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개의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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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nbo
작품등록일 :
2019.08.20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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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06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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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깊은 그림자(1)

DUMMY

“이거 큰일이군. 아직 마을까지 가려면 십 리는 더 남았을 텐데.”


퉁퉁 부어버린 바리의 발목을 살피며 영실이 중얼거렸다. 바리는 미안한 마음에 어쩔 줄 모르고 좌불안석이었다.


목지를 떠난 지도 어느덧 엿새가 되었다. 그동안 그들은 사당의 추격을 뿌리치기 위해 길 위에서 먹고 자는 강행군을 계속했다. 양식을 구할 때만 비교적 평범한 인상의 당우가 혼자 마을에 들를 뿐이었다. 목적지인 상평으로 가기 위해서는 호령산이라는 큰 산을 넘어야 했다. 그 전에 숨도 돌릴 겸 산 아래 위치한 마을로 향하던 중이었는데 바리의 발이 이상을 일으킨 것이다.


하긴, 진작 이리 되지 않은 것이 용하다고 해야겠다. 처음 여행을 하는 데다 귀한 대접을 받으며 자란 바리에게 지난 엿새간의 일정은 너무나도 가혹했다. 그럼에도 바리는 더러운 잠자리와 형편없는 음식, 그 어느 것 하나 불평하는 법이 없었다. 벌에 쏘인 양 빨갛게 부어오르고 물집으로 가득한 발은 분명 며칠 전부터 통증이 느껴질 터였다. 그것을 일행에게 폐를 끼칠까봐 꾹 참고 여기까지 견딘 것이다.


“무조건 참기만 한다고 능사가 아닐세. 이리 되기 전에 얘길 했어야지.”


“미안하오.”


“우리가 아니라 낭자를 위해서 하는 말이네. 몸이 상하면 고생하는 건 누구보다도 자신이란 말일세.”


손가락이 닿기만 해도 바리는 움찔하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일행 모두 짐을 뒤져봤지만 제대로 된 치료를 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수풀에서 한 여성이 걸어 나왔다.


그녀는 멧돼지의 털로 만든 조끼에 가죽 허리띠, 그리고 튼튼한 장화를 입은 사냥꾼이었다. 피부는 햇볕 아래 건강하게 탔으며 곧고 짙은 눈썹과 강인한 눈매에서는 자신감이 느껴졌다. 잠시 놀란 얼굴로 있던 여성은 이내 바리의 부은 발목을 보고 곧장 사태를 파악했다. 잠시 후, 그녀는 주변의 약초와 나뭇가지로 만든 부목을 덧대 솜씨 좋게 바리의 다리를 처치했다.


“이제 됐어요. 어느 정도 고통을 덜어줄 거예요.”


“고맙네.”


“마을로 가는 길이죠? 제가 안내해드릴게요.”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네.”


“아뇨. 이 근처는 위험해서 무슨 일이 있을지 몰라요. 마을에 무사하니 도착하는 모습을 직접 봐야지 제 마음이 편해질 테니 부디 거절하지 말아주세요.”


자신을 달래라고 소개한 이 사냥꾼은 불안한 듯 주위를 둘러본 뒤 일행을 재촉했다. 바리는 깡철이 업고 가기로 했다.


“이 근처가 위험하다니, 그건 무슨 말인가.”


“역시 아무것도 모르고 여기까지 오셨군요. 지금 호령산 일대는 나라에서 통금령을 내린 상태예요.”


“아니, 어째서?”


“호환이에요. 얼마 전부터 산을 오르던 주민들과 상평으로 가던 행인들이 살해되는 일이 발생했어요. 더 이상의 희생을 막기 위해 산에서는 호령산으로 통하는 모든 길목을 봉쇄했죠.”


“그럼 상평으로 가는 길도 막혀있겠군.”


“당연하죠.”


호령산을 통과하는 길은 상평으로 가는 지름길이었다. 호령산을 돌아가면 많은 날짜를 손해 보는 데다 흔적을 남기지 않아야 하는 그들로서는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땟국물과 먼지투성이인 당우 일행의 몰골을 살피며 달래가 말했다.


