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의 아이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문낭호
작품등록일 :
2019.07.30 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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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30 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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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17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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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칸汗;王 (5)

DUMMY

카르어이는 여느 때와 같이 조용했다.


겨울이 다가오며 곰들은 겨울잠에 들어갈 준비를 시작했다. 먹이로 잔뜩 배를 채우고, 움직이는 영역을 줄어들었다. 덕분에 늑대들은 살판이 나, 밤마다 달을 향해 울부짖었다. 그런 늑대들도, 오늘만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카르어이의 모든 곳에서, 하르부가들이 한 곳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가장 높은 나무가 있는 곳, 그 그림자에 가려 다른 나무들은 자라지 못해, 하늘이 훤히 바라다 보이는 곳. 그곳으로, 차강씨를 비롯해 거의 모든 씨족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둥, 북 치는 소리가, 나무 사이사이를 떠돌며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모여든 씨족들이 북소리에 맞춰, 나무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오강.”


그 사이에 유일하게 서 있는 이, 이르웨스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이르웨스의 발치에 엎드린 차강씨 전사 하나가, 고개를 숙인 채로 양 손으로 칼을 들어 올렸다. 그 칼을 내려다보는 이르웨스의 눈에, 짧은 순간에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모든 감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르웨스는 그 칼을 받아드는 대신에, 고개를 돌려 신목(神木)을 바라보았다. 하르부가에서도 가장 늙은 나무, 신령을 믿지 않는 하르부가가, 유일하게 모시는 신령의 상징.


다시 한 번, 둥, 길게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르웨스는 전사가 여전히 들어 올리고 있는 칼을 쥐었다. 정성스레 손질한 사슴가죽으로 칼집을 만든, 유난히도 긴 칼이었다. 칼의 묵직한 무게를 견디며, 이르웨스는 칼을 자신의 앞에 세워 올렸다. 야와우르, 그대가 쥐고 있던 칼의 무게를, 조금은 알 것 같구나. 이르웨스는 칼을 세워 든 채로, 잠시 눈을 감았다.


또 한 번, 길게 울리는 북소리가 이르웨스의 귀를 파고들었다.


그와 함께 카르어이에서는 드물게 텅 빈 하늘로부터, 길고 높은 휘파람 소리와도 같은 소리가 날아 들어왔다. 맹금이 우는 소리였다. 이르웨스는 감았던 눈을 뜨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소리는 들렸는데, 정작 맹금이 보이질 않았다.


문득, 신목 앞에, 하얀 형체가 보이는 듯 했다.


이르웨스는 칼을 세워 든 채 신목을 향해 걸어갔다. 이르웨스가 걸어가는 길을 따라, 무릎을 꿇고 선 채로 이르웨스를 바라보던 하르부가들이 하나 둘씩, 땅 위에 엎드렸다. 하르부가들이 만드는 파도에 타듯, 이르웨스는 한걸음 한걸음, 계속해서 신목을 향해 나아갔다. 나아갈수록, 신목 앞에 선 하얀 형체가 또렷해지는 듯 했다.


발아래까지 늘어진 하얀 옷자락이 햇빛을 받아 투명하게 반짝였다. 옷에는 별다른 무늬도 없었다. 다만 그 위로, 허리까지 흘러내리는 밤과 같은 머리카락이 선바람에 하늘거렸다. 원래 아무도 없었을 그 자리에 갑작스레 나타난 이건만, 이르웨스는 조금의 두려움도 없이 그에게로 나아갔다. 팔 한쪽을 뒤덮은 흉터가, 누군가의 숨결을 받는 듯이 간지러웠다. 참으로 오랜만에, 이르웨스는 작게 미소를 피워 올렸다.


이르웨스는 그 앞으로 나아가, 칼을 세워 든 채로 무릎을 꿇고 앉았다. 하르부가 모두가, 그런 이르웨스를 향해 무릎을 꿇은 채 엎드리고 있었다.


카르어이는 침묵하고 있었다. 카르어이, 검은 숲 전체가, 이르웨스를 굽어보고 있는 듯 했다.


“하늘의 신령이시여, 카르어이와 대산맥 모든 산군들의 주인 되는 신이시여.”


이르웨스는 하얀 옷을 입은 이를, 신목을 올려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르웨스, 제가 말했었지요.


“고귀한 하얀 순록의 피를 이어받은 이르웨스가, 오늘에 이르러 당신께 고합니다.”


하얀 옷을 입은 이가, 천천히 이르웨스를 향해 다가왔다. 그 자리에 있는 모든 하르부가들이 이르웨스를 바라보고 있었으나, 그 중에 하얀 옷을 입은 이를 보는 이는 아무도 없는 듯 했다. 하르부가들은 그저, 자랑스런 그들의 이르웨스만을 바라보았다.


