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정이라는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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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NA시나
작품등록일 :
2019.07.19 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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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05 0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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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4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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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탐정은 범인을 맞닥뜨린다 (1)

DUMMY

눈 밝은 편집장이 있었다. 그가 짚은 원고는 모조리 일정 이상의 상업적 성과를 냈다. 개중에는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베스트 셀러감이라고 알아보던 원고들도 있었지만 모두가 가망없다고 고개를 젓던 원고도 있었다. 그는 글의 가능성을 귀신같이 알아보았다. 그의 손을 거친 베스트 셀러는 이미 두 손으로도 다 꼽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사실 자신의 이름으로 된 베스트셀러를 갖고 싶었다. 그 자신이 쓴 책을 갖고 싶었다. 유감스럽게도 그의 능력은 자신이 글을 쓰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말하자면 아주 작은 떡잎만 보고도 어떤 식물인지 척척 알아맞추는 식물학자의 재능은 있어도 정작 씨앗을 싹틔우는 정원사의 재능은 없었다고나 할까. 그가 원래 작가를 지망하다 우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출판계에 뛰어들었고 편집자로서의 신이 내린 재능을 발견해버려 작가의 길은 오히려 요원해졌다는 점에 이르면 진부한 불행이었다.


거물 편집자로서 살아가던 그가 진부함에 질리지 않길 바라기라도 했는지 운명은 참신한 불행을 새로 보내주었다. 그에게는 동생이 하나 있었다. 그와는 달리 예술처럼 돈 안되는 짓에 한눈팔지 않고 금융 대기업 직원으로 출세가도를 달려오던 동생이었다. 그런 동생이 취미삼아 써봤다며 한 권의 소설을 그에게 보여주었다. 거기에서 편집장은 희대의 베스트셀러를 예감하고 말았다. 다른 사람 보여주는 건 부끄럽고 마침 형이 편집자니까 처음 보여주는 건데 어떠냐고 물어오는 동생에게 그는 잠시 검토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대답하고 말았다.

출력 원고를 쥐고서 집으로 돌아온 그의 머릿속으로는 온갖 생각이 휘몰아쳤다. 정리되지 못하는 폭풍이 가라앉은 자리에는 명료한 문장이 남았다. 아직은 오직 두 사람만이 이 소설의 존재를 알고 있다. 그걸 한 사람으로 만들면 된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했다.


이게 윤과 해결한 일곱 번째 사건의 개요다. 하필 뺑소니라는 방식이 사용되는 바람에 내막을 알고서도 피해자를 지키려다 내가 치일 뻔하기도 한 일이 있었고. 뭐, 그런저런 일들을 거쳐서.


다시, 윤과 만난 첫 날이었다.

사건을 해결하면 시간이 되돌아간다. 그게 소급의 정의였다. 가해자가 피해자를 해하려는 바로 그 순간으로 돌아가 범행의 발생을 막는다. 그렇지만 정작 내가 그 타임리프를 실감하는 건 꽤 늦었다. 머리로야 알곤 있었지만. 일단은, 방학이었던 데다가 딱히 월세나 공과금을 내야 하는 날짜가 겹치지도 않고, 탐정 조수 알바 이외에 하고 있는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요일별로 정해진 루틴한 일과가 있는 것도 아니다. 어차피 그 날이 그 날 같으니 시간이 되돌아가는 걸 알아차릴 요인이 없었던 것이다.