“분명 인근 고을까지 소식이 전해졌을 텐데요.”


“길을 잃는 바람에 몇몇 고을을 뛰어넘었거든.”


“용케 호령산으로 오는 길은 똑바로 찾으셨군요.”


“그러게 말일세.”


그러나 달래는 그 이상 캐묻지 않고 친절하게 길을 안내했다. 이윽고 준엄한 산맥과 그 아래 위치한 작은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의원의 위치를 알려준 달래가 작별을 고하며 숲을 향해 발을 돌렸다.


준엄한 산맥 아래 위치한 작은 마을은 우울한 분위기에 잠겨있었다. 일찍이 산에서 나는 소산물과 여행자들의 돈에 의지하던 처지였기에 그만큼 영향이 큰 것이다. 집집마다 나물과 버섯 등을 말리기 위해 펼친 돗자리엔 먼지만이 쌓여있었다. 호랑이의 습격을 두려워해 마을 둘레를 따라 날카로운 울타리를 세웠으며 호랑이를 쫓는 부적과 무서운 형상의 장승 등을 볼 수 있었다. 더러는 외지인의 방문에 관심을 보이기도 했으나 이내 축 늘어진 어깨를 이끌고 제 갈 길을 갔다. 마루에 앉아 무의미한 부채질을 반복하던 의원은 간만의 손님을 보고 반가운 티를 냈다. 조심스레 부목을 풀며 그는 한눈에 누구의 솜씨인지 알아보았다.


“오는 길에 달래를 만난 모양이구려.”


“어떻게 알았는가.”


“이 매듭 묶는 방식은 내가 그 애의 아비에게 가르친 것이라오. 달래는 당연히 그에게서 부목 대는 법을 배웠고.”

약을 조제하는 의원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드리웠다. 약을 먹고 깨끗한 붕대로 발목을 고정하니 바리는 한결 나은 표정이 되었다. 발목 자체는 단순히 접질린 것뿐이기에 며칠만 휴식을 취하면 괜찮아질 거라는 판정을 받았다. 그 밖에도 발바닥에 바를 약과 여분의 붕대를 건넨 뒤 의원이 말했다.


“그 아이의 발이 낫는 대로 마을을 떠나도록 하시오. 이곳은 이제 하늘의 노를 산 땅이 되었소. 남아있어 봤자 좋을 일이 없을 거요.”


마을에 하나뿐인 주막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그들이 방문했을 때 주모는 아예 일을 내팽개치고 집 안에 들어가 낮잠을 자고 있었다. 국을 끓이기 위해 식은 솥에 불을 붙이고 새 밥을 짓는 동안 당우 일행은 앞으로의 방안을 논의했다.


“산을 돌아서 가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죠?”


“못해도 이레는 넘을 걸세. 바리 낭자의 상태를 고려하면 그보다 더 필요하겠지.”


“어차피 길을 막았다 해도 산 전체를 감시하진 않을 것 아니냐. 그냥 우리끼리 산을 넘어가자.”


“아무런 지식도 없이 산을 올랐다간 미아가 되고 말걸.”


“그냥 앞만 보고 쭉 가면 되잖아.”


“주변이 나무천지인데 우리가 맞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어떻게 알겠나.”


“젠장, 귀찮아 죽겠네. 그냥 그 호랑이 우리가 잡자.”


“네?”


“그러면 문젯거리가 사라지는 셈 아니냐.”


그야말로 깡철다운 무식한 제안에 당우와 바리가 어이없어 하는데 뜻밖에도 영실이 깡철의 의견에 동의를 표했다.


“웬일로 자네치고 괜찮은 생각을 했군.”


“너 지금 뭐라고 했냐!”


“칭찬하는 걸세. 식사를 마치면 자세히 조사를 하도록 하지.”


“진심이에요?”


“아무리 그래도 범은 영물로 받들어지는 동물이오.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같소.”


“모르는 소리. 그동안 내가 노잣돈을 번다고 산에서 때려잡은 멧돼지나 곰이 몇 마리인데 범 한 마리 못 해치울까.”


