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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K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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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0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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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15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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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26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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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화

DUMMY

혼마치에 있는 예약한 고급 양식당에 도착했을 때, 아직 장 사장 가족은 도착하지 않은 때였다. 주리는 의자에 앉아서 선옥이 지난 4년 새 얼마나 달라졌을지 상상해 본다. 중학생 때부터 성숙한 미모가 돋보이고 성격이 시원스럽고 활달한 선옥이라면, 분명 잡지 『신여성』 표지를 장식할 만할 세련미 넘치는 아가씨로 성장했을 것이라는 게 주리의 머릿속에 떠오른 그림이었다.


하지만 살짝 야속한 마음도 들었다. 같은 이불을 덮고는 서로 살을 맞대고 애정을 속삭일 정도의 사이였는데, 왜 그간 아무 연락도 없었던 말인가? 하지만 본인도 도쿄의 선옥에게 연락 한번 하지 않고 새 친구들과 어울려 놀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미안함이 몰려온다.


그때 한 참의가 “여, 장 사장!”하자 주리는 상상에서 깨어났다. 식당 문을 열고 장평석 사장과 그의 부인 홍성혜 여사가 들어오고 있었다. 장 사장은 각진 얼굴에 한 참의보다 짙은 머리숱을 빗어 넘기고 콧수염을 기른 중년 신사였다. 한 참의보다 연배는 비슷하지만, 상대가 중추원 참의인 만큼 “아이고, 참의님. 이리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하고 싹싹하게 허리를 숙인다. 살집이 좀 있고 실크 드레스를 걸친 홍 여사는 성 여사와도 친분이 있는 만큼 서로 반갑게 맞이한다.


그때 주리는, 홍 여사 바로 뒤에서 들어온 선옥을 바로 알아보았다. 주리가 예상한 대로 성숙함이 나이를 먹으며 한층 더해지고, 세련되기 이를 데 없는 연녹색 원피스를 걸친 모습이었다. 주리는 의자에서 뛰어오르듯이 일어나 활짝 웃으며 “언니이!”하고 선옥에게 돌진하듯 다가갔다.


그런데 그때, 주리는 흠칫 놀라 그 자리에서 멈추고 말았다. “오랜만이구나.”하고 주리를 마주본 선옥의 얼굴은, 주리의 상상 속 그림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그 자신감 넘치고 발랄하던 얼굴은 어디론가 사라져 있었다. 반쯤 감은 눈에는 수심이 가득 차 있었고, 입꼬리는 옅게 미소짓고 있었지만 너무나도 씁쓸해 보였다. 농구 할 때 건강하게 상기되었었던 뺨은 혈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창백하였다.


게다가 주리는 선옥의 얼굴에서 강한 기시감을 느끼고 흠칫 놀라고 말았다. 선옥의 그 얼굴은, 흡사 아오야기 중위와의 약혼식 날에 화장대 거울에서 본 자신의 얼굴과 똑같았던 것이다.


성 여사는 주리의 감정을 모른 채 선옥에게 반갑게 말을 건다.


“어머나, 얘. 일본 유학 갔다 오더니 정말 예쁘게 자랐구나. 결혼 축하한다.”


“감사합니다, 아주머니.”


선옥이 정중하게 목례하지만, 얼굴에 웃음기라고는 하나도 없다. 그때 주리는, 장 사장이 딸을 못마땅하다는 듯 쳐다보고, 홍 여사가 남편의 그 시선에 불안해하는 기색을 보인 것을 눈치채었다.


한 참의는 자리에 앉아서는 혼사를 축하하며 장 사장의 사업이 늘 잘 되길 바란다고 덕담을 건냈다. 마침 맥주가 도착하자, 한 참의는 장 사장과 시원스레 건배한다.


“자, 우리 사업의 번창과 자작 가문의 며느리가 될 선옥이를 위하여!”


“감사합니다, 참의님. 감사합니다.”


장 사장이 잔을 부딪치고는 이에 응대한다.


“그리고 앞으로 장군 가문의 며느리가 될 주리를 위하여 건배하겠습니다!”


주리는 정중하게 “감사합니다, 사장님.”하고 감사를 표하지만, 물론 속으로는 ‘난 그 노망난 늙은이 며느리는 안 될 거거든요?’하고 입술을 삐죽인다.


