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 신경쓰이는 동행 (1)
세상에 널리퍼진 속설에 따르면 남자를 이유를 알 수 없게 자극하는 복장은 몇 가지 있지만 역시 가장 대표적으로는 ‘메이드복’을 꼽을 수 있다고 한다. 나 역시 도통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직접 보니까 이상하게 좋다.
왜 그런걸까? 정말 미스터리한 일이군. 노출도가 높다면 모를까, 무장으로 이름 높은 후작가답게 꽤나 정숙한 복장인데 말이야.
“음료를 드시겠습니까, 라샤크님?”
“아뇨, 됐어요. 그보다 저는 ‘님’이 아닌데.”
나는 내 식사 수발을 들고 있는 메이드복의 하녀를 흘긋거리며 훔쳐보다가 그녀가 말을 걸자 급히 두 손을 내저었다. 이놈의 동네는 손이 없는지 발이 없는지 왜 밥 먹는데도 옆에 누굴 붙여놓는 건지 모르겠다. 일단 눈요기는 되긴 하지만. 아? 혹시 그 이유인가?
“무슨 말씀이십니까, 후작님의 귀빈이시니 당연하지요.”
끙.. 하긴 누구에게든 말해봤자 이런 반응이라 난 그만 포기해버렸다. 오늘로 아인도르프 후작가에 도착한지 일주일째. 일주일전 나와 공주가 아인도르프 후작가를 한참 향하고 있을 때, 아인도르프 후작이 공주가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분기탱천해서 가문의 전 병력을 이끌고 피아이안으로 향하던 중에 마주친 이래로 난 그야말로 엄청난 환대를 받고 있었다.
심지어는 아침저녁으로 저런 하녀들이 옷을 갈아입는 것은 물론 목욕 수발까지 들려고 한다. 기겁을 해서 다 쫓아내고 정중히 거절하긴 했지만.
아무튼 처음 공주가 아인도르프 후작에게로 간다고 했을 때 그 이름을 어디서 들어본 적이 있는가 싶더니, 세실리아가 말한바 있는 공주의 무술 스승이자 로세하이안 왕국 최고의 맹장으로 불리는 칸젤 폰 아인도르프가 바로 그였다.
호탕하고 충성스러우며 공주를 지지하는 가장 강력한 세력 중 하나. 공주는 그의 비호 하에 후작가에 자리 잡고 현재 복잡해진 로세하이안의 정국을 헤쳐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일련의 사건에 대해 왕자파, 즉 왕자를 낳은 아르메이나 현 왕비의 아버지인 벨쥬드 공작을 위시한 세력은 비프로스트가 피아이안을 습격하자 공주가 겁에 질려 도주하고 왕자가 사태를 수습하였다고 주장하며 자신들의 행위를 부정하고 있었다. 그에 대해 아인도르프 후작을 위시한 공주파의 세력은 벨쥬드 공작이 공주 암살을 시도하여 공주가 탈출한 것이라고 그들을 소리 높여 압박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그렇잖아도 국왕이 병이 들어 후계자 문제로 시끄럽던 로세하이안 왕국은 지금 큰 혼란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공주파의 말이 맞으면 왕자파는 암살기도 등으로 더 이상 왕국에 발을 붙일 수가 없게 되고, 왕자파의 말이 맞으면 원래의 적통계승자라 할 만한 왕자의 입지가 거의 완전히 굳어지게 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내가 들은 바대로라면 지금 두 세력은 직접적인 충돌은 삼가고 자신들의 편을 모으는 중이라고 한다. 원체 사건이 갑자기 터진 대다가 두 측의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고, 이제 막 두 세력이 제대로 나 뉘어진 형국인지라 중립을 지키거나 아무런 입장표명도 하지 않는 쪽이 많았던 것이다.
