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제단
바칸이 눈을 떴을 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다. 태양의 눈물에서 짠 기름을 조금 묻힌 횃불이 길을 환하게 밝혔다.
일행은 꽤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바르카사는 바르킹 등에 업혀 코까지 골며 자고 있었고 바칸은 마르카 등에 업혀있었다.
태양의 눈물이 엄청 뜨겁게 타는데도 나무는 멀쩡했다. 해적섬 북부의 나무는 불에 타지 않고 눈을 녹여 먹으면 몸이 아프다. 마실 수 있는 샘이 가끔 있는데 그건 맹수나 몬스터들이 차지했다.
태양의 눈물과 얼음섬 아니었으면 여기 사람들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내려줘."
바칸의 요청에 마르카가 바칸을 내렸다. 바칸이 직접 뛰니 일행의 속도가 조금 빨라졌다.
"밤은 안전하다. 지금 빨리 가야 한다."
언데드는 밤에 움직이지 않는다. 바칸은 하늘을 바라봤다. 있는지 없는지 모를 정도로 희미한 눈썹달이 어렴풋이 떠 있었다.
"돌 가지고 돌아갈 때 가장 위험하다. 맹수가 찾아온다."
'점심에 숲에 진입. 덜 위험한 지역을 싸우면서 돌파. 달조차 거의 없는 밤에 숲을 빠르게 달려 돌이 많은 지역에 간다. 돌 적당히 찾고 밖으로 나간다. 날이 밝으면 언데드가 태양의 눈물을 발견하고 모여든다. 그걸 물리치고 비밀의 숲을 벗어나야 성공이다.'
바칸은 바르 부족이 태양의 눈물을 얻어내는 과정을 대충 유추했다.
"바르킹. 다른 데 가서 살 생각 없어? 춥지도 않고 먹을 것도 많은 곳."
"바후 부족이 없으면 우린 아이 없다."
바후 부족은 여인만 있다. 다른 부족은 고기와 가죽 그리고 태양의 눈물을 주고 바후 부족에 머문다. 바후 부족은 3일이면 아이를 낳는다. 아이가 여자면 바후 부족에 남고 남자면 아버지를 따라 떠난다.
바후 부족이 아니면 이들은 아이를 낳을 수 없다. 그래서 이곳을 떠나 다른 곳에 살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마르카와 바르킹이 바르카사를 번갈아 업으며 뛰었다. 존 역시 마나 수련 덕분에 체력이 조금 나아져서 이 악물고 끝까지 버텼다.
태양의 눈물을 쉽게 찾을 수 있는 지역에 도착하고 나서 횃불을 네 개 더 만들었다.
"흩어지자. 내가 소리 지르면 여기로 다시 모인다."
바르킹과 마르카가 횃불 하나씩 들고 먼저 떠났다.
"존, 넌 요 주변만 돌아. 바르카사도 지키고 휴식도 좀 하고."
숨을 헐떡이는 존은 휴식하게 하고 바칸과 톰슨도 횃불 들고 흩어졌다.
'사람 손을 탄 곳이다. 죽음을 노래하는 자의 영지인가?'
숲 사이사이에 있는 공터마다 인위적인 흔적이 조금씩 보였다. 바칸은 빠르게 달리며 돌을 찾았다.
한두 개로 만족할 게 아니기에 돌이 무더기로 있는 곳을 찾으려고 세세히 살피지 않았다.
덕분에 해적섬 북부 부족들의 발길이 한 번도 닿지 않은 깊은 곳까지 들어갔다.
'뭐지?'
교단에 있는 신의 제단과 비슷한 구조물이었다. 그림 혹은 글자로 추측되는 문양도 있었다. 바칸은 횃불을 가져다가 구조물을 자세히 살폈다.
'어디서 본 거 같은데?'
구조물에 특별한 문양 하나 찍혀있었다. 문양을 바라볼 때마다 바칸 머리가 간질간질했다. 바칸은 자세히 살피려고 가까이 다가갔다. 뭔지 알 것 같은데 떠오르지 않는 안타까움에 짜증이 확 일었다.
그때,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며 이명이 들리더니 환각이 보였다.
수많은 사람이 제단을 에워싸고 돌면서 노래인지 시인지 헷갈릴 모호한 운율로 기도문을 읊었다. 경건함보다는 간절함이 더 느껴졌다. 저들은 짧은 기도문을 끊임없이 반복하기만 했다.
"커, 컥."
기도문에 집중하는데 갑자기 몸이 뒤틀리는 느낌에 숨도 가빴다. 머릿속에 문양과 관련한 지식이 떠올랐다. 구체적이진 않지만, 중요한 지식이었다.
"태양신의 제단."
가쁜 숨을 애써 가다듬은 바칸은 제단을 천천히 돌면서 기도문을 외웠다. 바칸이 정확하게 외웠는지 채 세 바퀴도 돌기 전에 제단이 반응을 보였다.
바칸은 조금 물러서서 벅찬 마음으로 벌어질 일을 기대했다.
