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의 아이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문낭호
작품등록일 :
2019.07.30 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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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30 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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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18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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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성인식成人式 (2)

DUMMY

동호변경백 바타르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몹시 피곤했다. 본의 아니게 황도에 남아, 홀로 황도의 일에 동호경의 일까지 살피려니 슬슬 힘에 부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거기다 대 칸 야와우르는 전란의 전체 지휘까지 그에게 떠맡기고 서호경으로 떠났으니, 솔직히 바타르로서는 이미 예전에 한계가 찾아와도 이상하지 않다고 여겼다. 중요한 사안은 대 칸의 오르도에 보내 처리하고 있는데도 일에 파묻힐 지경이니. 바타르는 정사(政事)는 물리다시피 한 대 칸 야와우르 대신에 만기(萬機)를 처리하고 있던 세첸 네르구이에 대해 새삼스레 존경심까지 생길 정도였다.


그런데 거기다 이제는 남호경에서까지 나르 두르에게 동조한 반란이라니, 바타르는 솔직히 두 손 두 발 다 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바타르는 앞의 탁자에 놓인 양피지를 들어올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남호변경백 자가쉬가 보낸, 이 호사스레 금박장식까지 입혀진 양피지에 적힌 보고였다. 설마하니 그 자가쉬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출정할 줄은 몰랐다.


“아버님.”


이런, 또 하나 머리를 아프게 하는 문제가 찾아왔군.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변경백 바타르는 들어 올렸던 양피지를 다시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첫째 황녀님.”


흔히 검은 비단과 같은 머리라고 하던가. 굳이 말해 어느 쪽인가 하면, 바타르는 그녀의 머리칼을 보면 비단보다는 말을 떠올렸다. 아주 좋은 혈통, 이를테면 서호경 혈통의 검은 야생말. 혼약이 오간 이후 약혼식을 위해 처음 만났을 때, 변경백 바타르는 바로 알아보았다. 화려하게 장식한 비단으로 만든 그 황실예복 아래에, 그녀의 여느 형제들보다도 야성적인 것을 감추고 있다는 것을.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황녀 차우마랄을 보며, 바타르는 마주 고개를 숙여 인사를 받았다.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아버님의 건강이 걱정이네요.”

“별말씀을. 이 정도야 흔한 일이지요.”


잔뜩 걱정 어린 투로 하는 그녀의 말에, 변경백 바타르는 그렇게 대답하며 호탕하게 웃어 보였다. 하지만 눈만은 그녀에게서 떨어트리지 않았다.


여우야, 여우야, 어린 여우야. 오늘은 산군이라 불리는 이 시아버지에게, 무엇을 얻으려 왔느냐?


“흔하다 하시면 더욱 문제지요. 자, 들여오너라.”


차우마랄은 진심으로 걱정된다는 듯이 살짝 미간을 찌푸려 보인 후, 문에서 살짝 비켜섰다. 그러자 쟁반에 무엇을 받쳐 든 시녀들이 셋이나 줄줄이 들어왔다. 변경백 바타르는 그것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눈가를 꿈틀거렸다.


흙으로 빚고 구워 만든, 제국에서는 귀하다는 도자기 그릇들이었다. 주전자도 있었고, 술잔도 있었고, 예쁘게 치장된 다과들이 올라간 접시들도 있었다. 유목민이 주축인 나라에서, 깨지기 쉬운 자기는 귀한 대접은 받더라도 쓰이지는 않는 것이었다. 게다가 하나같이 푸른 청자(靑瓷)였다. 제국에서 주로 만드는 것은 투박한 질그릇이나 백자(白磁)였다.


“이리 귀한 그릇을?”


제국의 어지간한 대의족들도 청자는 본 적이 드물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동호변경백인 바타르는 청자를 자주 접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해마다 선물로 들어오고는 했다.


청자를 만드는 산왕국 쪽에서 보낸 선물로.


“허기지시지 않을까 하여, 제가 술과 먹을 것을 준비했습니다, 아버님.”