식사가 시작되자 성 여사가 선옥에게 재차 축하의 말을 건넨다.


“그나저나 정말 축하한다. 자작가 자제분과 혼인이라니! 앞으로 자작 부인이 되더라도 이 아주머니를 잘 기억해 주려무나.”


“예, 감사합니다.”


성 여사는 밝게 웃지만, 선옥의 표정은 그와 대비되게 어두웠다. 답례로 미소를 짓긴 했지만, 아무리 봐도 억지웃음이었다. 장 사장이 딸을 날카롭게 노려보았지만, 선옥은 표정을 풀지 않는다. 성 여사는 선옥의 이런 태도에 짐짓 당황했지만, 그래도 분위기를 풀어보려 수다를 시작한다.


“그나저나 놀랐어요. 우리 주리와 그렇게 친했던 선옥이가 어느새 자작가에 시집간다니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선옥이 시집보내려고 이곳저곳에 중매를 넣었는데, 글쎄 우 자작 댁에서 기별이 온거 있죠? 그런 지체 높은 집에서 우리 선옥이를 바란다니 거절할 수 있겠어요?”


“어머나, 세상에, 세상에!”


홍 여사의 대답에 성 여사가 경탄한다.


“그럼 사위 되실 분은 지금 뭐 한데요?”


“교토 제국대학 졸업하고 문관시험 합격했어요. 지금 총독부에 철도과에 서기로 있답니다.”


“어머나! 집안도 지체 높은데 제국대학까지 나오고! 게다가 총독부에서! 정말 기쁘시겠어요!”


홍 여사는 “아니에요, 뭘.”하면서도 입에서 비어져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한다. 이번에는 한 참의가 장 사장에게 질문한다.


“그나저나 사위 얼굴은 보았소?”


“아, 보았지요. 아주 훤칠한 친구입니다. 귀족 자제답게 예의범절도 있고 또 제국대학을 나와서 그런지 정말 듬직해요.”


장 사장은 사위 자랑을 하면서도 한 참의의 비위를 맞춰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뭐, 참의님의 장교 사위에 비하겠습니까마는······.”


“어휴, 별말씀을.”


이때 주리는 그렇게 보고 싶던 선옥을 눈앞에 두고도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 반갑게 재잘재잘 못다 한 이야기를 다 하고 싶었지만, 예전의 자신처럼 침울한 얼굴을 하고 있는데 도무지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 선옥 언니가 이렇게 되었단 말인가?


“그래도 우 자작이 중매를 선뜻 받아들이다니, 참 놀랍소. 작위 가진 사람들은 그런 집안과만 통혼하는 줄 알았는데.”


“아, 그게 사연이 좀 있답니다.”


장 사장이 목소리를 살짝 낮춘다.


“제가 지금 우 자작 회사의 대주주이기도 하거든요.”


“뭐요? 아니 언제 그렇게 되었소?”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신문에서 보셨죠? 우 자작이 투자한 기업이 실은 부실기업이라 큰 손해를 봤다고 말입니다.”


“벌써 1년 전 일 아니오? 그 문제와 관련이 있소?”


“있다마다요. 우 자작 취미가 수석(壽石)인데, 회사가 손해를 크게 보고도 취미를 멈추지 않았다는군요. 회삿돈까지 끌어서 돌을 샀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수석? 거 참 귀족들 취미는 이해할 수 없다니깐. 특이하게 생긴 돌이 뭐가 좋다고 비싼 돈 주고 사 모으는 줄 모르겠소.”

“그러게나 말입니다. 그래서 자작 댁이 품위를 유지하기 힘들다느니, 회사가 도산할 위기라느니 그런 소문이 돌아서 주식이 폭락한 상황에서, 제가 주식을 대거 사들였습니다. 이리 하면 우리 딸이 자작 부인 소리를 확실히 들을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과연! 절묘한 수요! 자작 나리의 호구를 확실히 잡으셨구먼!”


그러니까 자작가와 사돈을 맺으려고 선옥 언니를 회사 주식과 맞바꾸셨다, 그거네요. 주리는 하마터면 장 사장에게 눈을 거세게 흘길 뻔했다. 선옥이 시들은 꽃처럼 축 늘어저 있는게 이 정략결혼이 원인이라는 감이 확실하게 잡혔다.


