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마병의 위력
금속 조각끼리 부딪히는 절그럭 소리가 무겁게 울렸다. 동대륙에서 많이 사용되는 비늘 형태의 마갑을 쓴 말들이 맹수를 향해 돌진했다.
다리가 제국의 전투마나 아틀란티스 영지의 야생마에 비교해도 훨씬 굵었다. 발굽마저 금속을 대서 땅을 차는 소리가 맑았다.
'저게 편자라는 거구나.'
말발굽이 닳는 걸 막아주는 편자라는 물건을 바칸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구체적인 형태를 모르기에 드워프에게 제작을 의뢰할 수 없었다. 완벽에 가까운 설계가 아니면 드워프는 물건을 만들지 않는다.
인간 대장장이들은 솜씨가 부족해 말발굽에 달고도 전혀 깨지지 않는 작은 철편을 만들 수준이 안된다.
비늘 갑옷으로 몸통과 가슴을 보호하고 면갑으로 머리를 보호했다. 그러나 이마에 달린 뾰족한 뿔을 보면 그저 보호 목적으로 만든 면갑은 아닌 듯했다.
길이가 30센티 정도 되어 보이는 금속 뿔은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끝이 아래로 향했다. 상대를 찌른 후 상체를 드는 말의 습성을 이용해 쉽게 뽑아낼 수 있도록 설계한 거였다.
말이 무리를 지어 달려오자 표범들이 슬슬 피했다. 표범들은 떼를 지어 사냥하는 맹수가 아니기에 말의 돌진에 회피부터 생각했다.
엘리자베스로서도 맹수들끼리 서로 안 싸우게 하는 게 최선이어서 피하는 표범들을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볼트, 네 부하를 보내 말을 막아."
푸른 늑대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분주하게 움직여 아파서 골골거리는 것 같은 소리를 냈다. 우두머리의 지시에 늑대들은 포위를 풀고 달려오는 말 무리를 향해 뛰어갔다.
곧게 뛰지 않고 길쭉한 'Z'를 그리며 가볍게 뛰는 모습을 보니 말보다는 위에 탄 기수를 노리려는 것 같았다.
백 기가 넘은 말 무리와 늑대 사십여 마리가 부딪혔다. 바칸의 추측대로 늑대들은 높게 뛰어올라 기수를 덮쳤다.
태반은 뒤로 눕거나 앞으로 엎드리는 거로 늑대의 공격을 피했지만, 열 명이 넘은 기병이 늑대와 함께 바닥에 떨어졌다.
육중한 비늘 갑옷을 입은 기병들은 바닥에 떨어진 충격으로 숨도 쉬기 힘들었다. 다행히 말들 역시 전투 경험이 풍부해서 같은 편을 밟지 않고 뛰어넘었다.
몇몇 늑대는 뛰어오르기도 전에 뿔에 찔렸다. 뿔에 찔린 늑대는 깨갱거리며 바닥을 뒹굴었다. 미처 주의하지 못했는데, 뿔 윗부분에 거꾸로 된 이빨이 있어 뽑을 때 톱으로 써는 것처럼 상처를 크게 늘렸다.
대부분 말은 늑대 무리를 지나친 다음 반원을 크게 그리며 선회했다. 주인이 낙마한 말들은 멈춰서 뒷발로 걷어차고 몸을 띄워 앞발로 찍는 것으로 바닥에 누운 기수를 지키려 애썼다.
그러나 교활한 늑대들은 몸을 낮춰 다리를 물거나 갑옷이 보호하지 않는 배 부위를 물고 늘어졌다. 기마부대가 선회하여 다시 들이닥칠 때는 말과 기수 모두 숨이 끊어진 후였다.
"본드. 한때 네 전우다. 돕지 않고 뭐 하는 것이냐!"
리차드가 본드를 비난했다.
"리차드. 난 네 전우가 아니어서 내친 것이냐?"
사실 본드도 안다. 충성과 정직을 미덕으로 삼는 브릭섬에서 첩자를 어떤 눈으로 보는지. 눈 하나 잃지 않았다면 본드도 첩자로 들어가라는 제안을 거절했을 것이다. 브릭섬에서 첩자 노릇은 누구도 반기지 않는 일이다.
본드가 목적을 달성하고 돌아왔으면 리차드가 수비대에 자리 하나 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패한 첩자에게 자리를 내줬다간 리차드의 위신이 흔들릴 수 있다.
'그건 네놈 사정이지. 그리고 네놈들도 나한테 그렇게 대하면 안 되는 거였어.'
돌아와서 기병대 옛 전우들을 찾아갔을 때 에릭 빼고는 모두 차가운 표정으로 본드를 대했다. 옛정을 생각해서 마지못해 상대해 준다는 얼굴이었다.
