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

경성활극록

웹소설 > 일반연재 > 대체역사, 로맨스

PKKA
작품등록일 :
2019.07.10 16:41
최근연재일 :
2020.05.26 00:01
연재수 :
159 회
조회수 :
28,915
추천수 :
1,169
글자수 :
1,390,765

작성
20.01.30 19:42
조회
143
추천
6
글자
19쪽

118화

DUMMY

둘이 사귀고 있다는 폭탄선언을 들은 한 여사의 표정에서, 자애로움이 사라진다.


“주리야! 참으로 실망이구나!”


고모의 얼굴에 노기가 서린다.


“네가 각성하여 큰 뜻을 품은 줄 알았건만 외간남자를 만나고 다닌단 말이더냐! 어찌 이럴 수 있느냐!”


“저, 고모님. 그게 아니라요.”


주리가 쩔쩔매며 변명하려 하지만, 한 여사는 “아니긴 뭐가 아니냐!”라고 매섭게 몰아붙인다. 고모의 표정은 주리를 무섭게 윽박지르던 1931년 12월의 그 노기 띤 얼굴을 떠올리게 하였다.


“네가 뜻을 품었으면 해야 할 일을 해야 하거늘 어찌 함부로 남자를 만나 연애하며 즐기려 하느냐!”


고모의 호통이 쩌렁쩌렁 울리고 주변에서 짜증스러운 시선이 일어나자, 오 진사가 정중히 “여러분. 실례가 많았소.”라고 사과하고는 부인을 달랜다.


“부인, 진정합시다. 여긴 보는 눈이 많소. 화는 자초지종을 들어보고 내도 늦지 않소.”


오 진사는 말은 이렇게 하지만, 주리를 보는 눈에는 부인처럼 노기가 서려 있었다. 주리는 고모의 무서운 호통에 작년의 경험이 떠올라 절로 오금이 저리는 동시에, 자기가 정말 독립운동은 제치고 정우와의 연애만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그게 아닌데······.”라고 칭얼대고 말았다. 이때 정우가 나선다.


“진사 어른. 그리고 여사님. 미처 말씀을 올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정우의 태도는 정중하고 예의가 발랐지만, 오 진사와 한 여사는 “흐음.”하고 못마땅하다는 신음을 내었다. 정우는 품속에 감춰 둔 봉투를 하나 준다.


“듣는 사람이 많아 미처 말로 할 수 없는 얘기입니다. 읽어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오 진사가 봉투를 펴서 부인과 같이 읽어 본다. 쪽지를 본 순간 둘의 얼굴에 놀라움이 드러났다. 봉투 속에는 정우가 임시정부 사람임을 증명하는, 정우 등이 상하이에 있을 때 임정 요인들과 같이 찍은 사진을 첨부한 서류가 있었다. 오 진사는 재빨리 종이를 봉투 속에 집어넣고 정우에게 돌려준다. 둘의 표정은 급격히 누그러졌다.


“미안하구나. 내가 또 성질을 못 죽여서. 자네에게도 정말 미안하네.”


정우와 주리에게 사과하는 한 여사의 표정은 후회로 가득하였다. 주리는 다행이라고 안도하고는 얼굴이 활짝 펴진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충분히 오해하실 수 있었는걸요!”


주리는 분위기가 급격히 풀어지자 신이 났다. 정우가 임시정부의 독립운동가임을 고모부와 고모가 안 이상, 사실상 둘의 사이를 인정받은 것 같았다. 그리고 실제로 그랬다.


“주리야. 다시금 사과하마. 네가 진정 큰 뜻을 품은 게로구나. 여기 이 젊은이와 사귄 지 얼마나 되었느냐?”


“한, 3주 정도 되었습니다.”


주리는 벌써 그렇게 되었는지 돌아보았다. 고모는 대견하단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주리가 독립운동은 내팽개치고 남자랑 놀러 다닌다고 오해했던 한 여사는, 이제 주리가 독립운동가 남자와 연애를 하고 독립운동에 참여한다는 것을 알고 느낀 크나큰 기쁨을 얼굴에 숨기지 않았다. 그리고 조카딸을 꼬인 왠 놈팡이로 보이던 정우는, 훤칠하고 예의 바르며 뜻을 품은 건실한 청년으로 보인다.


