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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활극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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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KKA
작품등록일 :
2019.07.10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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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30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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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9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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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화

DUMMY

전날 밤 술상에서 오간 성리학의 심오한 대화를 따라가기 어려워 졸음이 왔던 주리는, 고모 한 여사가 이끌어 잠자리로 들어갔다. 그러나 고모와 단둘이 여러 가지 얘기를 할 기회를 잡은 주리는, 언제 졸았냐는 듯 눈이 말똥말똥해져서 고모와 오래 대화를 나누었다.


주리가 눈을 초롱초롱 밝히며 고모부와 어떻게 결혼하게 된 건지 묻자, 한 여사는 “어허! 나라의 큰일을 해야 하는 네가 어찌 남녀상열지사에 먼저 관심을 가지느냐!”라고 호통을 쳤었지만, 주리가 “에이! 고모니임~!”하고 애교를 부리자 결국 못 이기고는 허허 웃고 말았다. 주리는 그리하여 한 여사의 옛날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주리의 할아버지인 한호성 진사는 우암 송시열이 여자에게 경전을 가르침을 권했던 전례에 따라 딸 자청을 직접 가르쳤다. 부친의 가르침 아래 이미 12살의 나이에 사서삼경까지 이른 자청을 한 진사는 너무나도 기특하게 여겨 한 마디 선언하고 말았다. 학문에서 딸을 넘지 못한 사람에게 딸을 시집보내지 않겠다고 말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한 여사가 열다섯이 되던 해, 청주의 명망가인 한 진사 집안의 재신과 위세를 탐하여 매파를 통해 혼담을 오간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 같이 드리운 발 뒤에서 경전에 대한 깊은 이해를 보여주는 자청에게 수치심을 느끼고 돌아가 버렸다. 한 진사는 자칫하다가는 딸에게 아무도 장가들지 않을 거라며 걱정이 태산이었던 부인에게 자격 없는 놈팡이를 사위로 맞고 싶지 않다고 어깃장을 놓았다.


그러나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3년이 지나도 제대로 된 혼처가 나오지를 않았다. 주리의 할머니는 이러다가 딸 혼기를 놓치겠다고 성화였으나, 한 진사는 한번 내뱉은 말은 절대 바꾸지 않는 사람이었다. 주리는 고모가 이런 면에서 할아버지를 닮았다고 생각하였다.


어머니의 걱정에도 내색 안하던 자청이었지만, 속으로 착잡한 마음을 달래려 정자에 올라 송나라 여류시인 이청조의 사를 읊던 때, 그 시의 뒷부분을 정확히 읊으며 나타난 훤칠한 선비가 있었다. 그 사람이 오 진사였다. 오 진사와의 첫 만남이 어떠하였는지 듣자 주리는 이거 딱 낭만적 연애소설 소재라고 생각하며 좋아했다.


갑자기 웬 외간남자가 시를 읋으며 등장하자 기겁한 자청이었지만, 13세에 진사시에 합격한 신동 충주 사람 오세창의 이름을 들은 적이 있었기에 경계감이 풀렸다. 어느 새인가 둘은 시를 논하고 옛 성인의 말씀을 논하며, 서로의 학문을 견주고, 어지러운 시국을 한탄하며 교류하기 시작하였다. 둘은 남의 이목 때문에 몰래몰래, 쓰개치마를 푹 뒤집어쓰고 만나가며 서로를 알아갔다.


주리는 고모가 들려준 이야기가, 충주의 신동 오세창 진사가 청주의 명망 높은 유림인 한호정 진사의 따님인 한자청과 만나서 사랑하게 된 이야기가, 지금의 ‘자유연애’와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랐다.


단, 한 가지 현재의 자유연애와의 차이점이라면, 오 진사는 한 진사의 허가 아래 자청을 만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한 진사는 충주의 신동 오 진사의 소문을 듣고 그를 만나본 뒤 마음에 들어 했던 것이다. 그러나 젊고 풍류를 즐기던 오 진사는 마음이 없는 부부생활을 할 생각이 없다며, 우선 자청의 마음을 얻고 혼례를 치르겠다고 하여 장인을 더욱 흡족게 하였다.


