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허의 시대 : 방랑자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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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8 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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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21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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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12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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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술이 문제다

DUMMY

마법진은 거의 다 완성돼갔다. 마나가 둥그런 원형의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고 그 속에서 마이아스가 눈을 감고 팔을 벌린 채 마나를 붙잡고 있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다양한 도형 아래 뭔가를 적어내려 가는 도트가의 모습도 보였다.


더이상 신호마법이 성공하고 실패하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위험조차 인지하지 못할 만큼 자신이 맡은 일을 하고 있었다.


곧바로 달려 그들 앞을 막아섰다.


화살이 시위를 떠났다. 델타로는 이를 악 물고 검을 바닥을 향해 거꾸로 쥐었다.


공터 위로 이젠 밝아진 하늘이 보였다. 그 하늘을 화살이 덮는다. 중구난방으로 쏟아졌던 전과 달리 마치 소낙비 처럼, 틈 없이 까만 그림자마저 만들며 덮쳐오는 화살의 폭포 앞에 서서 델타로는 기억속의 한 장면을 필사적으로 떠올렸다.


눈을 감았다.


차츰 떠오르는 한 사람의 모습. 그가 보여줬던 잊지 못할 신비.


델타로의 몸에서 힘이 들끓어 오르기 시작했다. 제멋대로 날뛰기 시작한 마나가 발끝 부터 정수리까지 온몸을 두들겼다. 아득해질 것만 같은 정신을 붙잡고 검을 치켜들었다.


마나가 사방으로 뛰쳐나간다. 법칙을 부수고 현상을 뒤집는다.


그의 의지가 명령하면, 그의 마나가 세상을 강제시킨다.


검이 떨어져내렸다. 검끝이 바닥을 파고든다. 화살비가 한 치 코앞까지 도달했을 때, 천둥소리가 울렸다.


굉음에 놀란 도트가가 고개를 들었을 때 보인 것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양손으로 검을 쥔 델타로의 바로 앞에서 박살난 나무조각들과 구겨진 쇠촉들이 땅바닥으로 쏟아져 내리는 것 뿐이었다.


"어,어이! 기사양반, 괜찮소?"


천천히 일어선 델타로가 뒤돌아보며 씩 웃었다. 웃는 그의 얼굴 위로 빨간 선이 죽 그였다. 코피였다.


"화살 준비."


놋그릇을 긁는 듯한 목소리. 이어 끼긱 하는 활시위를 당기는 소리가 먼 거리에서도 들려왔다. 델타로가 다시 검을 들었다. 화살이 발사되기 전에 델타로의 검이 정면을 찔러들어갔다. 미지의 힘이 수십 미터의 공간을 가로질러 거구의 기사와 산적 궁수들을 휩쓸었다. 거구를 제외한 산적들이 망치에 맞은 나무인형처럼 퉁겨져 나갔다.


하지만 죽은 것은 마흔의 산적들 중 맨 앞에 있었던 셋 뿐이었다. 나머지는 비척거리며 다시 일어나고 있었다.


"정렬."


"저 불쌍한 머저리들은 내버려 두고 이리 와서 나와 검을 겨루자."


"정렬."


거구의 명령에 산적들은 비틀거리면서도 제 자리를 잡아갔다. 두려운 표정으로 부러진 활이나마 들고 섰다. 델타로의 입매가 비틀렸다.


"긍지없는 쓰레기에 겁쟁이까지 추가됐군."


"화살 준비."


산적들이 화살을 쐈고 델타로가 검을 휘둘렀다. 반으로 부러진 화살들이 우수수 쏟아졌다.


쿨럭.


수 차례 공격을 막아내던 델타로의 입에서 기침과 함께 핏줄기가 흘러났다. 검을 든 그의 손끝이 잘게 떨렸다. 화살 준비, 듣기 싫은 목소리가 다시 명령을 내렸고, 시위에 화살을 거는 산적들이 보였다. 델타로는 검을 치켜들고 가슴 깊이 숨을 끌어모아 외쳤다.


"오라! 조무래기들아! 내가 바로 강철을 부순 기사, 아인츠 가문의 델타로다!"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뒤이어 천둥이 몰아쳤다.


화살이 떨어진다. 무거운 쇠촉부터 떨어져 바닥에 박혀 깃을 부르르 떨었다. 멀쩡한 화살이 반 수가 넘었다.


결국 델타로의 몸이 천천히 무너졌다. 무릎을 꿇었다. 그의 등이 들썩일 때마다 숙인 고개 아래로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검에 의지한 팔이 경련하고 있었다.


거구가 말했다.


"죽여라."


산적들은 두려움에 감히 다가오지 못하고 다시 그 자리에서 시위를 당겼다. 바람이 불었다.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활대 휘어지는 소리도 났다. 델타로는 다시 한 번 검을 들려 했지만 한계에 다다른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실핏줄이 터졌는지 눈에서도 피가 흘러내렸다.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흐릿한 시야 속으로 날아오른 화살이 가까워진다.


