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의 아이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문낭호
작품등록일 :
2019.07.30 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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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30 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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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19 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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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성인식成人式 (6)

DUMMY

“황자님.”


벨트레그는 그릇 하나를 든 채 조심스런 걸음으로 어치르의 게르 안으로 발을 들였다. 서호군의 군진에 이른지 하루가 되었지만, 어치르는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고 있었다. 걱정이 되어 고깃국 한 그릇을 가져왔으나, 벨트레그를 돌아본 어치르는 국그릇을 보자마자 고개를 모로 돌려 버렸다.


“필요 없으니 도로 가져가게, 벨트레그.”


단호한 말이었으나, 벨트레그는 듣지 않았다. 대신에 어치르가 앉은 탁자 앞에다 국그릇과 수저를 내려놓고, 묻지도 않고 어치르와 마주 앉았다.


“가져가래도.”


어치르가 눈살을 찌푸렸다. 어치르는 무얼 먹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배가 고프지도 않았다. 가슴 속을 무언가 무거운 것이 억누르는 듯하여, 무엇을 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홀로 복기나 해볼까 꺼냈던 바둑판도, 채 돌 몇 개를 놓기도 전에 치워버렸다. 아직도 소식이 없는 사랄출룬이 떠오른 탓이었다.


“오늘까지 돌아온 그대의 형제가 몇인가?”


벨트레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대답이 어치르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할 것임을 알았다.


돌아온 울란 케시크는, 열 손가락으로 다 꼽기도 힘들 정도로 적었다.


“나의 사랄출룬은? 여전히 아무 소식도 없는가?”


벨트레그는 차마 어치르를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야와우르와의 전투에서 헤어졌던 울란 케시크도 몇 돌아왔으나, 하나같이 사랄출룬의 소식은 알지 못했다. 무사히 빠져나왔으나 소식을 전하기 힘든 상황인 것인지, 그도 아니면 항복하는 병사들에 휩쓸려 붙잡혔는지, 그것도 아니면 혼란한 전투 와중에 목숨을 잃었는지. 어느 쪽인지 확실하기라도 하면 좋으련만, 누구도 아는 이가 없었다.


“물을 마시면 불 같고, 고기를 씹으면 가죽을 씹는 것 같아, 벨트레그. 냄새까지도 역하니, 제발 가지고 나가게.”


어치르가 머리가 아픈 듯 머리 한쪽을 붙잡으며 그렇게 말했으나, 벨트레그는 그 말에 따라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러면 쓸개를 씹는다 여기시고 드십시오.”


벨트레그는 도리어 국그릇을 더욱 어치르에게 가까이 밀어내었다. 어치르가 사나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지만, 벨트레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불이든, 가죽이든, 쓸개든, 다 드십시오.”

“벨트레그.”

“드셔야 사십니다.”


어치르는 자신을 똑똑히 마주보는 벨트레그의 눈을 마주보고, 차라리 죽고 싶은 마음이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었다. 살리흐를 만났을 때, 차라리 기쁜 마음이었노라고도 도저히 말할 수 없었다.


“황자님께서는 저의 형제들의 목숨을 빚지셨습니다.”


벨트레그가 낮은 목소리로 하는 말에, 어치르는 허, 하고 헛웃음처럼 숨을 내뱉었다.


“나의 황자님, 황자님의 생은 오로지 황자님의 것이 아니십니다.”

“그러면, 나는 이제 내 마음대로 죽지도 못한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나의 황자님. 저의 이 목에 숨이 드나드는 한에는 안 됩니다.”


어치르는 아무 대답도 않고 국그릇을 내려다보았다. 별 음식도 아니었다. 보르츠를 넣고 죽처럼 끓인 것이 다였다. 하지만 병사들의 저녁시간도 지난 지 한참, 벨트레그가 일부러 준비해서 가져오는 데는 적잖이 손이 들었을 것이었다.


“드십시오.”


벨트레그가 다시 한 번 단호히 말했다.


어치르는 넙대대한 나무 숟가락을 들어, 죽에 가까운 고깃국을 퍼 올렸다. 혀에 닿는 것이 까끌까끌했다. 입에 들어오니 뜨겁지 않은데도 불을 삼키는 듯 했고, 역하고 쓴 쓸개를 씹는 듯 했다. 실제로 그런 맛은 아닐 테지만, 적어도 어치르에게는 그랬다. 간신히 한 입을 삼킨 어치르가 입을 열어 말했다.


“먹어 본 중에 제일 맛없는 보르츠로군.”

“서호군 놈들이 보르츠 만드는 재주는 없나 봅니다.”


툭 던져진 벨트레그의 말에, 어치르는 피식 웃으며 다시 한 숟갈을 퍼 입에 넣었다. 여전히 입에 모래를 씹는 듯 까끌하고, 쓸개를 삼키는 듯 썼다.


“서호변경백에게서는 아무 말도 없나?”

“소식이나 이르렀겠습니까. 서호군에는 차강 수울처럼 빠른 전령도 없으니, 시일이 제법 걸릴 것입니다.”


