으로 가슴이 들뜨기 이를 데 없었다.


그때 주리의 주의를 끌 만할 소리가 나온다.


"그나저나 재두는 귀국했다는데 여태 연락이 없어요?"


"그러게나 말이야. 내가 서에 전화하고 나서야 알았어. 원 참."


주리가 부모님의 대화에 끼어든다.


"재두 오라버니 귀국했어요?"


"그래. 벌써 사나흘 전에 돌아왔다는데, 전화 한통 없었다. 원 아무리 바쁘다고 해도 전화할 시간도 없나."


한 참의가 외조카에 대해 불평섞인 말을 한다. 주리는 '원래 그런 인간인 줄 모르셨어요?'하고 아버지에게 속으로 핀잔을 넣는다. 하지만 예리한 형사인 오재두가 종로서에 돌아왔다는 것은, 아무래도 불길하게 다가온다.


그런데 한 참의가 대뜸 이런 말을 한다.


“그런데 너, 오늘 저녁에 일찍 들어오거라.”


“예? 왜요?”


“오늘 장 사장이 저녁 같이하잰다. 너도 알지? 몇 번 본 적이 있으니.”


주리는 장평석 사장에 대해 알고 있다. 사업 관련해 장 사장이 여러 차례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으니까. 장 사장 또한 한 참의 집에 들락날락한 여러 인사처럼 주리를 퍽 귀여워해 주던 사람이라 나쁜 감정은 없었지만, 현재는 그 사람 회사 직원들이 어떤 처우를 받고 있을지부터가 궁금해진다.


주리가 일찍 들어오겠다고 하는데, 그때 성 여사가 이런 말을 한다.


“그러고 보니 장 사장님 딸이 조만간 혼례를 치른다면서요?”


“그렇지. 내가 어제 청첩장도 받아 왔어. 오늘 저녁 먹자는 것도 혼례 전에 한번 얼굴이나 보려고 그러는 거지.”


“그런데 그집 애가 우리 주리하고 아주 친한 관계 아니었나요?”


그 말에 주리는 어리둥절하여 “예? 누구요?”라고 하자, 성 여사가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까마귀 고기라도 먹은 게니? 네 학교 선배인 선옥이 말이다.”


선옥? 주리는 그 이름이 잠깐 기억나지 않아 머리가 멍했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그런 사람이 있었나?


그런데 그때, 갑자기 그 사람이 누군지 퍼뜩 생각나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어머나, 세상에! 선옥 언니요? 선옥 언니가 결혼한다고요?”


“어휴. 이제 기억났니?”


“어머, 어떡해! 어떡해! 어떡해!”


주리는 장선옥이란 이름을 새까맣게 잊어버린 것이 너무나도 부끄러워서, 그리고 그 선옥 언니가 경성에 있다는 것에 흥분하여 호들갑을 떨고 말았다.


“어이구. 걔가 도쿄로 유학간다고 며칠 동안 집이 떠나가라 울던 애가 지금 와서 뭔 소리라니?”


성 여사는 그런 반응을 보이는 딸아이가 귀여워 피식 웃는다.


“우와와. 저도 모르겠어요! 왜 내가 선옥 언니를 까먹었지?”


주리는 양손을 양 뺨에 가져다 대고 허둥지둥댄다. 어떻게 그 이름을 잊을 수가 있단 말인가? 학교 입학 후 2년 동안 아주 각별하고 특별한 관계로 보냈던 장선옥이란 이름을 어떻게 잊어버릴 수 있었단 말인가? 주리는 자기가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가서 왜 그런 건지 떠올리려 끙끙 애를 써야 했다.


주리의 이런 반응에 한 참의가 또 혀를 찬다.


“내가 저번에 장 사장 댁 들렀을 때 걔가 널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거늘 넌 잊어버렸단 말이냐?”


“우으······. 저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하기야. 걔가 도쿄 간 뒤로 연락이 거의 없었긴 했으니. 아무튼, 오랜만에 보는 것인 만큼 잘 대해 주거라.”


“예! 당연하죠!”