뭐, 난 이 정도까지만 이해하고 더 이상의 관여는 피했다. 알고 싶지도 않고 나와 상관도 없는 일이었으니까. 단, 한 가지 다행인 것은 사건이 당장 시급한 왕권다툼 문제로 넘어가는 덕분에 비프로스트에 대한 탄압 문제는 잠시 미루어졌다는 것이다. 적어도 어느 쪽 주장이 진실인지 결정될 때까지는 비프로스트 문제가 잠시 보류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다 잘된(?) 일이라 나는 이만 떠날 생각도 했지만 아직까지 다크문 헬리오스의 문제도 있고 해서 남아서 머무는 중인데, 뭐.. 귀족가의 생활이란 영 적응이 안 된다.
그래도 공주 말에 따르면 아인도르프 후작정도면 원채 순수 무골인지라 후작이라는 대귀족 치곤 굉장히 검소하게 사는 편이라고 하니.. 떵떵거리는 자식들은 얼마나 잘해놓고 사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금덩이로 목욕이라도 하나? 으음.. 어쩐지 정말 그런 놈도 있을 것 같아서 무섭군.
“라샤크님. 공주전하께서 찾으십니다.”
너무 고귀한 맛에 영 입맛이 안 나서 식사를 깨작거리고 있으니, 집사가 와서 공주의 호출을 전했다. 음, 요 몇 일간은 공주가 너무 바빠서 얼굴도 못 봤는데 여유가 좀 생겼나? 난 곧장 일어나서 공주가 집무실로 쓰고 있는 방으로 향했다. 마침 잘됐다. 이만 떠나는 문제를 좀 상의해 볼까 했던 차였는데 말이야.
“공주님, 부르셨습니까?”
공주가 기거하는 집무실에 도착한 나는 문밖에서 정중하게 물었다. 뭐, 공주랑 둘만 있으면 거진 반말조로 말하고 피아이란에선 반말도 맘껏 하긴 했지만 이곳에 온 뒤로 난 공주에 대한 처신을 주의하고 있었다. 내가 그녀를 마구 대해서 권위가 서지 않으면 지금 같은 시점에선 상당히 곤란할 테니까. 이곳은 집무실이니 그녀 혼자 있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들어와, 라샤크.”
놀라지 마시라. 그렇다..! 내가 공석에서 존댓말을 하게 되었다는 점이 바뀌었다면, 공주는 요 일주일간의 성과로 나에 대한 말투가 드디어 정상적으로 변모했다. 신기한 것이 남들한텐 예전이랑 똑같이 말하면서 나한테만 평범하게 이야기한다. 훗, 자기 이름을 걸고 대가를 갚겠다고 했으니 굉장히 무리해서 노력하고 있는 것일 테지.
난 슬쩍 웃고는 문을 열고 들어섰다. 커다란 원탁이 놓여있는 집무실의 가장 상석의 공주와 그 옆에 앉아있는 아인도르프 후작의 모습이 보인다.
“자네 왔는가?”
아인도르프 후작이 반가워하며 먼저 인사를 건내 와서 나도 꾸벅하고 마주 인사를 했다. 몇 번 만나보진 못하였으나 아인도르프 후작은 내가 평민이라 해도 굉장히 스스럼없이 대해주는 편이다.
그는 공주가 기저귀 차던 시절부터 업어 기른 사람이나 다름없다고 하는데, 바로 그런 공주를 위기에서 구출해 준 나를 처음부터 꽤 호의적으로 본 모양이었다.
예상했던 것보다도 나이가 훨씬 많은 편인 그는 아주 멋들어지게 앞가슴까지 풍성하게 기른 턱수염이 인상적인, 매우 강건한 느낌을 주는 노장이다. 종종 버릇처럼 저 턱수염을 쓰다듬을 땐 산전수전 다 겪은 침착한 노익장다운 풍모가 물씬 난다. 뭐.. 그래도 전장에 나서면 야차처럼 날뛰는 맹장 중의 맹장이라지만.
“라샤크. 요즘 심심하겠네? 할 일도 없고.”