그리고 갈색의 지저분한 가죽장화를 신은 발이 고개를 숙인 델타로의 눈에 들어왔다. 곧 로브자락이 펄럭이며 그 발을 덮었다.


윤이나는 나무 완드를 든, 먼지를 뒤집어 쓴 도트가가 주문을 외웠다.


[바람과 바람과 바람, 이끄는 바람]


완드 끝에 작은 마법진 하나가 빛을 뿜어내고 갑작스런 돌풍이 일어나 화살을 사방으로 밀어냈다. 몰아치는 흙먼지 속에서 헬쑥해진 얼굴의 도트가가 델타로를 일으켜 세우려 했다.


"이보쇼 기사양반! 정신차려, 튀어야지!"


"신호... 신호는?"


"위를 봐, 위를! 성공했으니까 얼른 일어나시라고!"


과연 하늘엔 붉은 빛깔로 세 개의 검과 하나의 방패, 그리고 말 한마리가 떠 있었다. 어설프게 생기긴 했으나 분명 맬라운 가문의 문장이었다. 그를 확인한 델타로가 "다, 행..." 이란 말만 남기고 픽 쓰러졌다. 반쯤 일으켜졌던 몸이 바닥에 쿵, 쳐박혔다.


"어, 어! 이 양반 기절했는데! 어쩌지?"


거센 바람소리가 잦아들고 산적들의 콜록거리는 기침소리가 들려왔다. 흙먼지가 조금씩 가라앉고 있었다.


"어쩌긴 어째! 빨리 업고 튀어요!"


"그 아가씨는 어쩌고?"


"우리가 동굴에서 멀어지는게 나아! 여기서 얼쩡대는게 더 수상해 보이니까 빨리!"


마이아스가 다리를 붙잡고 도트가가 상체를 들었다. 덩치값 하는 기사의 무게에 두 사람은 낑낑대며 수풀 속으로 도망쳤다. 도트가는 델타로의 손에 쥐여 덜렁거리는 검이 장딴지를 툭툭 칠때마다 비명을 질러댔다.


"도트가씨! 우리 지금 어디로 가는거죠!?"


"나도 몰라!"


무작정 산적들이 있는 방향 반대로 산길을 타고 올라갔다. 무성한 넝쿨과 나무뿌리, 돌부리에도 용캐 넘어지지 않고 뛰었지만 하나는 꼬맹이에 하나는 마법사다 보니 뒤에서 쫒아오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숲길이 끝나고 공터가 드러났다. 얼마 가지 않아 앞서 달리던 도트가가 멈춰섰다. 단내나는 숨을 뱉으며 기계적으로 다리를 움직였던 마이아스는 관성을 못 이기고 고꾸라졌다. 도트가, 델타로를 덮치고 바닥을 굴렀다.


끙끙 앓으며 일어나자 넋을 잃은 도트가의 얼굴이 보였다. 마이아스는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넓은 땅떵이에 기다란 빗금이 가로질러 있었다. 허겁지겁 기어가서 보니 협곡이 앞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 규모가 크지는 않았지만 건너편으로 뛰어 넘기에는 너비가 멀었고, 아래로 뛰어내리기에도 높이가 꽤 될 뿐더러 바닥을 흐르고 있는 물이 바위에 부딪혀 물보라를 일으키는 것이 심상찮아 보였다.


머리속이 텅 비어서 "어,어쩌죠 이제?" 얼결에 물어보긴 했지만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멍하니 있는 사이 산적들도 숲을 빠져나와 마이아스를 둘러쌌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일어난 마이아스가 델타로의 허리춤에서 단검을 빼들었다. 그의 검을 빌리고 싶었지만 정신을 잃은 와중에도 검손잡이를 꽉 쥐고 놓지 다른 방법이 없었다.


산적들은 9살 꼬마가 든 단검에 겁먹은 것 마냥 멀찍이서 빠져나갈 길목을 막고만 있을 뿐 달려들지 않았다. 활은 어디다 버리고 온 건지 가지각색의 쇠붙이를 들고 있었다. "죽여라." 어쩐지 망설이는 기색의 그들 뒤로 거구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시벌, 우리 이러다가 개구리 되는 거 아녀?"


산적들이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서슬 퍼런 거구의 시선에 어쩔 수 없이 한 발짝씩 느릿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실낱같은 여유가 생긴 마이아스는 쉼호흡으로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최대한 냉정하게 상황을 살폈다.


몸 숨길 곳 하나 없는 공터. 서른 명이 넘는 성인 남성을 상대로 그저 조금 단련됐을 뿐인 꼬맹이의 몸뚱이로 무얼 할 수 있을까 막막하던 차에 문득 가만히 서 있는, 녀석들의 우두머리, 거구의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저 우람한 덩치와 걸치고 있는 통짜 강철로 된 기사 갑옷이 장식은 아닐 것이다. 델타로가 아직 쓰러져있는 지금 혼자 달려들어도 막을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수하들이 어물쩍대는 지금도 공터와 숲의 경계선 쯤에 발을 걸쳐놓고 움직일 생각이 없어보였다.


다 잡은 사냥감을 보는 사냥꾼의 여유일까?


