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명적 사고
반 정도 남은 해적 무리를 본 보나비치는 기분이 묘했다.
자신이 높게 평가한 바칸이 해적에게 당하지 않은 건 다행이다 싶었다. 그러나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독종들이 풀 죽고 겁에 질린 모습을 보니 조금 걱정되기도 했다.
두 무리가 붙어 혼자 살아남아도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즐겁게 돌아가는 게 해적이다. 목뼈가 꺾여도 마음은 쉬이 안 꺾이는 종자들인데, 어떻게 당했는지 기세가 처음 같지 않았다.
제국이었으면 현역에서 물러났을 늙은 사냥개가 앞장섰다. 느리지 않은 걸음으로 달리던 사냥개가 갑자기 멈춰서 보나비치를 쳐다봤다.
"시체다."
해적 셋의 시체가 있었다.
"수습해라."
두목의 명령에 해적이 앞으로 나섰다. 그러나 곧 보나비치의 제지를 받았다.
"멈춰라. 무기까지 두고 간 걸 보면 함정이다."
"함정이라면 깨면 된다."
해적 두목이 직접 몽둥이를 들고 나섰다. 바닥을 툭툭 건드려 다섯 개나 되는 함정을 무력화한 두목은 보나비치에게 도전적인 눈빛을 보냈다.
"급하다. 빨리 끝내라."
두목은 시체 주변도 몽둥이로 툭툭 건드렸다. 아무 반응도 없는 걸 확인한 후 다가가서 휜 칼을 집어 들었다.
"갑옷 벗겨라."
다른 건 포기해도 무기와 갑옷은 꼭 챙겨야 했다. 제작 기술이 낙후한 해적에겐 좋은 갑옷이나 무기가 무엇보다 소중했다.
갑옷을 벗기려고 시체 하나 들어 올리는데 쉭 소리가 났다. 채찍이 허공을 때리는 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허공에서 역한 냄새를 풍기는 음식이 떨어졌다.
시체에 눌렸던 끈이 풀리면서 마지막 함정이 발동한 것이었다. 시체 주변에 설치한 함정은 눈가림이나 다름없었고 이게 메인이었다.
"이건 뭐지?"
보나비치의 질문에 해적 두목이 빠르게 대답했다.
"이 냄새는 오크를 부른다. 빨리 개울로 돌아가서 냄새를 없애야 한다."
"돌아간다."
일행은 황급히 개울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옷과 갑옷에 묻은 음식을 깨끗이 씻고 몸도 빡빡 문질러 악취를 없앴다.
그러나 이미 냄새를 맡고 달려온 오크들에게 발각되었다. 치명적인 향기를 참지 못한 오크들은 바로 덤비지 않고 냄새를 강하게 풍기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아무리 멍청이 오크라고 해도 보나비치 일행을 봤던 사실을 금세 잊어버릴 정도는 아니었다.
음식과 세 해적을 말끔히 먹어 치운 오크들이 보나비치 일행에게 덤볐다. 보나비치는 잠깐 고민하다가 사냥개를 안고 앞으로 뛰쳐나갔다.
어느새 뽑은 제국검이 오크 세 마리를 한꺼번에 베어버렸다. 마나를 이용해 신체 능력을 극대화한 보나비치는 빠르게 오크 무리를 돌파하고 시체가 있던 곳으로 달렸다.
"저 새끼 뭐야?"
"우릴 버리고 도망친 거 같은데?"
오크들은 빠르게 도망가는 보나비치보다 남은 자들에게 흥미가 더 컸다. 백 마리가 넘은 오크에게 포위당한 해적과 보나비치 부하들의 눈엔 절망밖에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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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칸 일행을 따라잡은 보나비치는 다짜고짜 검을 뽑아 덮쳤다. 여전히 나무가 빽빽하여 가로베기 같은 공격은 펼칠 수 없다. 그러나 찌르기나 내려치기는 딱히 제한이 없었다.
"도망쳐. 나랑 존이 막는다."
"도치. 뒤로 물러나."
톰슨이 두 드워프를 데리고 앞으로 달렸다. 도치라고 불린 사냥개도 보나비치의 분부대로 뒤로 물러나 숲에 몸을 숨겼다.
"존, 피해."
메이스로 검을 막는 존에게 바칸이 소리 질렀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존이 무척이나 아끼던 메이스는 보나비치의 검에 잘려 동강이 났다.
바칸은 보나비치에게 접근해 주먹을 휘둘렀다. 검을 회수하기엔 늦었다는 판단에 보나비치는 갑옷 방어술로 막았다. 전과 달리 주먹이 갑옷과 충돌한 후 나는 소리가 달랐다.
바칸은 브레이크 메탈과 브레이크 브레스를 결합했고 해적 상대로 효용성도 검증했다. 힘을 갑옷에 쏟기보다 안으로 전달하는 데 주력했기에 다소 묵직한 소리가 났다.
안타깝게도 금속 갑옷이 절반 이상의 충격을 흡수한 것도 있고 보나비치가 마나 수련자로서 맷집이 좋은 것도 있어서 공격이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래도 보나비치의 경각심을 다시 일깨워줘서 함부로 덤비지 못하게 하는 효과는 있었다.
