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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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알신더
그림/삽화
경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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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6 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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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21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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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28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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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240화

DUMMY

수많은 사람의 생각이 물밑에서 오가며 금분세수의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각자 품은 의도는 다르고 지향하는 점도 달랐지만 그들의 의식 깊은 곳에서는 같은 생각을 공유하고 있었다.


시대가 변한다.


백련지파의 난으로 뒤바뀌었던 시대는 무림팔주라는 이름으로 정립되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강하고 가장 시끄러웠으며 언제나 논란의 중심에 서 있으면서도 정파의 기둥으로 남아있던 현사의 금분세수는 한 시대의 끝이라고 충분히 말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


현사에게 도전하는 것으로 완전히 시대의 방점을 찍으려는 자, 금분세수 이후에 올 새로운 시대의 패권을 쥐려는 자, 심심해서 혹은 얼마나 엉망으로 은퇴하는지 지켜보려는 자 등 무림의 유력자들이 등봉현으로 모여들었다.


상문이 초대장을 전달한 무림팔주와 소림 방장에게 초대장을 받은 구파일방의 중진들은 물론이거니와 초대장을 받지 못했지만 멀리서나마 금분세수를 보기 위해 온 이들도 있었으며, 그 외에도 다른 목적을 지니고 등봉현에 찾아온 이들도 많았다.


그렇기에 등봉현은 화약고나 다름없을 정도로 위태롭거나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처럼 긴장이 고조될 것이라고 여긴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등봉현은 예와 다름없이 평온했다. 오히려 객(客)이 많이 온 만큼 호황을 맞이했기에 기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저짝이 너무 조용해서 다들 긴장하는 법이야. 게다가 여기 모인 인간들이 보통 높으신 인간들이 아니니 섣불리 검을 빼 들 수도 없지. 여기서 잘못 사고 쳤다간 무림공적 수준으로 몰매를 맞을 텐데 머리가 있다면 성질 죽이고 얌전히 구경만 해야지. 우리 새끼들이 사고 칠 낌새를 보이면 나라도 말릴 텐데 다른 놈들은 오죽할까. 으하하하”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것처럼 평온을 가장하고 있지만, 길거리를 다니는 무인들의 얼굴에는 알게 모르게 긴장이 서려 있었다. 그렇기에 천걸개는 술을 홀짝이며 크게 웃었다.


‘공법이 머리를 잘 썼어.’


호탕한 웃음소리에 주변의 시선이 천걸개에게 모여들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은 표정으로 술을 다시금 마시며 소실봉 자락을 올려다봤다.


공법은 무림의 거두인 현사의 은퇴가 아니라 소림의 고승인 현사가 속세에서 손을 씻고 불문으로 되돌아온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그렇기에 금분세수를 화려하게 할 이유도 없었으며, 소수의 인원만 초대했음을 증명하듯 산문 바깥에 인원을 배치하지도 않았다.


무엇보다도 향화객들은 계속해서 받고 있었기에 무인들은 자제할 수밖에 없었다.


한 꺼풀 벗겨본다면 소실봉은 물론이거니와 개방의 협력을 받아 등봉현의 모든 곳을 감시하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평온했다.


‘그 양반이 은퇴해도 소림은 소림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이보다 적당한 수가 없지.’


소림이 평소와 마찬가지로 움직이는 모습은 소림이 한 사람의 이름에 흔들리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었다.


어지간한 인간이라면 전부 눈치챌 수 있을 만큼 담담하면서도 단순한 수법이었다. 손영공이 복수를 천명한 만큼 더욱더 삼엄하게 경계해도 모자라건만 오히려 소림은 평소와 다름없이 움직일 뿐이었다.


이런 굳건함이야말로 소림이 무림의 태산북두라고 불리는 이유였다. 그렇기에 천걸개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을 둘러봤다.


‘앞으로 이틀 남았는데 올 사람은 다 온 것 같군. 그런데 참 기묘하단 말이지.’


여기 모인 이들이 아무런 생각도 없이 오진 않았겠지만, 분위기가 묘했다.


‘마치 전장 한가운데 던져진 기분이야. 아무리 긴장하고 서로 견제한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기묘하다니 큰일이 벌어질 것 같은데. 갈 때까지 사고를 몰고 다니다니. 그 영감다워서 어울리긴 하지만 조용히 끝내려던 공법은 좋아하지 않겠어.’


입술은 미소를 머금은 상태였으며, 입으로는 끊임없이 술을 들이켜고 있었다. 하지만 술이 들어갔음에도 위험을 감지한 머리는 취하지 않았으며, 술맛을 음미하는 것처럼 가늘게 뜬 두 눈은 쉴 새 없이 움직이며 공기를 읽어냈다.