오 진사에 대한 마음이 나날이 깊어져만 갔던 자청은 아버지가 혼처를 정했다고 하자 집에서 쫓겨날 것을 각오하고 외간남자를 만나고 있다고 밝혀 버리고 말았다. 그때 그 외간남자인 오 진사가 방으로 들어오고, 한 진사가 껄껄 웃으며 모든 사실을 밝히자, 자청은 이제까지의 조신하고 차분한 규수의 모습을 무너뜨리고 "에에에엑!"하고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이후 오 진사는 아버지와 연인이 짜고 자신을 놀렸다고 생각해 단단히 삐진 자청을 달래느라 며칠 동안 고생해야 했다. 자청은 혼례를 치르고 첫날밤에도 토라진 것이 아직 풀리지 않은 상태였지만, 결국은 못 이기는 척 남편의 억센 팔에 몸을 맡겼다. 주리는 이 대목에서 고모부와의 첫날밤은 어떠셨냐고 묻고 싶었으나, 그랬다가는 고모에게 밤새 혼날까 봐 참았다. 한편 분명 고모가 일부러 차가운 척을 하며 고모부를 애태웠을 거로 생각하니, 자기도 한번 정우에게 그런 시도를 또 하고 싶어졌다.


그러나 고모의 이야기에서 즐거운 것만 있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시집오고 나서는 수난의 연속이었다. 갑오년에 아산 전투에서 패배한 청나라 군대의 패잔병들이 고을에 들어와 행패를 부렸다. 모든 양반을 다 죽여버리겠다는 광신적인 동학교도들이 고을에 쳐들어왔다. 일본군 부대는 허울뿐인 군표를 지급하며 식량을 내놓으라고 은근히 협박하였다. 오 진사의 가문은 마을의 산림이자 지주로 그때마다 곡식 창고를 열고 총기를 사들여 주민들과 노비들을 무장시켜 청나라 패잔병을 멍석말이해 쫓아내고, 거세게 공격해 오는 동학교도들을 패퇴시키고, 일본군 병력과 대치하였다. 나라의 어려움에 근심하던 오 진사의 부친은 을미년에 국모가 시해되자 격분하여 거병하였다. 오 진사는 부친의 뒤를 이어 을사년에 외교권을 박탈당하자, 경술년에 국치를 당하자 다시 거병하였다.


그러나 적의 무자비한 진압이 인근 고을들을 초토화하자, 결국 오 진사의 농민들은 그 압도적인 폭력에 항전할 의지를 상실하고 말았다. 그러나 오 진사는 부인과 함께 뜻을 꺾지 않고 기다리다, 심산 김창숙 등이 주도한 파리 장서 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전국적인 만세 열풍에 참여하여 태극기를 들었다. 둘은 같이 있는 한 두려울 것이 없었고, 적의 총칼과 협박은 그저 하찮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두 부부의 날개를 일순간 꺾어버린 것은, 아들의 배신이었다.


“그놈은 어릴 때부터 이상했느니라.”


자애롭게 주리를 바라보던 고모의 얼굴에, 다시금 분노가 서렸다.


“개미나 풀벌레 같은 작은 짐승들을, 아무 감정도 내비치지 않고 밟아 죽일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어. 그 녀석은 자신이 누군가의 위에 있다는 것을 즐기고, 또 어떻게든 확인하려 하던 놈이었지. 짐승뿐 아니라 사람에게도 말이다.”


어린 시절의 오 경부보가 조부모님과 부모님의 속을 썩인 것은 한두 번이 아녔다. 집 노비의 아이를 집요하고 모질게 괴롭히고, 싸움이 붙은 아이를 돌멩이를 잡아 휘둘러 머리를 깨지게 하고, 가문을 오래 모셔온 나이 지긋한 집안 노비에게 이놈 저놈하고 함부로 말을 해 댔다. 오 진사와 한 여사는 그때마다 아들에게 피해를 준 사람들에게 고개를 숙이게 하였고, 어찌 이리 무도하게 구느냐고, 반가의 자제로 태어난 것은 남을 보살피기 위해서지 남의 위에 서서 짓밟으라는 게 아니라고 거세게 회초리를 휘둘렀었다.


“나는 그렇게 하면 그놈이 고쳐질 줄 알았다. 관례를 치른 이후에는 그래도 철이 든 줄 알았고. 그런데 말이다. 그건 다 그놈이 우리를 속이기 위한 기만이었던 게야!”