옳은 말이다, 고개를 끄덕이며 어치르는 다시 한 숟갈을 먹었다. 음식이 아니라 독을 먹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벨트레그의 말이 옳았다. 어치르의 생은 이제 어치르 자신만의 것이 아니었다. 아니, 어치르는 가만히 자신의 생이 오로지 자신만의 것인 적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니 입에 독처럼 여겨지고 혀에 쓸개처럼 쓴 것이라도, 생을 놓지 않기 위해 꿀꺽 삼킬 수밖에.


“기병을 빌려 사방을 정찰시키게, 나의 벨트레그.”


어치르의 붉은 눈이 다시 번뜩이는 것을 보고, 벨트레그는 지시에 따르겠다는 뜻으로 고갤르 숙여 보였다.


“군진의 위치를 정확히 모르는 이들도 많을 것이야.”


어치르는 다시 숟가락으로 고깃국을 퍼 올렸다. 이제 거의 다 먹어, 바닥이 보여 왔다. 애초에 그리 큰 그릇도, 그리 많은 양도 아니었다. 억지로 삼키다보니, 불을 삼키는 것 같은 고통도 금방이었다.


“사랄출룬의 소식도 좀 더 알아봐주게.”

“따르겠습니다.”

“사막을 삼키는 것 같군.”


마지막 한 숟갈을 삼키고, 어치르가 중얼거렸다. 남호경의 한 쪽, 낮에는 햇볕이 뜨겁게 모래를 달구고 밤이면 물이 얼어붙도록 차가워진다는, 사방 오백리가 모래뿐이라는 사막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가본적은 한 번도 없고, 이야기와 책의 글자로만 접해본 땅이었다. 하지만 그곳의 모래를 퍼먹는다면, 이런 기분이 아닐까 했다.


“더 가져다 드릴까요?”

“오늘은 되었어, 나의 벨트레그.”


어치르는 빈 그릇을 보기 싫다는 듯 밀어버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벨트레그가 빈 그릇을 챙겨, 어치르를 뒤따라 일어났다.


어치르는 이 군진에 이르러 게르에 들어선 이래, 처음으로 게르 밖으로 나섰다. 군진은 고요했고, 가끔 군사들이 움직이는 소리만이 멀리서 들려왔다. 원래 군진을 이끌던 서호군 지휘관의 배려로, 어치르나 울란 케시크들은 병사들의 게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 잡았다.


배려가 아니라면, 단순히 패하고 돌아온 이들의 감정이 자신의 병사들과 뒤섞이는 것을 꺼렸을 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건, 제법 능력 있는 자인 것 같다고, 어치르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달은 다시 차오르고 있었다. 하늘은 구름 없이 맑아, 검푸른 지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어치르는 그 지붕을 가로지르는 젖의 강을 따라, 별 하나하나를 살폈다.


“이 군진에 병사가 몇이라던가?”

“기병이 오천, 보병이 이만쯤 된답니다.”


어치르는 군진에 들어서며 보았던 군진의 기병들과 보병들을 떠올려 보았다. 보병들의 군장(軍裝)은 그가 이끌던 서호군과 크게 다를 것 없었다. 방패와 장창, 짧은 검과 갑옷을 갖추고 있었으나, 중갑보병이라고 부르기에는 조금 모자람이 있었다. 기병 또한 은빛 번쩍이는 통짜 판금으로 만든 흉갑을 입고는 있었으나, 중기병이라기보다는 경기병이라 하는 것이 맞는 무장이었다.


“그런데도 우리가 패배한 소식을 듣고도 이 자리에 가만히 있는다더냐?”


벨트레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몇 만에 이르는 병력을 이렇게 쉽게 징집으로 짜낼 수 있다는 것이 서호경이 대단한 점이긴 했다. 나르 두르가 이끄는 본진만 해도 벌써 십만 단위에 이르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이 군진의 병사가, 그들이 이끌던 서호군과 비교해도 그리 대단치 않은 규모라는 것이 문제였다.


“군장(軍將)이 나를 제법 가볍게 본 모양이야.”

“나의 황자님, 황자님을 가볍게 봤다기보다는, 아르트 케시크를 가볍게 보는 것이지요.”


아르트 케시크의 천호가 셋, 병력으로 따지자면 삼천. 어치르 또한 아버지 대 칸 야와우르가 세 개의 천호만으로 자신을 상대하겠다는 의지를 보였을 때, 그의 아버지가 자신을 얕보는 것이라 분해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질 거라는 생각을 안 했을 뿐이지, 그 세 개 천호에 발목을 잡히기에는 충분하다 여겼다.


결국 어치르 또한 아르트 케시크를 어느 정도 낮게 본 것이긴 했지만, 이 군진의 병력은 그보다도 적었다.


어치르는 이 군진의 군장의 생각을 손에 잡힐 듯 알 것 같았다. 사만에 이르는 병력으로 삼천에게 패퇴한 것은, 오로지 군을 이끈 그의 부족한 능력 탓이라 여기는 것이 분명했다.