주리는 그 말을 끝으로, 오랫동안 기억 저편으로 보내 놓았던 추억을 떠올렸다. 주리가 막 입학했던 14살 때였다. 지금처럼 성숙하지 않고 키도 작았으며 아직 어린아이의 호기심으로 가득했던 주리는 처음 들어가 본 중학교가 신기하여 점심시간이 되자 막 사귄 친구들과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던 차였다. 운동장 한 구석의 농구코트에서 선배 언니들이 우르르 모여들어 꺅꺅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다들 궁금해서 코트로 가 보았을 때, 주리는 눈을 떼지 못하였다. 체육복 차림으로 농구공을 주고받으며 바스켓으로 팔을 뻗는 농구부 선배들 중, 유독 빛나는 사람이 있었다.


어깨에서 시원스레 자른 머리카락, 누구보다 오뚝하고 선명하여 유난히 성숙해 보이는 이목구비, 운동복인 흰 스웨터에 둘러싸여 멋지게 뻗은 길쭉한 팔, 짧은 블루머와 허벅지까지 오는 긴 운동복 양말 사이에서 빛나는 튼실한 허벅다리. 이 모든 것이 어린 주리의 마음을 뒤흔들어 버렸다.


그 선배는 격렬하게 공을 튕기고, 파고들고, 힘껏 팔을 뻗어 공을 던졌다 하면 바스켓 안에 넣었다. 그 선배가 공을 넣을 때마다 주변에서 환호가 터져 나왔다. 선배가 뛰어올라 공을 넣고는 공중에서 몸을 돌려 땀을 털어내자 강렬한 햇빛에 얼굴이 빛났다. 그 얼굴을 정면에서 쳐다본 주리는, 너무나도 황홀하여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다.


주리는 이후 그 선배의 얼굴만 떠올리면 얼굴이 새초롬히 빨개지고 가슴이 콩닥거려서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선배가 누구인지 알고 싶어서 이곳저곳 돌아다닌 결과, 농구부 주장으로 고등부 2학년인 18세의 장선옥 선배임을 알게 되었다. 시원시원한 성격, 뛰어난 운동신경, 우아한 몸매, 급장을 맡을 정도로 적극적이고 거침없는 태도에 사복도 항상 모-던하고 세련되게 입는 사람으로 선생들의 신망과 조선인과 일본인을 막론하고 동급생과 후배들의 동경을 한 몸에 받는 선배였다.


이후 주리는 그 장선옥 선배와 친해지고 싶어서 안달이 났었다. 어린 주리의 눈에 장 선배는 그렇게 되고 싶은 어른 그 자체였다. 소학교를 막 졸업하여 아직 성장이 덜된 주리는 주변에서 귀엽다 소리는 들었지만 아름답다느니 멋지다느니 하는 소리도 듣고 싶어서 애태우던 터였다. 그런 주리에게 자신이 이상적으로 여기는 멋진 선배가 나타난 것은 명색이 중학생이지만 아직 소학교 6학년생에 가까운 꼬마 여자애의 마음을 뒤흔들 일이었다.


주리는 이후 선옥의 교실, 농구부 부실은 물론이고 선옥이 동급생들과 모여 가는 곳마다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며 말을 걸 기회를 엿보았다. 그러나 워낙 동경하는 사람으로 둘러싸인 데다가 4학년이나 선배인 선옥에게 무슨 말을 한다는 것은 극히 어려웠다. 고등부 건물에 들어갔다가 엄한 선배에게 걸려 왜 중등부 애가 고등부 건물에서 돌아다니냐고 혼난 적도 있었다. 선옥의 신경을 끌기 위해 그래도 할 수 있던 것은, 농구 경기 때마다 맨 앞줄에 서서 펄쩍펄쩍 뛰며 온 힘을 다해 응원하는 것뿐이었다.