제단에서 파도가 절벽을 치는 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왔다. 이어서 그르렁그르렁 코 고는 듯한 소리도 요란하게 들렸다.
소리가 갑자기 멈추더니 제단이 정확히 반으로 천천히 갈라졌다. 제단은 점점 커지는 틈으로 얼음처럼 보이는 덩어리를 연신 뱉어냈다.
'이게 진짜야. 태양의 눈물은 찌꺼기 같은 거였어.'
주먹 크기의 덩어리 수십 개 뱉어낸 제단이 서서히 닫혔다. 바칸은 황급히 들고 온 주머니에 덩어리를 담았다.
끝인 줄 알았는데 제단이 거의 닫힐 때 갑자기 태양의 눈물이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바칸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준비한 여분의 자루에 태양의 눈물도 모조리 쓸어 담았다.
'여기서 나온 태양의 눈물이 언데드를 거쳐서 비밀의 숲 곳곳으로 퍼졌구나. 외곽의 돌은 언데드가 사라지고 남은 거겠지.'
바칸의 추측은 대충 들어맞았다. 정확히는 태양의 눈물을 삼킨 언데드가 소화하지 못한 채 썩어 사라지고 돌만 남았다.
태양의 눈물을 가득 담은 자루도 등에 멘 바칸은 존이 있던 곳으로 달렸다. 약속한 곳에 도착했을 땐 이미 다른 사람 모두 모여서 바칸을 찾고 있었다.
아직 교류가 원활하지 않지만, 바칸은 바르킹의 표정에서 예상 시간보다 훨씬 늦게 도착했음을 알았다.
"뛰면서 말한다."
바칸은 태양의 눈물을 담은 자루를 톰슨에게 주고 투명한 돌을 담은 자루를 몸에 꽉 묶었다.
"돌이 가득한 곳을 찾았다. 절반 바르킹 준다."
바르킹은 솥뚜껑 같은 손으로 바칸 어깨를 힘차게 두드려 고마움을 표했다.
"바후 가서 아이 만든다. 고기 많다. 물 많다. 바르 강해진다."
그러나 기뻐하기엔 아직 일렀다. 바칸이 시간을 지체한 탓에 비밀의 숲을 채 벗어나기 전에 날이 밝았다. 언데드들이 태양의 눈물 냄새를 맡고 몰려왔다.
"톰슨, 돌을 넘겨."
바르킹이 태양의 눈물을 등에 멨다. 마르카는 바르카사를 업고 바르킹 옆에서 달렸다. 존은 앞에서 달리며 길을 막는 언데드를 치웠다.
"자, 감각 동기화 시작한다."
톰슨과 바칸만 할 수 있는 일이다. 다른 사람은 톰슨이 보낸 감각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다.
바르킹을 덮치던 꼬리 세 갈래인 산양이 바칸 주먹에 왼쪽 목을 맞고 쓰러졌다. 몇 호흡 뒤에 펑 터지는 소리가 울렸다.
"존, 왼쪽 놈 때려."
바칸과 톰슨이 동시에 외쳤다. 이건 반대로 바칸이 톰슨에게 영향 준 거였다. 바칸 머리에서 한 생각을 톰슨이 함께 외쳐버렸다.
왼쪽에 이빨 기다란 호랑이를 닮은 맹수가 존의 낭아봉에 맞고 주춤했다. 아파서가 아니라 힘이 너무 강해서였다. 바칸한테 무기 다루는 법을 배운 존은 낭아봉을 이용해 자신이 갖춘 힘보다 훨씬 큰 힘을 발휘했다.
오른쪽에서 뛰어오던 사슴이 옆구리 위치에 주먹 하나 얻어맞고 버둥거렸다. 바칸은 빠르게 이빨 호랑이의 왼쪽 몸통으로 돌아갔다. 둘이 동시에 덮치는데 이빨 호랑이는 핵이 반대편에 있었다. 덕분에 이빨 호랑이는 사슴보다 조금 더 '살'았다.
"대장, 어떻게 한 거야?"
존은 자신의 낭아봉에도 끄떡없던 이빨 호랑이가 바칸의 주먹에 쉽게 죽는 게 너무 궁금했다.
"가장 강한 곳을 파괴하면 돼. 너도 마나 익혔으니 정신 집중하면 찾아낼 수 있을 거야."
"대장, 나무 위 원숭이다."
원숭이라고 하기엔 너무 크고 흉악한 놈이었다. 다듬지 않아 이리저리 말라붙은 털을 보니 언데드가 된 지 꽤 오랜 것 같았다.
"강한 적이다."
마르카가 도끼를 든 손에 힘을 꽉 줬다. 기세 따위는 느껴지지 않는데도 마르카는 상대의 강함을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핵이 세 개.'
바칸은 몸을 날려 나무에서 뛰어내리는 원숭이 오른쪽 어깨를 때렸다. 핵이 하나 부서지자 원숭이가 바닥을 뒹굴었다. 언데드여서 통증을 못 느낄 테니 핵이 부서진 여파로 신체 제어가 잠깐 풀린 듯했다.
