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히어로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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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마마마바
작품등록일 :
2019.08.16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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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16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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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30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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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DUMMY

16.

보통 회사원들은 회사를 때려 치는 걸 꿈꾼다. 그런데 나는 한 번도 그런 걸 꿈꾼 적이 없다. 아트웍스에서 일하는 건 나에게 행운이었다.


사회에 처음 던져졌을 때 나는 내가 뭐라도 될까 싶었다. 그냥 사회 밑바닥의 거름으로 썩는 게 아닌가 싶었다.


부모님 집 지하실에 처박혀서 게임 좀 하고 만화 좀 그리는 게 다였다. 그런 나를 거둬준 게 아트웍스였다.


내가 회사 가는 걸 귀찮아하자 아트웍스는 재택근무를 허락해줬다. 고료가지고 징징댈 때면 인상해줬다. 그리고 싶은 걸 그리게 해줬고, 드힌 때를 제외하면 나에게 나쁘게 대한 적이 없었다.


그렇게 아트웍스에서 지금까지 일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일할 줄 알았다. 미래를 상상할 때면 항상 아트웍스도 상상했다.


아트웍스의 간판 작가가 된 헨리. 아트웍스 명예의 전당에 오르는 헨리. 코믹스 1위 기업이 된 아트웍스에서 일하는 헨리.


그런 꿈은 이제 산산이 부서졌다.


어디 소속도 아닌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다. 나는 지금 그림 좀 그릴 줄 아는 해파리에 불과하다.


궁상떠는 와중에 제리에게 전화가 온다.


“괜찮냐?”


제리가 말한다.


“그냥 뭐. 미래를 준비하는 중이지.”


“흠. 사장님과 얘기해 봤는데 워낙 완고하셔서.”


“사장님이 그렇지 뭐.”


“이직할 거야? 편집장님께 추천서 부탁할까?”


“잘 모르겠어. 일단 쉬면서 생각해보려고.”


잘 모르겠다. 나를 받아줄 데가 있을까? 사고치고 나오면 이직도 잘 되지 않는다. 업계는 작고 소문은 빠르니까.


어쩌면 코믹스 작가로서의 내 커리어는 끝난 걸지도 모른다. 다른 길을 찾아봐야 할지도 모른다. 그 디자인 회사 직원처럼.


“아, 깜빡 할 뻔했네. 뭐 좀 할 거 있는데. 시간 괜찮냐?”


제리가 말한다.


“시간이야 많지.”


“뭐 의례적인 일이야. 원래는 다른 직원이 담당하는데 내가 하겠다고 했어. 그게 나을 거 같아서.”


제리의 말이 길어진다. 마음이 불편한가보다.


“알았어. 하기나 해.”


“잠깐만 녹음 준비하고. 됐다. 이 대화는 녹음되고 있습니다. 귀하의 저작물들의 저작권은 계약에 따라 회사에 귀속되어 있으며 앞으로 그 저작물들을 활용한 창작활동은 법에 저촉될 수 있으니 각별히 주의하여 주십시오. 본 사항을 미리 알려드리니 이를 어기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여 주십시오. 이해하셨습니까?”


제리의 목소리가 기계음처럼 들린다.


“그래. 이해했어.”


나는 깊은 한숨과 함께 말을 잇는다.


“그럼 우리 사이도 여기까진가?”


“뭐? 내가 이제 네 편집자가 아니긴 하지. 그렇다고 네 친구가 아닌 건 아니잖아.”


제리가 말한다. 맞는 말이다. 그는 쾌활하게 말을 잇는다.


“직장 구하면 말하기나 해. 거하게 쏠 테니까.”


우리는 웃으며 전화를 끊는다.


전화를 보니 댄스에게서 문자가 와있다. 로즈에게서도. 나는 일단 댄스의 문자를 본다.


‘선배님 식사 하셨어요?’ - 제레미 댄스


댄스와 내 사이는 복잡하다. 댄스에 대한 내 생각이 정리가 되질 않는다. 그를 좋아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막상 그게 잘 안 된다.


어쨌든 뭐. 업계에 잘나가는 후배 하나 두는 건 멋진 일이니까. 나는 밥을 먹기로 한다.