"텨."
급한 나머지 바칸은 튀어를 한 글자로 줄여버렸다. 존은 메이스 손잡이를 보나비치에게 힘껏 던지고 몸을 돌렸다.
아끼던 메이스를 잃은 것 때문에 화가 한껏 났는지 숨이 무척이나 거칠었다. 바칸을 비롯한 다른 사람을 생각하지 않았다면 보나비치와 죽기 살기로 싸웠을 것이다.
"도치, 따라와."
보나비치는 바칸과 존을 시야에 둔 채 간격을 유지하고 쫓았다. 영리한 사냥개는 보나비치에게 조금 뒤처져서 달렸다.
보나비치는 마나를 돌려 육체 능력을 극대화했다. 도망 다니느라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한 두 도망자보다 더 빨랐다.
보나비치가 어느 정도로 가까워졌을 때 바칸과 존이 갑자기 방향을 90도로 꺾었다. 보나비치도 바로 방향을 꺾었다.
툭 소리와 함께 밧줄이 보나비치 발목을 졸랐다. 보나비치가 함정이 있는 곳을 밟지 않을 것으로 판단한 바칸이 기지를 발휘해 유인한 거였다.
보나비치는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검을 뽑아 밧줄을 잘랐다. 다행히 두 드워프가 급하게 설치하느라 나무창을 비롯한 후속 조치는 없었다.
땅에 떨어진 보나비치는 살짝 호흡을 고른 다음 박차고 일어났다.
"도치, 쫓아."
짧은 사이에 바칸과 존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사냥개를 앞세우자 기척을 죽이고 숨어있던 둘은 바로 모습을 드러내며 도망쳤다.
"도치, 따라와."
사냥개는 옆으로 길을 비켜준 다음 보나비치 뒤를 따랐다.
추격전은 2시간 후에 끝났다. 점점 나무가 듬성듬성해지고 바닥이 단단해지더니 갑자기 숲이 끝나고 바위산이 나타났다.
바칸 일행 다섯은 헐떡이는 숨을 가라앉히며 보나비치를 기다렸다. 확 트인 곳에선 마나를 이용해 급가속하는 보나비치의 기동력이 절대적 우위다.
사로잡으려는 게 아니라 그저 죽이려는 것이기에 보나비치는 힘 조절할 필요도 없다. 도망 다니면 하나씩 보나비치 손에 죽을 가능성이 크니 차라리 맞서기로 했다.
보나비치 역시 멈춰서 숨을 골랐다. 오크를 부르는 함정이 성공했는지 바칸 일행은 모른다. 양쪽으로 포위당할 염려에 숲으로 돌아가지 못할 거라고 판단한 보나비치는 지친 몸도 회복할 겸 거칠게 날뛰는 마나를 다독였다.
"보나비치. 원하는 게 뭐야?"
"네 목숨. 문서 따위는 네가 죽으면 아무 효용도 없다. 문서 줄 테니 목숨 살려달라는 개소린 집어쳐."
"이 경우 없는 새끼가. 목숨 걸게 만드네."
바칸이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싸움을 준비했다. 싸우는 기술은 몰라도 힘이 장사인 두 드워프가 있고 마나를 사용한 보나비치와 힘이 비슷하게 센 존도 있다. 재생력이 뛰어나 요해만 조심하면 쉽게 안 죽는 자신도 있고, 두 드워프 뒤에 숨어서 몰래 화살을 깎는 톰슨도 있다.
그러나 보나비치를 반드시 이긴다는 자신감은 없었다.
세븐 브레이크는 일곱 개 기술이 있다. 바칸이 능숙하게 사용하는 건 브레이크 하트와 브레이크 브레스다. 브레이크 본이나 브레이크 센스는 자주 펼치진 않았지만, 자신 있는 기술이다.
브레이크 메탈은 영주성에 있을 때 꽤 연습했다. 이름엔 메탈이라고 달았지만, 금속뿐 아니라 단단한 물건을 깨는 용도다. 영주성의 돌로 된 건물들은 연습에 딱 좋았다.
남은 둘은 이해조차 못 했다. 하나는 브레이크 커널이라는, 명치 부근에 있는 중요한 급소를 파괴하는 기술이다. 그리고 브레이크 소울 역시 어떻게 하는 건지 감도 잡지 못했다.
'브레이크 센스로 감각을 흔들어야 한다. 나머진 전혀 안 먹힌다.'
안타깝게도 뇌를 흔드는 턱이나 달팽이관에 충격을 전하는 뺨은 투구로 보호되었다. 바칸이 유일하게 노릴 수 있는 건 꼬리뼈다.
'쉽게 뒤를 내주지 않을 텐데.'
보나비치는 쉬면서도 수시로 고개를 돌려 숲을 바라봤다.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시늉을 하여 바칸 일행에게 심리적 압박감을 줬다.
"다들 잘 들어. 기회는 한 번이야. 실패하면 우린 죽어."
