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마왕 회사원이 되다 (3).
점심시간이 끝나고 오후 일과가 시작되었다.
부서원들이 저마다의 일로 바쁘기 시작했지만 규원은 여전히 여유로웠다.
의자에 앉아 팔짱을 끼고 눈을 감고 있는 규원의 모습은 누가봐도 일을 하지 않고 잠을 자는 모습이었지만,부서내 누구도 그것을 알지 못했다.
환영마법의 효과로 인해 그들이 한번씩 고개를 돌려 규원을 확인한다면,지금 규원은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현혹마법으로 인해 모두들 각자가 원하는 규원의 모습을 볼 수 있었기에 지금 사무실내 규원을 바라보는 분위기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단 한사람 정 대리를 제외하고 말이다.
정 대리는 자신에게 쌓이는 일거리에 스트레스를 받고있었다.
“이봐,정 대리.”
“네.과장님.”
“오전에 마무리해야할 서류 어떻게 됐나?”
“네?아,5분만 주십시오.마무리 단계입니다.”
“아직?”
“죄송합니다.서둘러 보내 드리겠습니다.”
강과장의 일 재촉은 물론,
“정대리님.싱가포르에 J사에서 전화왔어요.돌려드릴게요.”
“J사요?”
“네.화가 많이 난거같은데...지금 돌릴게요.”
외국에서는 컴플레인(complain) 전화까지 걸려왔다.
그것으로도 부족해 정대리가 해야 할 일은 더 쌓이고 있었다.
쌓여가는 일거리에 정 대리는 규원을 힐끔 쳐다보았다.
평소였다면 자신이 부탁하지 않아도 먼저 나서서 도와준다고 했을 규원이었지만,오늘은 아무말 없이 자신의 일만 처리하고있었다.
사실 그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규원도 자신의 일을 해야했고,정 대리 역시 자신의 일은 자신이 처리해야 하는 것이 맞는일.
하지만 지금 정대리는 자신의 일을 도와주지 않는 규원이 원망스러웠다.
급기야,
“야 정 대리!아직 멀었어?지금 부장님께 보고하러 가야된다고!”
결국 강 과장이 사무실에서 큰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거기다 싱가폴에서는 계속 전화가 걸려왔고,일은 계속 쌓이고 있었다.
말 그대로 일에 파묻힌다는 느낌이 든 정 대리가 결국 규원의 자리로 걸어갔다.
“이 대리님.이것 좀 대신 처리해 주시면 안됩니까?”
정 대리가 규원에게 가져간 일자리는 바로 자신에게 컴플레인이 들어온 싱가폴건이었다.
싱가폴의 컴플레인은 누가봐도 정 대리의 잘못이었다.
이게 문제가 커진다면,퇴사까진 아니라도 감봉은 불보듯 뻔한일.
정 대리는 자기가 저지른 일이지만,불똥이 자신에게 튀기 전에 규원에게 떠넘기려 하는 것이다.
그가 지금껏 봐온 규원은 호구중에 호구였으니까 거절하지 못하리라.
그래도 자기딴에는 그나마 양심이 남아있다고 생각하고있었다.
‘아,오늘 진짜 일진 사납네.싱가폴 건만 아니었음 일 전부 떠넘기는건데.뭐.그래도 큰거 하나만 떠넘겼으니까 나도 양심은 아직 남아있지?’
그러나 오늘의 규원은 평소 그가 알던 규원이 아니었다.
“내가 왜 그래야하지?”
“네?”
정 대리는 예상 못한 답변에 벙찌고 말았다.
원래였다면,
“그래?무슨일인데?아 이건 좀 어려운데...일단 가져와봐.”
라고 답해야했을 규원이 지금은 냉랭한 표정으로 답하고 있는 것이다.
순간 할 말을 찾지 못한 정 대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잘못들은것이라 여기고 같은 말을 조금 강한어조로 다시 반복하는 것 뿐이었다.
“이 대리님.이게 싱가폴 건인데...이것 좀 처리해주세요.”
“그러니까 내가 왜 그래야하지?”
“그게 원래는 대리님이 도와주셨지 않습니까?그러니까 좀 해주세요.”
평소였다면 여기까지 갈 일도 없었겠지만,또 부서원들이 신경쓰지도 않았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현혹마법의 효과로 인해 부서원들이 모두 규원의 호감이 극에 달해있었고,정 대리가 규원에게 자리를 옮기자 거의 모두라고 해도 좋을만큼 규원과 정대리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거기다 아직까지도 현혹마법은 그대로 이어지고 있었고,둘의 대화는 부서원들에게 이렇게 들려지고 있었다.
“이대리님.이것 좀 대신 처리해 주시면 안됩니까?”
- 아.정대리?미안한데 나도 좀 일이 밀려있어서...다음에 도와주면 안될까?정말 미안해.
“네?”
- 미안해.정 대리.