동호변경백 바타르는 시녀들이 양피지나 서류를 한쪽으로 조심스레 옮겨놓고, 술이 든 주전자와 다과나 간단한 요리들이 올라간 그릇들을 탁자에 늘어놓는 것을 잠자코 바라보았다.


“술은 감로(甘露)로 준비했습니다.”


차우마랄의 그 말에, 다시 한 번 바타르의 눈가가 잠깐 꿈틀거렸다. 바타르는 한 손은 뒷짐을 진 채로, 오른손을 휙 하고 뻗어 술주전자의 뚜껑을 열어 보았다. 그에게 낯설지 않은 술의 향기가 방 안으로 퍼져 나왔다.


오로홍감(五露紅甘). 산왕국의 명주임에 틀림없었다.


문득 변경백 바타르의 입에서 너털웃음이 터져 나왔다. 화려하고 예쁘게 만들어진 다과, 담백하게 만들어진 쌀 과자, 채소가 많고 고기는 적은 볶음요리. 하나같이 제국의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제국에서 다과는 즐기지 않고, 쌀은 적게 심고 밀과 보리를 많이 심으며, 과자는 젖을 끓여 만든다. 요리에는 채소가 적고, 고기는 많다.


“산왕국의 산물이 많군요, 첫째 황녀, 차우마랄.”


변경백 바타르가 주전자의 뚜껑을 다시 닫으며 말했다. 차우마랄은 태연한 얼굴로, 그의 앞자리에 마주 앉았다.


“하르부가에 선이 있지요.”


그 태연한 어투에는, 변경백 바타르도 헛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조금 일그러진 미소를 지은 채 변경백 바타르가 차우마랄과 마주 앉자, 그녀의 시녀들은 모두 방 밖으로 나갔다.


하르부가와 교역을 포함한 모든 교류를 끊을 것을 주장하고 관철시킨 것이 바로 변경백 바타르였다. 그를 도발하고자 한 것이라면 지나치게 성공적인 것이었고, 그 외의 의도가 있다면 너무나도 치기어린 것이었다.


“어느 씨족이지요?”


어디 한 번 들어나 보자는 듯, 변경백 바타르가 팔꿈치를 탁자에 대고 턱을 괸 채 청자들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바르 씨입니다.”


허, 하고 변경백 바타르에게서 황당하다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바르 씨라면, 동호경을 가장 열심히 약탈하는 부족 중에 하나가 아닌가!


“첫째 황녀 차우마랄, 그들이 무얼 줬습니까? 뭘 약속했어요?”

“제가 먼저 선을 대었지요.”

“참 대단한 일 하셨습니다.”


변경백 바타르의 입에서 드물게도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바르 씨가 동호경의 약탈에 열심이라는 소리는 곧 산왕국과 가깝다는 것이다. 변경백 바타르는 차우마랄이 선을 댔다는 뜻을 아주 쉽게 알아챘다. 바르 씨에 선을 댄 것이 아니다. 바르 씨를 통했든, 그쪽을 통해 바르 씨와 선이 이어졌든, 그녀는 산왕국에 선을 댄 것이다.


“가산군주(嘉山君主)는 참으로 현명한 사람이더군요. 정말 말이 잘 통해요.”


그 말에, 바타르가 팔짱을 낀 채로 차우마랄을 노려보았다. 가산군주. 가산군주 개염지(開艶摯). 동호경에 있으며 거의 평생을 하르부가와 싸우고 산왕국과 싸우다시피 해 온 바타르가 그 이름을 모를 리 없었다. 산왕국 왕의 장녀. 다시 말해, 산왕국의 계승권자였으니까.


“제 생각을 정말 잘 알더군요.”

“얼마입니까?”

“동호변경백 바타르, 나의 구부(舅父). 정말 이상한 일 아닌가요? 옥패수탐이라는 장난질로 다음대의 대 칸을 정한다는 거.”

“차우마랄 첫째 황녀. 가산군주가 얼마나 약속했습니까.”

