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완주
"심장이 완전히 멈췄습니다!"
"다른 생체반응은 전부 정상입니다. 심장만 멈췄습니다."
"믿기지 않네요."
수술실은 고요한데 밖에서 구경하는 사람이 난리였다.
약 반년 정도 아무 증세도 보이지 않던 박한 환자가 갑자기 '기절'했다. 전에는 깨어나지 못하는 것만 빼면 정상인과 전혀 다를 바 없었는데, 갑자기 의식을 잃은 사람과 같은 반응을 보였다.
황급히 수술실로 옮겼고 수혈팩도 수십 개 준비했다. 그런데 환자는 지금까지 보여주지 않은 새로운 패턴으로 최 교수를 괴롭혔다.
"재세동기 준비해. 빨리."
최 교수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나라의 존망이 걸린 마지막 전투에 나서는 비장함과 작은 실수도 용납지 않겠다는 결의가 버무려진 냉정함이었다.
"최 교수. 일단 기다려 보자고."
입을 꾹 다물고 지켜보기만 하던 박 원장이 마이크로 말했다. 최 교수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심장이 멈춘 환자를 그냥 지켜보자는 의견에 최 교수를 빼고 모두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둘이 상식과 직업윤리에 완전히 위배하는 결정을 했다는 사실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교수님."
"기다려. 나랑 원장님보다 더 이 환자를 깨우고 싶은 사람은 없을 거야."
박한은 고아 출신으로 모은 재산이 전혀 없고 쌍둥이 동생은 중범죄로 감옥에 있다. 병원에는 환자 치료비를 박 원장과 최 교수가 번갈아 낸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교수님. 이 일이 알려지면 비난을 막지 못합니다."
"현재 의학 상식으로 이 환자의 증상이 설명되던가? 상식을 벗어난 환자인데 상식대로만 대처하면 오히려 문제가 돼. 지금 심정지 빼곤 아무 문제도 없잖아. 뇌에 산소가 부족하지도 않고 혈액 순환도 잘 이뤄지고."
오히려 초반에 '기절'로 판명 났을 때보다 몸 상태가 나아졌다.
"쿨럭."
숨소리만 크게 들리는 가운데 누군가가 기침 소리를 냈다. 사람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다 나가. 수술실에서 다 나가."
최 교수는 수술실 안에 사람을 전부 쫓아냈다. 그리고 버튼을 눌러 수술실 카메라도 꺼버렸다. 박 원장은 모니터실에서 수술실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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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한 게 많겠지만, 우리도 아는 게 없습니다. 그저 당신을 깨워서 쌍둥이 동생과 만나게 하라는 지시만 받았습니다."
박한은 박 원장의 말을 귓등으로 흘리며 창밖의 풍경에 집중했다. 조금씩 어그러진 게 보이긴 하지만, 인간의 솜씨라기엔 너무 훌륭한 건물이 가득했다.
가끔 투구를 쓰고 바퀴 두 개 달린 수레로 달리는 자들도 보였다.
비슷한 옷을 입은 사람이 거의 없었다. 가끔 같은 옷을 입은 여자끼리 서로 흘겨보며 나직이 욕하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의뢰인을 만날 수 있을까?"
박 원장과 최 교수는 잘못한 것도 없는데 몸이 움츠러들었다. 입을 열기 전에도 기운에 눌려 공손한 몸가짐으로 대했는데, 목소리까지 들으니 오금이 저렸다.
"의뢰인이 누군지는 저희도 모릅니다. 다만 신 혹은 그에 근접하는 대단한 존재라는 사실만 유추하고 있죠."
최 교수는 초보 운전자처럼 바짝 긴장한 채 핸들을 꽉 잡고 앞만 보고 운전했다. 박 원장은 문에 들러붙다시피 해서 박한과 멀어졌다.
차는 약 2시간 달려서 청정시에 도착했다. 주차 구역에 차를 세운 최 교수는 박한을 데리고 면회 신청하러 갔다.
박한을 도와 면회 신청을 마친 최 교수와 박 원장은 공손히 인사를 올리고 떠났다.
"박한 씨. 박민 씨 도착했습니다. 3번 방으로 들어가 주세요."
박한은 미리 들은 절차대로 움직였다. 문을 열고 방에 들어가니 키 175 정도에 살이 피둥피둥 찐 남자가 있었다.