그때 한 참의가 유쾌하게 웃는다.


“아무튼, 투자할 곳은 잘 골라야 하는데 말이오. 우 자작 나리처럼 엉뚱한 데 투자하면 그렇게 되는 법이지. 이 한 아무개는 그런 거에서 절대 손해 보지 않는다오.”


웃지 마요. 아버지 얘기에요. 주리는 하마터면 한 참의 면전에서 비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이때 홍 여사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주리에게 말을 건다.


“얘. 네 남편 될 사람은 어떠니? 관동군의 장교분이라고 들었는데.”


“아오야기 중위님이요?”


주리는 살짝 헛기침하고는 이런 말을 줄줄 늘어놓는다.


“사람 좋은 무골호인이시죠. 뭔가에 집중하면 다른 건 다 잊어버릴 정도로 깊이 몰두하시고요. 자기 믿는 거에 아주 독실하고, 원칙을 세우면 그 원칙에 충실하시고요. 원대한 이상을 품으셔서 저 같은 계집아이가 따라가기 힘들 정도예요.”


“어머나, 그런 사람이 너에게 먼저 청혼을 했다니! 정말 좋겠구나!”


어른들은 주리가 지아비 될 사람을 칭찬했다고 여기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다. 주리는 아오야기 중위를 남이 눈치채지 못하게 비꼬고 있었다. 주리의 말에서 “사람좋은 무골호인”은 “멍청이”였고, “몰두”는 “눈치 전무”이었으며, “믿는 거에 독실”은 “광신”이었고, “원칙에 충실”은 “꽉 막힘”이었으며, “원대한 이상”은 “세계최종전쟁론이란 말도 안 되는 헛소리”였던 것이다. 한 참의는 주리가 정말 사윗감 칭찬을 하는 줄 알고 싱글벙글한다.


이때 성 여사가 선옥에게 말을 건다.


“그나저나 이 아주머니는 조금 섭섭하구나. 우리 주리와 그렇게 친했고 우리 집에도 자주 놀러 왔는데, 도쿄에 있는 동안 왜 편지 한 통 없었니?”


“죄송합니다. 조금 바빴어요.”


선옥이 힘없게 대답한 순간, 장 사장이 끼어들었다.


“그래. 아주 바빴지. 공부하느라 말이다. 어찌나 중요한 공부였던지, 이 애비는 참 감복했단다.”


이 말에 어찌나 찬바람이 섞여 있었는지 식사 자리에 싸늘한 기운이 맴돌았다. 선옥의 표정은 더더욱 어두워지고, 홍 여사는 남편과 딸 사이에서 안절부절못하는 게 주리 눈에 보인다. 한 참의가 애써 차갑게 식은 분위기를 살리려고 “하하하! 중요한 공부를 한 게로군! 공부는 항상 좋은 것이지!”하고 소리 높여 웃는다.


이때 성 여사가 묻는다.


“그런데 선옥이가 올해 스물셋이니, 아직 대학 4학년 아닌가요? 그럼 학교는 어떡하시게요?”


그러나 성 여사는 자신의 질문이 분위기를 더 식게 만들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장 사장이 냉랭한 목소리로 “어쩌긴 어찌합니까? 중퇴해야죠.”라고 내뱉은 것이었다. 그 말에 한 참의가 놀란다.


“아니 와세대다학이면 사립대라 등록금이 비쌀 텐데 졸업장도 못 받고 나간단 말이오? 너무 아깝지 않소?”


“어쩌겠습니까? 그 돈 대학에 돌려달라 할 수도 없고. 전 지금 얘 대학 보낸 거 후회 중입니다. 애가 3년이란 시간과 그간에 들어간 돈 다 날려버렸어요.”


주리는 놀라서 입을 딱 벌렸다. 어떻게 자기 딸의 대학 생활을 그런 식으로 정리해 버릴 수 있단 말인가? 홍 여사가 긴장한 얼굴로 “여보, 그래도······.”라고 하지만, 장 사장은 “당신은 가만있어.”라고 일축해 버린다.


“생각해 보면 여자애를 대학에 보낸 내가 엄청난 오판을 한 거였어요. 중학교나 고등보통학교만 나와도 될 것을 쓸데없이 여전까지 갔다가 시집도 제대로 못 가는 여자들이 사방천지인데, 왜 내가 선옥이를 일본 대학까지 보냈는지 정말 후회스럽습니다.”