서호군은 이야기와 전설, 신화로만 아르트 케시크를 접해 왔다. 지난 수탐전란에서도, 서호경은 아르트 케시크의 말발굽에 거의 짓밟히지 않았다. 눈치 좋고 세를 읽는 것이 빠른 서호변경백이 재빠르게 허리를 굽힌 덕분이었다. 그 때 실제로 아르트 케시크의 위용을 맛본 이들도 아마 얼마 남아있지 않을 터였다.


아르트 케시크에 대해 잘 안다 여긴 어치르도, 사랄출룬도, 벨트레그도 속절없이 당했다. 그러니 아르트 케시크에 대해 잘 모를 서호군의 군장이 보자면, 어치르는 삼천도 되지 않는 병력에 대패하고 온 능력 없는 황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었다.


“만나봐야겠군.”


어치르는 양손에 힘을 주어 꽉, 주먹을 쥐었다. 얼마간 손질하지 못해 길어진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고통이 밀려 들어왔다.


“나의 벨트레그, 그대도 이만 들어가 봐. 대신 내일 일찍 와주고.”


돌아보지 않은 채 하는 말에도, 벨트레그는 그러겠노라 대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보이지 않는데도, 벨트레그가 어치르를 대하는 예는 지극히 정중했다.


어치르는 얼마 지나지 않아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를 들었다. 어치르는 굳이 돌아보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방이 고요해지고, 어치르의 주변에는 밤의 어둠과 달과 별의 빛만이 남았다.


어치르는 속 깊은 곳에서부터 밀려오는 열기에 급히 허리를 굽혔다. 마치 혼자 남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고통과 역함이 한꺼번에 밀려나왔다. 어치르는 그것을 남김없이 초원 위에 쏟아내었다. 타는 듯 쓰라린 통증이 목에서부터 몰려 나왔다. 애써 억누르며 먹은 보람도 없이, 사막의 모래와 역겹고 쓴 쓸개조각들을 모조리 토해 내었다.


온몸이 바르르 떨려왔다. 어치르는 견딜 수 없어, 결국 무릎을 꿇고 그 자리에 엎드리다시피 했다. 먹은 것은 다 토해 내었는데도, 속에서는 끊임없이 뜨거운 고통이 밀려나왔다.


토악질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어치르의 위장은, 그야말로 모든 것을 게워낸 후에야 토악질을 멈췄다.


그 모든 일이 끝나고 나서야, 어치르는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몹시 중노동을 한 듯, 온몸에 피로감이 몰려왔다. 어치르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게르로 향하며, 소매로 입가를 닦아 내었다. 게르로 돌아가자마자 이 윗도리를 벗어버려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술이 간절하게도 생각났다. 이 상황에 술이 간절해지다니 어이가 없어 피식 웃음이 나오면서도, 도착한 첫날 군진의 군장이 위로한답시고 보내준 술병에 생각이 미쳤다.


일단 내일, 군장을 만나거든 보내준 술에는 감사를 전해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어치르는 모든 것을 뒤로하고 자신의 게르로 들어섰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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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 16. 남호南護 (完) 19.10.30 59 0 15쪽
135 16. 남호南護 (8) 19.10.29 47 0 17쪽
134 16. 남호南護 (7) 19.10.26 43 0 13쪽
133 16. 남호南護 (6) 19.10.23 56 0 12쪽
132 16. 남호南護 (5) 19.10.21 50 0 11쪽
131 16. 남호南護 (4) 19.10.19 44 0 13쪽
130 16. 남호南護 (3) 19.10.18 49 0 11쪽
129 16. 남호南護 (2) 19.10.17 42 0 12쪽
128 16. 남호南護 (1) 19.10.16 46 0 12쪽
127 15. 샤타르將棋 (完) 19.10.15 49 0 16쪽
126 15. 샤타르將棋 (9) 19.10.14 52 0 12쪽
125 15. 샤타르將棋 (8) 19.10.11 44 0 12쪽
124 15. 샤타르將棋 (7) 19.10.10 60 0 10쪽
123 15. 샤타르將棋 (6) 19.10.09 55 0 12쪽
122 15. 샤타르將棋 (5) 19.10.08 49 0 11쪽
121 15. 샤타르將棋 (4) 19.10.07 49 0 10쪽
120 15. 샤타르將棋 (3) 19.10.06 59 0 14쪽
119 15. 샤타르將棋 (2) 19.10.04 45 0 13쪽
118 15. 샤타르將棋 (1) 19.10.03 47 0 13쪽
117 14. 복호伏虎 (完) 19.10.01 51 0 14쪽
116 14. 복호伏虎 (9) 19.09.30 45 0 13쪽
115 14. 복호伏虎 (8) 19.09.29 43 0 10쪽
114 14. 복호伏虎 (7) 19.09.28 52 0 11쪽
113 14. 복호伏虎 (6) 19.09.26 60 0 11쪽
112 14. 복호伏虎 (5) 19.09.25 46 0 11쪽
111 14. 복호伏虎 (4) 19.09.24 53 0 13쪽
110 14. 복호伏虎 (3) 19.09.23 60 0 11쪽
109 14. 복호伏虎 (2) 19.09.22 50 0 14쪽
108 14. 복호伏虎 (1) 19.09.21 58 0 12쪽
107 13. 칸汗;王 (完) 19.09.20 52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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