선옥과 친해질 기회가 도무지 없어서 낙담하고 있던 차에, 예상치 못한 천재일우의 기회가 굴러들어왔다. 한 참의가 주말에 새로운 거래처 사장과 가족동반하여 점심식사하자고 한 날이었다. 그 거래처 사장이 장평석 사장이고, 그의 따님이 바로 선옥이었던 것이다. 주리는 음식점에서 선옥을 본 순간, 너무 놀라서 또 기절할 뻔했다. 선옥은 기쁘게도, 주리를 보자마자 누구인지 바로 알아차렸다.


“어머. 너 우리 학교 신입생 아니니? 연습경기 할 때마다 진짜 열심히 응원하던데.”


주리는 동경하던 선배가 바로 눈앞에 있다는 사실에 정신이 아득해져서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어찌하지 못하였었다. 무슨 말이든 하고 싶었으나, 목이 잠긴 듯 말이 거의 나오지 않았다. 선옥은 그런 주리를 흥미롭다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주리는 그게 너무 부끄러워 입을 꼭 다물고 음식을 오물거릴 뿐이었다.


덕담과 환담, 그리고 사업 상황에 대해 여러 잡담을 나눈 아버지들은 추가 상의를 위해 한 참의의 사무실로 가고, 부인네들은 같이 미쓰코시로 쇼핑을 갔다. 어머니들의 뒤를 따라가던 주리는, 그제야 선옥에게 말을 걸 수 있었다.


“선배님······. 선배님은 정말 멋지고, 아름다우시고, 농구 할 때 반짝반짝 빛이 나시고······. 세상 누구보다 멋지시고······.”


주리는 어린 후배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선옥에게 거의 횡설수설을 하였다. 어떤 말도 떨려서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러니까 뭔데?”


선옥이 살짝 웃으며 주리를 바라본 순간, 주리의 입에서는 이런 말이 빽 튀어나왔다.


“언니! 날 가져요!”


이 엉뚱하기 짝이 없는 말에, 선옥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손으로 틀어막았었다. 주리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한 건지 바로 자각하고 얼굴이 폭발할 지경이어서 “히잉.”하고 칭얼대고 눈에는 눈물이 고이고 말았다. 선옥은 웃음을 겨우 참고는 “너 되게 귀엽다.”라며 주리의 쪼그만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장난기 반 진지함 반이 어린 얼굴로 이렇게 물었다.


“우리 S자매 안 할래?”


S자매. 주리가 다니는 중학교 뿐만 아니라 모든 여학교에서 극히 각별하고 특별한 선후배 관계를 뜻하는 말이었다. 그 말에 주리는, 말 그대로 기뻐서 기절할 뻔했다.


그날 이후, 주리는 동급생과 선배들의 질투를 한 몸에 받으며, 선옥의 이른바 “S동생”이 되었다. 점심시간 종만 치면 주리는 도시락을 싸들고 고등부 건물로 달려갔다. 주리는 뒤뜰에서 선옥과 같이 도시락을 먹다 말고 어깨에 기대어 손짓발짓 애교를 피웠고, 선옥은 선배로서 짐짓 점잔을 빼면서도 쿡쿡 웃으며 주리를 어루만져 주었다. 같이 쇼핑 가서 똑같은 옷을 맞춰입고 똑같은 장신구를 사는 것은 일상이 되었다. 시험기간에 공부 가르쳐 달라고 칭얼대며 오는 주리에게, 선옥은 자기 공부가 바빠도 짜증 한번 부리지 않고 주리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첫 여름방학이 되자, 주리는 방학기간의 반을 선옥의 집에서 보냈고, 선옥도 반은 주리네 집에서 보냈다. 두 집의 부모님도 이 관계를 나쁘게 여기지 않아 서로 집에 오면 반가워했다. 한 이불 속에서 누워 서로 이리저리 어루만지고 볼을 부드럽게 비빌 때, 선옥이 주리를 귀여워하며 애정 어린 키스를 이마에 할 때, 주리의 기분은 날아갈 것만 같았다.


영원할 것 같은 이 관계는, 선옥이 졸업반에 올라가 마지막 12월을 맞을 때 끝나 버렸다.


“나 대학 간단다.”


“진짜요?”