한 참의와 성 여사는 장 사장이 딸을 바로 옆에 두고 이런 말을 노골적으로 하자 당황하여 서로를 멀뚱 쳐다볼 뿐이다. 주리 또한 장 사장이 대체 왜 이러는지 몰라 하는데, 갑자기 끼익하는 소리가 들린다. 선옥이 참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일어나버린 것이다.


“속이 안 좋아서요.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요.”


“오냐. 그러고 싶으면 그러거라.”


장 사장의 목소리는 차갑다.


“애비 말 안 들을 거니 소화가 잘도 되겠구나.”


선옥은 대꾸하지 않고 그대로 밖으로 나가 버렸다. 이때 주리는 부아가 치밀어 “어떻게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라고 장 사장에게 소리칠 뻔했다. 대신 어머니에게 “저, 언니 따라가 봐도 될까요?”라고 묻는다. 성 여사는 부녀간의 냉랭한 공기에 놀라, “그, 그래. 그러거라.”라며 말을 조금 더듬으며 허락하였다.


주리는 식당 밖으로 나가서 가스등이 들어오기 시작한 거리를 터덜터덜 걷는 선옥을 바로 따라잡았다.


“언니! 같이 가요!”


선옥이 힘없이 돌아보았다. 마침내 선옥은, 주리에게 “오랜만이구나.”이외의 말을 건넨다.


“미안하구나. 오랜만에 만났는데 이런 모습이나 보여주고.”


“아니에요, 언니! 아니에요!”


주리는 가슴 속에서 저리는 안타까움에 표정을 어찌 지어야 할지 몰랐다. 예전처럼 애교 있게 장난치며 다가가며 선옥의 마음을 풀어주어야 할까, 아니면 선옥의 기분에 맞춰서 진지하게 다가가야 할까? 이때 선옥이 먼저 말을 건다.


“잘 지냈니? 넌 여전히 밝아 보여서 좋구나. 예전보다 키도 더 자라고, 얼굴도 더 예뻐지고.”


선옥이 그래도 옅은 미소라도 지어주니, 주리는 마음이 조금 놓이고 또 멋쩍기도 해서 에헤헤 웃는다. 그러나 선옥의 표정은 다시 어두워진다. 주리는 선옥의 얼굴에 가득 낀 먹장구름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언니. 괜찮아요?”


선옥은 말이 없다가, 이런 말을 한다.


“미안해. 솔직히 좀 피곤하네.”


그때 주리는, 시들어버린 그 얼굴을 도무지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주리는 선옥의 손을 덥석 잡는다.


“언니!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내가 아는 선옥 언니는 항상 밝고 당당하고 씩씩했는데!”


주리는 선옥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게 말씀해 주실 수 있어요?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말 못 할 것도 다 털어놓는 사이였잖아요? 답답해서 쌓인 게 있으면 제게 풀어주세요! 그럼 기분이 더 나아지실 거예요!”


주리는 자신이 카라스마 준이치로 백작으로 가장한 정우에게 편지로 모든 걸 털어놓았을 때를 생각한다. 비록 자신이 정우처럼 성숙한 어른은 아니더라도, 누군가의 겹겹이 쌓인 고민을 들어주는 정도는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선옥은 다소 놀란 눈으로 주리를 보더니, 흉금에 묻어왔던 한숨을 터트린다.


“그래. 이 언니의 신세 한탄 좀 들어주겠니?”


선옥의 말은 우선, 사과로 시작했다.


“우선 널 속인 것부터 사과할게. 정말 미안해.”


“예? 뭘 속여요?”


주리가 놀라서 눈만 멀뚱멀뚱 뜬다.


“내가 와세대대학 성악과 간다고 했었지.”


“예. 기억나요.”


“그건 거짓말이었어.”


“예에에?”


주리가 놀라서 입을 벌린다. 선옥은 침통한 얼굴로 고백한다.


“성악과가 아니라 공대를 갔었단다.”


“세상에, 진짜요?”


