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구 면세점
왕관을 쓴 바칸을 본 율족 꼬마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왕이었어?"
"몇 달 전에 됐어."
꼬마는 함께 온 노인들을 소개했다.
"우리 섬의 각 가문 대감이야."
"아틀란티스 공왕 바칸이다."
일곱 대감이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대고 왼손은 허리 뒤로 보낸 후 허리를 조금 굽혔다. 율족이 손님으로 방문할 때 올리는 인사였다.
바칸은 왼손을 가슴에 대고 오른손을 배에 댄 다음 고개만 까딱였다. 율족이 주인으로 손님을 맞이할 때 하는 답례다.
"어려운 걸음 해줘서 고맙다. 여관으로 가는 길에 마침 시장이 있으니 잠깐 구경하는 것이 좋겠다."
바칸은 직접 일곱 대감을 안내했다. 율족 꼬마는 서툰 제국어로 자이르와 즐겁게 대화했다. 가드도 이젠 포기했는지 못 본 척했다.
"처음 보는 형태군."
"양산하는 물건 파는 시장이다. 뒤의 창고에 물건을 넣어두고 몇 개만 꺼내놓고 파는 거지. 비나 눈이 와도 진열한 상품만 걷으면 되니까 날씨 봐가면서 장사할 필요도 없지."
바칸의 지시에 맨날 놀고먹던 중급 시장 관리인이 오랜만에 일했다. 전시대 뒤에 있는 창고를 일일이 열어서 율족 대감들에게 보여줬다.
"창고 안이 무척 건조하다. 바다와 가까운데도 이럴 수 있는가?"
대감 하나가 창고 안에 들어가 바닥과 벽을 만지며 감탄했다.
"드워프 공법이다. 습기가 창고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고 설사 들어와도 빠르게 밖으로 내보낸다."
돌에도 숨구멍이라고 부르는 작은 구멍이 있다. 숨구멍이 큰 쪽을 안으로 하면 습기가 밖으로 잘 빠진다. 숨구멍을 찾고 크기를 알아내는 건 드워프만 할 수 있는 일이다.
"여긴 잡시장이라고 부른다."
하급 시장은 창고가 없고 매대들이 죽 붙어있었다. 매대는 가판대처럼 꾸몄는데 판을 끼워 넣을 틈을 여럿 만들어서 높이를 조절하게끔 했다.
"양이 적고 비싸지 않은 물건을 파는 곳이다. 먹는 것, 입는 것, 장난감 등으로 구역을 나눴지. 원하는 물건 쉽게 찾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귀족을 위해 준비한 고급 여관 근처에 있는 고급 시장이었다.
"가게마다 작은 창고가 있다. 귀한 물건이면 금속 금고를 임대해도 된다. 가게를 지키는 호위도 임대한다."
율족 대감들은 자기들이 사는 집보다 훨씬 멋진 가게에 푹 빠졌다.
"여기서 파는 물건은 면세 신청을 할 수 있다."
"면세 신청?"
"파는 상품이 아틀란티스 공국의 번영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걸 이해시키면 세금을 면제해준다. 예를 들면."
바칸은 겉옷을 벗고 안에 주렁주렁 매단 장신구를 자랑했다.
"왼쪽 가슴에 달린 건 드워프 장신구이고 오른쪽 가슴에 달린 건 인간 장인 솜씨다. 이런 유의 상품이라면 세금을 안 받는다."
"귀족이나 상인들이 영지로 오게 할 만한 물건은 세금을 전혀 안 받는다는 뜻인가?"
"그렇다. 그리고 귀한 물건이라면 공국이 가장 큰 고객이 될 수도 있지. 그리고 경매장도 있다. 식사를 마치고 경매장 구경도 시켜주지. 경매장 수수료는 1할이다."
고급 시장의 단독 가게 소개까지 마친 바칸은 일곱 대감과 율족 꼬마를 데리고 고급 여관으로 들어갔다.
"방 하나씩 내주겠다. 여긴 방값을 안 받는다. 음식값만 받는다."
숙박료를 안 받기에 여관의 유일한 수익은 음식이다. 음식 수익의 1할은 지배인이 받고 4할은 요리사들이 나눈다. 남은 5할은 영지에서 가져다가 지배인과 요리사 및 여관 하인의 기본 월급을 준다.
손님이 없는 달에는 기본 월급만큼 영지가 손해 본다. 손님이 안 오는 게 지배인과 요리사들 탓은 아니지만, 맨날 놀면서 월급만 받는 것도 미안해서 간만에 온 손님을 대접하는 데 소홀함이 전혀 없었다.
율족이 동대륙과 서대륙을 돌아다닌다고는 하지만, 항로는 정해졌다. 갔던 곳만 늘 가기에 차린 음식 중 절반 정도는 율족 대감들도 처음 접했다.