오 진사는 1920년 1월에 3월 만세운동 1주기를 맞아 다시 한번 고을에서, 그리고 장인 한 진사를 비롯한 충청도 일대의 유림과 연결하여 운동을 일으키려 했었다. 이때 아들 재두가 외조부를 비롯한 다른 고을의 명망 높은 선비들과의 연락책을 자처하였다. 오 진사와 한 여사는 드디어 아들이 큰일을 하려 한다며 기뻐하고 그 일을 맡겼다.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치명적인 선택이었는지는, 1달 후에 청주로 가서 장인을 만났을 때 알 수 있었다.


노쇠하고 병들었으며, 군수와 경찰서장이 주재소를 짖기 위해 사당 부지를 팔라고 압박하는 통에 생명의 불꽃이 꺼져가던 한 진사는, 한성에 유학을 갔다가 머리 깎고 양복을 걸치고는 일본 회사에서 일하며 만세운동은 그저 폭동이었으며 일본의 지배 속에서 가문의 위세를 유지하려면 사당 부지를 팔고 총독부에 협조해야 한다는 아들 덕만에게 벽력 같은 노호성을 질렀었다. 한 진사는 국망의 지경에 이른 까닭이 개화당의 말 대로 신학문을 등한시한 것이 문제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미쳐 아들을 한성에 보내 신학문을 배우고 나라가 다시 살 수 있는 길을 모색해 보라 하였다. 그러나 아들 덕만은 적의 권세와 부를 보고는 그것에 압도되어 버렸다.


한 진사는 아들을 한성에 보내 신학문을 배우게 한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이었다고 거의 울부짖으며, 에게 재산을 물려줄 수 없다며 오 진사와 한 여사를 불러 유산상속 의사를 물었으나, 오 진사는 종법에 따라 아들에게 상속하는 것이 맞으며 처남을 어떻게든 바른길로 돌려놓겠다고 장인을 달래었다. 그날, 나쁘지 않던 사이었던, 오히려 좋은 사이였던 자형과 처남, 손윗누이와 동생 사이에 고성이 오갔다. 자형과 손윗누이는 처남이 양반 가문을 오랑캐 상놈 집안으로 전락시킬 거냐고 꾸짖었고, 처남은 오씨 집안 사람이 한씨 집안 일에 개입하지 말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 바로 다음 날, 한 진사의 고택 마당으로 순사들이 우르르 들이닥쳤다. 그들 사이에는, 재두가 있었다.


"저자들입니다."


재두는 부모님을 손가락으로 가리켰었다.


“저들이 보안법 위반 행위를 저질렀습니다.”


재두 옆에 서 있던 일본인 청주경찰서장은, 만족스럽다는 웃음을 지었다. 오 진사와 한 여사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서, 자신들의 아들이 부모를 배신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어서 몸이 고목처럼 굳어진 채로 포승줄을 받았다. 병상의 한 진사는 외손자가 딸과 사위를 손가락질하는 눈앞의 말도 안 되는 광경에 심장을 움켜쥐고 비명을 내지르고는, 그 날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였다. 재두의 고변 한 번으로, 오 진사가 돌린 연판장에 이름을 적은 충청도의 유림 수십여 명이 형무소로 끌려갔다. 오재두는 그 대가로 순사 자리를 얻었다.


“아아! 고모님!”


주리는 참지 못하고 고모를 와락 껴안고 흐느꼈다. 얼마나 아프고 괴로웠을까? 고모부와의 사랑의 결실인, 열 달 간 배속에 품은 아이가 이런 끔찍한 배신행위를 저질렀다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주리는 고모의 아픔에,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의 아픔에 그저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고모는 의연하게 주리를 토닥여 주었다.


“울 것 없다. 그놈은 내 아들이 아니야. 요즘 말로는 ‘생물학적 아들’이겠구나. 그러니 신경 쓸 것도 없고, 네 친족이라 생각할 것도 없다.”


한 여사의 말은 놀라울 정도로 덤덤했다. 그녀의 말에는 어떠한 회한도, 어떠한 안타까움도 섞여 있지 않았다. 그래도 주리는 고모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생각하며, 울음을 멈추지 못하였다. 고모가 덤덤하게 말하는 것이 더 가슴이 아팠다.


그렇게 주리는 고모 품속에서 흐느끼다가, 어느새인가 잠이 들었다. 햇살이 창 너머 들어와 일어나 보니 고모는 이미 “늦잠은 좋은 습관이 아니니라.”하며 옷을 단정히 갖춰 입고 있었다.


