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각 무역
배가 마르카다에 도착했을 땐 4월 초였다.
제국이나 왕국에선 사람과 재화가 도시로 모인다. 세상의 변화를 가장 빠르게 느낄 수 있는 곳이 도시고 부랑자가 부호가 될 가능성을 품은 게 도시다.
도시는 활력을 유지하기 위해 돈에 관련한 것은 엄격한 법을 만들어 보호한다. 사기나 강도 등이 없는 건 아니지만, 사람들이 도시를 외면할 정도의 범죄는 철저히 단속한다. 사람과 재화가 끊임없이 돌아야 명맥을 유지할 수 있는 곳이 도시다.
초원과 사막과 황무지가 대부분인 야만족의 거주지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오아시스에서 엄격한 법을 통해 물과 나무와 풀을 보호하고 사람을 보호했다.
수백 년 전 제국과 왕국 군대가 야만족의 땅에 침략하고 도시를 세웠다. 강과 바다와 대규모 평야를 낀 마르카다가 생겼다. 마르카다는 도시의 법과 오아시스의 법을 모두 준수했다. 마르카다에서 사람 사이의 분쟁은 결투를 통해 해결해야 하고 강과 바다와 숲 등에 누구도 소유권을 주장하지 못한다.
"도시라고 해서 기대했는데."
약간 심통 난 말투였다. 처음 하는 도시 구경에 흥분했던 비나크 촌놈들은 크게 실망했다. 특히 전날부터 잠도 안 자고 기대했던 존이 가장 그랬다.
"크기는 내가 지금까지 본 도시 중에서 가장 커."
허풍쟁이 선장이 말했다. 한때는 차가운 바다를 통해 왕국 및 제국과 무역하던 도시다. 최소 야만족의 1/5이 이 항구 도시를 통해 물건을 팔고 사들였다.
"제국과 왕국 인구가 많아지면서 자기들 먹을 식량도 부족했다. 그래서 점점 무역이 끊긴 거야. 이들은 돈 말고 식량을 원했거든. 제국이나 왕국에 식량이 크게 남아돌아야 계속 무역할 수 있지. 그래서 도시엔 바다와 강 그리고 숲을 통해 먹여 살릴 수 있는 정도의 사람만 남은 거야."
부두에도 사람이 별로 없었고 가까운 거리에도 행인이 드물었다. 일행이 상상했던 도시와는 너무 달랐다.
"톰슨, 강부리 날려."
톰슨의 지시를 받은 강부리가 배에서 날아올랐다. 매일이다시피 신선한 양젖과 연한 쥐고기로 포식한 강부리는 엄청 빠르게 자랐다. 고기야 어미 보살핌을 받아도 배불리 먹는 건 마찬가진데 양젖은 흰머리수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귀한 음식이다.
날개를 한껏 벌리면 2미터는 되는 새끼 흰머리수리가 도시 상공에 나타났다. 흰머리수리의 특별한 울음소리에 도시에 있던 사람들이 고개를 들었다.
롱가바르 부족을 비롯해 흰머리수리를 조상신으로 삼는 자들이 황급히 바닥에 엎드려 절했다.
"돌아와 돛대 꼭대기에 앉으라고 해."
흰머리수리가 돛대 꼭대기에 앉았다. 배 선창에 태운 암컷 양의 갓 짠 젖에 소금을 조금 타서 돛대의 관망대에 올렸다. 흰머리수리는 부리를 한껏 벌리고 양젖을 후룩후룩 마셨다.
반 시간도 안 되어 수백 명 사람이 항구로 몰려왔다. 이들은 붉은 나무로 만든 상에 싱싱한 고기를 올려놓았다. 상 양옆에는 동대륙의 향로를 놓고 풀잎 말린 가루에 불을 붙여 연기를 냈다.
"톰슨, 강부리 불러."
톰슨의 부름에 강부리가 돛대에서 내려왔다. 강부리가 톰슨의 품에 안기자 제사를 차리던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가서 제사상에 고기 먹고 돌아오라고 해."
강부리는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가 제사상에 있는 고기를 먹어 치웠다. 길게 찢은 고기 한끝을 물고 꿀꺽꿀꺽 삼키니 중돼지 반 마리 양은 될 것 같은 고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강부리가 고기를 먹는 사이 수백 명 사람이 엎드린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포식을 마친 강부리는 다시 날아서 뱃전에 내려앉았다.
"작은 배 내려."
바칸과 톰슨이 배에 탔다. 그리고 카쿠랑 가죽으로 만든 물건도 함께 실었다.
"여기 부족을 대표할만한 사람이 있는가?"
"나는 흘란크 부족의 부족장이다."
"나는 롱가바르 부족의 제사장이다."
둘을 제외하고도 지위가 높은 자들이 몇 명 나왔다.