주리는 학교에서 더 이상 선옥을 볼 수 없게 된다는 생각이 들자 시무룩해졌다. 하지만 그래도 선옥이 경성에 있을 거라는 생각에 “그럼 어디 가요? 이화여전이요? 아니면 숭실여전?”이라고 해맑게 물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주리의 가슴을 덜컹 내려앉게 만들었다.


“미안해. 난 이번 학기 끝나면, 도쿄에 있는 와세다대학 성악과에 간단다.”


도쿄? 배를 타고 몇날 며칠 걸려야 갈 수 있는 곳? 주리는 사랑하는 언니가 저 멀리 가버리는 것을 알자, 그 자리에서 앙앙 울며 떼를 쓰고 말았다.


"싫어요! 싫어요! 언니 가버리면 난 죽어버릴 거야요!"


선옥은 애처럼 엉엉 우는 주리를 끌어앉고는 "영원히 못보는 것도 아니잖니. 언니는 유학 가서 꼭 해야 하는 게 있단다. 그러니 보내 줄 수 없겠니?"라고 주리를 달래었다. 주리는 그래도 울음을 멈추지 않고 선옥의 코트 자락을 흠뻑 적셨다. 여기에 주리는 선옥이 자길 버리고 떠난다고 생각하자 몰려오는 엄청난 섭섭함에 "언니 미워요! 보기 싫어요!"하고 등을 획 돌려 달려가버렸다.


집에 달려온 주리는 몇날 며칠을 눈물로 지새웠다. 언제나 함께 하자고 잠자리에서 속삭인 선옥이 자릴 버린 것 같아서 너무나도 야속했다. 현실을 겨우 지각한 때는 그 날로부터 닷새 째 되던 날이었다. 주리는 그때에 가서야 자기가 너무 이기적이었음을, 선옥이 이루고 싶은 꿈이 있는데 그걸 응원하지는 못할 망정 가지 말라고 때를 썼던 것이 유치했음을 깨달았다. 울음 섞인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 사과한 후 둘의 관계는 회복되었다.


하지만 선옥이 인천항에서 배를 기다릴 때 배웅하러 갔던 그 날, 주리는 울지 않으려고 입술을 꼭 깨물었지만, 비어져 나오는 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언니...... 나 잊지 마요..... 잊으면 진짜..... 죽어서 꿈속에 나타날 거야요!"


주리는 이 말을 하자마자 또 엉엉 울고 말았다. 선옥도 주리가 워낙 서럽게 우는 바람에, 그리고 이별에 가슴이 저렸기에, 그녀 또한 주리를 얼싸 안고는 펑펑 울었다. 이것이 주리가 학교 끝나고 대백루로 와서 경성지부 사람들에게 풀어놓은 추억담이었다.


"근데 참 사람이 간사해요. 언니와 헤어졌을 이후에는 내 인생에 기쁨이라고는 하나도 없을 줄 알았는데, 글쎄 3학년 올라가고 새 친구들 사귀고 놀다 보니 언니 생각이 하나도 안 났지 뭐예요. 에휴. 정말 부끄러워요. 그렇게 친한 언니었는데 그걸 까맣게 잊어가지고는."


그런데 주리는 수다를 떨다 말고, 주변 분위기가 심상찮음을 깨달았다. 천 지부장이야 항상 무표정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오라버니들은 대단한 충격을 받은 얼굴이 되어 입을 떡 벌리고 있던 것이었다.


"그, 그러니까, 아가씨는......"


명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여자들끼리 그렇고 그런, 그런 거 했다는 거야?"


"예. 그런데요?"


주리는 청년들의 표정이 심각하게 떨떠름해지자, 이들이 왜 이러는지 알았다. 그들에게 동성 간의 애정은 먼 나라 얘기였던 것이다.


"에이 참. 뭘 놀라고 그러세요? 요즘 여학생 중에 S관계 없는 애가 어디 있다고요?"


주리의 푸념에, 이번에는 재호가 "아니, 뭐. 잡지에서 보긴 했는데, 아가씨가 그런 걸 했다는 게 좀 충격이라."라고 난감해 한다. 이때 종팔은 스님에게 "스님은 어떻게 보십니까?"라고 묻자, 스님은 "이성 간 애욕이건 동성 간 애욕이건 다 애욕이니라."라며 개의치 않는다는 태도를 보였다. 이때 충격에서 벗어난 민호는 또 장난을 친다.