그러면서도 지금까지 들어온 정보를 계속 복기했지만 이런 분위기가 만들어질 만큼 수상한 낌새는 없었기에 천걸개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이럴 땐 역시 몸을 움직여야지.’


전쟁터에서 가만히 앉아있다면 목숨을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아직은 불안하다고 생각할 뿐이지만 전장에서 굴러먹던 본능은 서둘러 제 몸을 지키기 위해 몸을 움직이게 했다.


“어디로 가볼까.”


평소였다면 거침없이 움직였을 천걸개였지만 지금은 달랐다. 느긋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켜며 능청스럽게 말했지만 나름대로 갈등하고 있었다.


그의 머리는 위험한 분위기의 근원을 찾는 것을 우선시했다. 끊임없는 호기심과 행동력이야말로 천걸개의 원동력이나 마찬가지였지만 본능이 방해하기에 쉽게 발을 떼어내지 못했다.


천걸개의 본능은 제 몸을 지킬 수 있는 곳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자 고개가 돌아갔고, 그의 눈에 소실봉이 담겼다.


‘그래. 역시 소림이지.’


공법이라고 해서 자신이 모르는 일을 알 리가 없었다. 본능이 시키는 대로 제 몸을 지키기 위해 소실봉을 선택한 것이지만 본능을 이해하지 못한 머리는 무슨 사태인지 알기 위해서라며 합리화했다.


그렇게 발걸음을 옮긴 천걸개는 산문 앞을 지키고 있는 상문을 볼 수 있었다.


그러자 산문을 통과하는 대신 자연스럽게 상문의 옆으로 가더니 그대로 주저앉아 술을 들이켜기 시작했다.


“크. 좋다. 너도 한 잔 할래?”


상문은 갑작스럽게 다가와 술을 권하는 늙은 거지를 보고선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늙은 거지의 허리에 여덟 개의 매듭이 걸린 것을 보고 그가 개방의 방주임을 알 수 있었다.


“나무아미타불. 권해주셔서 감사하지만, 소임을 다하는 중이라 거절해야겠습니다.”


여전히 앞을 보면서도 정중한 말투로 거절하는 태도에 천걸개는 엷게 미소를 지으며 무릎을 '탁' 쳤다.


“크흐. 좋구나. 산문을 지키려면 당연히 그래야지. 그런데 여기 분위기는 사뭇 다르구나. 여길 제외하면 뒷골이 으스스해.”


안전한 곳을 찾아서 그런지 천걸개의 입이 풀렸다. 능청스럽게 말하면서도 과장된 행동을 곁들이는 모습은 평소의 천걸개였다.


중걸과 걸운개 역시 정말 거지다운 거지였기에 상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지만, 걸운개의 사부인 천걸개는 하늘이 내린 거지라는 이름답게 모든 면에서 진했다.


“나무아미타불. 그렇습니까.”


하지만 상문은 제 생각을 꾹 누른 채 그의 말에 답하고서는 정말인지 확인하려는 것처럼 고개를 찬찬히 돌리며 주변을 살폈다.


평소보다 활기찬 느낌이 주를 이루고 있지만 어딘지 모르게 복잡한 감정이 숨어있었다. 각자 품고 있는 야망이나 어떤 식으로 움직일지 가늠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긴장 등이 뒤섞여있었지만 상문은 그보다 깊은 곳에 숨겨진 분위기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와 별개로 상문 역시 누군가 날카로운 비수를 감추고 있음을 느꼈기에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하지만 산문을 지키는 동안 얼굴에 부정적인 감정을 드러낸다면 향화객들에게 불편함을 줄 수 있기에 다시금 표정을 가다듬었다.


상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천걸개는 찰나의 움직임을 확인했지만, 특별히 꼬집지 않고서 술을 한 모금 마셨다.


“금분세수라고 하면 아무리 원한을 갚겠다는 사람이 나올지라도 당사자가 아닌 바깥은 평온해야 하는데 너무나도 이상하단 말이지. 소림은 평화롭고 등봉현은 활기차지만 어딘지 모르게 음습해.”


술김에 쏟아내는 말처럼 빠르면서도 직설적이었지만 상문은 시선을 돌리지 않았음에도 그가 취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나무아미타불.”


그렇기에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나직하게 불호를 외는 것으로 그의 말에 동조했고, 천걸개는 피식 웃더니 다시금 입을 열었다.


“허허. 너도 중이로구나. 말하는 모양새가 아주 그럴듯해.”


그러자 상문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하지만 조금 전처럼 이상함에 눈살을 찌푸리는 방향이 아니라 위로 솟구치려다가 내려온 것이기에 천걸개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소림에서도 알아채고 어련히 방비했겠지만 노파심은 어쩔 수 없구나. 걸운개 고 녀석이 빨리 자리를 잡아야 나도 좀 쉴 텐데. 에잉.”


