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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K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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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0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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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15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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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08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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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3화

DUMMY

한바탕 웃음 이후 정중하게 나선 이 선비는 오세창 진사였다. 그의 영원한 반려인 한자청 여사가 옆을 지키고 있다. 둘은 중요한 일이 있어 불편한 몸을 이끌고 충주에서 경성까지 와 목적지로 향하던 중에 이 광경을 보고 증오의 소용돌이 속에 왕림한 것이다.


“무···.... 무엇을 말이오?”


오 진사의 풍모를 본 안 박사는 직감적으로 그가 만만찮은 인물임을 알았다. 옷매무새만 봐서는 한물 가고 기운 흔적도 있는 갓과 도포에 다리를 절어 지팡이에 의지하는, 자기 아버지 나이대인 초로의 시골양반에 불과해 보였다. 그러나 아버지와의 차이점은 그의 눈에 한평생 장사만 한 사람에게는 깃들어 있지 않은, 강한 확신과 의지, 그리고 극도의 당당함이 깃들여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순간 오 진사가 풍기는 풍모에 눌려 경어를 쓸 뻔하였으나, 젊은이들을 유교에 찌든 중장년층이 탄압하고 있다는 틀을 내세우는 그이기에 반말은 아닌 하오체를 쓴다.


“우선 중국인들의 세계지배 음모에 대해 묻고 싶소. 선생께서는 중국인들이 중국인 거리를 거점으로 삼아 돈의 힘으로 세계를 지배하려 한다 하셨는데, 그 말이 맞소?”


“그렇소. 그렇게 말하였소.”


“흐음. 참 희안하구려, 희안하오.”


오 진사가 고개를 끄덕끄덕인다. 입술에는 옅은 웃음을 띄고 있다.


“아까 보니 작년에 중국인 거리에서 주먹을 휘두루신 분들이 여럿 있던 것 같소. 그런데 정말 중국인들이 그런 음모를 꾸미고 있다면, 왜 그 분들은 지금 무사한 것이오?”


그 말에 술렁이던 좌중이 더욱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그 정도로 강대한 세력을 가진 게 이 나라의 중국인들이라면, 작년 일의 보복을 당해야 마땅하지 않겠소?”


안 박사는 불쾌해졌다. 이건 자신이 『시온의정서』를 들이밀던 히틀러 지지자들에게 했던 질문이 아닌가? 그런 만큼 거기에 어떻게 둘러대야 할 지도 잘 안다.


“그건 중국인들의 술책이오. 잘 모르나 본데, 짱꼴라들의 전략은 자신들의 세를 과시하는 게 아니오. 약한 척, 괴롭힘당하는 척 하며 세인들의 동정을 사서 옹호를 받는 거지. 자신들을 약자로 가장하여 사회에 거부감 없이 녹아들고 위선적인 지식인들의 동정을 사는 거요. 그렇게 세력을 확장해 가는게 놈들 방법이오. 그 때문에 놈들의 보복을 우리가 당하지 않는 거고.”


“호오. 거 참 재밌는 말씀이시구려.”


오 진사가 입술에 웃음을 머금는다. 안 박사는 그의 미소에 불쾌감을 느낀다.


“그 질문에 이렇게 답하셨으니 달리 질문해도 똑같은 말씀 하실 것 같으니 다른 물음을 좀 여쭙겠소. 그 헤겔인가 뭔가 하는 덕국(德國) 사람이 했다는 말을 좀 묻고 싶소. 중국이 황제 아래 모든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었다고 했고 선생께서는 그걸 그대로 믿는 것 같은데,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소?”


“그······. 그렇소. 헤겔은 짱꼴라들의 행태에 그렇게 말하였소! 중국은 신적인 존재인 황제가 모든 것을 통제하고, 통제를 쉽게 하기 위해 유교 같은 논리로 사람들을 노예화하는 나라라고 말이오! 그래서 시간만 있지 역사는 없는 나라라고 한 것이오!”


“흠. 흥미로운 말이오.”


오 진사는 퍽 재밌다는 표정이 되어 수염을 쓰다듬는다. 선비의 입에서 피식 하는 웃음과 함께 이런 말이 나온다.


“헤겔이라는 사람이 『사기』부터 『명사』에 이르는 24사(史)나 『십팔사략』, 『자치통감』을 한 번도 읽어보지 아니하고 그런 말을 했을 거라 생각하니 말이오.”