"야, 정우야. 너 조심해라. 그 선옥이란 아가씨 오면 연인 뺐길라."


주리는 그 말에 기겁해 손사래를 친다.


"에이! 이상한 소리 마세요! S관계는 학생 때 하는 거고 학교 졸업해서 남자랑 연애하거나 결혼하면 끝나는 거라고요! 지금 제게는 정우 오빠 뿐이라고요!"


주리는 그러며 옆에 앉은 정우 팔에 살포시 메달린다. 주리에게 있어서 선옥은 분명 각별한 사람이지만, 깊은 관계였던 시절은 몇 년 전으로 끝나지 않았던가. 정우는 주리의 추억담에 적잖이 놀라기는 했지만, "그때는 그런 감정이 있을 수가 있는거지."라며 이해심 있는 태도를 보인다. 생각해 보면 주리가 자신에게 자연스럽게 애교를 부리고 애정을 보란 듯이 과시하는 게, 그 시절 선옥과의 경험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천 지부장은, 이를 별로 이해해 줄 의사가 없는 것 같았다. 천 지부장이 주리에게 날카롭게 지적한다.


"넌 이 시대의 의인인 네 고모부님과 고모님이 경성에 왔다는 얘기보다 네가 옛날에 진한 관게였던 선배 얘기를 더 많이 하는 것 같구나."


그 말에 주리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선옥과의 관계는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애정의 관계였지, 독립운동과는 전혀 무관하지 않은가? 주리는 급하게 사과한다.


"죄송합니다. 저는......"


"되었다."


천 지부장이 차갑게 말을 자른다.


"네 사적인 일보다 우선 해야 할 것이 많음을 더 자각했으면 하는구나."


주리는 천 지부장의 면박에 부끄러워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그런 말도 하면 안 되어요?"하고 입술을 삐죽이고 있다.


"어찌 되었건 간에, 오세창 진사 어른과 한자청 여사님을 내일 낙랑파라에서 뵌다고?"


"예. 그렇습니다."


그때 천 지부장은 주리의 눈이 번뜩 뜨일 말을 했다.


"잘 되었군. 그분들을 대백루로 모셔오거라. 모두 그분께 인사를 드려야겠다."


"예? 정말요?"


"당연하지."


천 지부장의 태도는 확고하였다.


"나는 물론이고 여기 모두가 선비와 의인을 항상 존경하고 있다. 너희 고모부님과 고모님은 당대의 인걸이시자 이 시대의 의인이니, 마땅히 존경의 말을 바쳐야 하지 않겠느냐? 임시정부가 선비를 존중함을 그분들께 보여드리고자 한다."


주리는 천 지부장에 대한 섭섭함이 대번에 사라짐을 느꼈다. 천 지부장이 직접 나서 고모부와 고모에 대한 존경을 표한다니! 이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가!


천 지부장은 이것도 모자라, 주리가 더 기쁠 말을 한다.


"정우 너는 낙랑파라에 주리와 함께 가서 먼저 두 분을 뵙거라. 한 참의에게 인사할 수는 없으니 그분들께 인사해야 하지 않겠느냐?"


"예. 그리하겠습니다."


주리는 하마터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만세를 부를 뻔했다. 정우를 존경하는 고모부와 고모에게 정식으로 소개할 기회가 갖춰진 것이다. 주리는 정우가 늘 그랬든 정중하고 사려 깊은 태도를 취하며 고모부와 고모에게 최고의 존경을 바치고, 두 분이 이를 흡족해 하며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연출될 것을 기대한다. 그런데 그 기대는 대석의 질문 하나로 깨져 버렸다.


"근데 두 분은 조금 옛날 분이신데, 자유연애로 사귄다고 하면 어떻게 보실까요?"


그 말에 주리의 머릿속에는, 작년 12월에 보았던 고모의 매서운 얼굴이 자기를 마구 몰아붙이는 장면이 떠오른다.


