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선재림 - 03 꽃이 피려면 거름이 필요하다(3)
모두가 입을 다문 가운데, 유성이 홀로 입을 열었다.
“사파 무인에게 뒷돈을 받은 사실이 있습니까?”
총관이 이에 대답했다.
“없다.”
“있다는 뜻이군요.”
“무슨······.”
유성은 귀라도 먹은 듯, 제멋대로 답을 왜곡해 되풀이했다.
“향응을 대접받은 적은요?”
“없······.”
“역시 있군요.”
“지금 뭐 하자는 것이냐, 유성!”
총관 진두홍이 부들부들 대며 소리 질렀다.
자신의 답에는 관심도 없다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에 울컥 화가 난 것이다.
그런 총관을 보고 유성이 고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해합니다. 열등감이 가득 차 가주님을 끌어내리고 당신의 아들을 그 자리에 앉히고 싶었겠지요. 그런데 생각처럼 일이 잘 풀리지 않으니 그 화를 풀 길이 없었을 테고.”
“무슨 헛소리냐!”
“때문에 사파 떨거지에게 뇌물을 받아 그 화도 풀고, 이왕인 김에 진가장의 앞마당을 어지럽히게 해서 가주의 명예를 실추시킬 생각이었겠지.”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조곤조곤 말하자 구경하던 이들이 웅성거렸다.
그럴싸한 추리였기에 의심이 퍼져나갔다.
“하! 어이가 없군. 전부 네 추측일 뿐이지 않으냐?”
“인정할 생각도 없고, 결과를 뒤집을 용기도, 능력도 없으니 할 수 있는 것은 행패뿐. 저열하지 않소? 당신이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저 가주께서 큰 할머님의 배에서 나지 않았다는 점을 위로로 삼는 것뿐이었겠지.”
좌중이 정적에 휩싸였다.
몇몇 사람들에게는 꽤나 모욕적일 말, 문파의 모든 식솔들이 쉬쉬하던 비사가 유성의 입에서 흘러나와 모두의 가슴팍에 박혔다.
총관은 여전히 부들부들 거리고 있었다.
근거라고는 하나도 없는 이야기지만 엄연한 사실이었고, 하나같이 그의 신경을 거스르는 말들이었기 때문이다.
“봉안단주.”
“예, 공자님.”
유성이 얼굴을 붉게 물들인 진두홍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봉안단주에게 말했다.
“외적과 내통해 문파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부를 쌓은 자는 어떻게 해야 하오?”
명백히 총관을 표적으로 한 질문에 봉안단주가 잠시 망설이다가 답했다.
“진가장 소속인 경우 무공을 폐하고 쫓아냅니다.”
“가주의 명예를 더럽히고, 그 자리를 위협하려는 복심을 품은 자는 또 어떻게 해야 하오?”
“외부 세력일 경우 전쟁, 진가장 소속인 경우 무공을 폐하며 근맥을 절단합니다.”
유성이 총관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렇다는데?”
“크아아!”
진두홍이 일순 내력을 터뜨리며 유성에게 달려들었다.
-콰콰콰콰!
휘몰아치는 내력에 크게 바람이 일고, 유성의 옆에 시립해 있던 봉안단주와 소은이 움찔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가공할 기세. 하지만 힘만 세다고 싸움을 이길 수 있는 것이라면, 황소가 늑대를 잡아먹겠지.’
유성은 눈도 깜짝하지 않고 오른손으로 수도(手刀)를 만들며 앞으로 일 보 전진했다.
그리고는 그대로 진두홍의 손목 안쪽에 자신의 수도를 가져다 대었다가 바깥으로 휘둘렀다.
-스슥··· 파앗!
그러자 총관의 살갗이 찢기며 핏물이 터져 나왔다.
“으아악!”
“절정 고수의 내력을 가졌는데 이 한 수를 피하지 못하다니. 숙부도 공부가 참 부족하오.”
“네놈이 감히! 크아앗!”
고통에 겨운 소리를 지르던 진두홍은, 그나마 멀쩡한 왼 주먹을 치켜들고 다시 유성을 덮치려 들었다.
유성은 이번에는 오른발을 옆으로 뻗었다가 앞쪽으로 땅을 그으며 휘둘러 곡선을 그리며 허리를 살짝 숙여 공격을 피해 내고는, 다시 왼발을 당겨 총관의 후방을 점했다.
선 자리에서 순간 흔들리는 움직임에 진두홍은 헛손질을 하고 말았다.