“심지어는 매번 전란이 되거나, 그 비슷한 참사가 되지요. 수탐자는 실패하면 죽기 마련이요, 성공해도 아버지 대 칸처럼 폐인이 되니, 이런 일이 말이나 되나요?”


그 말이 마쳐지기도 전에, 바타르가 장심(掌心)으로 탁자를 거세게 내리쳤다. 무언가 무너지기라도 하는 것 같은 큰소리가 방 안에 울리고, 청자들이 요란한 소리를 냈다. 튼튼한 흑단(黑檀)으로 만든 것이 아니었더라면, 그 순간에도 온갖 보고와 서류에 생각이 미친 바타르가 힘을 빼지 않았더라면, 탁자다리가 속절없이 부러졌을 것 같았다.


“말을 조심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첫째 황녀.”

“그래서 제가 수탐권을 버렸습니다, 나의 구부.”


변경백 바타르는 잠자코, 아무 말도 않은 채로 차우마랄을 노려보았다. 차우마랄 또한 피하지 않고, 그의 눈을 마주 보았다. 차우마랄의 눈동자에서는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 대 칸 야와우르와 닮은, 불타오르는 영혼이 그대로 비쳐 나오는 것 같은 눈동자였다. 바타르는 그것을 범을 닮은 호박색 눈동자로 가만히, 한참을 노려보았다.


아주 오래 전, 수탐전란 때 차우마랄의 아버지, 대 칸 야와우르와 대면했던 기억이 새삼스레 떠올랐다.


대 칸 야와우르도 그 때, 저런 눈동자였던가?


아니다, 아니었던 것 같다.


“걱정하시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타오르는 눈동자와는 대비되게도, 차우마랄의 입가는 예쁜 호선을 그리며 미소를 만들어냈다.


“제국 땅을 제국의 병사가 아닌 자들이 밟게 할 수는 없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나의 구부?”

“약속드리지요, 첫째 황녀. 제국의 땅을 밟는 다른 땅의 병사들은, 모두 결코 고향 땅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겁니다.”

“든든하네요, 나의 구부.”


그렇게 말한 차우마랄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예의를 갖추어, 변경백 바타르 또한 그녀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니, 이제 구부라고 부르면 안 되려나요? 동호변경백 바타르.”


바타르는 그녀의 말을 향해 호랑이처럼 사납게 웃어보였다.


“옆에 서기엔 저의 곰이 부족함이 많겠군요, 첫째 황녀 차우마랄.”

“하는 수 없는 일이지요.”


하르부가에서도 반제국파인 바르 씨와, 심지어는 산왕국과 선이 있음을 감추지 않고 드러낸 이상, 동호경을 다스리는 변경백 바타르의 입장에서 이제 차우마랄은 동호경에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그의 뒤를 이어야 할 카르 바르가를 황도로 보낼 수도 없는 일이었다.


혼사는 깨졌다.


이유는 만들어내야 했다.


황녀가 하르부가의 바르 씨, 그리고 산왕국과 친해서라고 얘기했다간, 그렇잖아도 혼란한 황도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 되고 말 것이다.


그리고 변경백 바타르는 제국에는 충성하지만, 20여년 전에도 그러했듯이 계승을 둘러싼 혼돈에 뛰어들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는 제국의 땅을, 동호경의 방벽이면 충분했다. 그 이상은 바라지 않았다. 그녀가 단순히 야망이 있는 수준이 아니란 것을 진즉에 알았더라면, 애초에 이 혼사를 받아들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기야, 차우마랄은 성인식에서 흰 순록을 잡아 돌아온 이였다.


가죽은 아버지 대 칸 야와우르에게 바치고 뿔로는 자신의 화살통을 만들었다던가. 흰 순록이 대 칸을 상징하는 짐승 중에 하나였기 때문에, 성인식에서 잡은 짐승이었음에도 대 칸 야와우르에게 나눠 바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 파혼에 대한 사죄의 의미로 선물을 하나 드리지요, 동호변경백 바타르.”


문을 나서기 전, 막 생각이 미쳤다는 듯이 차우마랄이 돌아서며 말했다.


