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냥이 끝나면
시월이 되었다. 상인이 약속한 날짜에 맞춰 공구와 식량을 수레에 가득 싣고 찾아왔다.
"대단하다. 이 정도 마을을 고작 석 달에 지었다니."
바칸이 생각해도 대단하긴 했다. 두 드워프의 공이 컸지만, 존의 역할도 대단했다.
"검은 노예는 죽었어?"
두 드워프가 오랜 기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정보를 입수한 상인은 락과 링이 죽은 거로 오해했다.
상인의 추측과 달리 두 드워프는 훨씬 건강해져서 톰슨과 함께 슬라임 사냥에 열중하고 있다.
그간 미끼로 뿌린 썩은 고기 덕분에 늪지의 슬라임 숫자는 오히려 늘었다. 그래서 잡아도 잡아도 슬라임이 마르지 않았다.
"검은 노예가 없다고 의뢰 안 맡기는 건 아니지?"
섭섭하다는 듯이 말했지만, 본심은 아니다.
잔금만 받으면 마을 하나 세우고도 남는다. 그냥 세우는 거면 몇 개도 가능하다. 길드로부터 받을 식량과 모은 돈을 합치면 3년 안에 마을을 천 명 이상 규모로 키우는 것도 어렵지 않다. 농지만 충분하다면.
"그 다루기 어려운 드워프를 데리고 이 정도 마을 만든 것만 봐도 네 능력은 입증되었다. 내가 영주한테 잘 얘기해서 다음 마을 건설도 네게 맡기겠다."
'듣기 좋으라고 하는 빈말일까? 진심이라면 왕국 혹은 제국에 뭔가 문제가 생긴 게 틀림없다. 설마, 제국이 무너지는 건가?'
영주의 권위는 교단이 보장하고 귀족의 권위는 제국이 보장한다. 제국이 무너지면 귀족 권위가 무너진다.
바하 영주는 아무리 힘이 강해도 베르크 자작을 공격할 수 없다. 상대가 먼저 공격해도 방어만 가능하고 반격은 허락되지 않았다. 귀족이 아닌 자의 서글픔이다.
다행히 귀족이라고 무소불위의 권위가 있는 건 아니다. 잦은 패배로 귀족 명예를 실추시키면 작위를 박탈당한다. 그게 아니었으면 베르크 자작은 바하의 경기가 가장 활발한 여름만 되면 전쟁을 일으켜 상대를 말려 죽였을 것이다.
바하 영주가 과감하게 마을을 확장하는 건 힘을 키우려는 목적일 가능성이 크다. 바하 영주가 엄격한 귀족 심사를 통과할 가능성은 거의 없으니 귀족 권위가 무너질 거라는 추론이 합리적이다.
"잘 그려. 영주에게 마을의 멋진 모습을 그대로 전해야 한다."
화가 몇이 동대륙에서 만든 누런 종이에 영주성과 목책 그리고 마을의 전체적인 모습을 그려 담았다.
품질은 서대륙의 하얀 종이가 훨씬 낫지만, 가격이 너무 비싸서 차라리 양피지나 동대륙 종이를 쓴다.
"돌아가면 영주한테 말해서 잔금 치르게 하겠다."
남은 건 집 짓는 것과 목책 사이에 돌이랑 모래를 붓는 일이다. 모래나 흙이 안 흘러나오게 목책 틈을 메꾸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있을 정도로 쉬운 일이다.
의뢰를 끝내고 상인이 와서 직접 지휘해도 된다.
"근데 영주 되는 거 강등은 아니지?"
바칸은 대화 중에 상인이 바하를 떠나고 싶어 하는 느낌을 받았다. 바칸의 직설적인 질문에 상인 표정이 살짝 굳었다.
용병 조합에 들어가서 조합장을 죽여 갈아치울 정도의 위세를 부리던 자가 바하에서 하루거리에 있는 신생 마을에서 영주도 아니고 영주 대리인이 되는 건 좌천이나 마찬가지라고 봐도 된다.
"글쎄. 생각하기 나름이겠지."
바칸과 함께 오크를 잡았던 검은 머리와 빨간 머리는 상인이 수하를 시켜 꼬드긴 자들이다. 바칸이 오크를 조금씩 유인하여 처리할 방법이 있다는 정보에 두 떠돌이 용병 무리는 바칸을 찾아 나섰다.
그런데 상인이 욕심을 부려 애초 계획대로 두 무리를 해치우고 골드를 회수하는 대신 새 의뢰를 했다.
불행하게도 떠돌이 용병들은 세 백정을 죽이고 그간 사냥한 가죽을 들고 멀리 도망쳤다.
회수하기로 했던 골드도 날리고 아까운 수하 목숨 셋도 날렸다. 그 탓에 상인은 영주의 신임을 잃었다.
"눈치 안 보고 자기 능력으로 클 수 있는 여기가 오히려 낫다고 본다."