-휘익!
무게중심을 움직이고 전신의 근육을 통제하는 능력이 신기에 다다른 유성이 백화보(百花步)를 펼친 것이다.
그리고 바로 무릎을 굽히며 오른손을 사선으로 휘둘러 진두홍의 오금을 갈랐다.
-촤악!
“끄아아!”
“경험도 없고, 이해도 모자라오. 그냥 피하고 휘둘렀을 뿐이잖소? 오묘한 이치를 가진 절초도 아니고.”
“진, 진유성!”
“스스로 강하다고 생각했소? 다른 이들을 속이고, 해를 입혀도 괜찮을 만큼? 천만에. 당신은 널리고 널린 무림의 소인배, 빈 수레 중 하나일 뿐이야.”
“네놈, 이 천한 핏줄의 놈이 진가의 적손에게!”
“적손이라는 그 감투가 당신이 강하다는 증명이라도 되나?”
-피식.
발악하는 총관의 모습에, 유성이 실소를 흘렸다.
내공의 양, 지닌 바 힘 따위에 집착하던 자신을 일깨워 준 친구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진정 강한 자는 검강지경(劍剛之境)에 다다른 자도, 천의무봉(天衣無縫)의 경지에 오른 자도 아니야. 스스로를 이겨 낸 자다. 물론 당신은 끝까지 모를 테지. 알고 싶어 하지도 않으니.”
말을 마친 그는 잽싸게 손가락을 놀려 진두홍의 등허리를 밟았다.
순간 흘러든 유성의 정순한 내력이 은밀히 모여들던 진두홍의 내력을 그대로 흩어 버렸다.
“커헉···.”
총관은 오른 팔과 왼 다리가 베여 움직일 수 없게 되어 바닥에 엎드렸다.
유성은 피를 줄줄 흘리며 지껄이는 총관에게 눈길도 주지 않으며 입을 열었다.
“접밀당주와 원목대주는 순순히 인정하는가?”
“······예.”
그들은 같은 질문에 이미 한번 부정했으나, 총관을 가뿐하게 제압하는 모습을 보고 바짝 얼어 순순히 자백했다.
‘원목대주 장청은 팽가와의 싸움에서 나름 활약했던 무인. 그런 자가 이리 쉽게 제압되다니···. 긴 평화가 오히려 독이 되었구나.’
그들은 구란파(九瀾派)와의 관계에 대해 상세하게 실토하였다.
접밀당은 총관의 지시에 따라 식당에 가야 할 물자와 인근에 풀릴 구휼미 등을 빼돌려 팔았으며, 원목대는 마을에서 설치는 구란파 무인들을 눈감아 주었다는 이야기였다.
“봉안단주.”
“네.”
“이 셋을 당장 끌고 가서 뇌옥에 처넣으시오.”
“네, 공자님.”
유성이 봉안단주를 시켜 총관과 접밀당주, 원목대주를 끌어내고, 일이 모두 마무리되는 듯싶었다.
“접밀당원, 원목대원들 중 관련된 자는 당장 나오라.”
약간 안심하는 기색을 보이던 이들이 바짝 얼어붙었다.
“지금 자백한다면 그 징벌에 있어 사정을 봐줄 것이나, 끝까지 죄를 숨기려 든다면 가차 없이 파문이다.”
조용했다.
잠깐 지켜보며 입을 다물고 있던 유성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다시 말했다.
“소은, 단단한 몽둥이 하나를 가져오거라.”
“네? 네, 도련님.”
소은이 종종대며 걸음을 놀려 사라지고, 모두가 의문에 빠졌다.
그리고 곧, 공자 진유성이 무슨 뜻으로 그런 명을 내렸는지가 밝혀졌다.
“접밀당원과 원목대원 모두 차례로 나와 엎드리도록.”
“예?”
“내 신통한 재주가 있는데, 몽둥이찜질을 하다 보면 거짓말쟁이를 구분할 수 있지.”
“예?”
“어서 걸음을 놀려 나와 엎드리도록 하라. 만일 오늘 끄나풀들을 다 잡아내지 못한다면, 내일 다시 할 것이다. 내일도 잡지 못하면 모레도. 난 끝까지 할 생각이다.”
장원이 공포에 짓눌렸다. 이건 자신이 원하는 답을 얻을 때까지 화풀이나 하겠다는 뜻이 아닌가?
“고, 공자님······.”
