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이런 것이 행복이라는 것이구나.
해질녘이었다.
부산에서 마련해 준 최고급 호텔의 스위트 룸에 규원과 혜원은 물론 다른 일행까지 모두 모였다.
규원은 일행들을 하나씩 바라보다,자이란과 정소이에게서 시선을 멈추웠다.
“자이란.”
“네.왕이시여.”
“네가 왜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
단순한 규원의 말이었음에도 자이란은 고개를 숙인 채 몸을 떨고 있었다.
한순간에 방안의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답을 하라.”
“그건...”
자이란이 대답하려는 찰나,정소이가 나섰다.
“이 대리님.”
“......”
“이분은 제 스승님이신데요?”
왕의 말을 끊는 것은 왕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 만큼이나 중죄다.
하지만 정소이는 그것을 모른 채 계속 말을 이었다.
“화나셨어요?왜요?뭐 때문에요?”
점점 더 왕에게 무례한 상황.결국 보다못한 루아가 나섰다.
“왕이시여.”
“...루아.”
“네.”
“나는 너에게 나서라 한 적이 없다.”
“죄,죄송합니다.”
결국 루아는 아무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
규원의 시선은 아직 자이란에게 향해있었다.
“스승이라...”
규원이 작게 한 말에 자이란이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죄송합니다.벌을 주신다면 달게 받겠습니다.”
“아니에요.스승님이 무슨 잘못을 했다고...”
“소이야.나는 왕의 명령으로 이곳에 온 것이다.헌데 저분이 나에게 하달한 명령은 너의 스승이 아니었단다.”
“......”
자이란의 말에 정소이가 간절한 눈빛으로 규원을 바라보았지만,규원은 그녀에게 일절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리고 규원의 입이 다시 열렸다.
“벌이라...그래.무슨 벌을 원하는 것이지?”
“어떤 벌이라도 감당하겠나이다.”
목숨까지 잃을 각오를 한 자이란의 눈엔 단호함이 보였다.하지만 규원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자이란.”
“네.왕이시여.”
“내 너에게 무슨 명령을 전달했는가?”
“은신을 하고,정소이를 지키라 하셨습니다.”
“너는 정소이를 지키지 못하였는가?”
규원의 말에 정소이가 펄쩍 뛰었다.
“아니에요!스승님이 없으셨으면 전 분명 벌써 죽었을거예요!”
“...그렇다는군.”
규원의 한마디에 살짝 밝아진 표정의 정소이가 반색했다.
“그렇다면.”
하지만 아직 규원의 말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허나 자이란.”
“네.왕이시여.”
“너는 내 명을 하나는 지키지 못했다.인정하는가?”
“인정하나이다.”
“그렇다면 내 너에게 벌을 내리겠다.”
규원의 말에 루아는 침을 삼켰고,정소이는 울상으로 변했다.그리고 다시 규원이 입을 열었다.
“너에게 내리는 벌은...”
규원의 뒷 말은 자이란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들을 수 없었다.
- 너의 목숨을 바쳐서 내 딸이 될 아이를 보필하라.할수있겠느냐?이것도 지킬 수 없다면 내 직접 너의 목을 베리라.
전음(傳音) 따위가 아니었다.마왕의 ‘의지’가 자이란에게 직접 전달된 것이었다.
규원의 의지에 자이란이 크게 절을 하며 대답했다.
“제 목숨을 다바쳐서.왕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그렇다면 되었다.”
그 말을 끝으로 규원은 혜원과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규원이 방으로 들어가고,루아는 한달음에 자이란의 앞으로 달려갔다.
“다행이다.자이란.”
“그러게.”
“정말 많이 변하셨다니까.그렇지 않아?”
“음.확실히.”
루아와 자이란의 대화에 정소이가 끼어 든다.
“와 근데,이대리님.카리스마가...쫄려서 죽을뻔 했어요.”
왕을 앞에 두고 정소이처럼 이야기 할 수 있는자가 얼마나 될까?
물론 자신의 딸이 될 아이이기에 ‘기세’를 조정했겠지만 그럼에도 그것을 견뎌낸 정소이는 확실히 강해지고 있었다.
그것을 아는 자이란은 그저 미소를 지으며 정소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강해졌구나.하지만 아직 멀었단다.”
“네?뭐가요?”
자이란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은 정소이가 다시 물었지만,자이란은 그저 미소를 지을 뿐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지켜본 지렌이 헛기침을 하며 주위를 끌었다.