식사를 마치고 분수광장과 경매장까지 보여준 바칸은 영주성으로 돌아갔다. 일곱 대감은 고급 여관의 방 하나에 모여 어떻게 할지 상의했다.
"여기에 뿌리 내린다."
"근본을 잊으면 율족은 사라진다. 뿌리 내리는 거 반대다."
"나무가 뿌리 하나만 내리는가? 여기도 내리고 저기도 내려야 가뭄에 버티는 거지."
율족의 섬은 동대륙과 서대륙 중간 지점에 있다. 여러 해류가 만나는 곳이기도 하여 무역선이 반드시 경유하는 섬이 되었다. 그러나, 섬의 크기 및 여러 제한으로 율족은 번성할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서로 없는 물건을 교역하던 예전과 달리 이젠 동대륙에서 서대륙 물건을 만들고 서대륙에서 동대륙 물건을 만들었다. 특히 서대륙의 드워프들이 동대륙으로 건너간 게 치명적이었다.
동대륙의 비단과 향료는 아직 서대륙에 없지만, 동대륙에서도 물량이 적어 쉽게 구할 수 없다. 비싼 가격으로 어렵게 구했는데 배가 부서지거나 침몰하면 율족 전체에 큰 타격이다.
"가문 몇은 섬을 지키고 가문 몇은 동대륙과 서대륙으로 가는 게 좋다고 본다."
"누가 봐도 동대륙과 서대륙으로 가는 가문이 이득이다. 지금까지 그 문제로 타협이 이뤄지지 않은 거잖아. 차라리 모두 섬을 떠나든지 모두 섬에 남든지 두 길밖에 없다."
"섬을 버리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한다. 조상의 얼과 넋이 거기에 있다."
몇 년 동안 해결하지 못한 매듭이 갑자기 풀릴 리는 없었다. 일곱 대감은 밤늦게까지 합의점을 못 찾고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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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왕, 율족은 섬을 떠나고 싶은데 못 떠난대."
자이르가 시시콜콜 바칸에게 율족의 문제점을 일러바쳤다. 누구나 섬을 떠나 동대륙이나 서대륙에 자리를 잡고 싶어 한다.
정작 모두 떠나자고 하면 안 된다고 버티는 가문이 있다. 그리고 섬을 비우고 떠나는 것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율족의 섬에서 물과 음식을 보충하지 않으려면 출발할 때부터 넉넉히 실어야 한다.
물과 음식을 더 싣는다는 건 상품을 적게 싣는다는 뜻이다. 그 차이가 얼마나 큰지 수백 년 동안 교역으로 단련된 율족이 모를 수 없다.
'다 떠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고, 그렇다고 일부만 떠나자니 남고 싶은 사람은 없고.'
바칸은 율족의 고민을 이해했다. 확장이 쉽지 않은 아틀란티스 역시 마찬가지다. 영지 면적이 너무 커지면 지키는 게 어렵다. 지금 말로만 전문 병사인 2천여 전투 노예 출신들이 일을 열심히 하기에 영지가 유지되고 있다. 만약 전문 병사 모두 영지 경계를 지키는 용도로 돌리면 일손이 몹시 부족하다.
카쿠 농사는 7월에 시작하지만, 그전에도 넓은 땅에 분뇨를 계속 뿌려야 한다.
"투치. 율족을 들이는 걸 어떻게 생각하는가?"
"좋은 결정이다. 저들이 소문을 내주면 영지를 찾는 손님이 빠르게 늘 것이다."
바칸은 속셈을 한참 굴리다가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투치와 갭릴 그리고 일곱 호위를 데리고 고급 여관으로 갔다.
"영지민들이 율족이 가져온 물건을 꽤 샀다."
동대륙에서는 장신구를 노리개라고 부르고 여자들만 했다. 성인 남자가 장신구를 다는 걸 수치스럽게 여겼다. 그래서인지 율족이 가져온 노리개들은 하나같이 앙증맞고 귀여웠다.
혼인했거나 혼인하려거나 아이가 있는 영지민들이 주 고객이 되었다.
"세금은 제대로 걷고 있겠지?"
"하급 시장은 구역을 나눠 세금을 다르게 매겼다. 구역마다 상품의 최고 가격을 제한했다. 영지민들에게 각 구역의 최고 가격을 확실히 알려줬으니 비싼 물건은 세금 더 내야 한다."
바칸이 그린 큰그림에 투치가 멋지게 색칠했다.
바칸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먼저 말을 타고 출발한 자이르가 전한 소식을 듣고 대감들이 연회장에 모였다.
"의도치 않게 그대들의 고민을 알게 되었다. 나 역시 북쪽은 바다이고 동쪽은 강이며 서쪽에 몬스터가 막은 영지 때문에 비슷한 고민을 한 적이 있다."
