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스터 소탕
조나릭은 용병이다. 모험가를 꿈꾸며 가출했다가 사흘 굶고 떠돌이 오크에게 쫓긴 다음 현실을 직시해 용병이 된 지 보름 되는 햇병아리다.
보수가 엄청나게 짜도 음식을 제공한다는 말에 몬스터 소탕 의뢰를 받았다.
"형씨, 이 지역 사람 아닌 거 같은데?"
조나릭은 함께 걷는 용병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나 상대는 조나릭을 무시했다. 좀 더 세게 나갈까 고민하던 조나릭은 용병 손등에 난 자잘한 상처를 확인하고 현명하게 입을 다물었다.
'노예 사냥꾼인가?'
가끔 의뢰를 핑계로 용병을 고용해서 노예로 팔아버리는 놈들이 있다. 억지로 끌고 가야 하는 노예와 달리 제 발로 씩씩하게 뛰어가는 용병은 노예 상인의 입맛에 참 맞았다.
'그렇다면 보수를 이렇게 짜게 주진 않을 텐데?'
용병을 많이 홀리려면 보수를 푸짐하게 책정해야 한다.
"멈춰라. 식사 시간이다."
가출할 때 갖고 나온 돈은 며칠 만에 다 썼다. 베테랑 용병들이 선심 쓰듯 던져주는 음식 아니었으면 굶어 죽었을지도 모른다. 첫 의뢰를 받고 하는 첫 식사가 너무 기대되었다.
"줄을 서라."
조나릭은 구운 떡과 입에서 가루 나는 달곰한 음식 그리고 짭짤한 고기를 빠르게 먹어 치웠다. 허겁지겁 식사를 끝내고 나서 살피니 자신과 비슷한 자들이 보였다.
반면 베테랑으로 추정하는 용병들은 식사를 아주 천천히 했다.
"고용주를 만나고 싶다."
고용주 주변에는 늘 열 명이 넘은 호위가 있었다. 조나릭이 접근하자 바로 앞을 가로막았다.
"무슨 일인데?"
"왜 나는 고기 두 덩이만 주고 저들은 네 덩이나 주지? 다른 음식도 나보다 많이 주고."
"내일이면 알 거야. 쫓겨나기 싫으면 고분고분 있어."
조나릭은 결국 고용주와 대화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그러나 이어지는 저녁 식사에 꽁해졌던 마음이 풀렸다. 하루에 한 끼만 주는 줄 알았는데 점심도 주고 저녁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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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블린 전사는 주술사한테 앞발을 내밀었다. 주술사는 돌로 고블린 전사의 발톱을 다듬었다.
고블린은 이빨이 날카롭지 않다. 뾰족한 송곳니가 없는 건 아니지만, 무는 힘이 덩치에 비하면 너무 약하다. 발톱도 짧고 뭉툭하다.
손가락도 가운데 두 개만 힘이 세서 무기를 잡고 휘두르기도 어렵다.
독침 외에는 전투 수단이 없는 고블린이다. 궁여지책으로 짜낸 게 발톱을 날카롭게 다듬는 것이었다.
그러나 짧은 발톱을 뾰족하게 다듬는 섬세한 작업은 아무나 할 수 없었다. 실패해도 뒤탈이 없는 주술사가 그 역할을 맡았다.
툭 소리와 함께 고블린 전사의 발톱이 깨졌다. 너무 강한 힘에 가뜩이나 짧은 발톱이 거의 없다시피 되었다.
그러나 주술사는 전사의 발톱을 부러뜨린 일을 전혀 마음에 두지 않았다.
"까르르, 꺄르르르륵."
암컷과 새끼들이 재빨리 마을 중심으로 몰렸다. 족장과 전사들은 파이프를 들고 가시 침 끝에 독을 묻혔다.
주술사는 제단 위에 서서 힘과 용기를 주는 기도문을 외웠다. 기도문을 외우면 최소 한 달은 드러누워야겠지만, 안 외우면 당장 드러누워야 한다.
조나릭은 어려서부터 이야기를 좋아하는 아이였다. 특히 신화나 설화 그리고 몬스터와 모험에 관한 이야기를 즐겼다.
'고블린 마을엔 보석이 있지.'
빨리 마을로 들어가서 보석을 얻을 생각에 조나릭은 최전방으로 나섰다.
그때 미세한 슉 소리가 귀에 들렸다. 동시에 제단에서 기도문을 외우던 주술사가 쓰러졌다. 조나릭은 조금 앞에 있는 용병이 접시 두 개 크기의 이상하게 생긴 물건을 가죽 주머니에 넣는 걸 똑똑히 봤다.
"넌 외곽 지키는 임무를 맡은 용병이잖아. 왜 여기서 알짱거려."
다른 용병들과 함께 돌진하려던 조나릭은 덜미를 채는 손에 꼼짝없이 멈춰야 했다. 돌려보니 주술사를 죽인 거로 추측되는 용병이었다. 덩치는 조나릭과 비슷한데 힘이 엄청 강했다.