그 말에 양복 입은 인텔리들은 무슨 말인지 알고 술렁거린다. 허름한 차림의 일용직 노동자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뭔 소리야?”라고 한다.


“헤겔이 짱꼴라들에 대해 모르고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이오?”


안 박사가 오 진사를 노려본다.


“헤겔은 독일 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대철학자요! 유럽의 자유사상은 헤겔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단 말이오! 그런 말로 헤겔을 모독할 작정이오?”


“이 오 아무개는 불민하여 헤겔이란 사람이 누구인지 잘 모르외다. 그건 인정하겠소.”


오 진사가 허허 웃는다.


“허나 그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는 몰라도, 중국에 대해서 영 사리에 맞지 않는 소리를 했음은 알겠소이다.”


“무슨 근거로 그리 말하는 것이오?”

“중국에서 천자의 힘이 그랬던 적이 있는지 따져보면 대단히 이상해져서 말이오.”


오 진사는 그러며 좌중을 둘러보며 묻는다.


“여기 계신 분들 중 『삼국지』를 읽어 보신 분 계시오?”


이때 옆에 있는 한 여사가 말한다.


“나리. 『삼국지』보다는 『삼국연의』를 가지고 물어야 할 것 같습니다. 여기서 사서를 읽는 사람은 얼마 없어 보이니 말입니다.”


한 여사의 목소리에는 비웃음이 가득하였다.


“아. 부인 말 대로요. 그럼 『삼국연의』를 읽어 보신 분 계시오? 읽지 못했다면 『적벽가』같은 걸로 들어보거나 그랬던 분 계시오?”


그 말에 누구도 선뜻 손을 들지 않는다. 입을 다문 채 서로의 눈치만 본다. 물론 이들 중에 『삼국연의』의 이야기를 책으로 보거나 이야기꾼의 야담, 판소리꾼의 창으로 들은 사람은 여럿 있었다. 그럼에도 나서지 못하는 것은, 자신들의 외쳐대는 증오의 논거를 이 자가 꼬투리잡아 무너트려 버릴 수 있다는 무의식적인 두려움 때문일 것이리라.


“허어. 뭐가 그리 부끄러우시오? 읽거나 들었어도 문제될 것은 없거늘.”


오 진사가 혀를 끌끌 차고 계속 말한다.


“그저 아는데 그냥 나서지 않으셔서 안다는 전제 하에 말하겠소. 삼국연의 『삼국연의』속 천자가 어떤 역할이오? 영제는 십상시에게 휘둘리고, 헌제는 동탁과 조조의 위세 속에서 아무 힘도 쓰지 못하고 그저 위협당하고 조종만 받으며 한탄만 할 수 밖에 없던 황제였소. 천자가 헤겔이란 사람이 말한 그런 식의 신과 같은 존재며 모든 이들을 자기 발밑에서 부릴 수 있는 존재라면, 『삼국연의』의 이야기가 나올 수 있었겠소?”


그 말에 인텔리 룸펜들은 침묵하고, 일용직 노동자들은 머리를 갸우뚱한다.


“중국 삼국시대만 아니더라도 4,000년이 넘는 중원의 역사에서 황제가 그렇게 무소불위의 힘을 휘두른 적은 최근 500여년에 불과하오. 진시황의 통일 전 춘추시대부터 주천자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 전국시대에는 사실상 없어졌었소. 진시황의 권위는 다음 대에서 무너지고 한고조와 항우가 천하를 다투었었소. 이후에도 천자의 권위가 무너지고 군웅들이 할거하던 시기는 송태조가 천하를 정리할 때까지 몇 차례 등장하였소. 이걸 가지고 무슨 시간은 있는데 역사는 없다고 할 수 있겠소?”