"이 어리석고 한심한 것! 나라를 위해 목숨 바쳐 투쟁해야 하는데 감히 너 혼자 좋자고 연애를 하고 있단 말이더냐! 그리고 어른 허락도 없이 멋대로 외간남자를 만나고 다녀! 이런 불충, 불효, 불인, 불의한 것!"


주리는 지레 겁을 먹고는 "으아아. 그럼 어떡해요?"라고 허둥지둥댄다. 그 말에 재호가 "뭐, 독립운동 하는 조카사위가 생긴다는데 별 일 없겠지."라고 하지만, 민호는 또 정우에게 "야. 너 내일 준비 잘해야 겠다. 자유연애 해서 사귄다고 할때 여사님이 펄펄 뛰시면 큰일 아니냐?"라며 낄낄댄다. 정우는 민호에게 살짝 눈을 흘기며 "네 머릿속엔 장난칠 생각밖에 없냐?"라고 핀잔한다.


천 지부장이 다시 분위기를 무겁게 정리한다.


"엉뚱한 생각들은 마라. 그건 정우가 알아서 하면 될 일이지."


천 지부장은 주리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넌 오늘 장 사장 만날 때 유용한 정보가 있다면 빠짐없이 기억해 내일 보고하거라."


"예? 혹시 장 사장님이 작업 대상인가요?"


"그렇다."


천 지부장이 주리를 날카롭게 쳐다본다.


"혹시 기꺼운 기분이 드느냐?"


"아뇨.. 아뇨. 그럴 리가요."


주리가 손사래를 쳤다. 비록 장 사장은 선옥의 아버지이지만, 그 또한 한 참의와 환담을 나눌 때 일본제국의 통치를 찬양하고 힘 없고 못사는 사람들을 멸시하는 언행을 했음을 잘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 축적한 부라면 마땅히 정부 재산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주리의 지론이었다.


"그럼 되었고."


천 지부장이 눈초리를 거두었다.


주리는 대백루에 조금 더 있다가, 시간이 되자 바로 집으로 떠났다. 아버지 따라 공식 석상 같은 데 갈때 입는 단아해 보이는 블라우스와 검정 롱스커트로 갈아입은 주리는 차에 타고 식당으로 향했다. 이제 스물 세살이 되었을, 서로 애정 가득한 시절을 보냈던 선옥을 만나보길 고대하면서.


그 시간에 대백루에서는 진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그럼 아가씨에게는 숨기고 진행해야 하는 겁니까?"


민호의 물음에, 천 지부장은 "필요하다면 그렇게 해야겠지."라고 차갑게 말했다.


"괜히 알았다가는 절대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일 수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하지만 나중에 알았다가 더 섭섭해할 수도 있습니다."


혜월 스님의 지적이었다. 그 말에 천 지부장은 "그것도 감안해야겠죠."라고 대꾸하고는 정우를 흘깃 쳐다본다.


"네가 잘 설득해 다오."


"그리 해보겠습니다."


정우는 말은 이렇게 했지만, 속은 씁쓸하다. 천 지부장은, 주리를 애정을 가지고 대해 줬던 선옥의 결혼식을 완전히 끝장내 버릴 계획을 세운 것이다.


"떨떠름하게 생각할 건 없어."


총독부에서 돌아온 히로요시가 정우에게 한 말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히로요시에게 집중되었다.

히로요시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


"장선옥이란 아가씨가 우 서기와 결혼한다면, 행복한 결혼생활이 못될 것이 뻔 하니까."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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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2

  • 작성자
    Lv.18 PnP
    작성일
    20.01.31 16:57
    No. 1

    예전에 오세창의 글씨를 본적이 있지요. 큐레이터가 친일파의 글씨와 독립운동가의 글씨는 이런게 다르다면서 보여주는데 진짜 다른게 느껴지긴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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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글
    작성자
    Lv.12 PKKA
    작성일
    20.01.31 17:02
    No. 2

    아 오세창 진사는 실존인물 오세창과 동명이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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