“헌데, 네 부모 허락은 받은 거냐?”


한 여사는 이렇게 묻고는, “아니, 됐다. 네 부모라면 분명 허락하지 않을 터이니.”라고 알아서 대답한다. 그리고 “네 부모 대신 내가 너희 사이를 허락하마.”라고 호쾌하게 말한다. 오 진사 또한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다. 주리는 존경하는 고모부와 고모의 허락이 바로 떨어지자 기뻐 어쩔 줄 모르며 “고맙습니다!”하고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또 주변 시선이 집중되니 오 진사가 또 사과한다.


“그럼 혼례를 치렀는고?”


고모부의 물음에 주리의 뺨이 새빨개진다. 정우가 아직 치르지 않았다고 대답하니 “흐음. 하긴 아직 그럴 여유는 없을 터이니.”라고 고모부가 고개를 끄덕이는데, 갑자기 고모의 표정이 굳어진다.


“이정우 군이라고 했나?”


“예. 그렇습니다.”


“그럼 혹시 말일세. 아직 혼례를 치르기 전이라고 했으니 말이야······.”


고모의 목소리가 낮아지더니, 이런 말이 나온다.


“주리의 정조를 벌써 앗아가진 않았겠지?”


“고, 고모님!”


이 발언에 주리가 부끄러움이 폭발하였다. 어른들이 정조를 중히 여기는 건 알지만, 낙랑파라 같은 비교적 공개된 공간에서 이런 말을 대뜸 꺼내니 당황스럽기 이를 데 없다. 정우도 살짝 얼굴을 붉히지만, 가슴을 펴고 당당히 대답한다.


“하늘에 맹세컨대 그러하지 않았습니다.”


“흐음. 믿을 만 하구먼. 인내심이 있어.”


오 진사가 고개를 끄덕인다. 한 여사는 “자네는 욕정에 잘 휘둘리지 않는 친구로군. 요즘 젊은이 같지가 않아.”라며 흡족해 한다. 사실 주리는 정우가 조금 더 욕망에 충실해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다.


“내 둘이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 묻고 싶네만, 그랬다가는 얘기도 길어지고 여기서 할 얘기도 아닌 것 같은니 일단 다른 것을 좀 묻겠네.”


오 진사는 주변을 휙휙 둘러보고 이제 다른 손님들이 자기들 얘기에만 열중하는 것을 확인하고 질문을 시작한다.


“자네 나이가 올해 몇인고?”


“스물다섯입니다.”


“젊은 친구로군. 그 나이에 고생이 많네그려.”


“고생이라 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저보다 더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흐음. 그래. 한성에는 언제 들어왔는가?”


오 진사는 노련하게도 “상하이”나 “임시정부”같은 말은 전부 회피하고 있었다.


“올해로 4년째가 됩니다.”


“4년? 같이 다니는 사람들은 있는가?”


정우는 이를 그의 동지들이 얼마나 있는지 묻는 것으로 바로 알아챈다.


“8명 정도 됩니다.”


“한성에 그렇게나 들어왔단 말인가! 놀랍구먼.”


오 진사가 만족스럽게 수염을 쓰다듬는다. 오 진사에게 임시정부에서 파견된 독립운동가들이경성에서 암약한다는 사실은 여러모로 흥분될 일이었다.


“어디서 지내는가?”


“암자에서도 지내고 요릿집에서도 지냅니다. 그 요릿집으로 두 분을 모실 겁니다.”


“흐음. 그래. 여기는 이야기하기가 좋지 않으니. 사적인 얘기나 더 하고 가세나.”


오 진사는 시킨 엽차를 잔을 들어 음미해 목을 축인다. 찻잔을 천천히 드는 오 진사의 자세에는 저절로 고개를 숙이게 하는 기품이 넘치었다.


“고향은 어디인고?”


“연길 인근입니다.”


“연길? 간도에서 왔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간도에는 의인과 투사가 많지. 자네 또한 의인의 자제겠군.”


역시 만족스러워 하는 오 진사였다.