마을 처녀들의 환심을 살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찬 에릭과 달리 다른 사람들은 본드가 첩자 노릇을 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리차드도 혹시나 하는 마음이기에 계속 도와달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본드 일행이 도와줄 것이라는 기대도 크지 않았고, 돕더라도 큰 효과가 있을 거라는 기대도 없었다.
늑대 무리와 방향을 비튼 기병대가 두 번째로 충돌했다. 이번엔 경험이 쌓인 기병대가 우위를 차지했다. 기병들은 덮쳐오는 늑대를 방패로 막거나 말 위에 엎드리는 거로 피했다. 첫 충돌과 달리 세 명만 바닥에 떨어졌다.
두 번째 충돌에서 스물에 가까운 늑대가 뿔에 찔리거나 말발굽에 밟혔다. 그러나 기병대가 일방적으로 이득 본 건 아니었다. 눈치를 살피던 표범들이 충돌을 마친 기마병의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순간 속도는 표범이 훨씬 빨리 가장 뒤에 처졌던 기병 십수 명이 낙마했다. 기수는 낙마한 충격으로 기절했고 말은 표범 이빨과 발톱에 배가 갈려 창자를 질질 흘렸다.
"톰슨, 진짜 자신 있어?"
"맡겨 달라니까."
세 번째로 충돌하면 늑대가 남아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엘리자베스의 절대적 열세다. 엘리자베스는 도망칠 것이고 리차드는 기마병을 수습해 영지 구하러 돌아갈 것이다.
바칸은 이렇게 흐지부지 끝나는 게 마음에 안 들었다.
톰슨 안에서 뭔가 꿈틀거렸다. 바칸은 마나가 소용돌이치는 게 느껴졌다.
"후앙!"
바칸이 평생 못 잊을 그 소리가 울렸다. 오우거의 것보다 훨씬 약하긴 했지만, 효과는 나쁘지 않았다.
가까이 있던 본드는 다리가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엘리자베스는 푸른 늑대 등에서 떨어졌고 해적왕 역시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슉 소리와 함께 석궁이 발사되었다. 화살은 정확히 해적왕 턱을 뚫고 머리 안으로 들어갔다. 뇌가 곤죽이 된 해적왕은 눈도 미처 못 감고 즉사했다.
늑대나 말이나 표범 모두 바닥에 드러누워 바들거렸다. 빠르게 달리는 중에 낙마한 기마병 역시 마찬가지였다.
슉 소리와 함께 화살이 엘리자베스 이마에 박혔다. 해적왕과 달리 엘리자베스는 조금 버둥거리다가 죽었다.
본드는 허망한 눈으로 이 모든 것을 바라봤다. 약 십 년 전부터 시작한 리차드와 드레이크 그리고 엘리자베스의 삼파전이 톰슨이라는 흔한 이름을 갖춘 남자의 손에 끝났다.
톰슨은 당연한 거고, 바칸과 리차드와 사자 그리고 푸른 늑대도 멀쩡했다. 바칸은 갑옷 덕분이었고 리차드는 3단계에 이른 덕분에 빠르게 회복했다. 사자와 푸른 늑대는 종의 한계를 벗어난 존재들이어서 피어에 저항했다. 톰슨이 아닌 오우거가 직접 펼쳤다면 바칸 빼고 모두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리차드는 바로 고개를 돌려 도망쳤다. 무기는 물론 바닥에 누워 고통스럽게 신음하는 부하들마저 버리고 도망치는 모습에 본드는 다시 한번 슬픈 마음이 들었다.
'한때 내 영웅이었는데.'
사자는 주저하지 않고 리차드를 쫓아갔다. 그러나 덩치에 비교해 달리기는 느린 편이어서 리차드와 거리가 조금씩 벌어졌다. 아까 맹수 무리에 가장 뒤처져있던 걸 생각하면 표범은 물론 늑대보다도 느리다고 봐야 한다.
"어떻게 수습하지?"
바칸은 톰슨의 생각을 알았다. 그러나 이렇게 어마어마한 효과를 볼 것은 예상하지 못했다. 늘 타인의 생각이 궁금한 해적왕이나 맹수들을 통제해야 하는 엘리자베스는 마음이 열려있어서 톰슨보다 강한데도 큰 피해를 보았다.
"자연으로 돌아가. 너희 원래 삶으로 돌아가."
먼저 움직인 건 표범이었다. 이들은 톰슨의 말을 명령으로 받아들였다. 맹수치고는 겁이 많은 편이어서 피어에 쉽게 굴복했지만, 성정이 교활하여 빠르게 벗어났다.
표범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하나둘 사방으로 흩어졌다. 지금까지는 동료였지만, 이제부턴 영역을 놓고 다투는 적수다.
푸른 늑대가 목울대를 움직여 낮게 으르렁댔다. 늑대들이 바닥에 누운 채로 슬픈 울음을 토하더니 힘들게 몸을 일으켜 죽은 동료 목덜미를 물고 남쪽으로 떠났다.