바칸 역시 원숭이에게 얻어맞고 숨이 잠깐 막혔다. 금속 갑옷 아니었으면 최소 갈비뼈는 다 부러졌을 것이다.
숨을 조금씩 회복하는데 원숭이가 벌떡 일어났다. 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바칸을 쏘아보더니 몸을 돌려 도망쳤다.
"뛰자."
바칸을 도우려고 멈췄던 일행이 다시 뛰었다. 비밀의 숲을 가장 많이 방문한 바르킹이 방향을 지시했다. 마르카는 마르카가 된 다음부터 비밀의 숲을 출입했지만, 바르킹은 바르카사 때부터 비밀의 숲을 드나들었다.
"뱀. 대장, 뱀이다."
"저건 구렁이야. 뱀 아니고."
길이가 20미터 정도 되는 커다란 구렁이였다. 이빨 길이가 40센티에 육박했고 목 부위가 다른 곳보다 훨씬 굵었다.
"저건 방패 구렁이야. 목에 방패를 넣은 것처럼 생겼잖아."
바칸은 방패 구렁이를 공격하지 않았다. 살았을 때도 느린 구렁이인데 언데드가 되며 몸이 뻣뻣해지는 바람에 움직임이 몹시 굼떴다.
구렁이 다음으로도 태양의 눈물에 끌려온 언데드 여러 마리 해치웠다. 날이 밝고 2시간 조금 더 달려서 드디어 비밀의 숲을 벗어났다.
"여긴 안전하다. 아무것도 없다."
비밀의 숲 경계에는 언데드도 없고 살아있는 맹수도 없었다. 안 그래도 잔뜩 지친 일행은 멈춰서 물을 마시고 쥐고기와 카쿠로 배를 채우기로 했다.
그때 바르카사가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바칸, 무사해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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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 부족의 어른과 아이들이 눈물을 흘리며 바칸 일행을 배웅했다. 바칸은 배에 실은 보트 중에서 가장 큰 걸 바르 부족에 선물로 줬다. 그리고 그물도 하나 선물했다.
해류에 쓸리면 위험한 건 똑같으니 멀리 나가지 말고 가까운 곳에서 고기 잡으라고 알려줬다. 어른이 타기엔 보트가 조금 협소한 감이 있어 아이들이 물고기 포획의 중임을 맡았다.
물론, 아이라고 해도 웬만하면 덩치가 톰슨 정도는 되었다.
"자, 동쪽으로 간다."
허풍쟁이 선장은 다음 목적지와 반대되는 동쪽으로 배를 몰았다. 동쪽에 가서 순환 해류를 타고 남쪽으로 빠르게 갈 작정이다. 병사들이 노를 열심히 저었다.
"오르혼, 여긴 갭릴이다. 둘이 친하게 지내야 해. 서로 말도 가르치고 말이야."
오르혼은 마르카의 아들이다. 다음 마르카 유력 후보인데 바칸한테서 맹수 쉽게 잡는 기술 배우라고 보냈다.
"가드. 오르혼은 이제 6살이야. 그러니 형인 네가 잘 보살펴야 한다."
가드는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영민한 편은 아니지만, 영주 호위대 대장이라는 직책에 걸맞은 모습을 보이려고 무척이나 노력했다.
영지의 웬만한 어른보다도 훨씬 어른스러웠다.
"오르혼, 난 자이르. 자이르 형이야. 우리 친하게 지내자."
자이르가 까치발을 들고 오르혼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르혼은 순하게 웃으면서 자이르 겨드랑이에 손을 넣고 번쩍 들어 올렸다. 공중에 들린 자이르는 간지럼을 못 참고 웃으며 발버둥 쳤다. 오르혼은 자이르가 좋아서 웃는 줄 알고 더 높이 들었다.
갑판 한쪽에는 존이 근육을 단련했다. 마르카와 팔씨름에서 진 존은 마음이 크게 상했다. 보나비치한테도 진 적이 있지만, 상대는 마나 수련법을 익힌 제국 기사였다.
마르카하고는 순수한 힘으로 졌다. 헤어질 때까지 한 번도 못 이긴 건 정말 분했다.
톰슨은 강부리한테 먹이를 먹였다. 신선한 고기만 먹는 강부리여서 물고기를 잡아 뼈를 바른 다음 생살을 먹여야 했다. 아직 목구멍이 여려서 고기 가시를 조심해야 했다.
바칸은 방에서 홀로 고민하며 기존에 세웠던 계획을 수정했다. 이번 해적섬 방문에서 얻은 수확은 예상보다 훨씬 컸다.
- 작가의말
핵이 여러 개인 놈은 머리도 씁니다. 물러설 줄도 알고요.
해적섬 북부 부족은 남녀공학이 아닙니다. 여자들은 한 부족으로 모여 살고 남자들은 여러 부족으로 흩어져 삽니다. 관련 설정은 후에 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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