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 구출의 로망 (8)
난 익숙하지도 않은 기마술에, 등엔 어지간한 짐짝보다도 더 무거운 철 덩어리(?)를 달고 한나절을 꼬박 전력질주를 한 후유증으로 말에서 내리자마자 엄청난 허리통증을 느끼며 그대로 바닥에 퍼져버렸다.
공주가 요청한대로 피아이란에서 남동쪽방향으로 무턱대고 내달려왔지만 아직까지도 안전하다곤 할 수 없는 상황.
그러나 너무 괴로운 것은 어쩔 수가 없었고, 또 엄청난 무게를 진채로 한나절을 꼬박 달린 말이 완전히 지쳐 버렸기 때문에 잠시 멈출 수밖에 없었다.
하긴, 내가 이 정돈데 직접 달린 말이야 오죽할까. 난 측은하게 헥헥거리는 말을 바라보곤 공주에게 말했다.
“그 갑옷 좀 벗고 가시죠? 어차피 이제 걸어야 할 것 같은데.”
나도 그렇지만, 나보다 훨씬 심하게 피와 땀으로 한가득 치장을 하고 있는 공주는 조심스레 말에서 내려서며 대답했다.
“..미안하오. 하지만 이것은 왕국의 가보를 아바마마께 받은 것이라 버릴 수는 없소.”
허, 왕국의 가보라. 역시 그냥 갑옷이 아니었군. 솔직히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면 당장 내다버리라고 하고 싶은 심정이이지만 난 가난뱅이로써 차마, 그런 물건을 버리라고 말할 수가 없었기에 그냥 입을 다물고 편하게 드러누웠다.
아픈 것도 아픈 거지만 너무 지쳤다. 아, 따뜻한 물로 씻고 침대에 누워 잘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군. 음, 잠깐. 내가 이 정돈데 공주는 어떨까? 귀하게 자란데다가 여잔데.. 난 양심이 좀 찔려서 자리에서 일어서서 공주에게 다가갔다.
“그래도 일단 벗으시죠. 이대론 지쳐 쓰러져서 죽도 밥도 안 되겠어요. 어디..”
난 허락도 받지 않고 공주의 갑주의 이음새를 찾아 풀어내서 하나씩 뜯어냈다.
공주가 움찔하며 놀라긴 했지만 이런 갑주는 원래 혼자선 입고 벗는 것만도 보통일이 아니다. 아마, 그래서 공주가 쉬지도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던 거겠지. 차마 내게 갑옷을 벗기는 종자 일을 도와달라곤 하지 못하고.
“..미안하오. 정말 신세를 지는구려.”
이윽고 모든 갑옷 부위를 벗은 공주는 스스로 얼마 전 그녀의 목숨을 구해준 가죽갑옷도 벗었다.
음.. 역시 갑옷을 두 개나 껴입던 탓에 그 외의 복장은 극도로 간소하다. 땀투성이의 짧은 반바지와 얇디얇은 블라우스 하나. 왕족도 별 대단한 복장을 입는건 아니구나 싶다.
그런데 놀랍게도 갑옷을 벗으니 갑옷을 입었을 때와 비교되어서인지 공주는 매우 가냘퍼 보이는 몸매로 보였다.
쩝, 이 몸으로 그렇게 싸우고 달리면서 버텨낸 건가? 정말 대단하군. 내가 아프다고 징징거린게 부끄러울 지경인데. ..그보다 피부가 무척 희군..? 음, 겉으로 보긴 완전히 왕자 같아 보였지만 그래도 공주는 공주였던 모양이다.
“...흠, 흠.”
공주가 어울리지 않는 헛기침을 하자 난 그제야 내가 너무 공주를 뚫어져라 살폈다는 걸 깨닫고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돌렸다.
“아, 일단 좀 편하게 쉬시죠. 좀 쉬고 나서 어떻게 할지 생각하기로 하고.”
“알겠소. 그럼 나도 좀 쉬리다.”
그녀는 의연하게 대답하고는 나무그늘가로 가서 앉는가 싶더니 곧 피로감을 이기지 못했는지 그대로 드러누워 버렸다.
금세 고른 숨소리가 나는걸 보니 아무래도 바로 잠들어 버린 것 같다. 역시 힘든 걸 티내지 않고 참고 있었군. 쩝.
적의 추격대라도 오면 골치 아픈 일인지라 난 그녀가 누운 나무위로 기어 올라가서 휴식도 하고 망도 볼 겸 상당히 높은 나뭇가지위에 자리 잡고 앉았다. 나도 공주도 쉬지 않을 순 없는 상태니 추격대가 보이면 급히 그녀를 깨우고 숨거나 도망치는 수밖에..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내가 반쯤 졸았다 깼다를 반복하며 망을 보고 있자니 아래쪽에서 공주가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이미 해가 거의 다 져서 석양이 짙게 깔린 시간이었는데 그녀는 일어나자마자 주변을 좀 둘러보더니 급히 낑낑거리며 혼자 자신의 갑주를 다시 챙겨 입기 시작했다.
뭐지? 출발하려는 건가? 난 곧장 나무를 능숙하게 기어 내려와 그녀 옆에 서며 물었다.
“바로 출발하시게요?”
“앗..”
공주는 날 돌아보곤 깜짝 놀란 듯하다가 이내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정중하게 말했다.
“그대가 가버린 줄 알았소. 그래서 바로 아인도르프 후작가로 가려했는데.. 아니었구려.”
언제나처럼 침착한 목소리였지만 난 그 안에 작은 안도감이 담겨있음을 눈치 채고는 피식 웃으며 그녀가 갑옷 입는 것을 도와주었다. 이 갑옷도 좀 닦아야지 영 상태가 안 좋군. 이래서야 아무리 재질이 좋아도 오래 못쓸지도.. 난 여전히 피칠갑이 되어있는 갑옷들을 하나하나 들어 올리며 태연하게 말했다.
