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

독점 종말 이후 자살 지침서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이찮
작품등록일 :
2019.07.14 03:35
최근연재일 :
2019.09.16 04:59
연재수 :
40 회
조회수 :
5,672
추천수 :
166
글자수 :
144,364

작성
19.08.07 02:04
조회
77
추천
4
글자
8쪽

1장, 왕십리역전

DUMMY

“할아범.”


“후딱 안 인나냐. 그 놈들 다시 올지도 모른다.”


길 노인은 우악스럽게 내 손을 잡아끌었고 나는 인형처럼 끌려갔다. 아직 통증의 여운이 가시지 않아 힘없이 끌려갔다.


“하하, 할아범 여기 웬일이야. 어떻게 알고.”


“왕십리에서 벌어지는 일 치고 내가 모르는 일이 있더냐. 하여튼 무른 녀석. 한 번 속고 또 속느냐. 그렇게 주의하래도. 이잉, 쯧쯧. 어우, 더워라.”


길 노인은 능숙하게 절벽을 올랐고 나는 의식 없이 그 뒤를 따랐다.

길 노인은 노인의 몸을 가지고 있다고는 믿을 수 없게 쑥쑥 나아갔다. 등짐이 길 노인의 머리를 넘겼는데도 그는 아무것도 지고 있지 않은 것처럼 움직였다. 깡깡한 노인네.

가방이 신기하게 생겼다. 강철로 마감을 해 골격을 만든 가방은 사각형에 이런저런 총구 따위가 달려있었다. 그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가방 꼭대기에 달린 주먹도 들어갈만한 굴뚝이었다. 아니 굴뚝이 아니지. 저기서 연기가 조금 나고 열기가 은은하게 남아있는 것이 최루탄을 발사한 것은 가방인 모양이었다.


“처음부터 알았어요?”


“그래. 뭔가 거짓말 하고 있단 걸 알았지. 내 능력 알잖냐.”


“허, 그럼 왜 안 알려줬대. 거짓말인 거 알았으면 알려주지.”


“네 놈 눈이 오랜만에 살아난 거 같아서 말 안 했다. 시덥잖은 비밀이면 그냥 두려했지.”


“아니 거짓인걸 알았으면, 아.”


길 노인은 이능 각성자지만 나처럼 C급이었다. 아니, 활동을 안 해서 D급이었나. 그의 각성 능력은 ‘거짓말하는 페르소나’. 길 노인이 능력을 발동하면 길 노인의 머릿속에 상대의 거짓말하는 페르소나가 나와서 거짓말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길 노인은 그 얼굴을 보고 듣는다. 페르소나가 하는 거짓말을 들어 분석한 후 실제 상대가 어떤 말을 하는지, 상대가 말을 할 때 어떤 표정으로 말을 하는지를 면밀히 관찰한다.

길 노인은 여기저기서 굴러먹던 짬밥이 통으로 몇 통이라 눈치 하나는 기가 막혀서 상대의 거짓을 예리하게 잡아내는 것이다. 뭐, 협회에서는 그리 높이 산 능력은 아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것도 옛말이다. 그의 손자, 정명이 일이 있고부터 맛이 가기 시작해서 이젠 깜빡깜빡하게 된지 오래다. 아주 단편적인 것들. 손이라던가, 발, 혹은 콧잔등과 미간 따위만 보이기 일쑤였고 어떨 때는 페르소나가 3마디만 던지고 가기도 했다.

하여간 그의 능력이 예전 같지 않으니 내가 그녀의 거짓말을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그를 탓하는 것은 안 될 말이다. 전우로서.


“휴, 힘겨워라. 이놈아, 이젠 네가 네 발로 걸어라.”


“예이.”


길 노인은 왕십리역을 나와서야 짐을 풀고 허리를 툭툭 두들기며 잠시 휴식을 취했다.

후줄근한 후드까지 벗어버리고 웃통을 깐 길 노인의 몸은 갈기갈기 찢겼다 더욱 강하게 접합된 강철의 육신이었다. 지금은 조금 늙었지만. 나이답지 않게 깡깡하고 섬세한 육신은 상처투성이일지언정 다시 찢어질 일은 없을 것이다.


