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마왕 회사원이 되다 (4).
그날 저녁 자신과 함께 밥을 먹고싶다는 여직원들의 손길을 사양(여직원의 입장에서,실제로는 무시했다.)하며,규원은 지렌이 이끄는 곳으로 이동했다.
L호텔.스위트 룸.
지렌은 지난 새벽 마계에서 굴러다니는 돌멩이 중 하나인 다이아몬드를 지구 반대편인 미국으로 넘어가 비싼 값을 받고 팔아버리고 그 막대한 돈으로 한달 동안 L호텔 스위트 룸을 잡아버렸다.
오늘 아침까지 있었던 싸구려 모텔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넒고 화려했지만 그래도 지렌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죄송합니다.이 정도의 방이 현재로써는 가장 좋은 방입니다.”
“되었다.”
규원은 짧게 대답을 한 후 침대에 몸을 뉘었다.
천년전 자신이 했던 일을 하면 어떤 느낌이 드는지 궁금해서 시작한 일이었지만,아무 의미가 없었다.
‘지렌...때문인가?’
그도 그럴것이 규원이 한 일이라고는 점심식사를 하기위해 걸음을 옮긴 것이 전부였다.
규원의 업무는 지렌이 대신 다 처리했고,자신은 그저 명상을 하며 시간을 때운 것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규원은 고개를 저었다.
딱히 지렌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하긴.요즘에는 뭐든지 다 허무했었지. 때문에 신이 되면 나아질까 싶어서 신의 경지로 오르기 위해 중간계로 온 것이긴 하지만.’
절대자의 고독.
규원은 지금 그것을 겪고있었다.
마계에서도 자신의 상대는 단 3명.
하지만 아무리 규원이라도 그들을 상대 할 수는 없었다.
마계의 평화를 위해 아이러니하게도 마왕들 중 먼저 싸움을 건다면,나머지 마왕들이 공격을 당한 마왕과 힘을 합해 싸움을 건 마왕을 처단한다는 이상한 규약이 있는 것이었다.
때문에 규원은 그들과 전투를 할 수 없었다.
그렇게되자 규원은 허무해졌다.
마왕을 제외하면 넓디넓은 마계에서 자신을 상대할 수 있는 마족이 단 한명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타 차원의 침범으로인해 몸을 조금 풀기는 했지만,그것도 그때 뿐.
규원은 지금 지독한 고독감에 몸서리를 치고있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던게...언제였었지?’
전대 마왕을 쓰러뜨렸을 때 였나?
라고 작게 중얼거린 규원이 곧 고개를 저었다.
그때 역시 그리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았던 것 같았다.
아니면 신을 만났을 때?
그때도 아니었다.
규원은 자신이 마지막으로 가슴이 두근거렸을때를 되짚어보다 그대로 눈을 감았다.
* * *
다음날.
회사에 출근한 규원은 아침부터 소집된 부서회의에 참석하게 되었다.
“오늘 우리 부서에 회장님의 손녀가 견습으로 들어오실 예정이다.”
해외영업부의 부장 김우현의 말에 강 과장이 미간을 찌푸렸다.
“또 말입니까?”
“또라니?우리 회장님 손녀가 또 있었나?”
“그게 아닌거 아시잖습니까?부장님.기억 안나십니까?재작년인가에 회장님 손자분이 오셔서 부서가 없어질뻔한거.”
재작년.
회장의 손자라는 타이틀을 달고 처음 들어온 남자는 그 타이틀에 따라 과장의 직책을 달고 들어왔었다.
과장이라는 직책은 분명 높은 직급이었지만 임원이 아니었다.
그 말은 곧 현장에서 일을 해야하는 사람이라는 말이었다.
그런 자리에 갓 대학을 졸업한 회장의 손자가 자리를 차지했고,단 한달만에 실적이 반토막이 되어버렸다.
뿐만아니라 외국에서 찾아온 바이어를 접대하다 술먹고 난동을 부려 5천만불짜리 계약이 물건너가버린 일도 있었다.
그때를 생각하자 강 과장은 물론 김 부장 역시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잊겠나?내 수명이 10년은 줄어들었을텐데.”
“그러니까요.이제 겨우 우리 부서가 다시 성과를 올리고 있는데...또 그런일이 벌어지면...에휴.”
김 부장과 강 과장의 대화에 해외영업부의 거의 모든 직원들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그나마 표정변화가 없는 것은 그때 당시에 자리에 없었던 지훈과 그때의 기억이 없는 규원 정도였을 뿐 모두가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는 듯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를 읽은 강과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부장님.왜 하필 또 우리입니까?우리와 업무가 비슷한 국내 영업부도 있지 않습니까?”
“허참.강과장 계속 이럴건가?내가 무슨 힘이 있겠나?나 역시 자네들과 같이 지시를 받는 입장인데.”
김부장의 말에 강과장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예전과는 다를거야.우선 회장님의 손녀의 직급은 사원으로 정해졌고,거기다 회장님의 손녀는 하버드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재원(才媛)이야.그러니 강 과장 자네가 잘 다독거리면서 업무를 진행하게.”