"어이! 빡빡이 아저씨!"


마이아스는 손을 들어 거구의 남자를 정확히 삿대질 하며 바락 소리쳤다. 찔끔찔끔 다가오던 산적들이 입을 쩍 벌리고 경악했다. 거구가 자신의 맨들맨들한 대머리를 쓱 쓸어넘기는 게 보였다. 얼음장 마냥 변화가 없던 흉험한 얼굴이 움찔거렸다.


그가 입을 열었다.


"죽여라."


"아저씨 따돌림 당해? 왜 혼자 거깄어, 이리 가까이 와봐. 나 죽이고 싶은 거 아녔어?"


"죽여라."


"앵무새 마냥 즈겨라~ 즈겨라~ 할 줄 아는 말이 그것 밖에 없나봐?"


"저 놈을 당장 죽여라."


"다른 말도 할 줄 아네? 좀 모자란 사람인가 싶었는데 그냥 머저리였나보네. 즈 느믈 등증 즈겨라~ 어, 그건 왜 꺼내? 던지게? 던져봐! 던져 보라고 씹탱아! 왜 안 던져? 쫄았냐? 전직 기사씩이나 돼 보이는 놈이 배알도 없어서는, 야. 꼬추는 서냐?"


도끼를 꽉 진 거구의 손등에 핏줄이 돋아나 부들거렸다.


마이아스가 씨익 웃었다. 이유는 모르지만 저 거구의 남자가 자신에게 근접할 수 없을 뿐더러 직접적인 위해를 가할 수 없다고 확신 할 수 있었다.


살아날 구멍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이아스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씨뻘, 저 아가 금기어를 말해부렀어!", "좆됐다. 다 뒤진거야 이제!" 갈팡질팡하고 있는 산적들에게 외쳤다.


"아이고, 목아파 죽겠네. 야! 그래 너희들! 늬들 내가 누군줄 알고 이러고 있어? 지금 너희들이 밟고 있는 땅의 주인인 맬라운 공작가의 차남이 바로 나라고! 마이아스 림 맬라운, 들어는 봤냐? 아까 신호 쏴 올린 거 봤지? 이제 조금만 있으면 구원군이 와서 너네 대가리를 쪼개줄 거라는 소리니까 빨리 튀는게 좋을걸? 니네 어차피 고자새끼한테 억지로 끌려온 거잖아. 지금이라도 썩 꺼지면 너네 얼굴 내가 못 본걸로 해줄게. 여기 마법사도 있고 나도 마법 배웠어! 개구리가 돼서 평생 돼지 똥이나 퍼먹으면서 살고싶지 않으면 당장 꺼져!"


산적들은 꼬맹이의 입에서 나온 걸쭉한 입담에 얼이 빠졌으면서도 슬금슬금 눈치를 보다가 "안가? 안가? 좋아, 너넨 다 무기한 개구리형이다! 아숄라 쭈룹쮸쥬 킴치 콜라 찌즈 크러스트-" 두 팔을 하늘로 뻗고 웃기지도 않는 외계어를 중얼거리자 그제야 등을 보이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들이 달아날 수 있는 곳은 딱 숲의 경계선 까지였다.


콰득-!


가장 먼저 도망치던 산적의 몸이 붕 떠서 나무에 쳐박혔다. 뒤통수에 도끼자루를 매단 채로 시체가 덜렁거렸다.


세 명이 날아온 도끼에 죽고 다섯 명이 돌멩이에 머리가 터져나가고 나서야 산적들이 멈춰섰다. 여덟의 시체가 숲의 경계를 따라 선을 그은 듯 나란하게 누웠다. 죽은 여덟 명 중 단 한 명도 그 선을 넘지 못했다.


"저 놈을 죽여라. 죽이지 못하면 너희가 죽는다."


놋그릇 긁는 소리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산적들 중 하나가 욱 해서 소리쳤다.


"씨팔, 미친놈아! 니가 죽이면 되잖아! 난-" 퍽.


머리가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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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2. 하인베르크 19.08.21 25 1 13쪽
17 1. 술이 문제다 19.08.19 24 1 12쪽
16 1. 술이 문제다 19.08.16 40 0 12쪽
15 1. 술이 문제다 19.08.14 39 1 13쪽
» 1. 술이 문제다 19.08.12 43 0 12쪽
13 1. 술이 문제다 19.08.09 45 0 12쪽
12 1. 술이 문제다 19.08.07 41 0 12쪽
11 1. 술이 문제다 19.08.05 53 1 12쪽
10 1. 술이 문제다 +2 19.08.03 53 1 12쪽
9 1. 술이 문제다 19.08.02 52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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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1. 술이 문제다 19.07.31 43 1 12쪽
6 1. 술이 문제다 19.07.29 59 0 12쪽
5 1. 술이 문제다 19.07.26 53 0 12쪽
4 1. 술이 문제다 19.07.25 63 1 12쪽
3 1. 술이 문제다 19.07.25 69 0 12쪽
2 1. 술이 문제다 19.07.25 88 0 12쪽
1 1. 술이 문제다 19.07.25 138 0 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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