그 말에 당혹함이 좌중 사이에서 번져나간다. 안 박사는 어떤 말로 반박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아 얼굴이 파랗게 질린다. 그도 신학문을 배우기 전 한학을 배운 사람이었다. 중국의 역사에 대해서는 『사기』도 읽고 『십팔사략』도 읽었다. 겉핡기나마 알고 있는 지식으로라도 헤겔의 중국관이 완전히 틀렸음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중국에 대한 증오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그리고 그럴듯한 말을 구사함으로서 자신이 지적으로 대단하다는 신뢰감을 주기 위해 사용했을 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찌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중원의 황제들도 나라를 자기 내키는 대로 통치할 수 없었소. 그리한다면 경, 대부, 사는 왜 있으며 승상부는 왜 있으며 6부는 왜 있었겠소? 지금 봐도 그 복잡한 관청들은 왜 있었겠소? 여기에 대해 대답해 보실 수 있겠소이까?”


“그······. 그건······. 그저 황제의 전제권력을 돕기 위한······.”


안 박사가 겨우 입을 열었으나, 그 목소리가 오 진사에게는 영 들리지 않는다. 오 진사는 안 박사가 입은 열었으되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줄 알고 계속 자기 할 말을 한다.


“헤겔이라는 사람이 아마 청조의 모습을 보고 그렇게 말한 거라면 어느 정도는 수긍이 가겠소. 그때의 중원천자는 천자이기 이전에 만주의 대한(大汗), 그러니까 오랑캐 추장이었으니. 오랑캐 추장이 가진 힘은 중원천자에 비교도 할 수 없었다오. 이른바 전제주의를 논한다면 별의별 관청조직이 다 있는 중원의 모습보다 추장의 말 하나에만 움직이는 오랑캐들을 가지고 따져야지. 청조 이전에 명나라도 그런 모습을 보이긴 했소. 몽골 오랑캐의 지배가 100년이 넘었으니 그 흔적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 보니 말이오. 그러니까······.”


이때 안 박사는 청중들을 돌아보았다. 그는 이때까지 이런 정면반박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누군가를 공격하고 매도하는 데는 익숙하였지만, 방어를 해본 적은 없었다. 그래서 유난히 당황스러워하는 만큼, 청중들이 자신을 보는 눈도 흔들리고 있음을 느낀다. 서둘러서 반격을 해야 하였다.


“그런 지엽적인 걸로 꼬투리 잡지 마시오!”


거센 고함이 안 박사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래서? 짱꼴라들이 개인의 자유를 추구했소? 개인 권리와 민권의식이 있었소? 없었잖소? 황제 아래 관료들이 어떤 조직을 이루건 간에 결국 황제의 절대권력과 통치를 위한 것일 뿐이잖소? 천자의 권위가 떨어져도 결국 천자는 있었잖소? 그런 체제가 계속되는 이상 중국에 역사는 없고 시간만 있다는 헤겔의 명제는 충분히 성립하는 것이오!”


그 말에 오 진사는 껄껄 웃는다.


“그 말대로요. 천자가 약해도 천자는 있었지. 그런데 말이오. 고래로 임금 없던 나라가 대체 어디 있었소? 그 자유롭다니 뭐니 하는 구라파에도 결국 임금이 나라를 다스렸잖소? 구주대전 이후에는 패한 나라들이 공화제를 택했다지만 그 이전에는 다 임금이 있었잖소?”


“그건 근대적 헌법에 의거한 입헌군주국들이오! 전근대적인 전제군주제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단 말이오!”


안 박사는 자신의 반박에, 저 고루한 늙은 선비가 이성과 합리, 그리고 자유정신에 입각한 근대적 헌법의 정신을 이해할 리가 없으니 외통수에 몰아넣었다고 생각했다. 근대헌법이 어떤 정신과 사상에 입각해 구성되었는지에 대해 설명함으로서 저 전근대 봉건잔재 유교 꼰대를 입닥치게 만들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안 진사는 오히려 그 자리에서 싱긋 웃는게 아닌가.


“그러한 근대적이라는 입헌군주국들이 어떻게 등장한 것이오?”


“그것은 프랑스 대혁명의 산물이오!”


안 박사는 오 진사가 전혀 눌리지 않고 웃는 걸 보고 속으로 당황했으나, 자신이 그래도 잘 아는 소재로 이야기를 진행할 수 있음에 기뻐한다.


“계몽된 프랑스 민중이 어리석은 왕을 끌어내리고 단두대에서 목을 잘라 공화국을 선포하였소! 그 때문에 자신들도 프랑스 왕 루이 16세의 신세가 될 것을 두려워한 유럽의 여러 군주들이 전제군주가 아닌 헌법에 의거한 통치를 하게 될 것이오! 자유정신이 확대된 거지! 중국과 조선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소! 왕의 목도 못자르는데 무슨 역사가 있고 발전이 있단 말이오?”