속으로나마 고개를 끄덕이며 천걸개의 말을 듣던 상문은 갑자기 혀를 차며 걸운개를 구박하자 어리둥절했다.


“나무아미타불. 걸운개 사백께서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르셨습니까?”


상문의 말에 천걸개의 눈이 커졌다.


걸운개가 상문을 마음에 들어 한다는 보고서가 올라오긴 했지만, 허례허식을 싫어하는 걸운개가 사백이라는 호칭을 허용했다는 사실이 놀라웠기 때문이었다.


물론 상문이 제 앞이라 예의를 차리기 위해 사용한 호칭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상문이 칼같이 선배라고 선을 긋던 걸운개를 무시할 것 같지는 않았기에 다시금 안색을 되돌리고선 고개를 끄덕였다.


“잘못은 무슨. 거지가 될 팔자를 타고나서 이름까지 걸운(乞運)인 녀석이다. 하지만 이름답게 너무 거지라서 누구 위에 서 있는 것도 싫어하는 놈이야.”


그렇게 한숨을 내쉰 천걸개는 본격적으로 신세 한탄을 겸한 흉보기 시작했다.


먹을 수 있을 때 마구 먹거나 최대한 움직이지 않는 것은 거지다운 일이기에 이해할 수 있지만 후개다운 행동은 하나도 하지 않았다. 걸핏하면 자거나 늘어지거나 구걸을 하는 정도였다.


“구걸도 너무 잘해서 문제야. 무릇 거지라면 어디 주워 먹을 것이 있는지 여기저기 기웃거려야 하건만 그 녀석은 가만히 누워서 바가지를 내미는 것만으로도 항상 풍족하게 구걸해오지.”


개방은 거지집단이지만 소림과 마찬가지로 무림의 문파였다. 게다가 개방의 장점은 여기저기서 마구 긁어모은 정보력이었다.


구걸에 빗대긴 했지만 결국 정보를 처리하는 일은 뛰어나지만 직접 발로 뛰어서 정보를 얻는 점이 약하다고 제 입으로 실토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천걸개는 푸념과 함께 말해놓고도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뜰 정도였다.


“중간에 추임새를 넣어주며 잘 들어주니 내가 괜한 말까지 한 모양이군.”


“나무아미타불.”


상문은 속내까지 짐작하지 못했기에 그 정도 푸념이라면 괜찮다고 생각했다. 가끔 천호암에 들르는 법진은 대부분의 시간을 제자 칭찬에 할애했지만 가끔은 푸념을 늘어놓을 때도 있었다.


게다가 현사에 대한 푸념을 늘어놓는 공법도 자주 봤기에 상문은 괜찮다는 것처럼 나직하게 불호를 외웠다.


“으허허. 넌 소림이 아니라 백마사에 있어도 잘 어울리겠구나. 백마사의 명물 산적 스님이라니 제법 잘 어울리는구나. 그런데 제법 소란스럽구나. 도대체 누가 왔기에 이런 소란이지?”


천걸개는 귀를 쫑긋거리다가도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소란스러운 방향을 향해 목을 쭉 뺐다.


하지만 그 노력이 무색할 만큼 소란스러움이 가까워졌다.


“에이. 성가시다. 비키지 못할까!”


카랑카랑한 노인의 목소리와 함께 노도와 같은 기파가 쏟아지자 몰려있던 군중은 먼지가 흩어지는 것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소란스러움이 잦아들자 노인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더니 매무새를 다듬는 것처럼 옷을 툭툭 털어냈다. 그렇게 상문을 바라보며 목을 가다듬던 그는 상문의 옆에서 목을 길게 빼고 있는 천걸개를 보더니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허흠. 아니 이게 누구야. 거지 꼬마가 아니던가. 또 뭘 주워 먹으려고 여기까지 온 거야. 적적할 뻔했는데 마침 잘 됐군.”


“하하하. 후배 천걸개가 호연 선배님을 뵙습니다. 그간 강녕하셨는지요.”


개방의 방주 천걸개를 어린아이 다루듯 말했지만, 성질이 썩 좋지 않은 천걸개가 찍소리도 못한 채 허리를 숙이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없었다.


조금 전까지 몰려있던 군중이 이 광경을 본다면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겠지만, 상문은 담담하게 반장하며 허리를 살짝 숙일 뿐이었다.


“나무아미타불. 소림의 삼대제자 상문이 장강어옹 선배님을 뵙습니다.”


호연이라는 성씨 덕분에 그 정체를 알아차린 상문은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


그 순간 장강어옹 옆에 서 있던 헌앙한 청년의 몸에서 피처럼 새빨간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순식간에 사위를 장악한 핏빛 기운에 천걸개는 곧장 타구봉을 움켜쥐었지만, 그 청년은 그에게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상문에게 환한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스님.”


“나무아미타불. 범 시주님 오래간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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