댄스는 늘 입던 정장을 입고 온다. 그러고 보니 회사에 있을 때도 그 옷만 입었는데 세탁은 하는 걸까?


“사장님이 실수하신 거 같아요. 헨리 선배님을 그렇게 내쫓는 게 말이 되요?”


댄스는 만나자마자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 화제는 피하고 싶다.


“밥이나 먹으러 가지.”


우리는 전에 갔던 중식당을 향해 걷는다. 댄스는 그곳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거기는 가격이 싸요.”


이유를 물었더니 소박한 대답이 돌아온다.


나는 조용히 걷는다. 말할 기운이 없다. 주로 떠드는 쪽은 댄스다.


“어떻게 헨리 선배님을 그렇게 짜를 수 있죠?”


안될 것도 없지.


“내가 잘못한 것도 있으니까.”


“설마 선배님이 작가협회를 부른 거예요?”


“난 그런 짓은 안했어. 어떤 미친놈이 나한테 묻지도 않고 지 멋대로 부른 거야.”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 사장님도 그걸 아셔야할 텐데.”


우리는 중식당에 앉아서 적당한 메뉴를 먹는다. 내 건 무슨 면이고 댄스 것은 무슨 밥이고.


“선배님 먹고 나서 한잔 하실래요?”


“뭐? 술?”


“네 맥주도 좋고, 아무 거나요.”


나쁠 거 없지. 어차피 백수가 되니 하루도 긴데 취해서 보내는 것도 괜찮겠지.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나서 에인드 펍으로 간다.


“오 분위기가 괜찮네요.”


아직 낮 시간이라 그런지 익숙한 종업원은 없다. 나는 낯선 종업원에게 맥주 2잔을 시킨다.


맥주가 나오자마자 댄스가 술을 잘 못한다는 게 밝혀진다. 그는 한모금만 마시고 볼이 벌게진다.


“술 못 마시냐?”


“잘 마시진 않아요. 그래도 먹으려고 하면 먹죠.”


그래 먹으려고 하면 똥도 먹을 순 있지. 댄스는 반잔을 한 번에 마시고는 말을 잇는다.


“정말 이상한 거 아니에요? 선배님만큼 인상적인 만화를 그리는 사람이 없는데, 그런 선배님을 자르다니. 이해가 안 되네요.”


“내가 요즘 트렌드를 못 따라가니까.”


“트렌드보다 개성이 중요한 거 아니에요? 우리 회사는 너무 실적만 중요하게 생각해요.”


은근히 기분이 나쁘다. 자기는 트렌드에 맞춰서 돈을 쓸어 담는 주제에 말은 잘한다 싶다.


“그러는 너도 트렌드에 맞춰서 그리지 않냐?”


“그거야 어쩔 수 없죠.”


“어쩔 수 있지.”


“판매량 떨어져서 잘리면요.”


“뭐 나처럼 되는 거지.”


나는 비꼰 건데 댄스는 취해서 알아차리지를 못한다.


“그러기 싫어요. 잘리면 가난해져요. 그런 건 싫어요.”


“뭐 잘리면 잡지모델이나 하지 그래? 그 얼굴과 몸이면 충분하지 않냐?”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세요. 전부터 왜 그러세요. 저에 대해서 안다는 듯이 말하시던데.”


“그야 뭐 상상이 되니까. 졸업파티 때 너와 파트너하고 싶은 애들이 열은 됐겠지. 사람들도 너에게는 다들 사근사근하고 친절하게 대했을 거야. 안 그러냐.”


나는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잇는다.


“그러다가 왠지 모르게 만화나 그려보고 싶었겠지. 그래서 그렸고. 사람들이 뭘 원하는지 아니까 금방 성공했고. 넌 완벽한 녀석이니까. 안 그러냐?”


“선배님은 몰라요. 저도 힘들었다고요. 저도! 저도 언젠가는 드힌 같은 주인공이 나오는 코믹스를 그리고 싶었어요. 알아요? 친근한 캐릭터. 우리처럼 힘들고, 우리처럼 돈도 없는 그런 주인공이요.”


“그런 걸 그리고 싶었으면 그렸겠지.”