“부모님은 계신고?”


그 말에 정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죄송합니다. 두 분 다 돌아가셨습니다.”


“저런!”


오 진사와 한 여사 모두 놀란다. 주리는 정우의 부모님이 옛날에 돌아가시고 그가 카라스마 세이지 백작과 천 지부장 아래서 자랐다는 것을 알지만, 여전히 듣기 힘든 얘기였다. 오 진사의 표정은 난감해졌다.


“미안하네. 내 괜한 질문을 했구먼.”


오 진사가 잠시 침묵한다. 오 진사는 무안해서 헛기침을 하고는 이리 묻는다.


“혹시 선친의 함자를 말해 줄 수 있는가? 아는 사람일 수도 있어서 그러네.”


“이자. 항자. 진자 되십니다.”


그런데 그 말에, 오 진사와 한 여사 모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무, 무엇이!”


이번에는 오 진사가 주변 생각을 하지 못하고 소리를 높이었다. 오 진사의 얼굴은 예기치 못한 사실은 안 놀람으로 떨리고 있었다.


“혹시 회덕 사람 동우(同尤) 이항진 생원이 아닌가?”


“맞습니다!”


정우 또한 크게 놀랐다.


“제 아버지를 아십니까?”


“알다마다! 알다마다!”


한 여사의 얼굴에 기쁨이 넘쳐 흘렀다. 이번에는 한 여사가 묻는다.


“모친의 함자는 송자, 혜자, 영자 아닌가?”


“그렇습니다!”


정우는 아버지 이름에 어머니 이름까지 나오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한다. 옆에 있는 주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고모부와 고모는 정우의 부모님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럴 수가! 자네가 동우의 아들이었다니!”


오 진사가 정우의 손을 덥석 잡는다. 그의 얼굴에는 반가움이 가득하였다.


“선친과 나는 젊어서 교류가 있었네! 자네 선친은 회덕은 물론이고 공주 일대까지 명성이 있는 선비 중의 선비였어! 우암의 학통을 이어받은 선비로 예학과 종법에 대한 이해가 깊었지! 비록 몇 번 만나지 못하였지만, 정학의 도를 논하고 어지러운 시국을 어찌 헤쳐나갈지 논의하던 사이였네! 이럴 수가! 내 생전에 동우의 아들을 만날 줄은 어찌 알았겠는가!”


오 진사가 넘쳐흐르는 기쁨에 겨워 큰 소리로 웃으니, 주변 시선이 또 집중된다. 옆자리 사람이 “거, 조용히 좀 합시다!”라고 짜증을 낸다. 이번에는 정우와 주리가 쩔쩔매며 사과한다. 한 여사는 목소리를 높이진 않았지만 역시 기뻐서 어쩔 줄 모른다.


“자네 모친은 우암의 후예로서 재색을 겸비한 규수로 소문이 자자했네! 학문이 선친에 뒤지지 않아서 여군자로 이름이 높았는데, 자네는 둘의 핏줄을 타고났구먼!”


정우 또한 기쁨에 겨웠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알고 교류가 있던 사람들이 주리의 고모부와 고모였다니. 전혀 뜻밖의 만남이라 놀란 가슴이 계속 뛰었다. 주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두 집안이 선대부터 인연이 있었다는 것이, 정우와 자신의 만남을 마치 숙명처럼 느껴지게 하였다.


“믿을 수 없구먼, 믿을 수 없어.”


오 진사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의 목소리가 감동에 겨워 떨려오고 있었다. 한 여사는 남편에게 “나리. 우리가 아무래도 최고의 조카사위를 둘 것 같습니다.”라고 정우를 칭찬한다. 정우는 “송구스럽습니다.”라고 고개를 숙이고, 주리는 미래의 남편이 옆에서 찬사를 받자 감개무량하기 그지없다.


그때 오 진사가 묻는다.


“자네가 동우의 아들이고 하니 내 질문 하나 하겠네. 괜찮겠는가?”


“말씀하시지요.”


오 진사가 목소리를 가다듬고 묻는다.