선옥이 성악과가 아니라 공대라니! 주리도 공대가 어딘지는 대충 들은 적이 있었다. 공장에서 움직이는 기계가 움직이는 원리와 기계를 설계하는 방법을 배우며, 남자들만 득시글거린다는 그런 곳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그런 곳을 선옥이 갔었던 말인가?


그때 주리는 퍼뜩 기억나는 게 있었다. 선옥은 주리와 같이 거리를 돌아다닐 때, 길가에서 고장난 차량을 운전수가 땀을 뻘뻘 흘리며 수리하는 것을 보고는 그 자리에 붙밖힌 듯 가만히 있었다. 선옥의 눈은 그때 강렬한 호기심과 지식욕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자동차의 엔진 구조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뚫어지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주리는 그게 하나도 재미없이 느껴져서 기다리다 못해 빨리 가자고 보채고 말았다. 선옥은 그런 주리를 귀여워하며 쿡쿡 웃었었다.


이후 그런 일이 몇 번 있었다. 선옥은 길거리를 지나가는 한 자동차를 보고 눈을 번쩍이면서 그 자동차 모델이 무엇인지, 어느 회사에서 만들었는지, 주행속도가 어떻게 되는지 주리에게 우르르 설명해 주었다. 주리는 선옥이 가진 차량과 기계에 대한 지식량에 놀랐지만, 주리에게는 영 재미가 없는 얘기라. “아유, 언니! 그런 얘기 말고 딴 거 해요!”라고 보챘었다.


“그랬군요! 언니는 항상 기계 같은 것에 관심이 많았으니까. 수학도 시험만 봤다 하면 항상 만점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왜 공대가 아니라 성악과 간다고 그러셨어요?”


“그게 내가 와세다대학에 들어가는 조건이었으니까.”


선옥이 다시 한숨을 내쉬고는, 그녀의 사연을 들려주었다. 공학지식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재미를 느낀 선옥은 경성제대 도서관까지 가서 전문학술지까지 탐독하다가, 어떻게든 공학대학에 들어가서 본격적으로 공부를 하고 싶다는 열망이 강해졌다. 학술지를 통해 알게 되며 존경을 바치게 된 와세대대학의 한 공학부 교수와는 편지를 교환하기까지 했다. 교수는 선옥의 학구열을 응원하며 와세다대학 공학부 입시에 응시하라고 적극적으로 권하였다.


그러나 장 사장은 선옥이 대학에 가는 것 자체에 극히 부정적이었다. 더군다나 선옥이 운전사 아저씨에게 자동차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는 것을 보고는 여자애가 그런 것에 관심 가지는 거 아니라고 호통을 친 적도 있었다. 이런 마당에 대학에, 그것도 공과대학을 간다고 말하는 것은 집안이 뒤집어질 일이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선옥은 그 교수에게 편지를 보내 조언을 구했다. 교수는 흥미로운 제안을 했다. 대학 행정실과 상의해서 선옥의 공과대학 입학을 숨기고 다른 “여성스러운” 과로 입학한 것처럼 꾸며 주겠다고 한 것이었다. 선옥의 학교 선배를 비롯해 여성이 일본 유학을 갔을 때는 대체로 성악과로 가는 경우가 많았던 관계로, 그리고 선옥 본인도 노래를 좋아하는 관계로 그녀는 장 사장에게 성악과로 진학하겠다고 사정하였다. 장 사장은 대학 나와봤자 시집도 제대로 못 간다고 역정을 내었지만, 그래도 성악과가 “여자다운” 학과라는 점과 성악과 나온 신여성이 괜찮은 집에 시집간다는 풍문을 듣고는 와세다대학 입학을 겨우 허가하였다.


“잠깐만요! 그럼 대학 어떻게 다니셨어요? 공대에는 순 남자뿐이라던데.”


“어쩌긴. 남장하고 다녔지. 교수님의 도움으로 나는 학적부에 남자로 기록되어 있었어.”


주리는 그 말에 선옥이 혼부라 할 때 친척 오라버니의 학생복을 입고 남장을 한 적을 떠올렸다. 선옥은 그 활달한 분위기 덕인지 은근히 남장이 잘 어울렸다. 주리는 꼭 남자와 연애하는 것 같다고 신이 나서 선옥과 팔짱을 끼고 이리저리 돌아다녔었다.