그 말에 계전아가 앞장서서 “그렇다! 그렇다!”라고 소리지른다.


“자유를 억압하는 짱꼴라들을 변호하다니! 저자야말로 우리의 자유를 없애려는 유교 꼰대 늙은이야!”


안 박사는 계전아가 여자만 아니면 자신의 검은 셔츠단이나 갈색 셔츠의 돌격대로 내세울 수 있을 거라 생각해 흡족해한다. 계전아의 앙칼진 목소리에 “그렇다! 그렇다!”하는 사람들이 끼어든다.


“흠. 좋소. 그대들은 임금의 목을 치고 자유사상에 의한 나라를 좋아하는구려. 잘 알겠소.”


그런데 그 순간, 안 박사는 경악하고 말았다. 함정에 빠진 사람은 바로 그였음이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왜 지금 이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의 목은 치자고 하지 않소?”


그 한 마디에 다시 흥분하려던 분위기가 무섭도록 사라진다. 청중들의 눈에는 공포가 실려 버린다. 오 진사의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대번에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그대는 왕의 목을 치는 게 발전의 증거인 양 말하였소. 그렇다면 왕 중의 왕, 임금 중의 임금, 하늘의 황제를 자처하고, 아예 살아있는 신으로 떠받들어지는 자의 목을 치자고 해야 하는 게 사리에 맞지 아니하겠소?”


안 박사는 그 자리에 얼어붙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당했다. 완전히 당했다. 저 망할 꼰대는 내가 그러자고 못하는 이유를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그자가 누군지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잘들 아시겠지만, 기왕 말 나온 김에 말하겠소. 바로 일본 천황이오!”


그 말에 경악한 사람들이 입에서 비명과 탄식을 낸다. 안 진사는 기가 질려 몸을 떤다. 이런 외통수는 처음이었다. 지도교수에게 논문의 허점들을 하나하나 지적당할 때보다 더 몸이 떨려온다.


안 박사는 항상 선동 집회를 열 때마다 일본제국에 대한 공격은 하지 아니하였다. 경찰에 잡혀가지 않고 집회를 계속하려면 그 방법밖에는 없었다. 그는 말 한번 잘못했다가 보안법이나 치안유지법 위반이라며 고문을 수반한 조사를 받고 형무소에서 삶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에 자유가 없고 전제와 억압만 있으며, 중국인들이 그러한 억압을 자본을 무기로 전 세계로 퍼트리려 한다는 주장을 계속해온 그였다. 그의 논리대로라면 자유는 절대적인 가치를 가진 좋은 것이고, 중국의 체제는 헤겔이 비판한 ‘동방적 전제주의’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것은 일본 천황제에도 동일하게 가해질 수 있는 비판이다. 그러나 그것을 입 밖에 낼 수는 없다. 그렇다면 잡혀가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일본과 총독정치를 적극적으로 옹호하지도 않았다. 일본인에 대한 반감을 중국인에 대한 혐오감보다 더 크게 가진 사람이 훨씬 많았다. 그 자리에서 일본을 옹호한다면, 그는 그저 총독부의 어용학자 정도로 인식되어 지금의 인기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이는 와타베 류사부로의 조언이기도 했고 그의 말대로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지금 이 자리에서, 중국인에 대해 그렇게 맹비난을 해 놓고도 천황제를 동등하게 비판하지 않으면 엄청난 모순을 범하게 된다는 것이다. 자신이 절대 그럴 수가 없는데도! 이래서야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에 걸려든 소피스트들의 꼴이 아닌가?


“그대는 왜 천황 목을 치자는 말은 한 마디도 안하면서 이른바 동방적 전제주의를 운운하는 것이오? 천황 또한 중원의 천자에서 나온 말이거늘, 그렇다면 일본 또한 그렇게 쓰기 좋아하는 말인 동방적 전제주의의 또 다른 모습 아니겠소?”


“이······. 일본은 헌법이 있소!”


안 박사가 반격의 단초라 생각하여 내뱉는다. 그러나 그 순간, 오 진사의 차가운 웃음이 그를 맞이한다.