바하 영주는 성격이 괴팍하다. 칭찬에 인색하고 열 번 잘하다가 한 번 실수해도 서슴없이 내쳤다.
돈이 모이고 흐르는 곳이어서 쓸만한 인재도 많기에 사람 아끼는 법을 몰랐다.
"하긴. 늑대가 들개 품에선 제대로 클 수 없지."
바칸의 말이 상인 마음에 불을 질렀다.
상인은 그간 상인 조합과 선원 조합을 바하 영주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일에 큰 성과를 거뒀다. 게다가 최근엔 용병 조합에서도 영향력을 확보했다.
세 조합과 별개로 운영되며 공작의 손길이 닿은 길드는 어떻게 할 수 없지만, 길드의 근간이 되는 세 조합을 우호 세력으로 삼은 건 대단한 공로다.
당장은 아니어도 세대교체가 두 번 정도 이뤄지면 길드까지 바하 영주의 하수인이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바하 영주는 고작 16골드 돈 때문에 상인을 내쳤다. 바로 버린 게 아니라 허수아비 영주 자리라도 내줬다는 건 상인의 능력이 확실히 괜찮다는 뜻이다.
"난 다미앙이다."
"갑자기 왜?"
지금까지 열 번 가까이 만나면서도 둘은 서로 이름을 묻고 알려준 적 없었다.
"너도 그냥 이대로 지낼 사람은 아닌 것 같아서. 너랑은 쭉 같은 편이 되고 싶은 마음이야."
"바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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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나크 지도야. 작년 거여서 우리 마을도 있어."
톰슨이 바하로 가서 미클이 어렵게 구한 비나크 지역 지도를 받아왔다. 셋은 지도를 살피며 마을을 지을만한 곳을 찾았다.
무작정 뛰어다니며 찾는 것보단 지도를 보며 가능성 큰 곳을 찾아다니는 게 확실하다.
"강과 가까운 좋은 곳은 이미 다 차지했어."
이미 있는 마을과 거리가 가까우면 교단에서 허가가 떨어지지 않는다. 마을로 등록되지 않으면 누구든 마음대로 약탈할 수 있다.
교단이 영주의 권위를 보장하는 방식 중 하나다. 권위라는 건 어떠한 기준을 세우고 그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걸 무자비하게 배제하는 데서 나온다.
"여기, 여기, 그리고 여기."
"호수나 큰 냇물이 있어야 하는데."
지도에 점 세 개 찍었다. 바칸 일행이 살던 마을보다도 더 동쪽에 있는 지역들이었다.
예전에 야만족의 침입이 잦아서 베르크가 가장 동쪽에 있는 마을이었다. 수십 년 전부터 야만족의 공격이 뜸해지면서 서서히 베르크 동쪽에도 마을이 생겼다. 그러나 마을 만들고 유지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어서 큰 변화는 없었다.
십여 년 전 바하가 번창하여 재물이 넘쳐나면서부터 마을 생기는 속도가 조금씩 빨라졌다. 수많은 사람이 비나크 지역으로 몰려와 마을을 만들었다.
아직도 마을이 없는 곳이라면 농지가 부족하거나 식수가 적거나 맹수나 몬스터가 들끓거나. 아니면 길이 너무 불편하거나. 뭐든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대장, 문 열어."
"미클?"
톰슨이 달려가서 문을 열었다. 거리가 꽤 먼데도 미클의 다급한 마음이 똑똑히 느껴졌다.
"다미앙이 몰래 알려준 소식이야. 바하 영주가 무사를 보냈어. 대장과 존을 죽이려고."
"떠버리는?"
"떠버리는 바하에 있어. 다미앙이 떠버리를 보호할 거야."
"짐 정리해.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일단 여길 떠나야겠다."
짐을 거의 정리했을 때 톰슨이 서서히 접근하는 살기를 느꼈다.
"대장, 온 거 같아."
바칸은 생각을 정리했다.
어차피 계약서가 있는 건 아니니 바하 영주가 약속을 어기면 답이 없다. 단순히 잔금 주기 싫어서라면 무사를 보낼 필요도 없이 그저 안 주면 된다.
바하 영주가 작심하고 떼먹으면 바칸이 아무리 억울해도 받아낼 방법이 없다.
'비밀 지키려는 건가? 어차피 베르크 자작이 눈치챘을 가능성이 큰데?'
이미 들켰을 수도 있고, 어차피 바하의 지원을 받아야 하기에 들키는 건 시간문제다.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보여주자.'
바칸은 지금 영주성으로 달려오는 자들을 전부 죽여 바하 영주에게 경고할 작정이다. 바칸을 죽여야만 하는 절박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면 경고를 알아듣고 포기했으면 싶었다.
"미클, 톰슨. 뒷문으로 마을을 떠나. 일단 늪지로 가서 드워프와 합류해. 그리고 바로 고블린 산으로 가."