"저놈은 엘리사를 따르겠대."
푸른 늑대는 마녀 일족의 손에 자랐다. 엘리자베스가 죽었으나 맹약 관계는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다른 마녀는 전부 브릭섬 가장 남쪽 영지에 있었고 강부리 발톱에 매달려 배로 피난 가는 엘리사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마녀였다.
조금 더 지나서 본드가 회복했다. 톰슨과 친밀감이 조금이나마 형성된 것도 있고 그새 2단계로 경지가 오른 덕분이 컸다.
"리차드는 너흴 버리고 도망쳤다."
본드의 말에 바닥에 쓰러진 기마병 중 일부가 큰소리로 통곡했다. 충성과 정직을 미덕으로 삼는 브릭섬에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리차드가 아무리 드레이크와 함께 브릭섬 최강을 다툰다고 해도 이젠 끝이다. 영주 자리에서 쫓겨날 뿐만 아니라 브릭섬 어디에 가서도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할 것이다.
"리차드는 아마 우릴 전부 죽이려 할 것이다. 그래야만 영주 자리를 지킬 수 있으니까. 지금까지 우리가 알던 리차드라면 당연히 안 그러겠지. 그러나 내게 첩자 노릇을 권하고 쓸모가 사라지니 사정없이 내친 리차드라면 당연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에릭이 가장 먼저 일어나 자신의 애마를 일으켜 세웠다. 톰슨은 오우거의 피어를 흉내 낸 것이어서 파괴력은 있어도 깊이가 부족했다. 아무 대비도 못 하고 불시에 당한 거여서 효과가 좋았지만, 모두 회복이 빨랐다.
에릭을 비롯해 마나를 얻은 몇몇이 먼저 일어나서 동료들을 부축했다. 몸을 일으키니 짓눌렸던 마음이 서서히 살아나며 회복이 빨라졌다.
"네 명의 기병대장과 1기병대는 리차드를 쫓는다. 남은 자들은 죽은 동료 시체를 수습해서 영지로 복귀한다. 영지가 드레이크에게 함락되었다면 오늘 우린 영지와 함께 사라진다."
1기병대 대장 해리의 말에 네 명의 기병대장과 1기병대의 살아남은 자들이 말에 올라탔다. 처음엔 후들거리던 말들도 무리를 짓고 힘차게 달렸다.
"수습이 대충 되었어. 우리도 리차드의 영지였던 영지로 가자."
본드는 리차드가 버린 검을 주워서 품에 안았다. 날을 안 세운 검이어서 베일 걱정은 없었다.
"그건 왜?"
"기마병들이 리차드를 죽일 거야. 검을 함께 묻어주려고."
약 반 시간 달리니 먼저 출발한 기마병들이 눈에 띄었다. 말 세 마리에 기마병 일곱이 죽었다. 리차드 역시 부릅뜬 눈으로 피를 흘리며 싸늘한 주검이 되었다.
"사자는?"
"리차드를 한 대 때리고 영지 방향으로 달려갔다."
리차드 등에 난 커다란 상처는 치명적이진 않지만, 몸을 비틀고 팔을 휘두르는 데 큰 방해가 되었다. 기마병들이 목숨을 돌보지 않고 덤빈 것도 있지만, 적은 피해로 리차드를 죽인 건 사자 덕분이 컸다.
본드는 리차드의 검을 던졌다.
"함께 묻어줘."
"본드. 넌 영지로 가서 죽을 이유 없어. 넌 잘못한 게 없는데 우리 모두 널 외면했다. 드레이크 손에 죽는 건 우리면 족하다."
"누가 죽으러 간다고 했지?"
세븐 브레이크는 동대륙의 기예다. 1단계는 마나 집적, 2단계는 육체와 결합, 3단계는 마나의 사출로 명확히 나누는 서대륙과 달리, 세븐 브레이크는 처음부터 마나로 육체를 강화하고 공격에 마나가 동원된다.
비록 바칸이 마나를 자의로 사출하는 경지에 이르지 못해 자신을 2단계로 정의했지만, 3단계인 드레이크나 리차드와 싸워도 승산이 꽤 있는 편이다.
"난 제국이 임명한 아틀란티스 공국의 공왕이며 블라우크와 마르카다의 적법한 통치자다. 지금 엄정한 태도로 너희에게 브릭섬이 아틀란티스 공국의 땅이 되었음을 선포한다."
원래는 이럴 계획이 전혀 없었지만, 엘리자베스와 리차드의 죽음이 브릭섬을 무역 상대가 아닌 영토로 삼을 욕심을 부추겼다.
- 작가의말
엄정한 태도로 말씀드립니다. 건강 유의하십시오. 몸이 불편하면 의욕이 떨어집니다. 나이 들면 도전정신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익숙한 일은 몸이 불편해도 그럭저럭 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닌지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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