“대체 헌법으로 통치한다는 군주국 어디에서 군주를 현인신으로 받든단 말이오? 흔히들 신은 법 위에 있는 존재로 생각하잖소? 그런데 헌법으로 통치한다며 군주를 신으로 받드는건 아무래도 이상한 소리 아니오?”


“하지만······. 그래도······. 헌법이······”


“됐소. 이 얘기는 여기까지 합시다.”


오 진사가 더 들어줄 필요 없다는 듯 코웃음을 친다.


“그대가 헤겔이라는 사람의 말을 빌려오던 어쨌건 간에 사실 결국 목적은 따로 있으니. 그대의 논변들을 하나하나 반박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걸리고 본질적인 것도 아니오.”


당당한 선비의 오른팔이 앞으로 뻗어나온다. 곧게 뻗친 검지손가락 끝이 연단의 안 박사를 가리킨다.


“그대는 우리 동포들을 오랑캐 수준으로 떨어트리려고 하고 있소! 이 나라에 얼마 되지도 않는 중국인들에 대한 혐오를 부추기며! 이천 삼백만 동포에 비하면 한 줌도 안되는 중국인들이 무슨 거대한 음모를 꾸민 것처럼 꾸며서 말이오! 그러면서 성인 말씀을 모독하고 중국인들을 길거리에서 야만스럽게 죽이는 게 동포를 위한 것이라는 희대의 헛소리를 하고 있소! 여기에 작년에 일어난 그 끔찍한 일을 질타하고 중국인들에게 동포의 죄를 사과하며 군자의 풍모를 보이려 한 사람들을 위선자라는 되도 않는 소리로 매도하고 있소! 이런 상황이 닥쳤을 때 가장 훌륭하게 행동한 사람들에게! 이게 어딜 봐서 사람이 할 짓이오? 이게 어딜 봐서 배웠다는 사람이 할 소리요?”


“다······. 닥치지 못해!”


안 박사가 고함을 질렀으나 이미 오 진사의 입에서는 거센 반말이 나온다. 추상과도 같은 위엄이었다.


“이 한심한 자야! 기미년에 만세 좀 불렀다고 그게 벼슬인 줄 안다고? 그럼 네놈은 만세를 불렀다더냐? 적의 손에 잡힐 각오를 하고 만세를 불렀다더냐?”


“이······. 이!”


안 박사의 눈이 캄캄해진다. 그는 기미년의 그날, 유학 준비에 열심이었다. 일본어를 공부하고 외국 대학 입학에 필요한 도쿄 소재 외국어학교 입시를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런 그에게는 집 밖에서 거세게 들려오는 만세 소리는 그저 공부하는데 시끄럽게 하는 소리에 불과했었다. 학교 선생들과 학생들이 만세를 부르러 길거리에 나왔을 때, 그는 왜 학생의 공부기회를 뺐냐며 투덜댔었다.


그런 그였던 만큼 그때 왜 만세를 부르지 않았냐는 공격에는 어찌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국에 나라를 팔으려 들었다고? 그곳에서 나온 이봉창이 천황을 폭탄으로 날려버리려 하였다! 그 옛날 형가와 고점리와 창해역사가 진시황제에게 그랬던 것처럼! 네놈은 왕의 목을 자른 불란서인들은 자유사상이라 찬양하면서 어찌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해 그런 식으로 말하느냐? 대한민국이 중화민국에서 나왔고 삼균주의가 삼민주의에서 나왔다니 뭐니 하기 전에, 목숨걸고 투쟁할 수나 있느냐? 배를 곪고 어디에 적의 밀정이 있을지 두려우면서도 목숨바쳐 싸워볼 수 있느냐? 정부 사람들은 그렇게 싸우고 있다! 네놈이 여기서 헛소리를 하며 동포들을 오랑캐로 전락시키려 하면서 그곳 사람들을 모독하는 동안에도 그렇게 싸우고 있다! 어디 한번 그럴 수 있다고 대답해 봐라, 이 한심한 놈!”