"대장은?"
"난 존이랑 할 일이 있어. 일 마치고 고블린 산에 가서 합류할게."
톰슨은 남아서 함께 싸우려 했지만, 힘만 세고 싸우는 법을 잘 모르는 두 드워프와 오크 한 마리 제대로 상대 못 하는 미클은 톰슨의 보호가 필요했다.
둘이 떠나자 바칸과 존은 영주성 정문을 활짝 열어놓고 적을 맞이했다.
"맞다. 그놈들이다."
무사 중에 바칸과 존의 얼굴을 아는 자가 있는 듯했다.
"너희는 덩치 큰 놈을 맡아라."
검을 든 자가 바칸을 향해 달렸다. 남은 자들은 존에게 달려들었다.
무사의 검이 바칸 목을 찔렀다. 바칸이 갑자기 정면에서 달려드는 바람에 베기를 펼칠 겨를이 없었다.
바칸은 몸을 살짝 젖히면서 주먹으로 검 면을 타격했다. 타이밍이 느리거나 힘이 부족하면 죽지 않더라도 검에 베일 위험한 선택이었다.
'브레이크 메탈.'
아직 제대로 익히지 못해 상대 검은 무사했다. 제대로 익혔으면 검이 깨졌을 것이다. 브레이크 메탈은 금속으로 된 물건을 파괴하는 기술로 마땅히 연습할 방법이 없어서 지금껏 몇 번 펼쳐보지 못했다.
그러나 무사한 건 검뿐이었다. 검 면을 타고 흐른 강한 진동이 검 자루를 무사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했다.
'브레이크 브레스.'
상대가 갑옷을 입었기에 횡격막 대신 목을 쳤다. 횡격막보다 지속 기간이 짧고 맹수나 몬스터한테는 잘 안 먹힌다. 그러나 인간 상대로는 충분했다.
바칸은 바닥에 주저앉는 상대의 턱을 걷어찼다. 짬을 내서 고개를 돌려보니 존도 벌써 머리 두 개 터뜨렸다.
바칸은 바닥에 떨어진 검을 주워 상대 목에 꽂아 넣었다. 검을 뽑고 몸을 돌렸을 땐 존 곁에 시체가 네 구로 늘었다.
'예전보다 빠르다.'
존은 힘엔 큰 변화가 없었으나 동작이 부드럽고 빨라졌다.
바칸은 제국에서 만든 것으로 추정하는 날이 긴 검을 들고 존을 포위한 자 중 하나의 등을 찔렀다. 검이 살에 박히는 느낌은 주먹으로 때릴 때와 달랐다.
'검은 나랑 안 맞는구나. 역시 주먹으로 때릴 때가 편해.'
"대장, 우리 진짜 강해졌어."
12명이나 되는 자들을 다 해치우는 데 겨우 3분 정도만 걸렸다. 하나도 안 놓치려고 존이 문을 지키고 바칸 혼자서 도망 다니는 자들을 쫓은 탓이었다. 그게 아니었으면 아마 1분도 안 걸렸을 것이다.
"돈만 챙겨."
갑옷이나 신발도 챙기고 싶었지만, 빠르게 움직여야 하기에 포기했다.
"존, 우리 둘은 베르크로 간다."
"거기 가면 안 된다고 했잖아."
붉은 보석으로 벌어진 일 때문에 바칸은 일행에게 절대 베르크 마을로 가지 말라고 당부했었다.
"바하 영주랑 베르크 자작이랑 싸움 붙여야겠어."
바하 영주에게 직접 복수하기엔 힘이 약하다. 후환이 걱정되기도 하여 베르크 자작을 이용해 바하 영주를 귀찮게 굴 생각이다.
시체를 털어 돈주머니만 챙긴 둘은 밖으로 나왔다.
"바하 영주가 내 마을을 빼앗으려고 무사를 보냈다. 다들 도망쳐. 또 올 거야."
일꾼들에게 외친 바칸은 존과 함께 마을 정문으로 떠났다. 눈치만 보던 일꾼들은 바칸과 존이 떠나자마자 바로 움직였다. 일부 일꾼은 창고 문을 부수고 쌀과 고기 등을 메고 도망쳤고 몇몇은 영주성에 들어가서 죽은 무사들 갑옷과 옷 그리고 신발을 벗기고 무기도 챙겼다.
"대장. 바하 영주가 돈 주기 싫어서 저러는 거 아닐까?"
"에이, 설마. 고작 2백 골드가 아까워서?"
존이 우연히 찾은 정답을 바칸이 극력 부정했다.
- 작가의말
사냥이 끝나면 개를 삶는 이유 : 사룟값 아끼려고.
브레이크 메탈 - 파견 - 破堅
깨뜨릴 破에 단단할 堅
특징 : 회사원이 해외 브레이크 메탈 명령을 받으면 대부분 브레이크 멘탈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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