"여긴 평야여서 보석이 없어. 산에 사는 고블린 마을에나 보석이 아주 가끔 나오는 거야. 그러니까 고분고분 밖에 나가서 도망치는 고블린이나 잡아."
조나릭은 이놈들이 고분고분을 참 좋아한다고 속으로 투덜대며 외곽으로 빠졌다. 외곽에 도착하니 딱 봐도 새내기가 분명한 용병들이 정신 빠진 얼굴로 고블린 마을 전투를 감상했다.
'전투 아니야. 저건 학살이지.'
가죽 갑옷에 투구를 쓰고 안면을 가리는 면구도 착용했다. 왼손에는 나무 방패를 들었는데 고블린 독침이 꽂히지 않고 튕겼다.
손에 든 짧은 메이스는 고블린 머리를 정확히 터뜨렸다. 간혹 밖으로 빠지는 놈도 마을을 가까이에서 포위한 자들을 피하지 못했다.
"이럴 거면 우린 왜 고용했지?"
조나릭은 물론 다른 용병들도 투덜거렸다. 자신들도 완전무장하면 고블린 따위는 쉽게 잡을 자신이 있다.
어느새 고블린을 다 해치운 '정예 용병'들이 고블린 배를 일일이 갈랐다. 배를 가른 고블린 사체는 마을 밖에 쌓았다.
수백 마리 고블린 사체를 쌓은 후 주머니를 꺼내 뭔가 뿌렸다. 물처럼 보였는데 불을 붙이자 화르르 거세게 타올랐다. 얼마 안 되어 고블린 사체 더미가 작은 잿더미로 변했다.
"여기서 뭐해? 놀러 왔어? 일해야지."
의뢰인의 수하가 나눠준 도끼를 든 조나릭은 멍한 얼굴로 상대를 바라봤다.
"나무를 베. 여기에 마을 만들 거야."
'고블린은 비옥한 땅에 마을을 세운다고 했지.'
조나릭은 그제야 햇병아리 용병을 고용한 이유를 알았다. 자신들은 용병이 아닌 일꾼으로 데려온 것이었다.
'그래도 하루 세끼 배부르게 밥 주는 게 어디야.'
피할 수 없으니 즐기기로 마음먹었다. 도끼를 든 조나릭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나무를 벴다. 얼마 안 되더라도 일당은 꼬박꼬박 나오고 세끼 고기가 나오는 식사를 공짜로 준다.
"넘어간다. 넘어간다. 넘어간다."
나무를 채 1/10도 못 벴는데 가까운 곳에서 누군가 큰소리로 외쳤다. 조나릭이 고른 나무보다 훨씬 굵은 나무가 서서히 쓰러졌다.
조나릭은 나무가 쓰러지는 방향이 자신과 상관없음을 확인하고 계속 나무를 찍었다.
"넘어간다. 넘어간다. 넘어간다."
조나릭은 짜증이 났다. 자신이 나무 하나 못 쓰러뜨리고 있는데 상대는 벌써 세 번째였다. 얼굴에 맺힌 땀을 닦은 조나릭은 물통의 물을 마시며 조금 쉬기로 했다.
그때, 지금까지 본 사람 중에서 덩치가 가장 큰 용병이 나타났다.
"도끼질 가르쳐줄게."
말을 마친 덩치는 다짜고짜 도끼를 휘둘러 나무를 찍었다. 커다란 도끼 밥이 툭툭 튀더니 나무가 쓰러졌다.
"도끼질은 이렇게 하는 거야."
시범을 마친 덩치는 우쭐거리며 굵은 나무를 찾아 떠났다.
'오우거 좆같은 놈이 지랄하고 자빠졌네.'
조나릭이 속으로 덩치에게 욕설을 퍼부을 때, 아까 마을로 돌진하는 조나릭의 덜미를 잡았던 용병이 나타났다.
"저놈은 멍청이야. 그러니까 방금 일은 잊어버리고, 나무를 쉽고 빠르게 베는 법은 이래."
조나릭과 나이도 덩치도 비슷해 보이는 용병은 도낏자루 어디를 잡고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 도끼를 휘두를 때 어느 만큼 올리고 얼만큼의 속도로 할지, 도끼날이 나무를 찍을 때 각도는 어떻게 돼야 하는지 자세히 가르쳤다.
용병이 가르치는 대로 하자 도끼가 나무에 팍팍 꽂혔다. 효과가 눈에 보이니 나무 베는 게 재밌었다. 조나릭은 용병에게 고맙다고 인사하고 신나게 도끼질했다.
"비켜. 약해빠진 놈들아."
나무 세 그루나 쓰러뜨리고 잠시 쉬고 있는데 듣기 싫은 목소리가 또 귀에 들어왔다. 조나릭은 무거운 엉덩이를 들고 무슨 일인지 살폈다. 덩치가 나무뿌리에 묶은 밧줄을 잡고 있었다.
"뿌리 뽑는 법 가르쳐줄게."