주리는 혹시 남장한 선옥에게 반해 자신의 성 정체성을 고민한 학생은 없었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분위기에 전혀 맞지 않는 의문이라 참았다.


“입학하고 나서부터 공부와 연구에 푹 빠졌단다. 교수님의 강의를 듣고 논문을 보고 설계도를 보기만 하면 하루가 언제 지나가는지 모를 지경이었어. 그 때문에 네게 편지 하나 쓰는 것도 다 잊어버렸단다. 그러다 보니 교수님이 3학년 마칠 때 내가 일본에만 있을 재목이 아니라며 미국의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으로 유학할 수 있도록 같이 힘 써보자고 하셨단다. 거기서 아는 교수님이 있다고 말이야.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을 거야.”


선옥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공부와 연구에 열정을 바치던 그 시절이 떠오른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 표정은 바로 어두컴컴하게 변했다.


“그런데 한 달 전에 일이 터지고 말았단다. 아버지 회사 사람이 도쿄에 출장을 갔었는데, 그때 남장을 한 날 본 모양이야. 아버지는 사전연락 없이 내 하숙집을 불쑥 방문했었지. 그리고 내 책장에 꽂힌 공학 서적과 옷걸이에 걸린 학생복을 보고 불같이 화를 내셨단다. 나는 잘못했다고 아버지에게 무릎 꿇으며 사정했지만, 전혀 들어주지 않으셨어. 내가 이때까지 모은 그 책들, 아버지가 내 눈앞에서 다 찢어버리셨단다.”


“세상에! 그럴 수가!”


주리는 충격에 빠져 말을 잇지 못하였다. 그 광경이 눈에 선했다. 고래고래 날뛰며 책을 마구 잡아 뜯어 갈기갈기 찢는 장 사장과, 그 자리에 엎드려 다 잘못했으니 그러지 말아 달라고 울부짖는 선옥이.


“그럼 사장님께 아무 말도 못 하신 거예요? 그렇게까지 하는데!”


“지난 3년 간 부모님을 속여 왔다는 죄책감이 더 강했거든. 아버지도 내게 화나신 건 공대를 다녀서 뿐만이 아니라 계속 성악과 다닌다고 거짓말을 했다는 거고.”


주리는 선옥의 그 말에 가슴이 아프다. 주리 본인도 그러고 있기 때문이다.


“그 날로 나는 아버지 손에 잡혀 강제로 돌아와야 했어. 하숙집도 치우지 못하고. 결석계도 제출하지 못했는데. 돌아온 이후로 집안사람들이 내가 밖에 나가지 못하도록 막았단다. 나가게 해 달라고 애원해도 아버지는 싸늘하게 뿐이셨어. 어머니는 안타까워하셨지만, 결국 침묵하셨고.”


깊은 한숨이 이어졌다.


“그렇게 매일 갇혀 지내다가 혼담이 들어왔다는구나. 너도 알다시피 자작 집 자제가 내 배필이 될 거라고 말이야. 그때는 그냥 자포자기한 심정이라, 이게 운명이라면 받아들이려고 했는데······. 그러려 했는데······.”


그때 선옥은 갑자기 감정이 북받쳤는지 흐느끼기 시작했다. 주리는 화들짝 놀라 선옥을 달래주려 애쓴다.


“언니! 울지 마요! 울지 마! 여기 길거리잖아요! 우 자작 집 자제가 왜요? 몸에 문제라도 있는 거예요?”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구나!”


선옥의 목소리가 절규에 가까워졌다. 선옥은 숨을 추스르고는 말을 계속한다.


“그 사람이 우리 집에 와서 처음 봤을 때 인상은 분명 나쁘지 않았었어. 생긴 것도 나쁘지 않고 교양도 있고 예의도 있었고. 그래서 싫은 느낌은 안 들었단다.”


“그런데 왜요?”


선옥이 몸서리를 친다. 그녀의 목소리가 떨려 온다.


“어머니가 시댁에 가서 먼저 인사드리라고 자작 댁에 보낸 일이 있었단다. 그 집 어른들하고 인사를 나누는데 그 자리에 그 사람이 없었어. 별채에 있는 자기 방에 있을 거라고 해서 가 보았는지 문을 열고 들어가려고 하는데 안에서 이상한 신음소리가 들렸어. 순간 호기심이 잃어서 열린 문틈으로 무슨 일인지 보았는데, 아아, 아아! 내가 뭘 보았는지 아니? 어떻게 이걸 내 입으로 말해야 하니!”