그 호통에 안 박사는 대답하지 못하였다. 옛날의 자괴감이, 흡사 몇달 동안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을 때의 자괴감이 다시 돌아오는 것 같았다. 그때 어떤 형태나 주의로건 운동을 하러 룸펜 잉여들의 모임에서 사라진 자들은 안 박사에게 지적했다. 왜 이 시대의 지식인으로서 동포를 위해 나서지 않는가? 왜 맨날 자신을 알아주지 않은 사회에 대한 한탄이나 하며 박사학위로 얻은 지식을 썩히고 시간을 죽이고만 있는가? 경찰에 잡혀가는 게 그렇게 두렵나?


그 말에 안 박사는 그저 정치에 관심이 없을 뿐이다, 순수히 학문을 하고 싶어서 그렇다라며 둘러대었지만, 결국 자신이 나약한 룸펜 잉여라, 겁쟁이에 불과해서 그럼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러한 질문이 들어올 때마다 가슴에 칼이 꽂히는 것 같았다.


오 진사의 형형한 눈빛과 손가락은 이제 청중들로 향한다.


“그대들도 마찬가지요! 진정한 적이 광화문 앞에 버티고 있는데 그들이 강하다고 하여 입 다물고 있소! 거기까지라면 좋소! 지금 우리 동포 대다수가 그렇게 살고 있으니! 하지만 거기서 입은 화를 만만한 사람, 자기보다 더 약자을 괴롭히고 죽이자며 푸는건 대체 뭐하는 짓거리요? 이건 금수나 하는 짓이오! 오랑캐들도 이런 짓은 안하오! 다들 부끄러운 줄 아시오!”


오 진사의 손가락이 한번 휘젓고 지나가자, 인텔리 룸펜 중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는 사람들이 일어난다. 그 중 몇 명은 흡사 최면에서 막 깨어난 듯 멍한 표정이다. 내가 여기서 대체 뭘 하고 있냐는 얼굴로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람이 보인다.


그런데 앙칼진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린다.


“꼰대새끼가 까고 있네!”


얼굴이 시뻘개진 계전아 양이었다.


“너 짱꼴라 새끼에게 돈처먹고 이딴 소리 하는 거지? 어? 부끄러운 줄 알라고? 이 절뚝발이 병신 새끼야! 짱꼴라에 나라 팔아먹으려는 니들이나 부끄러워 해, 이 새끼야! 우리가 짱꼴라 처죽이고 착해지게 만들고 싶다는데 왜 참견질이야, 참견질이! 왜 우리 자유를 없애려고 잘나신 도덕군자 소리나 하고 자빠졌는데! ”


그의 사랑이 모독당한 계전아 양의 눈은 증오로 이글거린다. 이때 남편 옆에 있던 한 여사가 매섭게 입을 연다.


“대체 어느 집 아이이기에 이렇게 천박하느냐? 보아하니 말을 그런 식으로 하는게 익숙한 모양인데, 네가 지금 그런 말들을 담았다는 걸 네 부모가 알기는 하느냐?”


“시끄러, 이 꼰대년아! 우리 애미애비는 왜 걸고 늘어지고 지랄이야! 부모 타령 하는 거 보니 진짜 꼰대년이네! 지금 한번 죽어 볼래?”


계전아가 나서자 그녀와 어울리는 껄렁한 남녀들이 일어난다. 이들은 명분이고 논리고 상관 없이 그저 자기들 재미에 훼방을 놓는다면 역정부터 내는 자들이다.


“분위기 엉망으로 만들지 말고 꺼져!”


“우리가 하고 싶다는 데 왜 훈장노릇이야?”


“여기서 대가리 깨져 볼래?”


그러나 이 불량배들은 위협적으로 일어났음에도, 한 여사의 위엄 가득한 “닥치거라!” 한 마디에 순간 움찔한다. 그녀의 태도는 흡사 예전에 잘못을 저지르고도 뻔뻔하게 굴던 여종을 엄하게 꾸짖었을 때의 태도와 같다.


“이 금수같은 것들아! 네놈들은 사람으로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건 생각치도 않고 금수로서 살아가는 것만 원하는구나! 그럴 바에야 산으로 들어가 토굴 파고 살아가거라! 그것이 세상을 위해 더 나을 것일지니!”


“저 미친년이 죽으려고!”


계전아가 악을 쓰며 한 여사의 머리끄댕이를 잡으려 달려들으려 할 때였다.


“여러분! 진정해 주십시오!”


안 박사의 목소리였다. 계속되는 압박감에 호흡까지 곤란해지는 느낌이었던 그를 붙잡는 사람이 있었다. 와타베 류사부로였다.