“이 대리님.이게 싱가폴 건인데...이것 좀 처리해주세요.”
- 하아.진짜 미안해.나도 좀 바빠서...
“그게 원래는 대리님이 도와주셨지 않습니까?그러니까 좀 해주세요.”
라고 각색된 이야기가 들려왔다.
때문에 규원에게 이성으로써의 호감을 보이던 여직원은 물론 중앙에 위치한 자리를 지키고 있던 강 과장 마저 정 대리를 보는 눈이 곱지 않았다.
“이봐.정대리!무슨일이야?”
“네?아 과장님.그게...”
강 과장의 말에 정 대리가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하자 처음 싱가폴에서 전화를 받은 여직원이 대뜸 입을열었다.
“과장님.그게요.싱가폴에서 컴플레인 전화가 걸려왔었어요.”
그 말로 대충 상황을 이해한 강과장이 성질을 냈다.
“정 대리.싱가폴건 지금 당장 내 자리로 가지고 와.”
“네?”
“지금 손에 든게 싱가폴건 문서지?당장 가지고 와!”
“그,과장님.그게...”
“어쭈?이제 이 대리 뿐만아니라 나도 무시해?”
“아,아닙니다.지금 당장 가겠습니다.”
정 대리는 지금 미칠것만 같았다.
평소 규원을 먼지처럼 여기던 사람들이 갑자기 모두 한마음이 되어서 자신을 욕하고 있었다.
거기다 자신이 마음에 두고 있었던 여직원 마저도 지금 자신의 일을 일러바치고...
병신처럼 여기던 규원은 잘됐다는 표정(사실은 무표정했지만,정대리가 느끼기엔 놀리는 것으로 느껴졌다.)으로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지금 정 대리의 심정은 단 한마디로 정리될수 있었다.
‘씨발.좆같네.’
결국 한바탕 크게 혼이난 정 대리는 오늘 내로 싱가폴건을 무조건 마무리하겠다는 말로 강 과장의 쓴소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당연히 기분은 최악이었다.
문제는 싱가폴건을 처리해도 아직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그 상황을 아는지 강과장이 부서 내 사람들이 모두 들으라는 듯 큰소리로 외쳤다.
“오늘 정 대리 일 도와주는 직원은 한달간 야근이다.도와주면 알아서 해!그리고 정대리는 내일 아침 출근 전까지 오늘 자네 일 모두 마무리하고 나한테 보고해.알겠어?”
강과장의 말은 밤을 새서라도 모든일을 마무리 지으라는 것이었다.
당연히 정 대리는 침울한 표정으로 모니터만 볼 수 밖에 없었다.
집중하지 않는다면 밤을 세우더라도 모두 일을 처리하지 못할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정 대리의 귓가로 자신이 마음에 두고있던 여직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대리님.많이 놀라셨죠?제 마음이 듬뿍 담긴 커피에요.드시고 힘내세요.아자아자!”
“......”
정 대리의 기분이 더 더러워졌다.
* * *
혜원은 지난 주말을 포함해 월요일인 오늘까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아니 그녀가 한 일이 있긴 있었다.
꺼져있는 남편 규원의 휴대폰을 하염없이 전화하는 것.
거의 사흘을 굶은 그녀는 헬쑥하다 못해 창백한 표정이었지만,그녀는 지금 그런 것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던 차에 정 대리의 문자가 도착했다.
[혜원아.점심시간인데 우리 점심이나 먹을까?내가 자기 집으로 갈게.]
헤원은 그 문자를 확인하자마자 휴대폰을 잡아 던져버렸다.
저 악마같은 남자 때문에 자신의 결혼생활이 망쳐져 버린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그와 함께한 시간들을 모조리 도려내버리고 싶은 혜원이었다.
그리고 그가 문자한 저 휴대폰 마저도 부숴버리고 싶을 정도로 더러웠다.
그러다 울리는 휴대폰 벨소리에 서둘러 달려가는 혜원이었지만,전화의 주인공은 지금 그녀가 증오해 마지않는 정 대리의 이름이었다.
받아서 욕을 해버릴까 싶은 혜원이었지만,어차피 그의 유혹에 넘어간 것은 자신이었기에 벨소리를 무음으로 바꾸고 전화를 뒤집어버렸다.
그리고 지난 이틀간 그래왔듯이 양 무릎사이에 얼굴을 파묻어 버렸다.
지금 그녀의 머리에는 많은 생각이 교차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많은 것들중...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혜원에게는 너무 우울한 오후였다.
* * *
중간계에 타 차원의 침범의 징조가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서양.깊은 바닷속 안.
지구상에는 존재하지 않을 생물이 바닷속 물고기들을 말 그대로 학살을 하기 시작했다.
영화로 유명해진 백상어리도 아무것도 하지못하고 죽어나갔고,그것을 시작으로 대서양 바닷속 생명체들은 모두 죽어나가고 있었다.
그 사실은 아직은 인류에게는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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