한가지 더. 시간이 반복되는 소설이나 영화들에서 다루는 것과 달리 시간이 반복된다고 해서 늘 동일한 일이 벌어지지도 않았다. 나중에 생각해보고서 이유를 알았는데 사람의 행동에는 ‘반드시 그렇게 하는 것’과 ‘확률적으로 하는 것’ 이 있다. 관점에 따라선 ‘더 높은 확률로 하는 것’과 ‘더 낮은 확률로 하는 것’이라고 나눌 수도 있겠다. 그러므로 시간이 돌아갈 때마다 어떤 행동이 반복되기도 하고, 새로운 행동이 나타나기도 하고, 그런 조합이 사람 수만큼 존재하니까 총합해서는 그렇게까지 반복적이라는 인상을 받진 않게 된다. 게다가 이전과는 다른 기억을 가진 채로 세이브 지점으로 돌아가는 나와 윤, 가해자, 피해자의 존재도 있으니 우리의 행동으로 전혀 새로운 행동이 촉발되기도 하니 사건은 더욱 다채로워지고 반복의 지루함에서 멀어진다.


하지만 내가 타임리프를 정말로 실감하게 된 건 바로 그 새로운 행동 때문이었다. 나는 그 이전까지는 하지 않던 행동 한 가지를 했다. 윤에게 리사가 쓴 <완벽한 탐정>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다음날 리사를 찾아가 그녀의 원데이 클래스를 신청한 것이다. 나를 모델로 한 동화가 완성된다면 <완벽한 탐정>을 보여달라는 조건으로. 리사는 수락했다. 분명히 이름은 원데이 클래스인데 어쩐지 하루만에 끝나는 코스가 아니어서 나는 4일에 한 번씩 리사를 방문하기로 했다. 첫 날 앞으로의 진행 방향에 대한 설명을 듣고, 짧은 이야기를 나누고, 다음에 할 이야기 주제를 논한 후 미리 생각해오셨으면 한다는 숙제(?)를 받았다. 그런데 그 숙제를 마치고 약속대로 4일 후 리사를 다시 찾아갔을 때 리사는 무슨 일로 오셨냐고 반응했다. 그 4일 사이에 내가 윤과 세 번째의 사건을 해결해 소급이 일어났던 것이다.

다행히 리사는 윤의 의뢰인인 만큼 어떤 상황인지 금방 눈치챘지만, 시간이 되돌아가고 그 만큼의 벌어졌던 일이 없었던 걸로 되고 있다는 걸 내가 실감할 만큼의 어긋남은 있었다. 그 뒤로 소급은 세 번 더 일어났고 나는 리사를 네 번 더 만났다. 리사의 입장에서는 매일 첫 번째 같았겠지만 내 쪽에서 누적된 이야기들을 미리 정리해서 들고가는 방식으로 해결했다. 그러면서 깨달았다. 엄마와의 일도 엄마에겐 없었던 것이 되었고, 아저씨에게 했던 선언도 아저씨에겐 없었던 것이 되었겠구나.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에게 다시 그 일들을 반복해야 할 필요는 딱히 느끼지 않았다. 내가 알고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일들이었다. 하지만 주변인들에겐 내가 갑작스레 이유없이 변한 것으로 보이려나, 같은 감상은 했다.


아무튼, 일곱 번째의 소급을 겪고 오늘은 다시 윤과 만난 첫 날이다. 혜린 사건을 해결했을 때 돌아간 시각은 윤과 내가 만나기 사흘 전인 6월 26일 오후 6시 경이었다. 현의 사건을 해결했을 때는 같은 날 오후 8시쯤이었고, 그 다음 사건은 이틀 전의 아침이었고. 그런 식으로 조금씩 시간이 늦추어져서 일곱 번째인 이번 사건에 와서야 윤과 처음 만난 날인 아침으로 되돌아왔다.

···아니, ‘처음 만난 날’이라고 말해도 괜찮을까. 정말로 처음 만난 날은 6월 30일인 오늘이 맞지만, 혜린 사건을 해결한 직후에 되돌아간 6월 26일 나는 윤의 사무소로 출근했다. 그러니 어떤 관점에선 우리는 6월 26일에 처음 만났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쪽도 명확하게 엄밀한 서술은 아니다. 이래서 수많은 루프물의 주인공들은 정신이 망가지곤 하는 걸까.