“효종대왕께서 승하하셨을 때, 윤휴를 비롯한 남인의 무리는 인조대왕의 계비 되시는 자의대비 또한 효종대왕의 신하로서 상복을 3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네. 헌데 우암은 그러지 아니하였어. 우암은 자의대비가 상복을 1년 입어야 한다고 하였지. 효종대왕이 적장자가 아닌 차남이라는 이유로 말이야. 우암 선생이 왕실에 대한 공격과 불충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는 이러한 주장을 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보는고?”


정우는 막힘없이 대답하였다. 이는 부모님이 저술한 『송자대전찬의』에 서술된 내용이었다.


“우암께서는 주자의 뜻에 따라 모두가 공부하고 또 노력하여 성인이 될 수 있는 자질은 존비친소를 막론하고 확고히 존재한다고 보셨습니다. 그 때문에 왕실 또한 다른 이들에 비해 특별한 존재가 아니며, 왕실의 사람들이라도 보편적인 예법을 준수하는 데 예외가 될 수 없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차자(둘째 아들)인 효종대왕에 대하여 자의대비가 1년의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한 것입니다. 종법에 의하면 그러한 예는 인조대왕의 적장자인 소헌세자에게 갖추는 것이 맞기 때문입니다.”


“그러하네! 실로 그러하네!”


오 진사가 만족스레 웃는다.


“우암께서 추진한 내수사의 혁파와 양반호포론의 주장, 그리고 노양처종모용종량법의 주장도 그러한 뜻에서 나온 게지! 과연 동우의 아들이야! 자네 선친 또한 경술년에 거······.”


그때 부인 한 여사가 “나리!”하고 제지하지 않았으면, 오 진사는 하마터면 말실수할 뻔했다. 오 진사가 “아차!”하고 입을 다물었다. 오 진사는 하마터면 “자네 선친 또한 경술년에 의병을 일으켜 적에 맞섰는데, 역시 자네는 동우의 아들일세!”라고 할 뻔했던 것이다.


“내 정신 좀 보게. 워낙 기뻐서 실수할 뻔했어.”


오 진사는 무안하여 험험 헛기침을 한다. 그 틈에 한 여사가 말한다.


“아무튼지 간에, 자네가 주리와 연을 맺게 되어 정말 영광일세. 우리 집안의 실추된 명성이 주리가 각성한 것과 더불어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되었어!”


“과찬이십니다, 여사님. 과찬이십니다.”


정우가 겸양을 표한다. 주리는 이렇게 정우가 인정을 받고 또 인정을 받으니 좋아서 죽을 지경이다. 하지만 살짝 야속했다. 정우는 주리에게 본인이 송시열의 후예임을 이제까지 한 번도 말하지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정우의 성정이 겸손하여 모친이 우암의 후손임을 괜히 뽐내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것이라고 이해한다.


오 진사가 침묵을 멈추고 지팡이를 잡는다.


“자, 이만 가세나! 여기는 더 말을 하기에 좋지가 않네. 자네 머무는 곳으로 우릴 좀 안내해주게.”


“그러겠습니다. 가시지요.”


오 진사가 몸을 일으키고 절뚝이며 걸어간다. 그의 발걸음은 절뚝일지언정 당당하고 또 가벼웠다. 모두 낙랑파라에서 나와 정우가 지나가는 인력거가 있는지 찾는 와중, 한 여사가 주리에게 시선을 돌렸다.


“주리야.”


“예. 고모님.”


주리가 해맑게 미소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주리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고모의 표정이 매우 엄격하게 굳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너는 대체 왜 치마를 짧게 입고 다니는 게냐?”


주리는 세라복 차림으로, 역시 무릎 위에 살짝 걸치게 줄여 입은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주리는 “치마 짧은 게 뭐 어때서요? 예쁘잖아요.”라고 한순간, 고모의 “어허!”하는 호통이 내리친다.


“어쩌자고 남들 앞에서 다리를 드러내는 그런 차림을 하고 다닌단 말이냐! 비록 우리 집안이 네 아버지 때문에 상놈의 집안으로 떨어졌지만, 너는 네 할아버지의 후손이고 또 반가의 여식이야! 반가 여식의 체통을 지켜야지!”