“하아.”
김 부장의 말에도 강 과장은 물론 부서원들의 표정은 풀리질 않았다.
사기가 크게 떨어진 상황.
하지만 다음 이어진 김부장의 말에 모두들 조금이나마 표정이 밝아졌다.
“그리고 이번에 회장님의 특별지시로 우리부서만 성과금이 나온다.”
“성과금이요?”
“그래.회장님도 그때 기억을 하고 계시네.자네들이 고생했다는 것을 말일세.이번에 두둑히 챙겨주신다니 그리 알고 있도록하게.이만 회의는 마치지.강 과장은 더 할 말 있으면 하고 나오게.나는 임원급 회의가 있어서 말일세.”
“네.알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김 부장이 회의실에서 나갔고,강과장과 다른 부서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김 부장에게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김 부장이 완전히 나가고 김 부장이 앉았던 자리에 강 과장이 앉으며 한숨을 쉬었다.
“하아.진짜 하루하루가 스펙터클하네.”
강 과장의 한숨을 시작으로 저마다 불평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금세 회의실은 도떼기 시장마냥 시끄러워 졌고,강 과장이 책상을 한번 두드리며 주위를 환기 시켰다.
“그나저나 회장님 손녀는 누가 담당할거지?”
강 과장은 말을 하며 부서원들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모두들 강 과장을 눈길을 피하기 바빴다.
결국 강 과장이 직원들을 하나하나 호명하기 시작했다.
시작은 부서내 막내.지훈이었다.
“지훈이.이제 업무 대충 다 파악했지?너도 이제 후배 받아야지.”
강 과장의 말에 지훈이 내심 혀를 내둘렀다.
‘그게 후임이야?선임보다 더 무섭겠구만.잘못하다간 내 모가지 날라가겠다.’
“아,아닙니다.아직 많이 모자랍니다.더 배워야합니다.”
지훈의 말에 강 과장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지훈의 말대로 아직 지훈이 신입을 담당하기엔 경력이 너무 짧았다.
그러다 강 과장이 부서내의 여직원들을 보았다.
“주란씨는 어때?”
“에효.과장님.말도 마세요.요즘 우리 죽을 맛이에요.해외에서 어찌나 전화가 많이 걸려오는지.그치 서형씨?”
“네.과장님.저희 안그래도 요즘 너무 힘들어요.집에가면 바로 뻗어버린다니까요?이 상황에서 신입 교육까지 하면 정말 죽어요.”
강 과장이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들이 약간 과장되게 말을 하긴 했지만,요즘 해외쪽에서 일이 많아 이것저것 요구하는 전화가 많이 들어오기는 했기 때문이었다.
강과장은 이번에는 어제부터 말썽을 일으킨 정 대리를 쳐다보았다.
어제 밤새 업무를 한 것인지 다크써클이 턱밑까지 내려않아있고,머리엔 떡이져있는 정 대리였다.
“정 대리?”
“과장님.저 지훈이 하나만으로도 벅찹니다.거기다 과장님도 아시잖습니까?저 요즘 일에 치여산다는것을요.”
겨우 하루 일이 많았을 뿐인데,능청스럽게 말하는 정 대리 였다.
그런 정 대리에게 무언가 한마디를 더 꺼내려다,일을 영악하게 하는 정 대리에게 회장님의 손녀를 붙여주면 일이 더 심각해질 것 같은 느낌이 든 강 과장이 결국 선택한 것은 규원이었다.
“이 대리.”
“......”
“자네가 맡아주게.”
“......”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규원이었지만,정 대리를 뺀 나머지 직원들은 역시 하는 표정으로 규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당분간 이 대리 업무 중 절반은 정 대리 자네가 맡게.”
“네?”
“허허.잊었나?우리 부서에서 가장 업무량이 많은 것이 이 대리라는걸?아무리 이 대리라도 자신의 업무를 다 소화하고 신입을 교육하기엔 힘들것이야.”
1년전.지훈이 신입사원으로 들어왔을 때 교육의 문제로 그때도 규원에게 더 마음이 갔던 강 과장이었다.
업무를 영악하게 하는 정 대리와는 다르게 언제나 정론으로 일을 진행하는 규원이었기에 신입 교육을 시키기에 적격인 인물이 규원이었다.
하지만 당시에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바로 업무량.
지금도 그때와 다르지 않게 많은 업무를 전담하고 있는 규원이었지만,어제부터 계속 영악한 행동을 하는 정 대리가 꼴보기 싫었던 강 과장이 규원의 업무 절반을 정 대리에게 안겨버리고 만 것이다.
그리고 강과장의 결정을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지만,단 한사람 정 대리는 달랐다.
“하,하지만...”
“아아.그만.그리고 다른 부서원들이 정 대리를 조금 도와주게.”
더이상 정 대리의 말을 듣기싫었던 강 과장이 정 대리의 말을 끊었고,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부서원 모두가 한 입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그들이 정 대리를 도울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들 역시 많은 업무량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똥씹은 얼굴을 한 것은 정 대리.단 한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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