조금 더 정신이 혼란해지는 이야기를 하자면 6월 30일이 첫 만남이라는 설을 채택할 경우 정확한 첫 만남의 시각은 4시에서 5시 사이 어드메였다. 하지만 지금 윤의 전화가 울려오는 이 순간은 6월 30일 2시 42분이지. 그렇다면 우리는 이미 만난 것일까요, 아닐까요. 아는 사이일까요, 아닐까요.

별로 아무래도 좋은 고민이지만.

나는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인가요? 오늘 출근 약속은 없지 않았나요.”

“매정하게 왜 그래, 우리가 일할 때만 만나는 사이인 것마냥.”

“일할 때만 만나는 사이잖아요.”

“별 일 없이도 사무실에 나와서 시간 죽이다가 밥 얻어먹고 가던 건 그럼 네가 아니야?”

“그 때는 탐정 업무를 어떻게든 초칠 불온한 의도로 가득했는데 다시 그러길 원하나요?”


여기서 다시 그럴 마음이 있어? 라고 물어오는 거나 예상했는데 가볍게 웃은 윤은 이렇게 답했다.


“그건 무서우니까 휴가나 보내버려야겠는걸.”

“······네?”


갑자기요? 여기서요? 휴가를요?


“그동안 너무 열심히 일하지 않았어? 슬슬 멈춰줄 때도 됐지. 게다가 여름이잖아. 여름휴가 가야지. 한 2주쯤 쉬고 오면 어때.”


그 여름, 반복되고 있으니까 그런 논리면 내내 휴가를 가야 하는 것은 아닌지······ 아니, 그보다 중요한 문제가 있잖아요.


“······그 동안에 사건이 벌어지면요?”


보통의 사건도 시급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교환법칙 사건은 좀 더 시급하다. 돌이킬 수 있는 기일을 넘어버리면 피해자의 존재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가. 게다가 보통의 사건과는 달리 휴가 간 동안 대신해줄 사람도 전혀 없다. 그 사실을 윤이 모를 리도 없다. 모르기는 커녕,


“한시바삐 피해자를 되찾아야 한다는 이유로 저를 한밤중에 불러냈던 사람이 지금은 태평하게 휴가 가라고 말하는 걸 어떻게 이해하면 될까요?”

“아 좀 잊어버려라 그런 건.”


분명 머리카락을 마구 헤집느라 생긴 듯한 침묵이 잠시 전화선을 지배했다. 다시 입을 뗀 윤의 목소리는 왠지 낮아져 있었다.


“혹시 우리가 해결한 사건들의 발생빈도를 계산해본 적 있어?”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우연찮게 아까까지 관련된 생각을 하고 있어서 금방 답할 수 있었다.


“6월 26일부터 6월 30일까지 총 7건. 7 나누기 4는 1.75니까, 반올림해서 하루에 2건 꼴로 발생하고 있어요.”

“그래. 지나치게 많아.”

“비교군이 없어서 저는 원래 이렇게 발생하는가보다 생각했는데. 많은 건가요.”

“엄청나게. 교환법칙은 우연하게 듣거나 우연하게 알아차려서 우연하게 발생하는 거잖아. 이렇게 빈발하는 우연 따위가 어디 있어. 내가 너를 만나기 전까지 맞닥뜨리던 빈도와 견주어서도 명백히 늘어났어.”

“그렇다는 건······”


말이 생각을 앞질렀다. 나는 저도 모르게 모리어티, 라고 내뱉었다. 윤이 빠르게 긍정했다.


“그래.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인위적이야. 누군가가 일부러 교환법칙을 퍼트리고 그에 따라 범죄를 저지르기를 조장하고 있다고 생각해봄직 해. 물론, 애초 교환법칙 자체가 명확히 밝혀진 무엇도 아니니 법칙 자체가 더 이상 우연에 머무르지 않고 확장되어 가는 것이다······ 따위의 가설도 세워볼 수는 있겠지만, 그건 그것대로 문제니까.”