주리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치마를 짧게 입고 다닌다고 길거리에서 알지도 못하는 어른들에게 뜬금없이 불려가 잔소리를 들은 일이 여러 번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마다 “예. 죄송합니다.”했지만, 돌아서서는 그 사람 뒤에 혀를 쏙 내밀어주던 주리였다. 사실 작년 12월에 고모가 주리의 복장을 못마땅하기는 하였지만, 지금은 자신을 예뻐하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치마 길이 가지고 잔소리를 하는 것이다.


“고모님! 다리 드러나는 게 뭐 어때서 그런가요?”


주리가 살짝 부아가 올라와 이리 대꾸하였다. 그 말에 고모의 잔소리가 시작된다.


“어찌 그런 물음을 하느냐? 여자아이가 맨살을 드러내고 다니면 음심을 품은 자들을 자극해 봉변을 당하고 정조를 위협받을 수 있음을 모르느냐?”


고모의 호통에 주리는 이상하게 용기가 올라와지지 않으려 한다.


“그럼 그런 마음을 품은 사람 잘못이지 왜 치마 짧게 입은 게 잘못인가요?”


“예의범절에 어긋나는 복장을 하니까 그렇지! 맨살을 드러내어 남자를 유혹하는 건 기생 중에서도 삼류나 하는 짓이란 말이다!”


“제가 언제 유혹했다고 그러세요!”


주리는 그만, 상대가 존경을 바치는 고모임을 잊고, 살짝 화가 나 이렇게 말하고 말았다. 그런데 살짝 찔리는 게 없진 않았다. 한때 생각 없이 모여서 혼부라를 하던 시절에는 자신의 예쁜 다리를 드러내면 잘생긴 모던보이와 같이 연애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정우가 자기 다리를 신경쓰는 시선을 보내는 것도 알기에 계속 이런 치마를 입고 다녔다. 하지만 주리는 찔리는 감정을 빠르게 벗어나 자기 논지를 전개한다.


“그럼 고모님처럼 불편하게 길게 입고 다녀야 한단 말인가요? 움직이는 데 너무 불편하단 말이에요! 게다가 제가 잡지에서 봤는데요, 옛날 방식처럼 길게 두르고 속곳을 입는 것보다는, 이렇게 입고 다니는 게 다리 혈액순환에 더 좋다고요!”


“어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닐진대 건강 핑계로 넘어가려 하느냐!”


고모의 호통은 더 커진다. 옆에 있는 오 진사와 정우는 고모와 조카딸이 이런 문제로 언성을 높이자 표정이 난감해져 서로만 쳐다본다.


“게다가 그렇게 짧게 입고 다니다가 강풍이 불거나 넘어지기라도 했을 때 어찌하려 그러느냐! 속곳을 다 보여주려 하느냐?”


주리는 그 지적에 부아가 더 치밀어서는 이렇게 쏘아붙인다.


“그래서 요즘은 안에 블루머 입고 다니거든요! 속곳이 아니니까 부끄럽지 않거든요!”


“이런 망측한! 요즘 여학생들이 그 블루머인가 부르마인가 뭔가 하는 망측한 짧은 서양 복장을 하고 체육인가 뭔가 하며 몸을 마구 움직인다던데 너도 그렇단 말이냐?”


결국, 주리는 쏟아지는 잔소리에 참다못해, 고모에 대한 강한 존경심에도 불구하고, 아주 예의범절에 어긋나는 행위임을 자각하면서도 이리 소리치고 말았다.


“고모님은 구식이에요!”


이에 한 여사도 물러나지 않고 “너는 쓸데없이 하이칼라다!”라고 소리친다.


주리는 얼굴이 시뻘개져 “우우우우웅!”하고 뺨을 부풀리고, 한 여사는 “흐으으으음!”하며 주리와 대치한다. 정우와 오 진사 모두 고모와 조카 간에 이런 일로 괜히 생채기가 날까 봐 “주리야, 이만 진정해.”, “부인. 화를 푸시구려.”라고 말리려 하는 순간, 갑자기 한 여사 입에서 “풉.”소리가 나온다. 그러더니만 “하하하!”하는 시원한 웃음소리가 한 여사 입에서 나오는 게 아닌가.