선옥은 주리의 어깨를 잡는다. 그녀의 두 눈에서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린다. 주리는 “괴로우면 생각하지 않아도 괜찮아요!”라고 달래려 하지만, 선옥의 입은 이미 열렸다.


“그 사람은 옷을 다 벗고는 집안 하녀 같은 사람을 발가벗기고, 밧줄로 쌀가마니 묶는 방법으로 은밀한 곳이 다 보이는 추잡스러운 결박을 해 놓았단다. 그리고 하녀의 맨몸에 불붙은 양초에서 흐르는 뜨거운 촛농을 떨어트리고는······. 아아! 더는 말 할 수 없구나! 너무 추잡해서 더 말할 수가 없구나!”


주리는 너무나도 큰 충격을 받아 할 말을 잃어버렸다. 아오야기 중위는 이시와라 간지의 끔찍한 사상을 광적으로 추진하긴 해도 개인으로 볼 때는 예의 바른 신사였다. 그런데 선옥의 남편 될 우 서기는, 사람을 고문하며 욕구를 해소하는 끔찍한 인간이 아닌가!


“내가 더 절망한 것은 그 사람의 얼굴이었어! 점잖은 신사처럼 보이던 그자가, 자기 하녀를 그렇게 고문하면서 그 얼굴이 얼마나 희열로 가득하게 변했는지 아니? 하녀가 살려달라고 애원할수록 기쁨을 느끼던 그 얼굴을 난 평생 잊지 못할 거야! 그리고 난 그때 깨달았지. 그 불쌍한 여자의 자리에 내가 있게 될 거라는 걸!”


주리는 선옥의 절망감을 절절히 느끼자, 충격 뒤에 주체할 수 없는 분노를 느껴서 고래고래 소리를 쳤다.


“이런 나쁜! 아비지옥에 떨어질 나쁜 놈! 어떻게 그딴 사람이 언니 배필이 되어요! 말도 안 되어요! 언어도단이에요!”


“주리야. 이미 그런 일이 내게 일어나고 있단다.”


“사장님껜 말한 거예요? 사장님은 뭐라고 하셨어요?”


“놀라긴 하셨지. 하지만 이미 정해진 일에 아무 말 말라고 하시더구나.”


이때 주리의 분노를 계측기로 잴 수 있다면, 분명 고장이 났을 것이다.


“어떻게 아버지가 되어서 그러실 수 있어요? 자작 집 사돈이 되겠다고 언니를 그런 변태성욕자에게 팔아치워요? 그게 무슨 부모예요!”


그때, 선옥이 견디지 못하고 주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4년 전에 헤어질 때 인천항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래도 결혼 전에 널 봐서 정말 다행이야. 네가 이렇게 예쁘고 씩씩하게 자란 걸 보니 언니는 정말 기쁘다. 또 네 남편 될 사람은 장교지만 품행이 방정한 신사라지? 정말 다행이구나. 너는 나처럼, 나처럼 살지 않아다오. 나처럼 새장 안에 갇혀서 평생 불행한 삶을 살지 말아다오.”


주리는 선옥의 흐느낌을 들으며 이를 앙다물었다. 단단히 잘못된 일이었다. 죄라고는 그저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 싶어서 애쓰고, 반대하는 부모님을 거역할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한 것뿐인데, 왜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왜 날개가 꺾인 채 그런 변태성욕자에게 고통을 받는 미래를 맞이해야 한단 말인가! 주리는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흥분했다.


“언니! 걱정 마요! 내가 도와줄게요! 내가 그딴 변태에게 언니 넘기지 않을 거예요!”


“말만이라도 고맙구나.”


선옥은 흐느끼면서도 애써 미소지었다.


“하지만 우리가 어떡할 수 있겠니? 아버지는 내가 어딜 가든 사람을 붙이신단다. 이 경성에서 도망칠 수 있는 곳은 없어. 포기하면 편하단다.”


“포기하지 마요!”