윤은 숨을 고르듯이 말을 끊었다. 그리곤 갑자기 상쾌한 목소리를 이어붙였다.


“이게 네가 휴가를 가야 하는 이유야.”

“하나도 설명 안 되는 말을 이 이상 깔끔한 설명도 없다는 투로 말하는 것좀 그만둬요.”

“나는 배후 조사를 좀 해볼 테니까 할 일 없을 너는 쉬라고. 이런 조사는 조수가 동행하지 않는 게 탐정 소설의 규칙이잖아.”


당신 무슨 소설을 읽은 거예요, 같은 반론은 하려다 말았다. 윤이 곧이어 이렇게 중얼거렸기 때문이다.


“그동안 일어나는 사건은······ 최대한 덜 일어나길 비는 수밖에. 너는 내가 빨리 배후를 밝혀내길 빌어줘.”


그런 표현을 써버리면, 기분이 곤란해지잖아.

이렇게 윤과 만난 첫 날, 엄밀히는 윤과 만나기도 전에 나의 휴가가 시작되었다.

그때까지의 나는 휴가 동안 소급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정상적인 시간의 흐름을 느껴볼 수 있겠네, 같은 평화로운 생각 반, 그 동안에 실종되었지만 내가 구하지도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데 대한 부채감 반, 이상한 시간 속의 일을 온전히 공유하고 있는 상대가 윤 뿐이라는 데서 오는 묘한 애틋함 미량 따위에나 잠겨 있었다. 그깟 생각들을 모조리 무너뜨리는 파국을 맞이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일단은 그 전의 일을 조금 더 이야기하자.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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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5. 탐정은 의뢰인이 필요하다 (6) 20.07.29 20 0 11쪽
52 5. 탐정은 의뢰인이 필요하다 (5) 20.06.23 23 0 10쪽
51 5. 탐정은 의뢰인이 필요하다 (4) 20.06.07 21 0 11쪽
50 5. 탐정은 의뢰인이 필요하다 (3) 20.05.30 19 0 10쪽
49 5. 탐정은 의뢰인이 필요하다 (2) 20.05.20 20 0 10쪽
48 5. 탐정은 의뢰인이 필요하다 (1) 20.05.11 22 0 9쪽
47 4. 탐정은 범인을 맞닥뜨린다 (完) 20.03.30 26 0 9쪽
46 4. 탐정은 범인을 맞닥뜨린다 (13) 20.03.30 20 0 9쪽
45 4. 탐정은 범인을 맞닥뜨린다 (12) 20.03.23 18 0 12쪽
44 4. 탐정은 범인을 맞닥뜨린다 (11) 20.03.23 16 0 11쪽
43 4. 탐정은 범인을 맞닥뜨린다 (10) 20.03.03 33 0 10쪽
42 4. 탐정은 범인을 맞닥뜨린다 (9) 20.03.03 14 0 11쪽
41 4. 탐정은 범인을 맞닥뜨린다 (8) 20.02.25 22 0 11쪽
40 4. 탐정은 범인을 맞닥뜨린다 (7) 20.02.25 22 0 11쪽
39 4. 탐정은 범인을 맞닥뜨린다 (6) 20.02.15 23 0 9쪽
38 4. 탐정은 범인을 맞닥뜨린다 (5) 20.02.15 33 0 9쪽
37 4. 탐정은 범인을 맞닥뜨린다 (4) 20.02.11 26 0 11쪽
36 4. 탐정은 범인을 맞닥뜨린다 (3) 20.02.11 21 0 10쪽
35 4. 탐정은 범인을 맞닥뜨린다 (2) 20.02.04 26 1 10쪽
» 4. 탐정은 범인을 맞닥뜨린다 (1) 20.02.04 23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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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3. 탐정은 과거를 바꾼다 (5) 20.01.07 30 1 10쪽
28 3. 탐정은 과거를 바꾼다 (4) 19.12.24 62 1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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