이르웨스는 똑똑히 그를 보았다. 투명하게 반짝이던 하얀 옷자락은 완전히 하얗게 바뀌었다. 살랑거리는 긴 머리카락 사이로, 이르웨스는 똑바로 그 얼굴을 바라보았으나, 알아볼 수 없었다. 지쳐버린 목동 같아 보이기도 했고,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노인 같기도 했으며, 앞날에 대해 기대에 찬 소녀 같기도 했고, 첫 전투를 앞두고 잔뜩 긴장한 전사 같기도 했다.


다만, 그 눈동자만은, 이르웨스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오랜 시간 흩어져 있었던 순록의 자손들이, 오늘 이 자리에서 마침내 하나의 이름 아래 모이기로 하였습니다.”


이르웨스, 결국, 이 날이 왔군요.


하얀 옷을 입은 이가, 천천히 소매를 걷어 올린 후 양 손을 이르웨스의 머리 위에 올려놓았다. 높은 신목에 걸려 있던 해가 기울며, 햇빛이 이르웨스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엎드린 채로 이르웨스를 곁눈질 하던 몇몇 이들이, 그 모습을 보고는 자신들도 모르게 작게 감탄을 내뱉었다.


이르웨스는 지금껏 세워 들고 있던 검을 거꾸로 들고, 칼집을 끌어내려 검날을 드러내었다.


이르웨스를 비추던 햇빛이, 검날에 부딪히며 새하얗게 빛났다. 칼집은 뒤로 던져버렸다. 땅 위로 칼집이 털썩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이르웨스가 칼을 양손으로 쥐었다. 장식도 없이 밋밋한 칼이, 곧 이르웨스의 기합성과 함께 땅 속 깊이 파고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칼날은 완전히 땅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이르웨스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르웨스의 머리에 올려놓았던 손을 어느 샌가 가지런히 모아 쥔 하얀 옷을 입은 이가, 이르웨스를 마주보며 미소 지었다. 여전히 그 얼굴을 알아 볼 수는 없었지만, 눈동자만은, 또렷이 보였다.


금빛 속에, 은빛이 소용돌이치며 섞여있는 것 같은, 기이한 눈동자.


“그러니 이 자리에서.”


이르웨스는 말하며, 눈을 깜빡였다.


그 사이, 하얀 옷을 입고 있던 이는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이르웨스의 머리에, 여전히 그가 만졌던 촉감과 무게감이 은은히 남아있었는데도. 이르웨스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모여든 하르부가들이, 어느새 엎드렸던 몸을 들어 이르웨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가.”


산왕(山王)의 관(冠)도, 대 칸의 인(印)도 없지만.


이르웨스는 양 손을 천천히 하늘 위로 들어 올렸다.


“칸汗의 자리에.”


그와 함께,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 모인 하르부가들이 모두 몸을 일으켰다. 손을 들어 크게 소리치는 이들도, 눈물을 글썽이며 기뻐하는 이도 있었다. 어찌 되었건, 하르부가가 카르어이로 쫓겨 온 이래, 처음인 것이다.


그들이 지도자가, 하르부가를 하나로 만들어, 칸의 자리에 오른 것은.


“칸의 자리에 오를 것입니다.”


딸아, 나의 이르웨스. 네 평생의 사람을 잃고, 자식을 얻는 때에, 너는 칸이 될 것이다.


성인식을 치르던 해에, 주술사는 꿈을 꾸었다며 이르웨스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혼인을 하고, 살바르를 낳고, 또 병으로 남편을 잃었건만, 그 일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르웨스는 주술사가 그 때에 그저 헛꿈을 꾸었으려니 했다.


그런데, 지금에 이르러, 그것이 헛꿈이 아니었음을 알았다.


신령을 믿지 않는 하르부가가 믿는 신이라고는, 오로지 하나 뿐이었다. 그러니, 그 주술사에게 꿈을 준 이 또한 그 신령일 것이었다. 그리고, 아마도 이르웨스의 눈앞에만 나타났던, 하얀 옷을 입은 이 또한, 그 신령임에 틀림없었다.


에밍오르ㅡ약산신불.




이르웨스에게 살바르가 보낸 사람이 도착한 것은, 칸의 자리에 오르는 의식을 치른 바로 그 날의 밤이었다. 의식을 보러 온 하르부가들은 쉬이 흩어지지 않았고, 제각기 가져 온 음식들을 풀어놓으며 한바탕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의식을 치르느라 피곤하다는 핑계로 홀로 들어와 있던 이르웨스는, 살바르의 서신을 받아들고는 한참이나 읽지도 않은 채 그것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살바르. 마모치누아. 나의 아이들.