빠빠빠 빠아빠 빠빠빠 빱 빠빠빠 딩딩딩


길 노인의 바지주머니에서 알람소리가 울려퍼졌다. 길 노인은 주름진 눈을 끔뻑이더니 천천히 핸드폰을 꺼내 알람을 껐다.


“뭐에요?”


“일어나란 소리지 이눔아.”


해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깊은 밤이었다. 지금 왜 일어나? 나는 시간을 보려고 핸드폰을 꺼냈다.


“에이 씨. 몇 시에요?”


“2시 반.”


“하, 영감쟁이, 진짜.”


의미 없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무 의미 없는 새벽 2시 반에 누군가는 깊은 의미를 부여한다. 길 노인이 그랬다. 2시 반은 손자 길정명이 숨을 거둔 시간이었다.

길 노인은 한숨을 내쉬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처량한 눈빛으로 별들을 세다가 돌연 나를 봤다.


“이눔아. 이럴 줄 알았지. 잘 알아보고 사람 따라다니라고 했냐, 안 했냐. 엉? 이놈이 안 죽는다고 아주 죽여줍쇼 하고 모가지를 내어놓고 다녀 아주. 그러다 한 번 호되게 당해 봐야 정신을 차리지, 에잉 쯧쯧.”


“아니, 할아범. 할아범이 따라가라며. 따라가랄 땐 언제고 이제 와서 나한테 그렇게 뭐라고 그러는 거야?”


“에에? 이놈이 아주 반말까지 찍찍 싸지? 내가 할애비지 니 친구여? 그리고 내가 따라가라 그러면 받잡겠숩니다 하고 넙죽 받아다 따라가냐? 내가 앞으로 구르라고 그러면 구를거여? 굴러봐라 이놈아.”


“구르긴 뭘 굴러, 이 노인네가 진짜. 구르긴 뭘 굴러! 그리고 그 사람들이 위험한 사람들인지 어떻게 알아. 아직 몰라. 모른다굽쇼. 얘기 들어보려고 했는데 할아범이 나온 거 아뇨.”


“이눔아, 서명교 딸이 나섰어. 서명교 딸이! 안 위험하겠냐? 안 위험하겠어?”


“그 서명교 딸이라고 좋아할 땐 언제고 서명교 딸이라고 열을 내는 겁니까, 열을 내긴. 베르나도 귀랍니다, 베르나도 귀.”


“뭔 귀? 바늘귀 짝귀 말고 꼬부랑 소리 귀는 처음 들어봐 이놈아!”


나는 차근차근 성전의 영웅, 베르나도 귀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가 잡아죽인 몬스터가 헤아릴 수 없고 도륙해놓은 악당들 시체가 산을 이룬다고 이야기해줬다.

길 노인은 뚱하게 듣다가 말했다.


“그러니까 괴물 잡아죽이는 거에 미친놈이란 거 아녀.”


“뭘 그렇게 말을 하고 그럽니까.”


“말을 이렇게 하지 어떻게 하냐, 이놈아! 하여간 뭐 하나에 미친 놈 치고 안전한 놈 못 봤다. 그놈은 눈깔부터가 헤까닥 했어, 이놈아.”


“눈깔은 무슨,”


길 노인의 허리춤에 걸린 방독면이 눈에 들어왔다. 눈구멍 부근에 야투경 비스무리한 처리가 되어 있는 듯 했다. 그걸 보니 또 열 받네.


“아니, 할아범. 그 미니건은 어따 두고 왔수?”


“버리고 왔다. 못 써 그건.”


“하, 참. 할아범. 아니 곱게 구해오면 되지 미니건은 왜 갈겨요, 갈기긴.”


“그 놈들은 곱게 해결볼 놈들이 아녔어. 미니건 거 아까워라. 돈푼 깨나 들인 건데.”


길 노인이 그리 판단했다면 그런 거다. 그의 눈치는 이능급이다.


“진짜 아파 죽을 뻔했다고요! 미니건으로 몸에 구멍 숭숭 나면 얼마나 아픈지 아쇼? 진짜 돌아버린다니까!”