모두 비장한 눈빛으로 바칸의 지시를 기다렸다.
"어차피 실패하면 죽을 거 난 공격에 목숨을 걸 생각이야. 내가 기회를 만들면 너흰 꼭 잡아. 저놈이 안 죽으면 우리가 죽으니까 목숨 걸라고."
바칸 일행이 먼저 움직였다. 바칸이 앞장서고 존이 바로 뒤를 따랐다. 그 뒤엔 두 드워프가 있었다. 싸우는 기술을 모르는 둘은 기회만 되면 보나비치의 팔이든 다리든 잡고 늘어지기로 했다.
가장 뒤엔 석궁에 화살 하나 장전한 톰슨이 따랐다.
'아니다. 브레이크 하트다.'
브레이크 메탈에 브레이크 브레스를 섞어서 투구를 공격하려던 바칸은 생각을 바꿨다. 감각이 흐려졌다고 쳐도 보나비치는 큰 문제가 없다. 검을 마구잡이로 휘둘러 감각이 돌아올 때까지 버티면 된다.
심장에 타격이 전해지면 상대는 육체 능력이 하락한다. 지금까지 해치웠던 상대와 달리 보나비치가 회복한다고 하더라도, 회복하기까지 자기 실력을 모두 발휘하지 못한다.
"존."
바칸은 비수를 보나비치 하체로 던졌다. 보나비치는 검을 잡지 않은 왼손으로 비수를 쳤다. 동시에 존의 철퇴가 보나비치의 머리로 떨어졌다.
철퇴는 보통 장병기다. 그러나 존이 든 건 머리는 철퇴와 같아도 자루는 무척 짧은 변종이었다. 자루가 짧아서 철퇴에 힘이 제대로 실리지 않는 단점이 있다.
존은 뛰어난 힘으로 타격이 약한 약점을 극복했고 궤도가 작아 공격 속도가 현저히 빠른 장점을 얻었다.
보나비치는 감히 경시하지 못하고 검을 휘두르는 팔에 힘줬다. 검과 부딪힌 철퇴가 쓱 베어지자 보나비치는 큰 시름 놨다. 존이 마나를 익히지 않았다는 확신이 들면서 긴장이 한순간 풀렸다.
그때, 비수를 던지고 옆으로 비키는 척하던 바칸이 움직였다. 오른손으론 보나비치의 왼팔을 눌러 방어하지 못하게 하고 왼 주먹으로 심장 위치를 때렸다. 최근 가장 열심히 연습한 브레이크 메탈과 전부터 능숙히 펼치던 브레이크 하트가 합쳐지며 보나비치의 심장에 강한 충격을 줬다.
"컥."
피가 정맥으로 역류하는 기분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금속 갑옷의 보호가 아니었으면 역류를 막는 판이 찢어져서 어떻게든 죽었겠지만, 보나비치는 운 좋게 목숨을 부지했다. 타격받은 심장도 마나의 치료로 곧 회복할 거다.
그러나 잠깐의 경직이 바칸 일행에겐 기회가 되었다. 두 드워프는 동작이 느려진 보나비치에게 달려가서 육중한 몸으로 부딪쳐 함께 쓰러뜨렸다.
땅에 쓰러진 보나비치는 검을 들어 몸에 올라타려는 존을 공격했다. 존은 바칸의 공격이 적중하자 보나비치가 움직일 힘도 없을 거로 예상했다. 그래서 서둘러 몸에 올라타서 양팔을 봉인하려 했는데, 보나비치가 받은 타격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약했다.
"존!"
바칸이 몸을 던져 존에게 부딪혔다. 존의 육중한 몸이 바칸과 부딪힌 후 튕겼다. 보나비치가 내지른 검은 존을 밀쳐낸 바칸 옆구리를 베었다.
고래 가죽으로 만든 튼튼한 가죽 갑옷도 마나를 익힌 기사 앞에선 아무 소용 없었다.
"죽어!"
톰슨이 침착하게 석궁 방아쇠를 당겼다. 처음 보는 물건이지만, 보나비치는 자기 다리에 화살을 꽂았던 물건임을 확신했다.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지만, 어느새 양팔을 누른 드워프들 때문에 꼼짝할 수 없었다.
툭.
탄성이 좋은 힘줄을 꼬아서 만든 석궁 줄이 끊어졌다.
- 작가의말
브레이크 세븐의 마지막 두 기술.
브레이크 커널 - 진단 - 震丹
울릴 震 구슬 丹
특징 : 이름만 듣고 파이어 에그를 수비하는 멍청이가 있는데, 실상은 동대륙에서 단전이라고 부르는 중요한 혈도를 파괴하는 기술.
브레이크 소울 - 파혼 - 破魂
깨트릴 破 넋 魂
특징1 : 이혼 대법과 쌍벽을 이루며 연예인들에겐 특히 치명타였다고 한다.
특징2 : 동대륙의 작은 반도 나라에 얼간권이라는 파생 무공이 있다. 얼간권에 당한 자는 얼이 가버린 놈이라고 해서 얼간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평범한 직업을 갖기 어려워 주로 정치인을 한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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