"진짜 왔구나. 그럼, 일 시작하자."
"난 들은 게 전혀 없다."
박민은 부은 것처럼 퉁퉁한 얼굴을 찡그렸다.
"칠상권을 넘겨. 어차피 내게서 가져간 거잖아. 그리고 네게 무슨 갑옷이 있다고 하던데 그것도 넘겨. 안 그럼 죽이기 힘드니까."
"내 심장에 있는 둘 말하는 거지?"
"응. 이 비만병 걸린 몸이 진저리나니까 빨리 끝내자. 말하는 것마저 숨이 차. 겨우 수련한 내공과 칠상권을 네게 넘기는 바람에 지금 이 모양 이 꼴이 됐다고."
"난 어떻게 되지?"
"거기까진 내 알 바 아니고."
박한과 박민이 손을 맞잡으려 하자 간수가 다가와 손과 소매를 검사했다.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간수는 문을 열고 나갔다.
"대단하군. 몇 년 안 되는 사이에 환골탈태한 것도 모자라 내공을 수백 배로 불리다니. 게다가 호신강기 전 단계인 호신기도 연성했구나."
"네가 말하던 갑옷이야. 호신기인지 뭔지가 아니고."
박한의 몸에서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뭔가가 박민 몸으로 넘어갔다. 하나둘 보내면서 박한은 어마어마한 상실감에 시달려야 했다.
"근데 꽤 고분고분하네? 난 안 돌려준다고 난리 피울 거로 예상했거든."
"마나도 마법사도 없는 세상. 돌아갈 방법은 이밖에 없어. 모든 걸 건 도박이라고 해야겠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박한도 믿는 바가 있었다. 임모탈은 쉽게 죽지 않는다.
어느새 칠상권과 마나 그리고 정령 갑옷 모두 박민에게 넘어갔다.
"죽을 준비 되었나?"
1/4 확률로 죽고 1/4 확률로 원래 세상에 돌아간다. 남은 1/2은 두 신이 있던 세상에 갈 확률이다.
"오행연환, 음양합일."
비록 마나를 전부 잃었지만, 감각까지 사라지진 않았다. 박민의 마나 흐름을 확인한 박한은 방금 느낀 상실에 필적하는 충족을 얻었다. 그간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이 하나씩 풀려나가며 망아의 상태로 들어갔다.
"자질은 참 훌륭한 아해로고. 인연의 끈을 꽉 잡아라. 그럼 돌아갈 확률이 커진다. 그리고 최대한 네게 피해 안 가게 하마."
박민의 주먹이 박한 가슴에 가볍게 닿았다.
홍수가 울부짖고 폭풍이 발광한다. 땅이 분노하고 산이 무너진다. 하늘이 수천 개 번개를 내려 세상을 깨끗이 한다.
하나가 된 일곱 기운이 두 신을 공격했다. 푸른 날개에 속박되고 거인의 기운에 약해진 두 신은 크게 반항하지 못했다.
더구나 하나인 듯 일곱인 듯 다양한 변화로 괴롭히는 기운에 제대로 된 대처를 하지 못했다.
"죽지는 않았군. 그럼 행운을 바란다."
박한의 몸이 가루가 되었다. 가루는 땅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물에 섞이기도 하고 하늘로 퍼지기도 했다.
몸이 사라지며 박한의 정신이 넓게 확장했다. 수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잊었다.
'아는 사람.'
운전대를 잡았던 최 교수가 보였다.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를 부둥켜안고 슬피 울고 있었다.
박 원장도 보였다. 눈물에 젖은 얼굴로 10대 후반으로 보이는 소년 얼굴을 보듬고 있었다.
'벗었다. 운명의 굴레를.'
임모탈로서 바칸에게 부여되었던 운명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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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륙은 엉망이 되었다.
바칸이 사라지며 드워프 장신구 공급이 끊긴 펠릭은 정치력을 잃어가며 점점 허수아비 황제가 되었다.
고딕은 마법사들의 약속을 믿고 군대를 확충했다. 그런데 마법사들이 수십 년 전처럼 갑자기 모습을 감춰버렸다.