“혹시 모르지. 두들겨 맞다가 열 받은 몇몇이 자신이 본 사실을 밀고할 수도.”
유성이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말했다.
모든 이들이 몸을 바르르 떨었다.
“도련님, 가져왔습니다.”
“오, 도구가 왔군. 접밀당부터 시작하지. 나와.”
유성의 호된 매질은 밤까지 계속되었다.
얻어맞는 이들은 어째서 가주가 나와 사정을 묻지 않는지, 어째서 누구는 덜 맞고 누구는 더 맞는지 따위를 알 겨를이 없었다.
그저 엉덩이를 부여잡고 흐느적거릴 뿐이었다.
다음 날, 구란파와 내통한 문파원 여섯이 추가로 잡히고 나서야 무거웠던 분위기는 풀어졌다.
“다 계획한 것이더냐?”
“네.”
진유성과 진훤이 집무실에 앉아 대화를 나누었다.
둘 사이의 탁상 위에 놓인 찻잔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내통자를 어찌 알고?”
“소은이를 통해 아버님의 비선을 빌렸습니다. 이미 명단은 확보한 상태였고, 세 머리를 잡았을 때 과하게 긴장하는 자를 찾으니 과연 일치하더군요.”
“호오. 확실히 확인했다는 뜻이로구나. 그럼 그놈들만 솎아낼 것이지, 다른 이들은 왜 때렸느냐?”
진훤이 연속해서 질문했다.
“한통속이 아닌 이들도 그 성정을 고칠 필요가 있었습니다.”
“성정?”
“네. 그들도 상관이 그릇된 일을 하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겁니다. 명에 의해 억지로 동참했을 수도, 그저 자기 일이 아니라고 눈 감았을 수도 있지요.”
“그래서?”
“제 잘못 정도는 알아야지요. 남 먹을 것을 훔쳐 팔고, 억울한 이들을 외면한 일. 그것이 못된 일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려 했습니다.”
“그렇구나.”
진훤은 아들의 섣부른 일처리를 질책하려 불렀으나, 되려 감탄하게 되었다.
그 신속함과 과감함, 단순 가담자에 대한 처벌까지. 일문을 이끄는 대표자가 되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다만 아쉬운 것은, 굳이 사실을 밝히지 않고 고변을 독촉하듯 매질을 해 오해를 산 것이지만, 손발처럼 다뤄야 할 문도들에게 두려움을 품게 하는 것 역시 나쁜 일은 아니었다.
“그래, 총관과 둘은 어찌 처리할 셈이냐?”
“규율대로 무공을 폐하고 추방해야 할 것입니다.”
“총관이 네 혈족인데도?”
“예외는 있어선 안 됩니다. 신상필벌. 그래야만 모두의 신뢰를 얻을 수 있습니다.”
어차피 그대로 두었다간 큰 분란을 일으킬 인물.
유성은 그들을 미리 치워 버리고자 했다.
“그래. 네 뜻대로 하마.”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총관과 접밀당주, 원목대주가 추방되었고 여섯 명의 내통자가 뇌옥에 갇혔다.
한껏 피바람이 불까 많은 이들이 걱정했으나, 다행히도 다른 조직들의 비리며 악행은 밝혀진 바가 없어 사건이 종결되었다.
“이 공자님께서 소가주가 되신다지?”
“아 그래서 이번 일을 통째로 맡긴 것이 아닌가, 가주께서.”
훌륭하게 사건을 처리한 유성이 소가주로 확정된다는 소문도 돌았다.
이에 따라 그 걸림돌인 진유돈은 불편한 시선을 받게 되었다.
“저 작자가 소가주 후보로 언급되던 인간이기도 한데···.”
“그 아비가 사파와 내통한 반역자이니 또 모르지.”
그는 죄를 뒤집어쓰고 파문당하지는 않는 대신, 숭산으로 향하게 되었다.
대문파 소림의 속가 제자가 된 것이다.
죄인의 아들로, 문파에서 쫓겨나는 신세치고는 썩 괜찮은 처사였다.
“네 아비의 죄로 너까지 벌하진 않겠다. 그러니 너도 그 일로 본가에 한을 품지 않았으면 하는구나.”
“······.”
“네 자질은 훌륭하나, 그 근성과 심성이 자질을 따르지 못하니, 소림에 가거든 정신의 단련에 더 힘을 쏟거라.”
“······.”
가주의 지엄한 명에 대답할 힘을 잃은 채 남서쪽으로 향하는 모습이 퍽 처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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