"작은 선물이다."
바칸은 흰머리수리 깃털 하나씩 꽂은 가죽 모자를 이들에게 선물로 줬다. 모자를 선물로 받은 자들은 바칸과 톰슨에게 공손한 인사를 올렸다.
"여기 음식이다. 다들 맛보아라."
육식이 일상인 이들에게 쥐고기는 매력적이지 않았다. 반대로 말하면, 달면서도 짭짤한 카쿠는 이들이 혼을 쏙 빼놓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리고 이건 왕국 최고의 장인들이 만든 모자와 장갑 그리고 신발이다. 만져봐도 된다."
특별한 약물로 지방을 깔끔하게 제거하여 가죽 품질이 높았다. 가죽 재봉사들 등급을 엄격히 나누고 등급에 따른 수익 차이를 크게 냈기에 모두 열심히 일했다. 쥐 가죽이 다루기 쉬운 면도 있어서 바칸이 내놓은 모자와 장갑 그리고 신발 모두 최상의 품질을 자랑했다.
"우린 내일 떠난다. 배에 이런 물건 많으니까 집에 가서 가죽이나 약초 그리고 비싼 물건 가져와서 교역해라. 갖고 온 물건이 많지 않으니 서둘러라."
부족 책임자들이 돌아서서 각자 부족 말로 호통쳤다. 흰머리수리와 상관없는 부족들도 몰려와서 구경하다가 교역한다는 말에 부랴부랴 집으로 달려갔다.
'초원 여우 가죽, 표범 가죽, 푸른 늑대 가죽. 귀한 물건 정말 많구나.'
바칸은 귀한 물건을 골라서 받고 카쿠와 가죽 제품을 내놨다.
'카쿠만 좋아한다. 가죽 제품은 장갑만 인기 있고 모자나 신발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채 오후가 되기도 전에 교역이 끝났다. 뒤늦게 소식을 듣고 달려온 자들은 발을 구르며 후회했다.
"9월이나 10월에 또 올 것이다. 그땐 더 큰 배로 온다. 가죽과 약초 그리고 상아를 준비해라."
보트 몇 개가 부두를 왕복하며 물건을 실어 갔다. 부두는 오랜 기간 수선을 하지 않아 2천톤급의 배를 댈 만한 곳이 없었다.
"대장, 다 끝났는데 왜 안 떠나?"
"도시엔 집정관이 있어. 우리한테 세금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거야. 세금 면제한다는 문서는 받고 떠나야지. 번번이 강부리 데리고 올 순 없잖아."
저녁이 거의 될 때 집정관이 찾아왔다. 바칸은 미클이 만든 장신구 하나와 흰머리수리 깃털 세 개로 세금 면제권을 얻어냈다. 돌아가는 집정관의 마차에 카쿠 한 상자도 넣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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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 해적들이 우리랑 교역할까?"
"걱정하지 마. 먹을 걸 준다는데 안 하고 못 배겨."
배가 향한 곳은 제국의 통치를 받을 때 마르카다와 교역할 목적으로 만든 해적섬 유일의 항구 도시였다. 마르카다의 몰락과 함께 망한 도시다.
"저기가 블라우크야."
"근데 왜 블라우크 먼저 안 들렀어? 여기 더 가깝잖아."
"그땐 해적들이 몬스터랑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을 거야. 지금은 고기잡이 나갈 준비 하면서 그물 수선하고 있겠지. 그리고 이후에도 마르카다 먼저 들르고 여길 들를 거야. 마르카다에 쓸만한 물건이 여기보다 훨씬 많으니까."
커다란 배가 접근하자 부두에서 난리가 났다. 특히 바칸의 배는 비용 문제로 설계도만 존재하는 배여서 해적들에게 너무 생소했다. 이론적으로 훌륭하지만, 굳이 군함도 아닌 운송선을 저 정도 돈을 들여야 하나 싶게 만드는 전형적인 책상머리에서만 일한 자들이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
드워프 덕분에 인건비랑 제작 기간이 확 준 바칸에겐 큰 문제가 아니지만.
"여긴 항구가 멀쩡하네?"
"마르카다는 해적들이 찾아오는 게 싫으니까 부두를 방치했겠지."
바칸은 배를 부두에 가로로 댔다. 곧 나무 사다리를 대고 병사들이 내렸다.
"여기 집정관 있어?"
"기다려라."
휜 칼을 든 전사 수백 명이 부두로 몰려와 일행을 크게 에워쌌다. 그러나 하나같이 피가 밴 붕대를 감고 있는 모습이어서 딱히 두렵게 느껴지진 않았다.