아틀란티스는 황제 바칸이 실종되었다. 다행히 황후와 황태자가 있어 민심의 동요는 줄었지만, 외유와 내환으로 흔들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리치로 변한 바후퀸이 해적섬 남부로 진출했습니다."
황제 자리에 앉은 황태자가 고개를 돌려 올리비아를 쳐다봤다. 다섯 살치고는 영특하지만, 그래봤자 다섯 살 기준이었다. 이미 독서를 시작하여 식견이 웬만한 어른 못지않다고 해도, 상황을 이해하고 결정을 내리기엔 한없이 부족했다.
"대신들은 기탄없이 생각을 말해라."
올리비아의 말에 대신들이 다투어 자기 생각을 말했다. 대신들은 제국보다 파벌의 이익을 대변했기에 쓸 만한 의견은 없었다.
어느새 철혈의 여제로 변한 올리비아가 차가운 눈으로 대신들의 한심한 작태를 지켜봤다.
톰슨은 마음을 읽는 능력이 사라졌고 미클은 치유 능력을 잃었다. 한동안 눈치만 보던 대신들이 2년 전부터 파벌을 나눠 정치 싸움을 시작했다.
다행히 본드가 3단계에 이르렀고 존은 버서커 능력만 잃고 힘은 그대로였다. 드레이크의 무적함대도 여전히 황실에 충성하기에 감히 반란을 획책하는 자는 없었다.
"지금 문제는 리치를 처리하고 말고가 아니라 해적섬 사람들을 어떻게 처우할지다. 허튼소리 하는 놈은 이제부터 대신 자리에서 쫓아낼 테니 입 열기 전에 생각부터 하자."
헛소리는 줄었지만, 여전히 훌륭한 대책은 서지 않았다. 결국, 드레이크와 존이 해적섬으로 가서 상황을 살피고 정보도 수집한 후 최후 결정을 내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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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갭릴, 후회하지 않을 거지?"
"미클. 이 방법밖에 없다."
"좋아."
미클은 트롤 등에서 뜯어낸 재생 문신을 갭릴 등에 붙였다. 문신은 빠르게 사라졌다.
"미클. 종교 하나 만들까 하는데."
갭릴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두 신 모두 사라져서 제단의 효력이 백 년 안에 사라질 거라며. 그때 다가올 혼란을 대비하여 종교를 만드는 게 좋겠어. 대부분 사람은 믿고 의지할 뭔가가 필요하니까."
미클은 신의 속삭임 원본을 하루에 몇 번씩 탐독했다. 서대륙 어떤 신학자도 미클보다 신에 관해 아는 게 적을 것이다.
"그러자."
미클은 이제 쓸모가 사라진 자신에게 할 일을 찾아준 갭릴이 정말 고마웠다.
"미클 백작. 드레이크 백작과 존 백작이 돌아왔다."
"지금 어디에 있지?"
"황궁으로 갔다. 바후퀸을 처단했다고 한다."
미클과 갭릴은 바로 마차를 타고 황궁으로 향했다. 아틀란티스 영지의 영주성을 증축하여 만든 황궁은 크기는 작아도 아름다움은 대륙 최고였다.
"들어가기 싫다."
황궁 문 앞에서 갭릴이 주저했다. 대신들이 하는 꼬락서니가 보기 싫어서 투치는 병을 핑계로 재상직을 내놨다. 갭릴과 미클 역시 예전과 달라진 분위기가 몹시 괴로웠다.
"황태자가 크면 다 해결될 거야."
아니나 다를까. 대청에서 대신들이 손가락질하며 다투고 있었다. 리치가 된 바후퀸을 해치웠지만, 해적섬엔 여전히 언데드가 들끓었다. 해적섬을 버리자는 의견도 있고, 해적섬을 수복하자는 의견도 있고, 해적섬은 버리고 사람들만 이주시키자는 의견도 있었다.
"꼴이 말이 아니군."
익숙하면서도 낯선 목소리가 대청에 퍼졌다. 분명히 낮은 소린데 모두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미클과 갭릴은 다리가 풀려 바닥에 쓰러졌고 존과 드레이크는 음흉한 웃음을 터뜨렸다. 발을 드리우고 황태자를 도와 국정을 처리하던 올리비아는 눈물을 줄줄 흘렸다.