주변의 추대도 있었지만, 하르부가를 하나로 한 이상, 이르웨스 또한 어쩔 수 없이 칸이 되어야 함은 알고 있었다. 이전처럼 차강씨의 이름 아래 다른 씨족들을 움직인 것도 아니고, 이번에야말로 진정으로 하르부가의 이름 아래 모든 씨족을 모은 것이다. 그러니, 이르웨스는 오강이 아니라 칸이 되어야만 했다.


하지만 살바르, 더불어 마모치누아는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이르웨스는, 그것을 걱정하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보내 온 서신을 펴보지도 않고 보고만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결국, 이르웨스는 서신을 펼쳐, 읽어 내렸다. 서신의 내용은, 이르웨스가 읽기 전에 미리 짐작한 바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살바르는 이르웨스가 마모치누아를 받아들여 아들로 삼았는데, 이제 와 동호경과, 그리고 나아가 제국과 반목함은 옳지 않음을 꼬집고 있었다. 하르부가가 하나가 된 것은 놀랍도록 기쁘고, 자신 또한 반가운 일이나, 그 힘을 동호경과 제국을 침탈함에 쓰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의 행동이 바르씨와 다를 것이 무엇이냐며.


이르웨스는 서신을 다 읽어 내린 후, 다시 고이 접어, 한 쪽에 밀쳐놓았다.


살바르, 나의 딸아.


살바르가 한 말에 틀린 것은 없었다. 이르웨스 또한, 살바르가 서신에 적어 보낸 내용에 적잖이 동의하고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나의 딸아.


이르웨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나서자, 흥이 돋은 어느 하르부가의 노랫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려왔다.


검은 숲에 피는 꽃은 어디 있나.

순록의 아이들아,

늑대의 이빨 끝에, 산군의 발톱 끝에,

검은 숲에 피는 꽃이 있을 테다.


마두금 켜는 소리가 노랫소리와 함께 들려왔다. 길게, 그리고 아련하게 숲속으로 퍼져나가는 마두금 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이르웨스는 자연스레 마모치누아가 떠올랐다. 마두금 켜는 솜씨 하나는, 이르웨스가 본 중에 제일이었는데.


다시, 그 소리를 들을 날이 있을까.


이르웨스는 잔치에 함께하지 못한 채, 그들의 칸을 지키고 있는 전사 중에 하나를 불렀다. 낮과 밤 없이 달려, 나아가지도 돌아가지도 못한 채 있는 사신에게로 가라 했다. 사신에게, 이르웨스가 새로이 칸에 올랐음을 알리라고. 그리고 황도로 나아가, 젊은 세첸에게 전하라고 했다. 하르부가는 하나가 되었고, 이제 자신이 칸에 올랐음을.


고개를 끄덕인 채 달려 나가는 전사의 뒷모습을 지켜보다, 이르웨스는 다시 고개를 밤에도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신목을 바라보았다.


젊은 세첸의 대답에 따라, 어쩌면.


이르웨스는 딸도, 아들도 떠나보내야 할 것이다.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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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칸汗;王 (5) 19.09.17 34 0 11쪽
102 13. 칸汗;王 (4) 19.09.16 34 0 12쪽
101 13. 칸汗;王 (3) 19.09.16 36 0 9쪽
100 13. 칸汗;王 (2) 19.09.15 36 0 13쪽
99 13. 칸汗;王 (1) 19.09.12 37 0 14쪽
98 12. 탕가락盟誓 (完) 19.09.11 31 0 16쪽
97 12. 탕가락盟誓 (7) 19.09.10 29 0 12쪽
96 12. 탕가락盟誓 (6) 19.09.10 30 0 11쪽
95 12. 탕가락盟誓 (5) 19.09.09 29 0 22쪽
94 12. 탕가락盟誓 (4) 19.09.09 29 0 11쪽
93 12. 탕가락盟誓 (3) 19.09.09 32 0 14쪽
92 12. 탕가락盟誓 (2) 19.09.08 29 0 12쪽
91 12. 탕가락盟誓 (1) 19.09.07 35 0 11쪽
90 11. 울륵英雄 (完) 19.09.07 33 0 10쪽
89 11. 울륵英雄 (9) 19.09.06 34 0 12쪽
88 11. 울륵英雄 (8) 19.09.06 32 0 10쪽
87 11. 울륵英雄 (7) 19.09.05 31 0 11쪽
86 11. 울륵英雄 (6) 19.09.05 31 0 10쪽
85 11. 울륵英雄 (5) 19.09.04 30 0 14쪽
84 11. 울륵英雄 (4) 19.09.04 30 0 13쪽
83 11. 울륵英雄 (3) 19.09.03 30 0 12쪽
82 11. 울륵英雄 (2) 19.09.03 31 0 11쪽
81 11. 울륵英雄 (1) 19.09.02 28 0 10쪽
80 10. 효시嚆矢 (完) 19.09.02 28 0 9쪽
79 10. 효시嚆矢 (8) 19.09.01 31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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