“나의 곰...아니, 변경백의 카르 바르가는 돌아오게 하는 편이 좋을 거예요.”


차우마랄은 정말로 걱정이 된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고 눈을 내리깔며 소매로 입가를 가렸다.


“저의 친구들이, 봄이 지나 곤궁함을 더 이상 견디기 힘들다고 들었거든요.”


그 말을 마치고 차우마랄이 사라지자, 바타르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헛웃음은 곧, 너털웃음으로 바뀌고, 다시 커다란 웃음으로 바뀌었다.


어린 여우가, 제국의 진짜 여우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탔구나.


하지만 유쾌하기도 했다. 따지고 보면, 제국의 잿빛 여우의 약속은 지켜졌다. 차우마랄은 그의 곰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혼약이 무너졌으니, 잿빛 여우의 약속대로 곰은 차우마랄의 말에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동호경의 잡다한 의족과 족민들 또한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나이를 떠나 친구였던 이, 아르트 케시크의 옛 만장 어터르친의 말이 떠올랐다.


앉아서 천리(千里), 따르면 천리(天理), 모자람도 어긋남도 없다.


제국의 잿빛 여우에 대해, 참으로 맞는 말이었다. 그것이 네르구이가 한 일이건, 차우마랄 스스로가 한 일이건, 이제 세첸 네르구이의 약속은 지켜졌다. 그렇다면 동쪽의 산군이 이제 보답할 차례였다. 며느리가 될 뻔한 아이에게 약속한 것도, 단단히 지켜야 했다. 바타르의 입가에 산군의 난폭한 미소가 떠올랐다.


변경백 바타르는 곧 빈 종이 하나를 꺼내들고, 천천히 붓을 놀리기 시작했다.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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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 16. 남호南護 (完) 19.10.30 59 0 15쪽
135 16. 남호南護 (8) 19.10.29 47 0 17쪽
134 16. 남호南護 (7) 19.10.26 43 0 13쪽
133 16. 남호南護 (6) 19.10.23 56 0 12쪽
132 16. 남호南護 (5) 19.10.21 50 0 11쪽
131 16. 남호南護 (4) 19.10.19 44 0 13쪽
130 16. 남호南護 (3) 19.10.18 49 0 11쪽
129 16. 남호南護 (2) 19.10.17 42 0 12쪽
128 16. 남호南護 (1) 19.10.16 46 0 12쪽
127 15. 샤타르將棋 (完) 19.10.15 49 0 16쪽
126 15. 샤타르將棋 (9) 19.10.14 52 0 12쪽
125 15. 샤타르將棋 (8) 19.10.11 44 0 12쪽
124 15. 샤타르將棋 (7) 19.10.10 60 0 10쪽
123 15. 샤타르將棋 (6) 19.10.09 55 0 12쪽
122 15. 샤타르將棋 (5) 19.10.08 49 0 11쪽
121 15. 샤타르將棋 (4) 19.10.07 49 0 10쪽
120 15. 샤타르將棋 (3) 19.10.06 59 0 14쪽
119 15. 샤타르將棋 (2) 19.10.04 45 0 13쪽
118 15. 샤타르將棋 (1) 19.10.03 47 0 13쪽
117 14. 복호伏虎 (完) 19.10.01 51 0 14쪽
116 14. 복호伏虎 (9) 19.09.30 45 0 13쪽
115 14. 복호伏虎 (8) 19.09.29 43 0 10쪽
114 14. 복호伏虎 (7) 19.09.28 52 0 11쪽
113 14. 복호伏虎 (6) 19.09.26 60 0 11쪽
112 14. 복호伏虎 (5) 19.09.25 46 0 11쪽
111 14. 복호伏虎 (4) 19.09.24 53 0 13쪽
110 14. 복호伏虎 (3) 19.09.23 60 0 11쪽
109 14. 복호伏虎 (2) 19.09.22 50 0 14쪽
108 14. 복호伏虎 (1) 19.09.21 58 0 12쪽
107 13. 칸汗;王 (完) 19.09.20 52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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