덩치의 몸이 갑자기 커진 착각이 들었다. 끙 소리와 함께 덩치는 밧줄을 잡고 뒤로 천천히 걸었다. 덩치의 뒷걸음질에 맞춰 나무 그루터기가 뿌리째 뽑혔다.
"뿌리는 이렇게 뽑는 거야."
가르침을 마친 덩치는 휘적휘적 다른 곳으로 떠났다.
덩치가 떠난 다음 친절한 용병이 바로 나타나 뿌리 당기던 자들에게 키 작은 사람이 그루터기와 가깝게 서고 큰 사람이 멀리 서야 하며 마지막 사람은 당기는 것보다 밧줄이 꼿꼿한지 더 신경 써야 한다며 자세히 가르쳤다.
"넘어간다. 넘어간다. 넘어간다."
곳곳에서 나무 넘어간다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고블린 마을을 순식간에 소탕한 '정예 용병'들이 도끼를 들고 나무를 벴다. 덩치처럼 빠르진 않지만, 조나릭이 두 그루 벨 사이에 세 그루 벨 정도로 능숙했다.
'도대체 이 용병대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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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갑자기 비명이 울렸다. 모닥불 근처에서 잠자던 조나릭은 황급히 일어나 무기부터 찾았다.
'피곤한 건가?'
비명이 들리는데도 정예 용병들은 뒤척거리기만 하고 바로 일어나지 않았다.
그때 친절한 용병이 새내기 용병을 끌고 모닥불 곁으로 다가왔다.
"멍청한 새끼. 이른 새벽에 소리 지르고 난리야."
몇 마디 더 꾸중한 용병은 하품하며 잠자러 돌아갔다.
"무슨 일인데? 독사야? 겨울이면 독사가 땅굴에 들어가서 잠잘 텐데?"
"헛것 본 거 같아. 틀림없어. 잘못 본 걸 거야."
조나릭은 안쓰러운 눈으로 횡설수설하는 용병을 바라봤다. 가끔 첫 전투를 겪으면 정신이 나가는 용병이 있다고 들었다. 아무래도 눈앞의 용병은 어제 고블린을 직접 죽이고 힘들어하는 것 같았다.
'난 저러지 말아야지.'
진심이 전혀 안 담긴 위로의 말 몇 마디 건넨 조나릭은 오줌 싸러 밖으로 나갔다. 딱히 마렵거나 하진 않은데, 일어난 김에 시원하게 배출하고 싶었다.
"으읍."
다행히 조나릭은 손으로 자기 입을 틀어막아 비명이 퍼지는 걸 막았다. 비명이 멈추고 나서야 조나릭은 입에서 손을 떼서 눈물과 콧물을 닦았다.
"뭐야? 마법사야?"
밤새 나무집이 3백 채나 생겼고 집을 에워싼 목책도 지어졌다. 그리고 나무집 가운데에 돌로 지은 2층 건물도 보였다.
'난 마법사의 노예가 되어 마법 실험을 당하는 것인가?'
자기 손과 오크 손이 바뀌고 가끔 돼지나 두꺼비로 변할 것을 생각하니 도망치고 싶었다.
"고용주가 누군지 알아?"
어느새 친절한 용병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눈 밑이 거뭇한 걸 보니 잠을 제대로 못 자는 것 같았다.
"넌 알아?"
조나릭은 반문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제국 명예 후작이야. 여기에 마을 만들려고 하지."
제국이란 말에 조나릭은 지금 상황이 이해되었다. 제국이라면 하룻밤에 저 정도 건물 올리는 건 일도 아니다.
제국의 기사들은 드래곤을 타고 다니고 귀족의 집은 구름에 닿을 정도로 높다. 제국엔 몬스터도 없고 산과 들에 과일과 곡식이 넘친다.
"너 말이야. 용병 짓 하다간 오래 못 살 거야."
"왜? 지금 잘하고 있잖아."
"너 오크랑 안 싸워봤지?"
"예전에 몇 번···"
"몇 번 오크랑 싸우는 꿈 꾼 적 있겠지. 오크는 너 같은 약골은 백 있어도 해치울 수 없는 몬스터야. 오크는 싸울수록 힘을 내거든. 가죽은 두껍고 갑옷처럼 단단해. 너처럼 무기도 없는 놈은 얼마 있어도 오크 밥이 될 뿐이야."
조나릭은 상대 말이 진실임을 안다. 이 의뢰를 받은 것도 돈이 적으니 위험하지 않겠다 싶어서였다.
"차라리 제국 귀족의 영지민이 되는 건 어때?"
조나릭은 마음이 움직였다. 집 떠나면 개고생이라는 말이 정말 와닿았다. 가출할 때 누나가 그간 모은 돈을 훔치지만 않았어도 이미 집으로 백번도 돌아갔을 것이다.
"낮에 고용주 찾아가서 영지민 되고 싶다고 말해. 원하면 네 가족도 데려올 수 있어."
- 작가의말
진 주인공 조나릭. 소호강호 리스팩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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