챙이 넓은 모자를 쓴 도시 집정관이 나타났다. 하체는 가죽 바지를 입었지만, 모자와 상의는 제국 시절의 집정관 복장이었다. 바칸의 금속 갑옷과 투구 그리고 병사들의 무장을 확인한 집정관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멀리서 온 손님이군. 무슨 일로 이 궁벽한 곳을 찾았는가?"
"교역을 신청한다. 음식과 옷을 가져왔다. 그리고 상처 빨리 아무는 약도 있다."
바칸의 말에 해적들이 술렁였다. 무식한 서부의 칼쟁이들과 달리 동부는 제국 문화를 최대한 이어가려 노력하고 있었다.
제국의 기사로 추정하는 자가 물건을 들고 교역하러 왔다는 말에 수백 년 전의 영광이 재현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생겼다.
"귀한 손님이었군. 물건 보고 결정하지."
바칸의 눈짓에 병사가 삶은 카쿠를 담은 접시를 내놨다. 카쿠를 조금 맛본 집정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고기도 있다."
소금으로 간을 한 말린 쥐고기 역시 해적섬에서 쉽게 먹을 수 없는 별미였다.
"이건 모자와 장갑 그리고 신발이다. 제국 최신 양식이지."
집정관이 덩치가 조금 작은 해적을 불렀다. 모자와 장갑을 쓰고 신발을 갈아 신은 해적이 연신 따뜻하다고 외쳤다.
"이걸 바르면 피가 빨리 멎는다. 그리고 상처가 빨리 아물지."
집정관은 비수로 자기 팔뚝에 상처를 낸 다음 약을 발랐다. 쥐 가죽과 물고기 부레를 함께 달여서 만든 고약은 효과가 빨랐다.
부레가 접착성이 강하기에 상처를 봉합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효과를 냈고 쥐 가죽에는 지혈 작용을 하는 성분이 많았다.
지혈을 빨리해서 출혈을 줄이고 외부와 단절하다시피 하여 감염 걱정이 없다. 이것만으로도 해적들의 감탄을 받아내기에 전혀 손색이 없다.
마르카다에서 얻은 약초까지 섞어서 소염 능력까지 강화하면 정말 훌륭한 외상약이 될 가능성이 크다.
"훌륭하다. 원하는 게 뭐지?"
"고래와 상어 가죽, 맹수 가죽, 바다 진주. 그리고 귀한 물건 있으면 추천해라."
"바다표범 가죽이 있다. 고래 가죽보단 못하지만, 상어 가죽보다 훨씬 낫지."
"좋다. 교역을 시작한다."
집정관의 명령에 해적들은 집으로 돌아가서 가죽과 진주 그리고 귀한 물건을 전부 꺼내왔다. 상어 이빨이나 바다표범 이빨도 있었고 무늬가 이쁜 돌도 가끔 있었다.
바칸은 가죽과 진주를 바하의 가격으로 매긴 후 그에 상응한 카쿠를 내줬다. 마르카다와 달리 여긴 장갑 외에 모자도 반겼다.
'신발은 겔트 왕국에 팔아야겠다.'
신발은 따뜻하기만 하고 내구성은 부족했다. 대부분 사람이 잘 돌아다니지 않는 겔트 왕국에서나 팔릴 것 같았다.
"10월 즈음에 또 올 것이다. 음식과 따뜻한 옷 그리고 상처에 바를 약을 갖고. 또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라."
"무기. 몬스터와 싸울 무기가 있어야 한다. 휜 칼은 몬스터에게 효과가 없다."
"고민해 보지. 그럼 그때까지 내가 말한 물건들 최대한 많이 준비해 두어라. 최소 오늘보다 50배 물량은 보장하지."
집정관은 자신들이 왕국과 제국에 어떤 취급을 받는지 잘 알았다. 그래서 귀한 손님임에도 하룻밤 묵고 가라고 만류하지 못했다.
바칸 역시 일을 다 끝내자 빨리 영지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다음번엔 다른 사람이 올 수도 있다. 가격은 여기랑 가장 가까운 겔트 왕국 시세로 매길 것이다. 공평한 거래를 원하면 9월에 바하로 사람 보내서 가격을 알아봐도 좋다."
고기를 먹으려면 먼저 돼지부터 살찌워야 한다. 바칸에게 선택 여지가 컸다면 굳이 마르카다와 블라우크를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바하의 어마어마한 지리적 우세를 누르려면 상인들이 찾는 물건이 많아야 한다. 그런 물건을 얻으려면 마르카다와 블라우크를 살려야 한다.
- 작가의말
경험이 쌓이면서 슬럼프 대처에 능숙해집니다. 그런데 슬럼프가 아예 안 오게 하는 방법은 없네요. 다행히 연참을 하지 않은 덕분에 밑천이 두둑합니다. 팬티 보일 일은 없겠습니다.
야만족 거주지랑 해적섬. 이제부턴 다 주인공 땅인 거 아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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