주리는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주리는 다 밝히려 했다. 선옥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들을 잘 알고 있다고. 분명 천 지부장과 정우라면 무슨 꾀를 내어 선옥을 탈출시키고, 옥룡회의 밀항선을 통해 미국으로 보내줄 수 있을 것이다. 분명 선옥을 구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 주리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자신이 흥분해서 섵불리 생각한 것 같았다. 천 지부장의 그 엄격한 태도로는, 부호의 딸인 선옥에게 결코 동정적인 모습을 보여줄 리가 없을 것 같았다. 선옥이 현재 민족과 나라가 처한 상황에 대해 자각한 말은 이제까지 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또, 만약 자신이 독립운동을 하고 있다고 했을 시, 선옥이 그 정보를 누군가에게 말하지 않는다는 확신이 정말 있을까? 은연중에 말하기라도 한다면 어찌 될까?


주리는 다른 사람도 아닌 선옥도 완전히 믿지 못한다는 상황에 큰 괴로움을 느끼면서도, 서둘러 말을 수습한다.


“미안해요. 괜히 흥분해서. 내가 화낸다고 될 일도 아닌데.”


“아니야. 그저 내 말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고맙단다.”


선옥이 감정을 겨우겨우 추스르고는 발걸음을 옮긴다.


“이만 들어가자. 너희 부모님 걱정하시겠다.”


주리는 선옥의 뒤를 따른다. 선옥의 터덜터덜 걷는 발걸음이 그렇게 무거워 보일 수가 없었다. 주리는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어떻게든 머릿속을 논리정연하게 정리하여 천 지부장에게 호소할 수 있을지 생각해 내려고 부단히 애를 쓰게 되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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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6

  • 작성자
    Lv.61 아르세닉
    작성일
    20.01.26 12:10
    No. 1

    다행이네요. 아무런 죄책감 없이 저 결혼 깨 버릴 수 있어서.

    찬성: 1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8 PKKA
    작성일
    20.01.26 12:11
    No. 2

    그것이 의도한 바입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4 PnPd
    작성일
    20.01.31 17:00
    No. 3

    세상에 이상한것들의 95%는 섬나라놈들이 만든다는 말이...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8 PKKA
    작성일
    21.01.02 22:28
    No. 4

    성진국..... (실수로 댓삭해서 다시 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5 고단풍
    작성일
    20.08.24 21:05
    No. 5

    선옥이 캐릭터 잠깐 나오고 마는 건가요?
    어쩌면 한인애국단에 들어갈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지금 한인애국단에 주리밖에 여자도 없고 외로울 것 같은데 선옥이가 들어가면 좋겠네요.
    그리고 여자가 남장하고 공대생에 들어간다니.
    이 정도 캐릭력이면 레귤러 멤버로 괜찮지 않나요?
    잘하면 정우 친구랑 엮을 수도 있구요.
    에구구, 제가 너무 흥분했네요.
    그 정도로 선옥이 캐릭터가 맘에 드네요.ㅎㅎ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8 PKKA
    작성일
    20.08.24 21:30
    No. 6

    근데 일제강점기에는 여학생 동성애가 흔한 것이었다는 기사를 보고 급조한 캐릭터라 그렇게 계속 중요하게 나올 캐릭터로 구상하지 않았어요 ㅠㅠ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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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4 324화 +10 23.01.22 226 4 18쪽
323 323화 +8 23.01.20 221 4 23쪽
322 322화 +8 23.01.08 219 6 23쪽
321 321화 +14 22.12.25 235 6 18쪽
320 320화 +10 22.12.11 224 4 18쪽
319 319화 +10 22.11.27 237 6 14쪽
318 318화 +10 22.11.20 230 7 19쪽
317 317화 +8 22.11.13 230 5 14쪽
316 316화 +8 22.10.23 253 6 18쪽
315 315화 +8 22.10.02 240 4 13쪽
314 314화 +5 22.09.14 263 3 13쪽
313 313화 +5 22.08.15 266 5 29쪽
312 312화 +14 22.07.31 286 7 29쪽
311 311화 +2 22.01.31 291 4 19쪽
310 310화 +7 22.01.15 283 4 21쪽
309 309화 +3 22.01.01 269 6 18쪽
308 308화 +6 21.12.19 279 6 20쪽
307 307화 +4 21.12.12 292 8 23쪽
306 306화 +8 21.11.28 276 6 18쪽
305 305화 +12 21.11.23 281 9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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