“이렇게 버리고 갈 생각이었다면 애초에 거기 구하러 안 갔을걸요.”
도망 안 갈 테니 앞으론 걱정 말라는 의미로 가볍게 한 말이었는데 르미엘르 공주는 갑자기 매우 진지해진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라샤크, 그대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소.”
뭐지? 난 의아하게 그녀를 마주 바라보았는데, 공주의 차분한 얼굴위로 숨길 수 없는 의문이 떠올라 있는 것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무슨 질문일지 짐작은 간다. ..뭐라고 대답한다?
“..그대는 로세하이안의 국민이 아니라했으니 나에게 백성으로서 충성하는 것은 아닐 것이오. 또한 그대를 오랜 시간 보지는 않았으나, 쉬이 남의 지위나 권위에 굽힐 사람이 아님을 아오. 일전에 헤어질땐 혹시 아바마마가 보낸 사람이 아닐까 싶었으나 그 역시 아니라 짐작되오. 게다가 그대는 강하오. 내가 본 누구보다도 강한 사람이오. 정체가 궁금할만큼.”
“......”
“그런데 어찌하여 나를 돕는 것이오? 처음 그대가 제르만의 일을 귀뜸해준 것은 단순한 호의였다 해도 또한 그대는 목숨을 걸고 다크문 헬리오스의 어쌔신들과 싸우고, 기사와 병사들과 싸웠소.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자 그대는 매우 화를 내었고, 날 살리려 많은 무리를 불사했소. 어찌하여 그토록 나를 돕는 것이오, 혹 내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지금 말해주었으면 하오.”
그녀는 한나라의 왕녀답게 나를 ‘의심’ 하고 있다. 인간이란 원래 정말 일방적인 선의는 쉬이 믿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편이지만, 그녀 같은 지위에 있는 자들은 아마 훨씬 더할 것이다.
그녀는 차기 대권의 유력한 후보 중의 하나고 이번 사건으로 그 일은 더욱 확실시 되었다. 그런 그녀 입장에서는 ‘나’ 라는 정체불명의 강자가 갑자기 나타나 자신을 돕고 있으니 아마 도움을 받으면서도 불안하지 않을 수가 없을 테지.
음.. 물론 내 입장에선 시시껄렁한 농담으로 답변을 돌릴 수도 있는 문제지만 그랬다가는 좋은 일하고서도 완전히 의심만 사게 된다.
“이것 봐요, 공주님. 나는 정말 그저 떠돌이 여행가에 불과해요. 그런데 왜 당신을 도왔느냐? 저도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게 참 궁금해서 고민을 했는데, 누군가의 도움으로 알게 됐죠. 그냥 당신이 마음에 들었고, 그래서 내가 약간 무리하면 살릴 수 있는데도 그냥 넘어갔다가 죽는 꼴 보기 싫어서 그랬어요. 결국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일이라서 한 거죠. 그렇잖나요? 내가 맘에 드는 사람 내가 살리겠다는데 꼭 대단한 이유가 있어야 해요?”
난 결국 머리를 긁적이며 솔직하게 말해버렸다. 그런데 내 답변을 들은 공주가 얼굴을 돌리고는 어색하기 짝이 없는 헛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왜 저러지..? 난 잠시 곰곰이 생각하다가 내 대답에 굉장한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 잠깐. 내가 지금 뭐라고 지껄인 거지?
“아, 알겠소. 그대의 말이 옳군. 선의로 한 일을 의심하였으니 참 부끄럽구려.”
공주는 왠지 모르게 약간 붉어진 얼굴로 버벅거리며 대답했다. 잠깐, 이거 의심한 것 때문에 부끄러워서 붉어진 거 맞지? 응?
난 왠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인 채로 식은땀을 흘렸다. 아니겠지? 공주가 이상하게 받아들인 건 아니겠지?
“흠, 흠. 쓸데없는 걸 물어서 미안하오. 아인도르프 후작가가 멀지않으니 이제 출발하겠소.”
결국 나는 그냥 불안함 마음을 ‘아닐 거야 하하’ 이정도로 덮어버렸다.
여기까지 우리를 인도해준 말은 가엷게도 심한 무리를 해서인지 다리를 절어서 그냥 자유롭게 풀어주기로 하고 공주와 나는 아인도르프 후작가를 향해 함께 걷기 시작했다. 아, 대가 얘기가 나온 김에.
“아, 그런데 아까 말한 ‘대가’ 말인데요.”
“혹시 뭔가 필요한게 있다면 내 이름을 걸고 힘닿는 대로 준비해 주겠소. 반드시.”
걷던 중에 난데없이 꺼낸 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공주는 굳은 의지를 담아 내게 조금도 걱정 말라는 듯이 듬직하게 말했다. 그러나 난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말했다.
“아니 그런게 아니라, 대가라기엔 뭐하지만 그 말투 좀 바꿔주시면 안될까요?”
“..내 말투가 이상하오?”
진짜 몰라서 묻나 이사람? 난 멀뚱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공주를 향해 황당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저한텐 심하게 이상한데요. 그냥 평범하게 반말을 하거나 하면 안 되는지?”
“으음.. 도대체 어디가 이상하단건지 모르겠소. 허나, 그대가 불편하다면 바꾸리다.”
..그러니까 그 말투라니까. 난 한숨을 좀 쉬고는 자신의 말투의 어디가 이상한지 골똘히 고민에 빠져있는 왕자님 같은 공주님과 함께 석양이 지는 길을 걸었다. ..무척 이상한 낭만이 있군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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