큰소리로 외치던 대신들이 고양이를 본 쥐처럼 쪼그라들었다. 새로 대신이 된 자들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고 몸을 움츠렸다.
"그간 고생이 많았소."
"아니옵니다. 돌아오리라 믿고 있었습니다."
황좌로 간 바칸은 황태자를 번쩍 들어 목말을 태웠다.
"폐하. 체통을 지키심이."
바칸은 올리비아의 말에 반응하지 않고 선 채로 대신들을 굽어봤다.
"나 말고 황태자를 봐라."
대신들이 고개를 젖히고 황태자를 바라봤다.
"이젠 높이가 다르지? 목을 젖히니까 목소리가 안 나오지?"
대신들은 황급히 무릎을 꿇고 고개를 바닥에 처박았다.
"투치를 불러라. 대륙을 통일하고 드래곤과 전쟁을 벌인다."
"폐하, 드래곤은 죽었다고 알려졌습니다."
"드래곤은 죽었다. 그러나 드래곤의 힘을 탐낸 마법사들이 힘에 휘둘려 드래곤으로 변이했다. 오는 길에 한 마리 죽였으니 여덟 마리가 남았을 거다."
완전한 드래곤이 되기 전에 찾아내 죽여야 한다. 아니면 인류에겐 멸망이라는 선택밖에 남지 않는다.
"일 년 안에 대륙을 통일한다. 그리고 얼음섬 거인들이 약해지면서 정령이 풀려났다. 어떤 재해를 일으킬지 모르니 보이는 족족 제압하거나 죽이도록."
그날, 바칸은 목말에 재미 들린 황태자를 종일 태우고 다녀야 했다. 그리고 밤이 되어 황태자는 난생처음 어머니한테 볼기를 맞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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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이날이 왔구나."
리치 슬레이어 존이 말했다. 지금 일행 앞에는 커다란 드래곤 한 마리가 입으로 불을 뿜어내고 있었다.
"이건 미친 짓이야. 난 빠질래."
본드가 뒤로 물러섰다. 드레이크 역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조금씩 물러서는 게 존의 제안이 탐탁지 않은 듯했다.
"비겁자들."
존의 비난에도 모두 동요하지 않았다.
"대장, 그럼 우리 둘이라도 가자."
바칸은 고개를 끄덕이고 주머니에 담긴 기름을 머리에 부었다. 영지의 땅을 비옥하게 하려고 심은 콩 나무의 넝쿨에서 자란, 말이나 양도 안 먹는 콩에서 짜낸 기름이다.
낭아봉을 버리고 짧은 메이스를 든 존과 맨손을 한 바칸이 신나서 불을 뿜는 드래곤을 향해 달려갔다. 인간으로선 상상하기 힘든 빠른 속도로 드래곤에게 접근한 둘은 꼬리를 타고 기어올랐다. 몸에 기름이 묻어 미끈거리긴 하지만, 마나를 이용해 손바닥을 드래곤 비늘에 찰싹 붙인 덕분에 떨어지지 않았다.
"대장. 이놈 암컷이야?"
"드래곤은 암수 구분이 없어. 새끼를 낳는 게 아니라 영생의 돌을 만들어 번식하거든."
"대장, 내가 앞장설게. 괜찮지?"
존은 드래곤 항문으로 들어간 최초의 드래곤 슬레이어 타이틀을 바칸에게 양보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드래곤 항문으로 들어가는 기발한 이 방법은 예전에 오크를 잡을 때 바칸이 생각해 낸 것이다. 그래서 양해를 구했다.
"괜찮아."
"고마워. 난 큰 심장 부술 테니 대장은 작은 심장 부숴."
말을 마친 존이 싱글벙글 웃으며 드래곤 항문으로 기어들어 갔다.
- 운명의 협주곡 완주(完奏) -
- 작가의말
미클 = Michael
갭릴 = Gabriel
운명의 협주자는 연주를 끝냈습니다.
박한의 쌍둥이 동생 박민은 동대륙의 살수가 빙의한 겁니다. 또 다른 구상 중인 글의 주인공이죠.
11월 연참대전에 가벼운 글로 돌아오겠습니다. 아주 재밌지는 않지만, 거슬리지 않고 피식피식 웃을 수 있는 글로 준비하겠습니다.
부족한 글 끝까지 읽어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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