고모의 옛이야기에 여전히 우울감을 느끼던 주리는, 옷을 갈아입고는 정우 방으로 향했다. 정우 얼굴을 보면 텁텁한 마음이 좀 가실 것 같아서였다.


문 앞에서 노크하고 "오빠? 일어났어요?"라고 불렀는데, 대답이 없었다. 살짝 문을 열어 보니, 정우가 침상에 돌아누워 자는 게 보인다. 맞은편 침상에서는 민호가 자고 있다. 시간이 거의 아침 9시가 되어 가는데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걸 보니, 전날 꽤 늦은 밤까지 대화를 나누었던 모양이었다.


정우가 무방비하게 자는 얼굴을 보자, 주리는 언제 우울했냐는 듯 장난기가 발동해 방 안으로 살금살금 들어왔다. 안정된 숨소리로 편히 자는 정우 앞에 서자, 만약 붓과 먹물이 있었다면 얼굴에 장난을 쳤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여 소리 죽여 킥킥 웃었다.


"오빠. 일어나요."


주리는 정우 귀에 대고 속삭였다. 정우는 눈을 뜨지 않았다.


"잠꾸러기 오빠. 일어나요. 해가 중천이에요."


한 차례 더 속삭였지만 역시 무반응이다.


"흥. 나처럼 예쁜 여자애가 깨워주는데 안 일어난다 이거죠?"


주리는 심통이 난 척 속삭이는데, 정우는 계속 잠만 잔다. 주리는 히히 웃으며 정우 옆에 몸을 누였다. 침상이 그다지 크진 않았지만, 정우가 벽에 가까이 붙어 자는 통에 공간이 좀 생긴 터였다. 그래서 누웠다기보다는 몸을 걸친 정도여서 몸이 조금 배겼지만, 개의치 않았다.


주리는 뺨이 달아오르는 걸 느끼며 정우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거리가 가까웠다. 주리는 어릴 적 읽은 동화책에서 나온, 죽은 듯 자는 공주님에게 왕자님이 키스를 하자 공주님이 깨어난 이야기를 떠올린다. 입 맞추면 정우가 깨어날까 하는 생각에, 주리는 입술을 살짝 내밀고 정우의 입술로 다가갔다. 조금씩 조금씩.


그런데 그때였다.


“뭐하니?”


“으아악!”


정우가 싱긋 웃으며 눈을 번쩍 떠 버린 것이다. 주리는 너무나도 놀라서 몸을 들썩여 버렸다.


“어! 어! 어!”


몸을 걸치다시피 누운 와중에 몸을 거세게 들썩이자, 주리는 균형감각을 상실하고 침상에서 굴러떨어지려 했다. 정우가 화급히 잡지 않았다면 바닥으로 한 바퀴 굴러서 민망한 꼴을 보였을 것이다.


주리는 “괜찮아?”라고 놀란 얼굴로 물어보는 주리에게 “뭐에요! 깨어 있었으면 말을 하던가요!”라고 심통을 부렸다. 정우는 웃으며 “미안. 미안.”하고 달래주었다. 전날 오 진사와 밤 늦게까지 대화를 나누어 피곤한 그였지만, 주리가 들어와서 속삭이자 잠이 깨었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장난기가 발동해, 자는 척 하는 동안 주리가 어떻게 행동할지 관찰하였던 것이다.


정우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려다가 자기가 놀라고 당황하게 된 주리는 부끄러운 나머지 “몰라요, 진짜!”하고 괜히 투정을 부렸지만, 몇 분 후에는 같이 침상에 누워 입 맞추고 있었다. 부드럽고 달콤하게, 둘은 서로의 입술을 갈망하였다. 그 속에서 주리가 가지고 있던 우울감은 잠시 자취를 감출 수 있었다.


그때 맞은편 침상에서 자다 깬 민호가 볼멘소리를 한다.


“야. 제발 나 있을 때는 그러지 좀 마라. 총각 마음에 상처가 크다.”


정우는 오랜 형제가 아직 옆에 여자가 없는 것을 헤아리지 못하고 이러고 있다는 점이 미안하여 사과하지만, 주리는 잔망스럽게도 “부러우면 오라버니도 여자 사귀던지요.”하고 혀를 쏙 내민다. 민호는 “아오! 내 더러워서!” 하고 이불을 뒤집어써 버린다.


모두 늦은 아침을 먹고, 주리는 천 지부장의 지시 아래 장 사장의 집으로 향했다.