주리가 놀라서 어안이 벙벙해 고모를 멀뚱멀뚱 쳐다본다. 한 여사는 그런 조카를 귀엽다는 눈으로 바라보며 이리 말한다.


“조금 전의 말은 널 시험해 보기 위해서였다. 네가 작년에 날 봤을 때처럼 주눅이 드는지, 아니면 당당하게 자기 말을 할 수 있는지 알고 싶어서 그랬던 것이니라.”


“예? 그런 거였어요? 뭐에요! 놀랐잖아요!”


주리는 고모에게 완전히 속았음을 알고 또 뺨을 부풀린다. 한편으로는 엄격하고 무서운 고모가 이런 장난을 칠 수 있는 사람임을 알고는 이전보다 더한 친근감이 다가옴을 느꼈다.


“치마 길이가 어떻든 간에 정학의 가르침을 명심하며 행동하면 되는 것임은 나도 알고 있다. 그리고 나쁜 일이 생겼을 때 치마 길이가 문제가 아니라 음심을 품은 자들을 탓하는 것이 사리에 맞는 것이지. 그러니 네 치마 가지고 했던 잔소리는 신경쓰지 말거라.”


주리는 고모가 더 이상 자기 치마 가지고 잔소리를 할 생각이 없음을 알고 얼굴이 활짝 핀다.하지만 한 여사는 단순히 장난으로만 그런 소리를 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너는 반가의 여식이다. 그리고 여기 정우 군과 혼례를 치를 거고. 그러니 몸가짐을 언제나 조심하고 품위 있게 행동해야 함을 항상 잊지 말아라.”


아무래도 잔소리 같기는 했지만, 그 잔소리에도 애정이 느껴지기에, 주리는 알겠다고 웃음짓는다.


한 여사는 “뭐, 내가 작년에 너에게 한 건 품위 있는 행동은 아니었다만.”이라고 자조한다. 그러나 바로 표정이 즐거워지더니 오 진사에게 이리 말한다.


“이 아이가 부아를 내는 모습이 적잖이 귀엽지 않습니까?”


오 진사는 부인의 말에 허허 웃고 주리는 “우우웅! 뭐에요오!”하고 고모에게 성화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4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경성활극록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경성활극록』 쓰며 영향받은 작품과 참고문헌 +4 19.07.11 791 0 -
159 159화 +2 20.05.26 82 4 14쪽
158 158화 +7 20.05.20 136 4 13쪽
157 157화 +4 20.05.16 136 5 23쪽
156 156화 +4 20.05.13 138 5 21쪽
155 155화 +2 20.05.09 143 3 14쪽
154 154화 +2 20.05.05 142 3 17쪽
153 153화 +2 20.05.02 142 6 13쪽
152 152화 +4 20.04.30 143 4 12쪽
151 151화 +2 20.04.26 152 3 13쪽
150 150화 +4 20.04.23 155 4 16쪽
149 149화 +4 20.04.21 145 4 13쪽
148 148화 +2 20.04.18 141 6 17쪽
147 147화 +4 20.04.17 143 4 16쪽
146 146화 +2 20.04.14 141 3 23쪽
145 145화 +4 20.04.11 139 3 14쪽
144 144화 +2 20.04.06 139 3 23쪽
143 143화 +6 20.04.03 139 5 15쪽
142 142화 +4 20.03.30 139 3 14쪽
141 141화 +6 20.03.26 140 4 19쪽
140 140화 +4 20.03.22 141 5 23쪽
139 139화 +8 20.03.20 143 3 16쪽
138 138화 +4 20.03.15 140 5 23쪽
137 137화 +2 20.03.15 140 4 14쪽
136 136화 +2 20.03.14 140 6 18쪽
135 135화 +4 20.03.12 140 4 23쪽
134 134화 +4 20.03.09 140 4 14쪽
133 133화 +2 20.03.06 141 5 17쪽
132 132화 +8 20.03.04 142 7 21쪽
131 131화 +8 20.03.03 141 5 17쪽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PKKA' 작가를 후원합니다!

  • 보유 골드: 0 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