“어쩔 수 없었어요. 그런 건 잘 안보잖아요. 전 돈이 필요했어요. 팔리는 만화를 그려야 했다고요. 프로 데뷔도 못한 채 아무도 안보는 만화를 올리는 기분을 아세요? 팬레터 대신 독촉장만 쌓여가는 걸 보는 기분은요? 모르시겠죠. 그걸 아신다면 저를 비난하지 않으셨겠죠.”


힘들어하는 그의 모습이 상상되질 않는다. 이 완벽한 녀석이 이런 말을 하니까 기만처럼 느껴진다. 댄스는 남은 술을 다 마시고 말을 잇는다.


“선배님 최근 작품을 읽었어요. 스플릿맨이요. 좋더라고요. 꿈을 꾸는 이들이 배를 곯지 않도록. 뒷 표지에 그렇게 적혀있더군요. 정말로 스플릿맨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면 저도 선배님 같은 작품을 쓸 수 있을지도 모르죠. 정말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했을지도 몰라요. 말해주고 싶은 이야기를요.”


댄스는 말을 마치고도 뭐라 중얼거리다가 별안간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나는 시선이 부끄러워 그의 입을 막는다. 꿈에 대해 말하다가 노래를 부르다니. 뮤지컬 배우가 따로 없다.


나는 그의 입을 막고 부축하면서 펍 밖으로 데려간다. 그의 키가 나보다 훨씬 더 크기에 쉽지 않다. 좀 조용한 곳에 이르러서 그를 놓아준다.


“아무튼 그렇다고요! 아시겠어요?”


내가 입을 막는 동안 무슨 얘기를 한 모양이다. 나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인다.


“오늘 즐거웠습니다. 선배님. 가끔 이렇게 마셔요.”


댄스는 펍에서 있었던 일을 벌써 다 잊은 모양이다. 그는 꾸벅 인사한다.


“그럼 전 갈게요. 안녕히 가세요.”


이렇게 말하면서 댄스가 차도로 뛰어들려고 한다. 가겠다는 게 그 뜻이었나? 불안해진 나는 그를 데려다주기로 한다.


“너 어디 사냐? 아직도 회사에서 사냐?”


“어, 헨리 선배님 아직 안 가셨네요.”


취기가 점점 오르는지 댄스는 갈수록 이상해진다.


“회사에서 사냐고.”


“네. 회사에서 살아요.”


우리는 이인삼각을 하듯이 붙어서 비틀거리며 걷는다. 그는 자꾸 내 머리에 팔을 올린다. 기분 나쁘게. 댄스의 정장에서는 악취가 난다. 하필이면 택시도 잡히질 않는다.


내가 땀을 쭉 빼고 나서야 택시가 온다. 나는 댄스를 쑤셔넣고 옆에 앉는다. 택시는 회사로 굴러간다.


나는 회사 경비에게 댄스를 맡긴다. 경비는 이제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나에게 꾸벅 인사를 한다. 나는 숨을 고르면서 시원한 로비에 잠깐 있다가 나간다. 앞으로 댄스와 술 마시는 건 삼가야겠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면서 로즈의 문자를 확인한다.


로즈의 문자는 긴 거 하나랑 짧은 거 하나다. 긴 거는 내가 짤렸다는 sns글을 복사해서 보낸 것. 흠, 내가 이렇게 언급될 정도로 유명했었나? 그리고 그 밑에 짧은 문장.


‘괜찮은 거야????’ - 로즈 델리아


로즈는 몰랐으면 했는데. 다음에 만날 때도 내가 여전히 작가인 것처럼 대해주길 바랐는데.


나는 부끄러워서 답장도 하지 못한다. 그녀와 말을 섞기에는 너무 한심한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다. 그녀도 나에 대해서는 그렇게 신경 쓰지 않을 거다. 그냥 스쳐지나간 인연이라고 생각하겠지.


어쩌면 몇 년 후에 창가에 앉아서 밖을 보다가 떨어지는 풋사과를 보고 떠올릴지도 모르지. 아 그때 그 뚱뚱한 작가, 뭐하고 지낼까? 하고. 뭐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이 한심한 사람에게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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