와타베 또한 이 예상치 못한 선비가 집회를 훼방놓으니 지극히 당황스러웠다. 처음에는 안 박사가 알아서 잘 반박하고 선동을 통해 이들을 압도할 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안 박사가 기가 질리고 저 초로의 부부가 좌중을 압도하는 게 아닌가. 안 박사의 허점인 일본을 비판하지 못함을 정확히 공략하며 말이다. 와타베는 이곳에 있는 부하들을 통해 저들을 끌어내려고도 생각했으나, 그랬다가는 반박하는 사람들의 입을 막는다는 인상을 주게 되어 안 박사의 신뢰성을 떨어트릴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흥분한 분위기를 제어하지 못하여 유혈사태가 일어나는 것도 결코 원치 않는 일이었다.


“지금 난동이 일어나면 안 됩니다. 잘못하다가는 너무 경찰에 눈에 띄어버리게 될 겁니다. 일단 진정 시키고, 후일을 도모합시다.”


안 박사는 이를 악물었다. 생각 같으면 저 망할 늙은이들을 이 자리에서 한꺼번에 린치하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러나 와타베에 말대로 그랬다가 경찰에 끌려가면 더 곤란하다. 결국 즉석에서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우리는 저들을 통해 확인했습니다! 짱꼴라들의 음모가 이렇게 깊음을 말입니다! 그럴싸한 논리로 사람들을 현혹하는 저들이 얼마나 무서운지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들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짱꼴라들과 그들과 결탁한 기득권 세력이 얼마나 사람들을 조종했으면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허, 참!”


오 진사가 코웃음을 치자 안 박사는 애써 무시한다.


“저 사람들은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자기들이 속고 있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분노는 이들을 저렇게 만든 짱꼴라들에게 향해야 하지, 저 불쌍한 사람들에게 향하면 아니 됩니다!”


안 박사는 이 논리로 두 사람을 중국인의 음모에 속은 가련한 사람 정도로 만들어버렸다. 그러나 이미 구사하기에는 너무 늦은 논리이기도 했다. 인텔리 몇 명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하고는 자리를 박차 떠나 버린다. 남은 사람들도 혼란스러운 표정이 되어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는다.


“거 참 말 고맙소! 중국인들에게 놀아난 이 아무개가 무슨 말을 해도 더 소용은 없겠구려!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어쩔 수 없겠소. 그대들의 놀이판에 뛰어든 내가 참 잘못했소이다! 이 자리에서 사과하도록 하겠소!”


오 진사는 그러며 휙 허리를 숙인다. 물론 그 자세에 진지한 미안함은 하나도 들어있지 않다.


“나리. 아무래도 시간만 버린 것 같습니다. 빨리 가시지요.”


한 여사가 한심해 죽겠다는 얼굴로 안 박사를 쏘아보고 한 말이었다. 오 진사는 “그러도록 합시다.” 한 마디를 남기고 뒤로 돌아 지팡이를 앞으로 옮긴다.


계전아와 그 무리들은 그 뒤에 대고 “착한 짱꼴라는 죽은 짱꼴라다!”라고 고함을 지른다. 그러나 앞서만큼의 열기있는 호응이 뒤따르지 않는다.


“애석한 일입니다. 적의 통치에 맞설 생각은 아니하고 중국인 죽이기에만 열을 올리는 자들이라니!”


한 여사가 장탄식을 한다.


“어찌하겠소? 강자에게 당한 울분을 자기보다 더한 약자에게 풀려는 것은 누군가에게나 있는 금수의 마음이라오. 배움과 가르침을 통해 사람을 본연지성으로 이끌 수 있는데, 저들은 그것을 받지 아니하였으니.”


오 진사는 덤덤한 태도로 발걸음을 옮긴다. 하지만 한 여사는 여전히 침통한 표정이다.


“저런 것들도 제 자리에 돌려놓기 힘든데, 그놈은 오죽하겠나이까?”


“그럼에도 해 봐야 하오. 지금만한 기회가 없잖소.”


오 진사는 부인을 달래며 앞으로 나아간다. 둘은 전차를 타고 목적지에서 내린다. 혜화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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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3 313화 +5 22.08.15 266 5 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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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 311화 +2 22.01.31 291 4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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