“험.험.”
하지만 루아는 물론 자이란과 정소이 까지도 지렌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결국 지렌이 입을 열었다.
“루아.”
“왜요?”
“너는 아비가 왔는데 인사도 안하느냐?”
“흥!아빠가 어디가서 당할 위인도 아닌데 내가 왜?”
“...후우.너와는 대화가 많이 필요하겠구나.”
“흥!또 검을 놓으란 소리하려고 그러는 거면 됐어요.”
부녀지간의 싸움이 되려 할 때 였다.
지렌의 뒤에서 엄마 품에 있던 예원의 작은 말이 방안 모두에게 들렸다.
“엄마,엄마.나 이제 이야기 해도 돼?”
순간 방안의 모든 시선이 예원에게 집중 되었다.
아직 어린나이임에도 모두들 자신을 쳐다본다는 것을 알았음일까?
예원은 엄마의 품에서 벗어나 당당히 섰다.
그리고,
“안녕하세요.저는 기장 유치원 햇님 반 최예원입니다.”
몇 시간전,규원과 지렌에게 그랫듯,책을 읽는 듯한 목소리로 인사를 한 예원은 배꼽인사를 시전했다.
예원의 그 귀엽고 깜찍한 모습에 루아의 눈이 동그래 졌다.
자연히 아버지인 지렌과의 싸움을 잊어버린 루아의 눈동자엔 자그마한 아이의 모습이 담겨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자이란과 정소이도 마찬가지였다.
한순간에 무시당한 지렌이 혀를 차다,앙증맞게 손가락을 입에 물고 자신을 쳐다보는 예원의 모습에 그도 그만 미소를 짓고 말았다.
예원 덕분에 훈훈해진 분위기를 이용해 서로를 소개하는 시간을 갖게 된 사람들과 마족들.
그렇게 하루가 또 지나가고 있었다.
* * *
방에 들어선 규원과 혜원.
특히 혜원은 행복한 미소를 가득 머금고 있었다.
“오빠.”
“......”
“뭐 때문인지는 몰라도 잘했어요.”
“뭐가 말인가?”
“자이란 언니요.안 그래도 루아 언니가 걱정 많이 하던 것 같은데.”
“언니라...”
혜원에게 감히 언니라 불릴 정도의 존재가 있던가?
그런 생각에 규원의 미간이 살짝 찌푸러졌다.
그 모습을 본 혜원이 규원의 찌푸러진 이마에 키스를 퍼부었다.
“뭐야!누가 또 우리 오빠 인상을 쓰게 만든거야?에잇!쪽.쪽.”
혜원의 애교섞인 애정공세에 결국 규원이 픽하고 미소지었다.
규원의 기분이 풀린 듯 하자 혜원이 다시 입을 열었다.
“오빠.루아 언니랑 자이란 언니가 없었다면 오빠가 없는 시간을 견디지 못했을거에요.그리고 왕비라는 거에 아직 자각도 없을뿐더러 설령 자각이 있어도 언니들 만큼은 제가 부르고 싶은대로 부르게 해줘요.”
“...혜원아.”
“알겠죠?또 그 일로 막 인상쓰고 그러면...”
“그러면?”
“확 뽀뽀해 버릴거야.”
“하하하하.”
결국 웃음을 터뜨린 규원이 혜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마치 고양이처럼 규원의 품에 안겨든 혜원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근데 오빠.소이는 왜 그렇게 챙겨요?”“...나중에 설명해주마.”
“치.맨날 나중이래.알았어요.근데요.오빠.”
“......”
“나 이제 스킬도 막 쓸 수 있어요.”
“스킬?”
“응.‘왕비의 호위병’이라는 스킬인데,조금만 더 있음 세명도 소환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
“응.그래서 호위병들을 지금 루아 언니가 훈련시켜주고 있어요.루아 언니가 훈련시킬 때 표정 본 적 있어요?막 눈이 이렇게 치켜올라가요.헤헤.”
규원의 품에서 혜원은 지난 일주일간 있었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모두 이야기를 했고,규원은 자신의 품에서 재잘거리는 혜원의 이야기를 모두 들어주고 있었다.
그렇게 떠들다 지쳐서 잠이 든 혜원의 얼굴을 부드럽게 만지던 규원의 입가에 어느덧 행복한 미소가 머물고 있었다.
“행복이라...이런 것이 행복이라는 것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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