하하, 예전 같으면 ‘라샤크, 그대 아무런 일도 없어서 적적 하겠소이다. 괜찮으시오?’ 뭐 이런 닭살 돋는 멘트가 나왔을 테지. 난 그런 생각을 하며 피식거리고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조금 그렇군요. 공주님.”
둘이 아닌데도 말을 좀 편하게 한건, 아인도르프 후작은 애초에 그런 격식을 잘 따지지 않는 성격인데다가 이미 나와 공주가 말을 편하게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역시 이번에도 그는 전혀 우리 둘의 대화를 이상하게 보지 않는 듯 했다. ..혹시 그냥 둔해서 모르는 걸지도.
“그럼, 어때? 라샤크가 원한다면 기사가 되는 건. 넌 공도 있고, 여기 아인도르프 후작이 기사회의 원로대표이니 어려운 일도 아니야. 서임만 되면 바로 로얄기사, 내 친위기사가 될 거야.”
“로얄기사나 친위 기사는 모든 젊은 기사들이 선망하는 자리지. 파격적인 특혜일세. 그리고 솔직히 말하건데 추후엔 또 어떻게 될지 누가 아는가? 그렇지 않나?”
옆에서 아인도르프 후작도 은근한 태도로 말을 거드는걸 보니 아무래도 날 기사로 끌어들이기로 작당한 모양이다. 하기야.. 애초에 기사가 되는 것만으로도 평민에게는 꿈과 같은 굉장한 출세다. 게다가 공주의 친위 기사가 되었다가 공주가 이 정쟁에서 승리하기라도 하는 날이면 난 최고의 대우와 명예, 혹은 권력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까놓고 말해 내가 무슨 그런 세상사에 소탈한 은자 같은 놈은 아니라지만 솔직히 그다지 흥미로운 제안은 아니다. 골치도 아픈데다가 일단 지기라도 하는 날엔 어쩌라고?
“훗, 됐어요. 그런 갑갑한 것 해서 뭐한다고.”
나는 그렇게 거침없이 말하고 나서야 내 앞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는 그야말로 기사의 표본과도 같은 노장에 또 하나는 기사 서임을 위해 기사수행까지 떠난 공주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아차 싶었지만, 공주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부드럽게 미소 지을 뿐이었고 아인도르프 후작은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껄껄거리며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사내가 그 정도 패기는 있어야지, 암. 요즘 젊은 기사놈들더러 좀 배우라고 하고 싶군.”
태도를 보니 공주는 내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 짐작하고 있었던 모양이니 아마 이 제안이나 하자고 나를 부른 것은 아닐 것이다. 난 가만히 자리에 앉아 공주의 용건을 기다리기로 했고, 그런 날 보면서도 한참을 껄껄거리며 웃던 아인도르프 후작이 공주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어려서부터 완전 선머슴이 따로 없던 공주님이 웬 사내 이야기를 그렇게 하나 했는데. 과연 제법 강단과 패기가 있습니다, 그려. 껄껄껄. 이제 이 늙은이도 안심이군요.”
“..후작.”
공주는 난처한 듯 말끝을 흐렸고 난 좀 당황해버렸다. 정말 주책이로군. 아니, 그런데 이 늙은이 공주더러 선머슴이라니? 아무리 사실이라지만(?) 그렇게 대놓고 말해도 되는 거야? 난 잠시 동안 멍한 눈으로 주책스러운 웃음을 멈추지 않는 후작을 바라보다가 안 되겠다 싶어서 먼저 공주에게 이야기를 꺼냈다.
“그보다 다른 용건이 있어서 부른 것 아닙니까?”
“음. 그래. 그러면 이만 본론으로 넘어갈게. 다크문 헬리오스에 대한 일이야.”
음.. 역시 이거였군. 확실히 지금으로썬 반드시 가장 먼저 짚고 넘어가야할 크나큰 문제다. 공주는 물론이요 나의 생존이 걸린 문제이기도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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