“여차하면 내가 도와줄 걸세. 어차피 바리 낭자의 발이 나을 때까지는 여기에 있어야 하는 처지니 해보고 안 되면 그때 다른 길로 돌아가면 될 일이네.”


“네 도움은 필요 없다. 하루 만에 잡아보이도록 하마.”


문제의 호랑이는 아주 오래 전부터 산군으로 추앙받으며 산의 수호신 역할을 하던 영험한 범이었다. 산군의 보호 아래 산은 풍요로웠으며 삿된 이매망량이 감히 발을 붙일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랬던 산군이 돌변하여 살육을 시작한 이유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이야기를 하던 마을 사내가 신벌이 내린 것이라며 어깨를 떨었다.


“죽은 이들만 불쌍하게 됐죠. 시신이라도 찾아서 명복을 빌어줘야 하는데.”


“그건 무슨 말인가.”


“희생자들이 살해당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장소에는 엄청난 양의 혈흔과 찢어진 옷자락 등이 남아있을 뿐, 시신은 감쪽같이 사라져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아마 산군이 거처로 물고 간 것이겠죠.”


“그렇다면 이 일을 호환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지 않나.”


“산군의 발자국과 털이 항상 그 자리에서 발견됐으니 의심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애당초 이 근방에서 사람을 덮칠 만한 짐승은 산군밖에 없습니다. 곰이고 이리고 전부 옛적에 산군이 쫓아냈거든요. 그 덕에 상평으로 가는 길이 안전할 수 있었던 것이고요.”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물어보겠네. 혹시 아직도 산에 출입하는 주민이 있는가.”


“누가 미쳤다고 제 목숨 버릴 일을 자처하겠습니까. 상대는 몸길이만 열 자가 넘는 데다 수백 년 간 이 산을 다스린 터줏대감이라고요. 뭐, 딱 한 명 산군을 잡겠노라며 뻔질나게 산을 드나드는 정신 나간 년이 있지만요.”


“그게 누군가.”


“달래 말입니다. 직접 안내도 받았다고 들었는데요.”


“그러고 보니 처음 만났을 때도 숲속에 있었죠.”


“참 불쌍한 녀석입니다. 어렸을 때 어머니를 병으로 여읜 것도 모자라서 이번에는 아버지마저 돌아가셨으니 눈이 뒤집어질 만도 하죠.”


“이번에는?”


“달래의 아버지가 처음으로 산군에게 희생당한 분이었거든요. 마을에서 가장 뛰어난 사냥꾼이었는데 그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사내를 보내고 마을 어귀에서 달래를 기다리는 일행의 표정은 착잡하기만 했다. 자신을 기다리는 일행을 발견하고 달래가 아는 체를 했다.


“그 아이, 발목은 괜찮은가요?”


“접질린 것뿐이라고 하더군. 지금은 주막에서 쉬고 있네.”


“다행이네요. 그런데 여기까진 무슨 일로 나오셨나요.”


“범을 잡으러 다닌다고 들었네. 우리와 협력하지 않겠는가.”


“기어이 산을 넘으실 생각이군요.”


“낭자는 산에 대해 잘 알고 우리는 이시미에 도술도 부릴 줄 알지. 서로 도움을 줄 수 있을 걸세.”


곰곰이 생각하던 달래가 영실의 제안을 수락하며 말했다.


“그 전에 확실히 해둘 것이 있어요. 저는 지금 산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것이지 산군을 사냥하려는 게 아니에요.”


“산군이 주민들을 해친 원흉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단 말이군.”


“오늘 하루 종일 이 상황에 대해 알아보고 다녔다면 여러분도 석연찮은 점을 느꼈겠죠. 그러니 산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확인하고 이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행동할 겁니다.”


“젠장, 까다롭기도 하구나.”


“나중에 가서 오해가 생기는 것보다는 낫죠.”


깡철의 거구에도 전혀 기죽지 않고 달래는 강단 있는 모습을 보였다. 결국 그들은 달래의 제안을 받아들이며 협력을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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