“이 문제에 대해 그 아가씨의 의향을 물어보거라. 만약 마음이 있다면 바로 연락하고. 그리고 밀항 비용으로 얼마나 낼 수 있는지도 물어보거라.”


“상하이까지는 200원은 줘야 하고, 상하이 거쳐서 로스앤젤레스까지 가려면 800원은 될걸.”


명수가 가격을 설명해 주었다. 주리는 밀항 비용이 생각보다 비싸다고 느꼈지만, 불법적인 밀항은 항상 위험부담이 있다는 점에서 납득을 하였다.


주리가 장충동에 있는 멋들어진 문화주택인 장 사장 댁 근처까지 갔을 때였다. 갑자기 고성이 들려왔다. 일본말이었다.


"이건 과학계의 큰 손실입니다! 어떻게 그런 인재를 시집보내서 집안에만 두려고 하는 겁니까!"


대문간에서 양복 차림의 일본 사람이 거세게 항의하고 있었다. 옆으로 퍼진 풍채에 머리가 완전히 벗겨져 대머리가 번쩍하고, 흰 머리가 양옆에만 남은 노인이었다. 나이는 들어 보이지만 혈색은 좋았는데, 그중에서 특히 눈이 가는 부분이 있었다. 유난스럽게 커다란 코였다. 거의 주리의 주먹 만한 코였다. 상황이 아니었으면 그 코주부 얼굴을 보고 웃음을 터트렸을 것이다.


장 사장은 대문간에서 그 코 큰 일본인을 밀어내고 있었다.


"과학계고 뭐고 난 관심 없소! 당장 나가시오! 괜히 혼인하는 애 흔들지 말고!"


"자식 인생을 망치려 작정을 하셨군! 선옥 양의 칼텍 입학 허가서가 떨어졌단 말입니다, 캘리포니아 공과대학! 칼텍이 세계 공학계에서 어떤 위치인지 알기는 합니까?“


”난 그런 건 상관하지 않소! 여자애가 유학 씩이나 가서 그런 거나 배웠다는 게 더 화가 나오!“


”이런 답답한 사람을 봤나! 공학에 대단한 재능과 열정이 있는 사람을 아무것도 못 하게 만드는 게 말이 됩니까!"


"당신 자식 아니니 상관 하지 마시오!"


일본 노인이 장 사장에게 밀려나 대문 밖으로 나오자마자 문이 쾅 하고 닫혔다.


"학계가 크나큰 인재를 잃겠구나!"


일본 노인은 분노에 차 허공에 주먹을 휘두르고 씩씩거렸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체념의 한숨을 쉬고는 다른 곳으로 터덜터덜 가 버렸다. 주리는 이 갑작스러운 일에 당황했지만, 정황상 저 코 큰 일본 사람이 선옥을 도와준 와세다대학의 교수인 것을 짐작하였다.


주리는 대문을 살짝 열고 들어가서 “그 교수가 다시 오거든 바로 다시 연락하게! 알겠나!”라고 하인들에게 호통을 치던 장 사장을 발견했다. 보아하니 장 사장은 교수가 찾아왔다는 연락을 받고 바로 회사에서 달려온 모양이었다. 장 사장은 “안녕하세요.”하고 멋쩍게 들어오는 주리를 보고 놀란 눈치다.


“너 학교에 있을 시간 아니니?”


“아버지가 시집가기 전에 마음대로 돌아다녀도 된다고 하셨어요.”


“참의님도 의외시군. 나라면 그렇게 안 할 텐데 말이다.”


장 사장은 그 와세다대학 교수에게 노성을 지르고 분이 안 풀렸는지 가시 돋친 소리를 한다.


“선옥이 보러 온 거면 걔 방에 가 보거라. 나는 나가 봐야 하니까.”


장 사장은 차갑게 대꾸하고는 그대로 나가 버렸다. 주리는 생각해 보면 자기 아버지가 장 사장보다는 나을 거로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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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2

  • 작성자
    Lv.18 PnP
    작성일
    20.02.11 15:19
    No. 1

    와우 칼텍급 공순이....
    하여간 자식이 부모를 고발하게 권장하는 사회는 보기가 참 끔찍합니다. 사실 한국도 비교적 최근까지ㄴ...읍읍!!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2 PKKA
    작성일
    20.02.11 15:25
    No. 2

    그런 폐륜이 그래도 찾기 힘들었다는건 다행입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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