“죽지도 않으면서 그놈의 우는 소리. 그럼 그놈들한테 잡혀서 쑤시고 씹고 지랄은 다 하고 오고 싶으냐? 한번 긁힌 거 가지고 사내놈이 징징징.”


“이 노인네가!”


길 노인과 투닥거리다가 나도 그도 지쳐서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슬금슬금 멀어져서 왕십리역에서는 거리가 꽤 멀어졌다. 이젠 타운에 더 가깝다.

신경전을 벌이다가 등을 맞대고 앉으니 서늘한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서늘한 바람이 머리를 식혔다. 나는 궁금했지만 물어보지 못한 질문을 했다.


“무슨 거짓말이었어요?”


길 노인은 고개를 살짝 틀어 날 물끄러미 쳐다봤다. 잠시 그러곤 다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밥 처음 해봤다는 거.”


“그게 거짓말이었어요?”


“그래. 난 뒤지게 못하길래 정말 밥 처음 하는 줄 알았지.”


“그런데 왜 날 쫓아왔어요?”


“...”


길 노인은 말이 없었다. 뭐, 별 것 아닌 것에도 거짓말을 하는 것이면 온통 거짓말을 하고 있어서 이 별 것 아닌 거짓말이 관성처럼 이어져 나온, 뿌리 깊은 거짓말이구나 파악한 것일 수도 있고. 아니라면 그 말을 하는 입술을 봤는데 뒤늦게 거짓말 하는 입술 모양이 그녀가 만난 이후로 계속 해온 입술 모양이란 것을 깨달았을 수도 있고. 그것도 아니라면,


그냥 손자가 걱정돼서일 수도 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종말 이후 자살 지침서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연재 주기(수정) 19.07.29 99 0 -
40 1장, 상왕십리(3) 19.09.16 7 1 7쪽
39 1장, 상왕십리(2) 19.09.14 13 1 7쪽
38 1장, 상왕십리 19.09.09 14 1 7쪽
37 1장, 길노인의 철물점(2) 19.09.06 23 1 7쪽
36 1장, 길노인의 철물점 19.09.02 25 1 8쪽
35 1장, 왕십리 타운청(4) 19.08.30 26 1 7쪽
34 1장, 왕십리 타운청(3) 19.08.29 35 0 8쪽
33 1장, 왕십리 타운청(2) 19.08.25 38 1 8쪽
32 1장, 왕십리 타운청 19.08.23 41 1 9쪽
31 1장, 다시 왕십리(9) 19.08.21 38 1 8쪽
30 1장, 다시 왕십리(8) 19.08.20 46 2 11쪽
29 1장, 다시 왕십리(7) 19.08.17 59 2 9쪽
28 1장, 다시 왕십리(6) 19.08.16 58 3 12쪽
27 1장, 다시 왕십리(5) 19.08.14 54 2 7쪽
26 1장, 다시 왕십리(4) 19.08.12 65 4 8쪽
25 1장, 다시 왕십리(3) 19.08.11 65 4 8쪽
24 1장, 다시 왕십리(2) 19.08.10 59 2 8쪽
23 1장, 다시 왕십리 19.08.09 71 3 9쪽
» 1장, 왕십리역전 19.08.07 78 4 8쪽
21 1장, 왕십리역 지하도(3) +4 19.08.06 82 5 8쪽
20 1장, 왕십리역 지하도(2) 19.08.05 78 5 7쪽
19 1장, 왕십리역 지하도 19.08.04 88 5 10쪽
18 1장, 왕십리(13) +2 19.08.03 97 5 9쪽
17 1장, 왕십리(12) 19.08.02 99 3 8쪽
16 1장, 왕십리(11) +2 19.07.31 110 3 8쪽
15 1장, 왕십리(10) 19.07.30 116 3 7쪽
14 1장, 왕십리(9) 19.07.29 124 4 8쪽
13 1장, 왕십리(8) 19.07.27 132 5 8쪽
12 1장, 왕십리(8) 19.07.26 140 4 9쪽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이찮' 작가를 후원합니다!

  • 보유 골드: 0 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