카쿠만 아니었다면 비나크 공작이 던져준 8천 노예 때문에 영지가 망했을지도 모른다. 노예를 모두 버리는 선택이 있긴 한데, 그건 정말 최악이다. 자칫 귀족 작위와 영주 자리를 모두 뺏길 수 있는 악수다.
"내게 괜찮은 제안이 있다. 듣고 결정하기 바란다."
바칸은 잠깐 숨을 골랐다.
"우리 영지는 6월 1일마다 경매를 연다. 예전엔 드워프 장신구를 상품으로 내놨지만, 올해부터 드워프 장신구는 없다. 대신 드워프에게서 배운 장인들의 작품 그리고 여러 진귀한 물건을 내놓을 생각이다."
"난 지금 그 경매를 해마다 3번 열 생각이다. 6월 1일, 11월 1일, 3월 1일."
6월 1일을 제외하면 율족이 서대륙을 방문하는 시기와 겹친다. 11월엔 겔트 왕국에 안 오지만, 경매 수익이 높다면 경로를 바꾸는 것도 어렵지 않다.
"그 경매에 율족을 요청한다. 너희는 경매품을 내놔도 되고 경매에 참여하여 물건을 사도 된다. 동대륙에서 귀한 취급받는 물건이 경매장에 나올 수도 있으니까."
"외람되지만, 그게 우리 고민과 무슨 상관인가?"
대감 하나가 바칸에게 질문했다.
"왕국을 세워라."
일곱 대감은 놀란 눈으로 서로 쳐다봤다.
"섬에 남는 가문이 왕이 되어라. 동대륙과 서대륙으로 간 가문은 왕에게 충성과 세금을 바쳐야겠지."
너무 뜻밖의 말이어서 대감들은 입을 꾹 닫고 머리만 굴렸다.
"왕국을 세우면 우리 공국에 대사관을 신청해라."
"대사관?"
"그렇다. 율족만 살고 율족의 법대로 사는 작은 구역을 주겠다. 율족 구역에서 벌어진 일은 공국이 아닌 율족이 우선 처리하게 하고, 요청이 있어야 공국이 개입한다. 해마다 한 개 가문을 파견하여 대사관에 머물게 하면 된다. 왕이 된 가문은 섬에 계속 남아야 하고 남은 가문은 번갈아 대사관에 사는 거지. 동대륙에도 비슷한 거 하나 만들면 더 좋고."
대감들은 바칸의 제안을 가늠했다. 아주 마음에 드는 건 아니지만, 지금까지 다퉜던 문제 대부분을 해결할 수 있는 괜찮은 방법이었다.
"우리 공국에는 학교가 있다. 어린아이들에게 글자를 가르치고 셈을 세는 법도 가르친다. 원한다면 율족 아이들도 받겠다. 어른이 되기 전까지 우리 영지에서 글과 셈을 배우면서 안전하게 살 수 있지."
항구에 놓인 수십 대의 투석기가 기억났다. 게다가 가까운 창고에 바퀴 달린 쇠뇌차가 있다고 한다. 적이 오면 수십 대의 쇠뇌가 항구로 투입된다.
전문 병사가 2천 명이나 되고 동쪽의 레드 벨트는 배가 잘 뜨지 않는다. 서쪽엔 몬스터가 많은데 영역을 인정받아 넘보는 일이 없다고 들었다.
"임신한 여자도 여기서 살게 할 수 있을까?"
"물론이다. 참고로 우리 영지에서 아기가 죽은 건 셋뿐이다. 영지의 치료사가 없는 사이에 일어난 불상사다. 치료사가 있는 한 아이나 산모나 모두 건강했다."
"우리가 공국과 공왕을 위해 어떤 일을 해야지?"
"소문을 내라. 아틀란티스 영지에 드워프 장신구와 헷갈릴 정도로 귀한 장신구가 있고, 길이와 넓이가 4미터 이상인 맹수 가죽이 있고, 크기가 2미터 되는 사슴뿔도 있고, 푸른고래와 흰고래 가죽도 있고, 초원 여우와 늑대 그리고 표범 가죽도 있다고."
"공국에 뭐가 필요하다고 할까?"
바칸은 율족이 마음에 들었다.
"순도 5할 이상의 철광석, 쌀과 밀, 진주와 보석, 그리고 영지에 필요 없어도 경매장에 내놓을 만한 물건은 모두 환영한다. 여긴 많은 사람이 모여 필요한 걸 얻어가는 교류의 장이 될 것이다."
- 작가의말
아틀란티스 홍보대사로 율족이 위촉되었습니다.
율족이 세운 나라 이름은 율도국 어때요? 길동이가 왕 하면 딱 좋을 거 같긴 한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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